함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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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상훈 (咸尙勳, 1903年 10月 25日 ~ 1977年 1月 2日 [1] )은 日帝强占期 의 言論人, 作家이며 大韓民國 의 政治人이다.

生涯 [ 編輯 ]

黃海道 松禾郡 出身으로 와세다 大學 政經學部를 나온 그는 言論人으로 活動했다. 日帝 强占期 동안 東亞日報 政治部 論說記者와 朝鮮日報 編輯局長을 歷任하였다.

日帝 强占期 末期에는 조선일보사가 改編되어 펴낸 雜誌인 《 趙匡 》의 代表 筆陣으로서 親日 論說을 發表한 일이 있다. 한便, 背泳同志會 , 臨戰對策協議會 , 조선임전보국단 , 朝鮮言論輔國會 等 여러 團體에서 活動했다. [2]

太平洋 戰爭 終戰 後 美軍政 下에서 組織된 諮問 機關인 南朝鮮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 에서 公報部長을 지냈으며, 한국민주당 宣傳部長과 調査部長을 歷任하는 等 右翼 系列로 政界에 뛰어들었다.

1946年 6月 15日 午後 5時 40分 서울驛 에 마중나가 서울驛 에 到着한 三醫司 遺骨을 迎接하였다. 이어 太古史(太古寺)에 마련된 殯所에 參席하였다. 1947年 서울 鍾路區 가회동 洞會長에 當選됐다. [3]

黃海道 出身인 함상훈의 政治的 背景은 西北靑年團 이었고, 1949年 에 열린 大韓民國 制憲國會 總選 濟州道 再選擧에 出馬했을 때 서북청년단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4] 大寒文筆家協會 副會長과 민주국민당 宣傳部長을 歷任했다.

1954年 에는 當時 國會議長이던 巨物級 野黨 政治人 신익희 韓國 戰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으로 간 趙素昻 과 1年 前 印度 뉴델리 에서 密談을 갖고 韓半島 中立化를 謀議했다는 爆彈 宣言으로 物議를 빚기도 했다. [5] 이 事件은 申翼熙를 陰害하기 위한 政治工作 事件으로 判斷되나, 以後 함상훈이 입을 다물어 正確한 眞相은 알려지지 않았다. [6] 함상훈은 이 事件으로 민주국민당에서 除名 當했다.

2008年 發表된 民族問題硏究所의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中 言論/出版 部門에 選定되었으며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가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705人 名單 에도 包含되었다.

歷代 選擧 結果 [ 編輯 ]

實施年度 選擧 臺數 職責 選擧區 正當 得票數 得票率 順位 當落 備考
1949年 總選 1代 國會議員 濟州 北濟州郡 甲 大韓獨立促成國民會 8,790票
25.20%
2位 落選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

各州 [ 編輯 ]

  1. “前 本社編輯局長 咸尙勳氏 別世”. 朝鮮日報. 1977年 1月 5日. 7面面.  
  2. 친일인명사전編纂委員會 (2004年 12月 27日). 《日帝協力團體事前 - 國內 中央便》. 서울: 民族問題硏究所. 330,384,389,538,546쪽쪽. ISBN   89-953307-2-4 .  
  3. "當選된 서울 各 洞會長 ②", 朝鮮日報 1947年 10月 3日子 2面 4段, 社會面
  4. 김종배 (2004年 1月 24日). “4.3直後 發令..7個月만에 電擊 更迭 - [4代 김용하 知事] 食糧不足,傳染病 하루 數十名씩 死亡” . 濟州의소리 . 2008年 7月 16日에 確認함 .   |題目= 에 지움 文字가 있음(위치 25) ( 도움말 )
  5. “「眞相糾明 바란다」 咸尙勳氏, 다시 聲明”. 朝鮮日報. 1954年 11月 3日. 1面面.  
  6. 류근일 (2006年 4月 18日). “[류근일칼럼] ‘驚愕할 情報’가 虛僞일 때 ”. 朝鮮日報. A34面面.   |題目= 에 지움 文字가 있음(위치 1) ( 도움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