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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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桓檀古記)는 이유립 이 1979年에 出刊한 이다. [1] [2] 古代 부터 傳해지던 歷史서 4卷을 계연수 가 묶은 것이라 主張하였으나 大韓民國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歷史學界에서는 魏書 (僞書)로 判斷하여 고중세辭意 飼料 로 取扱하지 않는다. [3]

槪要 [ 編輯 ]

《환단고기》는 編輯者는 계연수 로 1911年에 《參星旗 上(上)》, 《參星旗 下(下)》, 《단군세기》, 《북부여機》, 《太白일사》의 5가지 冊을 엮고 解除를 달았다. 그리고 이를 弟子인 이유립 에게 주고 60年 뒤에 公開하라고 하였다. 이유립은 이 冊을 간직하고 있다가 1979年에 出刊하였다고 한다. 《환단고기》에 收錄된 各 冊들은 다음과 같다.

  • 《參星旗》는 桓雄 이라 불리는 王이 다스린 1565年 동안의 新詩배달국 과 그 前身이라 하는 3,301年間의 還國 의 歷史를 다루고 있다.
  • 《단군세기》는 47代의 檀君이 2千餘 年間 다스린 古朝鮮의 歷史를 다루고 있다.
  • 《북부여機》는 북부여 에 6名의 王이 있었으며 이것이 高句麗 의 前身이라는 內容을 骨子로 하고 있다.
  • 《太白일사》는 還國 , 배달국 , 三韓 , 高句麗 , 渤海 , 高麗 의 歷史를 다루고 있다.

構成 [ 編輯 ]

  • 目次
  • 凡例(凡例)
  • 參星旗(三聖紀) 上 - 安含로 (安含老) 지음.
  • 參星旗(三聖紀) 河 - 원동중(元董仲) - 新詩歷代記 包含.
  • 檀君世紀(檀君世紀) - 李嵒 (李?) 지음.
    • 檀君世紀서(檀君世紀序)
    • 檀君世紀
  • 북부여機(北夫餘紀) - 複애거사 犯葬 (伏崖居士 范樟) 지음.
    • 북부여機(北夫餘紀) 上
    • 북부여機(北夫餘紀) 下
    • 가섭원扶餘機(迦葉原夫餘紀)
  • 太白일사(太白逸史) - 일十幢(一十堂) 耳麥 (李陌) 지음.
    • 太白일사目錄(太白逸史目錄)
    •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
    • 還國本紀(桓國本紀)
    • 新詩本紀(神市本紀)
    • 三한관경本紀(三韓管境本紀)
      • 三한관경本忌祭祀(三韓管境本紀)
      • 馬韓世가(馬韓世家) 上
      • 馬韓世가(馬韓世家) 下
      • 繁閑世가(番韓世家) 上
      • 繁閑世가(番韓世家) 下
    • 소도경傳本勳(蘇塗經典本訓) - 天符經, 三一神誥 包含.
    • 高句麗國本機(高句麗國本紀)
    • 대진국本紀(大震國本紀)
    • 고려국本紀(高麗國本紀)
    • 太白일사發(太白逸史跋)
  • 환단고기發(桓壇古記跋)

《환단고기》에서 言及된 文獻 [ 編輯 ]

《환단고기》에서 言及된 文獻은 다음과 같다. [4]

  • 確認되는 文獻 - 《 詐欺 》, 《雲級漆첨》 〈헌원本紀〉, 《管子》, 《 漢書
  • 確認되지 않는 文獻 -《代辯설(大辨設)》, 《三星밀기(三聖密記)》, 《삼한祕記(三韓秘記)》, 《조대기(朝代記)》, 《震域遺棄(震域遺記)》, 《表訓天使(表訓天祠)》

出刊 經緯 및 經過 [ 編輯 ]

《환단고기》를 傳受받았다 主張하는 이유립이 밝히는 出刊 警衛는 아래와 같으나, 歷史學界에서는 魏書이므로 이러한 出刊 經緯 自體가 虛僞라고 判斷하고 있다.

  • 《환단고기》〈範例〉에는 光武 15年( 1911年 으로 推定. 實際 光武 年號는 10年(1907年)까지만 使用) 계연수가 傳해지는 四書를 묶어 《환단고기》라는 冊名으로 刊行하였다고 적혀 있으며, 《환단고기》〈發(跋)〉에는 1949年 에 이유립의 文人인 오형기가 이유립의 付託을 받아 《환단고기》를 情緖(正書)한 것으로 되어 있다. 1911年 刊行視 30部를 發行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出刊 事實 및 版本은 確認되지 않는다.
  • 1920年 移轉, 이유립이 《환단고기》의 原本을 계연수(~ 1920年)로부터 건네받았고, 1975年 에 保管해 오던 原本이 모든 關聯 資料와 함께 流失되었다가 이유립이 記憶을 되살려 復元했다고 傳해지지만, 事實 與否는 確認되지 않는다. [5]
  • 1979年 11月에 筆師·影印한 漢文本(100部 限定)李 광오理解史라는 出版社를 통해 出刊되었고, 이유립은 박창암을 통하여 日本의 辯護士 出身 在野學者 가지마 노보루 (鹿島?)와 接觸하여 直接 原本을 傳達하였다. [6] [7]
  • 1982年 日本語 飜譯本이 出刊되어 話題가 되었다. 가지마 노보루는 이 冊에 붙여진 詳細한 解除를 통해 古代 韓半島에 ‘禹伽倻 王朝’가 있었다고 主張하였다.
  • 1983年 이유립은 配達義塾이라는 出版社를 통해 《환단고기》를 다시 零인·출간하였다. 이때 이유립은 1979年에 出刊된 《환단고기》를 "조병윤이 許諾을 받지 않고 任意로 出版한 것"이라고 主張 [8] 하며 自身이 一部 誤字를 矯正하여 새롭게 出版하였다고 말하였다. [9] 그러나 이때 出版된 配達醫숙본 《환단고기》는 出刊 年度를 1979年으로 쓰고 있다.
  • 1985年 一般人을 對象으로 한 첫 한글 飜譯本 [10] 이 國內에 出刊되었고, 이듬해 6月에는 4個 出版社에서 出刊, 베스트셀러圈 에 올랐다. [1]

主要 內容 [ 編輯 ]

《환단고기》는 古朝鮮 以前에 還國 배달국 이 存在하였다고 記述하고 있다. 두 나라는 桓因 桓雄 이 統治하였으며, 各各 7臺와 18臺를 傳하였다고 한다.

還國 [ 編輯 ]

建國 [ 編輯 ]

《환단고기》에 따르면 桓因은 四百力의 하늘 에서 홀로 變化하여 神이 되고 이 桓因과 함께 하늘로부터 어린 男女 800名이 淺海의 東쪽 땅인 黑手(黑水)와 白山(白山)의 땅에 내려와 建國하였다고 한다. 四百力을 시베리아 로, 淺海는 바이칼호 라고 主張하기도 한다. [11]

12聯邦 [ 編輯 ]

《환단고기》에 따르면 환국은 12個의 나라로 構成된 遊牧文化를 바탕으로 한 聯邦國家이며 各各의 卑離國(卑離國), 양운국(養雲國), 구막韓國(寇莫汗國), 구다天國(句茶川國), 一群國(一群國), 우루國(虞婁國) 또는 筆拿鞠(畢那國), 客玄韓國(客賢汗國), 丘某액국(句牟額國), 매구餘國(賣句餘國) 또는 直購多國(稷臼多國), 社납아국(斯納阿國), 선비국(鮮裨國)이다. 그 領土가 매우 넓어 南北이 5萬 里요, 同壻가 2萬餘 里였다고 記錄되어 있다.

歷代 桓因 [ 編輯 ]

《환단고기》에 따르면 환국의 存續期間은 3,301年, 或은 63,182年 동안 王이 7代라고 한다. 《환단고기》에 記錄된 桓因은 다음과 같다.

  • 1代 桓因: 안派遣(安巴堅) 桓因
  • 2代 桓因: 革서(赫胥) 桓因
  • 3代 桓因: 고시리(古是利) 桓因
  • 4大 桓因: 駐于孃(朱于襄) 桓因
  • 5大 桓因: 石製임(釋提壬) 桓因
  • 6大 桓因: 구을리(邱乙利) 桓因
  • 7代 桓因: 地位리(智爲利) 桓因 또는 段인(檀仁) [12]

新詩배달국 [ 編輯 ]

《參星旗》의 〈新詩歷代記〉와 《太白일사》〈新詩本紀〉에서는 新詩배달국 에 對해 記述하고 있는데, 檀君 이 세운 古朝鮮 以前의 滿洲 韓半島 를 中心으로 자리잡았던 韓民族의 古代 國家라고 한다. 桓雄 이 다스린 國家로 18代 1565年의 逆年이며, 中國 神話 에 登場하는 癡愚 또한 배달국의 한 임금으로 記錄되어 있다.

  1. (紀元前 3898年): 거發한(居發桓)환웅, 在位 94年, 120歲
  2. (紀元前 3804年): 거不利(居佛理)桓雄, 在位 86年, 102歲
  3. (紀元前 3718年): 우야고(右耶古)환웅, 在位 99年, 135歲
  4. (紀元前 3619年): 模寫라(慕士羅)환웅, 在位 107年, 129歲
  5. (紀元前 3512年): 태우의(太虞儀)환웅, 在位 93年, 115歲
  6. (紀元前 3419年): 多衣鉢(多儀發)桓雄, 在位 98年, 110歲
  7. (紀元前 3321年): 거련(居連)桓雄, 在位 81年, 140歲
  8. (紀元前 3240年): 안부련(安夫連)桓雄, 在位 73年, 94歲
  9. (紀元前 3167年): 양운(養雲)桓雄, 在位 93年, 139歲
  10. (紀元前 3071年): 갈고(葛古)환웅 또는 禿顱한환웅 在位 100年, 125歲
  11. (紀元前 2971年): 巨野發(居耶發)桓雄, 在位 92年, 149歲
  12. (紀元前 2897年): 주무신(州武愼)환웅, 在位 105年, 123歲
  13. (紀元前 2774年): 사와라(斯瓦羅)桓雄, 在位 67年, 100歲
  14. (紀元前 2707年): 者奧地(慈烏支)桓雄, 癡愚天王이라고도 하며, 請求國으로 都邑을 옮겨서 在位 109年, 151歲
  15. (紀元前 2598年): 치額特(蚩額特)桓雄, 在位 89年, 118歲
  16. (紀元前 2509年): 軸다리(祝多利)桓雄, 在位 56年, 99歲
  17. (紀元前 2453年): 革多世(赫多世)桓雄, 在位 72年, 97歲
  18. (紀元前 2381年): 거佛壇(居弗壇)桓雄 或은 單웅(壇雄), 在位 48年, 82歲

第5代 桓雄人 태우의 桓雄의 열두 아들 中 막내가 태호 伏羲 이며, 그의 後孫이 現在의 산시省 (山西省, 山西省)에 살았다고 한다. 환단고기에서는 태호 伏羲氏가 八卦의 詩抄임을 밝히고 있다.

(檀君)朝鮮 [ 編輯 ]

《환단고기》〈檀君世紀〉는 檀君 의 治世에 對해 仔細히 記錄하고 있으며, 그 逆年은 다음과 같다.

  1. 王儉(王儉)檀君: 在位 93年
  2. 부루(扶婁)檀君: 在位 58年
  3. 假肋(嘉勒)檀君: 在位 45年
  4. 誤沙丘(烏斯丘)檀君: 在位 38年
  5. 구을(丘乙)檀君: 在位 16年
  6. 달문(達文)檀君: 在位 36年
  7. 한율(翰栗)檀君: 在位 54年
  8. 寓書한(于西翰) 或은 誤死함(烏舍咸)단군: 在位 8年
  9. 아술(阿述)檀君: 在位 35年
  10. 노을(魯乙)檀君: 在位 59年
  11. 圖解(道奚)檀君: 在位 57年
  12. 阿干(阿漢)檀君: 在位 52年
  13. 흘달(屹達) 或은 大陰달(代音達)檀君: 在位 61年
  14. 古佛(古弗)檀君: 在位 60年
  15. 大音(代音) 或은 後흘달(後屹達)檀君: 在位 51年
  16. 위나(尉那)단군: 在位 58年
  17. 여을(余乙)檀君: 在位 68年
  18. 동엄(冬奄)檀君: 在位 49年
  19. 丘某소(?牟蘇)檀君: 在位 55年
  20. 高홀(固忽)檀君: 在位 43年
  21. 소태(蘇台)檀君: 在位 52年
  22. 색불루(索弗婁)檀君: 在位 48年
  23. 牙笏(阿忽)檀君: 在位 76年
  24. 椽那(延那)檀君: 在位 11年
  25. 솔나(率那)단군: 在位 88年
  26. 醜로(鄒盧)단군: 在位 65年
  27. 두밀(豆密)檀君: 在位 26年
  28. 해모(奚牟)檀君: 在位 28年
  29. 魔휴(摩休)檀君: 在位 34年
  30. 나休(奈休)檀君: 在位 35年
  31. 등올(登兀)檀君: 在位 25年
  32. 樞密(鄒密)檀君: 在位 30年
  33. 감물(甘勿)檀君: 在位 24年
  34. 오루門(奧婁門)檀君: 在位 23年
  35. 사벌(沙伐)檀君: 在位 68年
  36. 매勒(買勒)檀君: 在位 58年
  37. 마물(麻勿)檀君: 在位 56年
  38. 다물(多勿)단군: 在位 45年
  39. 두홀(豆忽)檀君: 在位 36年
  40. 달음(達音)檀君: 在位 18年
  41. 音叉(音次)檀君: 在位 20年
  42. 乙우지(乙于支)檀君: 在位 10年
  43. 物理(勿理)檀君: 在位 36年
  44. 舊物(丘勿)檀君: 在位 29年
  45. 餘루(余婁)단군: 在位 55年
  46. 步을(普乙)단군: 在位 46年
  47. 高熱加(古列加)檀君: 在位 58年
  • 治世 期間은 紀元前 2333年 ~ 紀元前 238年으로, 47代 2096年間 持續되었다고 한다.

북부여 [ 編輯 ]

  • 해모수

해모수 (解慕漱)는 古離國 사람으로, 高熱加 檀君의 支配下에 23歲의 나이로 軍隊를 일으켰고, 8年째에 檀君이 되었다.

고조선의 高熱加 皇帝는 將帥들이 더以上 命令을 따르지 않게 되자 權力을 버리고 帝國을 다섯 名의 中央 貴族, 吳哥의 손에 넘겼다. 해모수 는 23歲에 將軍이 되었다. 해모수 와 그의 軍隊는 白岳山을 襲擊하여 차지하고 천왕랑이라는 稱號를 使用하였다. 檀君 해모수 는 紀元前 195年에 죽었으며, 太子 某修理가 王位를 이어받아 북부여 의 2番째 統治者가 되었다.

  • 某修理

某修理(慕漱離, 紀元前 195年頃 ~ 紀元前 170年)는 북부여의 두 番째 檀君이다. 高進 의 兄이기도 하다. 紀元前 170年, 某修理 檀君은 죽고 太子 告解史가 繼承하였다.

  • 告解史

告解史(高奚斯, 紀元前 170年 ~ 紀元前 121年)는 북부여의 세 番째 檀君으로, 고우루와 東扶餘의 創建者 解夫婁의 아버지이다. 紀元前 121年 告解史 檀君이 죽자 太子 고우루가 북부여의 네 番째 檀君이 되었다.

  • 고우루

고우루(高於婁, 紀元前 121年 ~ 紀元前 86年)는 북부여의 네 番째 檀君 으로, 東扶餘 의 創建者 해부루 의 兄이다.

紀元前 86年 고우루는 相續者가 없이 죽고 그의 동생에 依해 繼承되었다. 그는 軍隊와 고리國王 高進을 보내어 衛滿 朝鮮 (紀元前 195年頃 ~ 紀元前 108年)의 境界를 防備하였다. 한무제 (在位 紀元前 141年 ~ 紀元前 87年)의 攻擊으로 衛滿 朝鮮 이 解體되었고, 북부여 는 4郡을 두려는 한나라 의 兵力을 攻擊하였다.

  • 고두幕

고두幕(高豆莫, 紀元前 108年 ~ 紀元前 60年)은 同名 의 創建者이며 북부여 의 5番째 檀君으로, 高熱加 檀君의 後孫이라고도 한다. 그는 紀元前 86年 해부루 檀君을 몰아내고 북부여 에서 權力을 잡았다.

紀元前 108年 고두막은 卒本 에서 同名 을 創建하고 스스로 東明이라 하였다. 東明王은 軍隊를 모아 한나라 軍隊를 攻擊하였다. 紀元前 86年에 19回의 戰鬪 後에 한나라君을 몰아내고 防備하였다.

紀元前 87年 북부여의 檀君 고우루는 東明王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옮겨갈 것을 傳言을 받고 근심하다 병들어 死亡하였다. 고우루의 死後 그의 동생 해부루 가 王座에 올랐으며, 紀元前 86年에는 가섭원으로 옮겨 東扶餘 를 세웠다. 그때 東明王은 북부여의 5番째 檀君이 되었다. 東明王은 고무書를 북부여의 太子로 삼았다.

  • 고무서

고무서(高無胥, 紀元前 60年 ~ 紀元前 58年)는 북부여 의 6番째 檀君이다.

고무서는 紀元前 59年 고두幕의 事後 王座에 올랐다. 紀元前 58年 그의 治世 2年에 해모수 의 直系 後孫 高朱蒙 卒本扶餘 로 왔다. 고무서는 高朱蒙 이 凡常치 않은 人物임을 알아보고 그의 딸과 結婚시켰다. 高朱蒙 은 그의 자리를 이어 북부여 의 7番째 檀君이 되었다.

  • 해부루 (가섭원 扶餘機)

해부루 (解夫婁)는 北扶餘 네 番째 檀君 고우루의 동생이었다. 紀元前 86年 고우루가 죽자 고열가의 後孫 고두幕이 王座를 차지하고 해부루 를 東쪽으로 밀어냈다. 해부루 는 東海 近處의 가섭원으로 移動하였고 東扶餘 를 創建하였다.

〈太白일사〉의 內容 [ 編輯 ]

〈삼신오제본기〉 [ 編輯 ]

오래前부터 이어져 온 韓國 固有의 信仰과 舊圜(九桓)의 風俗, 風習을 敍述하고 있다.

〈三한관경本紀〉 [ 編輯 ]

馬韓 變한 의 歷史를 적고 있다. 歷代 馬韓 , 變한 의 君主가 나타난다.

〈소도경傳本勳〉 [ 編輯 ]

檀君 時代의 新敎(神敎)를 說明하고 있다. 《 三一神誥 》와 人類 最初의 經典인 《 天符經 》이 있었다고 敍述하고 있다.

〈高句麗國本機〉 [ 編輯 ]

一部 傳해지지 않는 여러 書籍의 引用文을 통하여 高句麗 의 歷史를 敍述하였다.

高進 王 [ 編輯 ]

高進(高辰)은 북부여 의 創建者 해모수 의 둘째 아들이다. 高進은 古離國의 王이며, 高句麗의 創建者 高朱蒙 의 曾祖 할아버지이다.

高進은 북부여 의 將軍으로 북부여의 4歲 고우루 檀君 아래에서 그는 古離國의 支配者가 되었다. 그곳은 鴨綠江 書案에 位置하였다. 그는 高齡에 古離國을 다스리며 우거 를 막아 衛滿朝鮮 을 攻擊하였고, 이는 그의 아들과 孫子에 依해 繼承되었다.

高進의 曾孫 高朱蒙 북부여 의 7番째 檀君 이 되었다. 高朱蒙 高句麗 를 創建하였다.

高朱蒙 [ 編輯 ]

高朱蒙 의 生父는 고某수(高慕漱) 또는 불리지(弗離支)라고 한다. 불리지는 高進 王의 孫子였는데, 高進은 해모수 의 둘째 아들이다.

沃沮後인 고某數는 하백 의 딸 油畫 와 만나 結婚하였고, 불리지가 죽자 高朱蒙 은 웅심산(熊心山)에서 자랐으나 미움을 받아 脫出하였다. 境界를 넘어서 그는 북부여 로 들어 갔다. 高朱蒙 북부여 의 6番째 檀君 고무서의 사위가 되었고, 고무書가 죽자 북부여 의 7番째 檀君이 되었다.

〈대진국本紀〉 [ 編輯 ]

대진국( 渤海 )의 歷史와 함께 歷代 皇帝 (왕)의 廟號와 시호, 年號를 다음과 같이 敍述하고 있다.

  1. 대중賞: 世祖(世祖) 진국熱皇帝(振國烈皇帝), 年號 중광(重光)
  2. 古往: 太祖(太祖) 성무고황제(聖武高皇帝), 年號 千桶(天統)
  3. 武王: 光宗(光宗) 무皇帝(武皇帝), 年號 仁安(仁安)
  4. 文王: 世宗(世宗) 광성門皇帝(光聖文皇帝), 年號 大興(大興)
  5. 隊員의: 廢位되어 廟號와 시호 없음. 在位 當時 使用한 年號는 記錄 없음
  6. 聖王: 人種(仁宗) 城隍祭(成皇帝), 年號 中興(中興), 휘 火興(華興)
  7. 강왕: 穆宗(穆宗) 江皇帝(康皇帝), 年號 精力(正曆)
  8. 定王: 毅宗(毅宗) 正皇帝(定皇帝), 年號 盈德(永德)
  9. 僖王: 康宗(康宗) 喜皇帝(僖皇帝), 年號 朱雀(朱雀)
  10. 簡王: 哲宗(哲宗) 間皇帝(簡皇帝), 年號 太始(太始)
  11. 先王: 成宗(聖宗) 先皇帝(宣皇帝), 年號 建興(建興)
  12. 대이진: 章宗(莊宗) 火皇帝(和皇帝), 年號 喊話(咸和)
  13. 대건황: 純宗(順宗) 案皇帝(安皇帝), 年號 대정(大定)
  14. 대현석: 明宗(明宗) 警皇帝(景皇帝), 年號 天福(天福)
  15. 대인선: 廟號 없음. 哀帝(哀帝), 年號 靑苔(淸泰)

大尉海 는 《환단고기》에서 皇帝로 記錄하지 않았고 當時에 使用된 年號도 記錄하지 않았다. 이는 《환단고기》가 처음 쓰여진 1911年 當時 大尉海 渤海 의 國王으로 認定되지 않았고 1940年 에야 渤海의 國王으로 認定되었던 事實을 反映하고 있는 것 같기도하다.

〈대진국本紀〉에서는 대진국이라는 名稱만 使用되며 渤海 로 國號를 바꾸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이에 對해 《환단고기》를 註解한 임승국 (林承國) 敎授는 渤海 라는 이름은 外部에서 부르는 이름이었지 渤海人 스스로가 부른 國號는 대진국日 것으로 推定하였다.

〈고려국本紀〉 [ 編輯 ]

高麗의 歷史를 敍述하고 있다.

評價 및 論難 [ 編輯 ]

史學界의 意見 [ 編輯 ]

《환단고기》는 大韓民國 의 古代史學界에서 魏書 라는 意見이 支配的이다. [3] 凡例에는 1911年 에 完成된 것으로 되어 있으나 1979年 이 되어서야 登場한 理由가 不明確하고, 原本이 提示되지 않으며, 後代에 登場한 用語나 學說이 反映되어 있고, 旣存의 歷史와도 어긋나며, 內容이 矛盾된다는 理由로 後代의 僞作으로 여기는 것이다. 大韓民國 學界의 立場은 다음과 같이 整理할 수 있다.

大韓民國 [ 編輯 ]

短期告祀 》와 함께 後代의 僞作이라는 主張에 大部分의 韓國古代史學者들이 同意하고 있으며 但只 著述時期에 對해서 1920年代 初盤, 1949年 , 1979年 附近이라는 等의 異見이 있을 뿐이다. 廣大한 還國 배달국 , 古朝鮮 의 記錄 等은 根據가 없고 誇張된 歷史로 判斷하며, 飼料로서의 價値가 없다고 보고 있다. [3] 또한 《환단고기》의 內容에서 親日的 要素가 存在한다고 指摘되기도 한다. [13]

日本 [ 編輯 ]

酒類 學界는 時代와 맞지 않는 用語의 登場, 引用 文獻이 不明確하다는 等의 理由로 古代 歷史를 主張하기 위한 緯書로 看做한다. 또한 《 枯死苦戰 》( 古史古? )等과 비슷하다는 指摘이 있다.

眞僞 論難 [ 編輯 ]

《환단고기》가 眞書라는 主張이나 魏書라는 主張이 竝存하고 있다. 直接的으로 對立하는 主張을 먼저 整理하면 아래 表와 같다. 以下 內容은 고준환의 《신명나는 韓國史》의 眞序論과 문영의 《만들어진 韓國史》의 反論을 整理한 것이다. [14]

眞序論 位序論(反論)
渤海 3代 文王의 年號 大興(大興)李 《환단고기》에 記錄되어 있는데 이것이 정효公主 墓地門에서 確認되었다. 該當 年號는 《 新唐書 》에 이미 記錄되어 있는 事實이며 渤海와 關聯된 代表的인 著作인 《발해고》에도 이미 실려 있는 事實이므로 《환단고기》가 最初가 아니다.
高句麗 遺民 이정기가 中國 本土에서 세운 大帝(大齊)에 對한 記錄이 《환단고기》에 처음 記錄되었다. 《新唐書》에 이정기 및 그의 後孫에 對한 列傳이 存在한다.
長壽王의 年號 建興(建興)李 《환단고기》에 記錄되어 있는데, 이것이 1915年 出土된 高句麗 佛像에서 確認되었다. 《환단고기》의 實際 公開 連帶는 1970年代이므로 1915年의 發掘 內容이 적혀 있다는 것이 眞書라는 證據가 되지 못한다.
淵蓋蘇文의 祖父와 曾祖父의 이름이 《환단고기》에 記錄되어 있는데, 이것이 1923年 出土된 泉男生 墓誌銘에서 確認되었다. 《환단고기》의 實際 公開 連帶는 1970年代이므로 1923年의 發掘 內容이 적혀 있다는 것이 眞書라는 證據가 되지 못한다.
商나라 의 王 무정(武丁)李 鬼方(鬼方)을 攻擊했다는 記錄이 《환단고기》에 記錄되어 있는데, 이것이 甲骨文을 通해 確認되었다. 無定義 鬼方 攻擊 記錄은 《周易》에 이미 記錄되어 있는 것이다.
《환단고기》에는 檀君이 北京 一帶를 다스린 檀君朝鮮의 天子(天子)였다고 記錄하고 있다.
河北省 中産墓에서 發掘된 靑銅器에 ‘天子건방중산후’라는 名文이 있어 이를 證明해준다.
中國이 最初로 天子라는 呼稱을 使用한 것은 紀元前 221年 秦始皇 때이다.
秦始皇이 最初로 使用한 것은 皇帝 라는 呼稱이며, 天子라는 呼稱은 周나라 以前부터 이미 使用되고 있었다.

眞序論 [ 編輯 ]

  • 近代 用語 等 後世에 一部 加筆되었더라도 內容 全部가 僞作된 것은 아니며, 특정한 目的을 가지고 造作했다면 보다 完璧해야 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므로 意圖的인 造作은 아니라는 意見 [15] 이다.
  • 高等科學院 박창범 敎授는 《 短期告祀 》(檀紀古事)와 《 檀君世紀 》(檀君世紀)의 ' 오성翠樓 '의 天文現象 記錄을 現代 天文學으로 檢證한 結果 記錄보다 1年 前인 紀元前 1734年에 記錄과 비슷한 現象을 發見했다. ' 오성翠樓 '의 天文記錄은 當時의 國家라는 틀 안에서 測定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後代에 누군가가 이 現象을 作爲的으로 記述했을 境遇 正答이 될 確率은 0.007퍼센트로 加筆되었을 可能性은 거의 稀薄하다는 것이고 《 短期告祀 》와 《 檀君世紀 》의 信憑性도 함께 證明되었다는 意見 [16] [17] 이다. 前 韓國天文硏究院腸 박석재 도 비슷한 主張을 하였다. [18]

位序論 [ 編輯 ]

《환단고기》가 後代에 僞造된 記錄이며, 史書로서의 價値가 떨어진다고 主張하는 代表的인 見解는 다음과 같다. [3]

  • 계연수라는 사람이 實存 人物인지 確實치 않다. 또한 公開 날짜에 對한 約束(100年뒤 公開한다)과 實際 날짜에 對해서도 矛盾이 存在한다.
  • 환단고기에서 환국은 東西 2萬浬 南北 5萬里라고 한다. 하지만 저것을 現在의 單位로 計算하면 還國은 북극에서 南極까지 다스린다는 結論이 나오는데, 이는 不可能하다. 萬若 必死가 잘못되어 東西 5萬浬 南北 2萬里가 眞實이라고 하더라도 유라시아 大陸 全體를 支配했다는 亦是 不可能한 結果가 나온다. 또한 환단고기 床에서 該當 記錄이 敍述된 時代는 이런 單位가 存在할 수 없으며 測定 技術이 存在할 可能性도 極히 낮은 紀元前 7197年이다.
  • 桓因 하나當 非正常的인 壽命을 가진다. 桓因 7名에 3301年 또는 63182年동안 存續했다고 記錄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桓因 1名 平均 472年 또는 9026年이라는 人間으로서 不可能한 壽命이 나온다.
  • 환단고기에 따르면 領土를 끊임없이 占領해가지만 漸漸 領土가 줄어든다. 代表的으로 回/臺 地方을 보면 갈고 桓雄이 歸屬시킨 이 地域은 배달국 初期 領土에도 包含되어 있지만 아무 言及 없이 치우가 再征服한다. 以後 檀君 時代에서도 檀君 王儉이 財政服하고, 以後 檀君이 된 색불루가 다시 이 地方을 殷나라에게서 뺏는다. 그리고 結局 春秋戰國 時代가 到來하면서 더 以上의 言及이 없다. 그러나 환단고기에는 이런 地方을 잃었다는 記錄이 存在하지 않는다.
  • 現傳하는 여러 歷史書 및 위서를 베껴 쓴 痕跡이 많이 存在한다. [19]
  • 用語 使用이 適切하지 않다.
    • 社百力( 시베리아 ), 罷拿硫酸( 파미르高原 ), 水密이( 수메르 ), 우루, 지백特( 티베트 ), 男女平拳, 父權, 常春, 世界萬邦(世界萬邦), 産業, 文化 等 近代 以後에 登場한 用語가 使用되었다.
    • 高麗(高麗), 蒙古(蒙古), 黑手(黑龍江), 영고탑, 산동(山東) 等 實際 使用 時期가 相異한 用語가 使用되었다. 各 名稱의 實際 使用 時期는 다음과 같다.
      • 蒙古(蒙古): 징기스칸 이 登場할 무렵에 登場한다.
      • 영고탑: 淸나라 時調 說話와 관련지어 淸代 以後에 登場한 用語이다.
      • 산동(山東): 中國 司書 《 漢書 (漢書)》를 引用하면서 實際 史書에 없는 산동 (山東)이라는 말을 加筆하였는데, 實際 산동 이라는 用語가 該當 地域을 가리키게 된 것은 明나라 때 以後이다.
  • 著述 連帶
    • 1911年 出刊本은 存在하지 않으며, 出刊 年度인 1979年 보다 前에 《환단고기》 또는 그 底本이 되는 5卷의 著書가 存在했다는 根據가 없으며, 이유립 本人이 《환단고기》를 고쳐가며 創作하였던 痕跡이 發見된다.
    • 1911年 에 編輯된 冊이 1979年 에 出刊되기까지 60年이 넘게 所要된 說得力 있는 理由를 提示하지 못한다.
  • 旣存 사서와 符合하지 않는다.
  • 後代의 글을 引用하는 等 內容上의 矛盾이 있다.
    • 1909年에 死亡한 이기 가 1911年에 完成된 《환단고기》를 甘受하였다고 說明되었다.
    • 신채호 가 《 詐欺集解 》의 註釋을 잘못 解釋하고 主張했던 것으로 推定되는 "전삼한, 後三寒雪"李 反映되어 있다. [20]
    • 이화사의 《言行錄》에 收錄된 詩가 《 短期告祀 》와 《환단고기》에 引用되었다.
    • 《환단고기》의 內容에 따르면 南北國 時代 新羅 의 사람이 著述했다는 《參星旗》에 18世紀 淸나라 時期에 著述된 冊이 引用되어 있다.
  • 《환단고기》와 《短期告祀》에 說明된 수메르 (水密이)와 티베트 (지백特)까지 進出한 巨大한 帝國으로서의 古朝鮮의 遺跡(居住地나 무덤)이 全혀 없다.
  • 還國과 배달국이 存在했다는 時期의 東아시아 新石器 時代 國家 가 存在할 수 없으며, 一般的으로 文明이 登場하는 時期도 그 以後이다. 또한 이들의 國家 體制도 郡縣制 라고 主張하지만 時代와 땅덩어리를 생각해 볼 때, 郡縣制는 事實上 不可能한 統治 體制이다.
  • 《환단고기》는 渤海 의 王系譜를 14臺로 記錄하고 있으며 13代 대현석과 14代 대인선의 諡號를 各其 經濟와 哀帝로 記錄하고 있다. 그러나 20世紀 中葉 김육불 에 依해 渤海의 14代 王인 大尉海 가 發見되면서 渤海의 君主는 모두 15名임이 確認되었으며, 대현석 및 대인선의 시호 亦是 當時 新羅의 王 경애왕 을 誤讀하여 나타난 것임이 밝혀졌다. [21] 이는 《환단고기》가 渤海의 王에 對한 正確한 옛 記錄을 參考하지 않았다는 證據가 된다.
  • 《환단고기》의 天文 記錄을 통한 證明에 對한 反論도 提起되었다. 전용훈 博士는 오성聚合 이 5世紀 頃 中國의 天文 書籍에서 計算 方法이 밝혀진 것임을 指摘하며 後代에 하나라 商나라 로 交替되는 正當性을 强調하기 위해 計算하여 記錄한 것을 《환단고기》에서 使用한 것임을 指摘하였다. [22] 實際로 《竹書紀年》에는 夏나라의 마지막 王 걸왕 때의 오성錯行(五星錯行)李 記錄되어 있으며 그 時期도 《환단고기》와 近似하다.

中道론 [ 編輯 ]

《환단고기》가 復元되는 過程에서 相當 部分 加筆되었음은 認定하지만 現存하지 않는 模本(母本)이 있을 수 있고, 그 內容에 包含된 《 天符經 》·《 三一神誥 》·《 참전계경 》은 大韓帝國이나 日帝强占期 初에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볼 때, 《환단고기》에는 傳來되는 船價 系統의 흐름이 表出되었으리라는 意見이다. [23]

이러한 見解는 變容된 程度를 잘 알 수 없으므로 歷史 硏究에 活用하는 것은 危險하다는 主張 [24] 과, 直接的인 引用은 避하면서 大體的인 흐름만은 參照할 수 있다는 主張 [25] 이 있다. 다만 後者에서 天文學을 動員해 歷史解釋에서 나타나는 問題에 對한 批判과 反駁 [26] 도 있다.

造作說 [ 編輯 ]

《환단고기》는 出刊 經緯 自體에 矛盾이 많다. 이러한 矛盾을 追跡하여 《환단고기》 自體가 이유립에 依해 造作된 創作物임을 主張하기도 한다.

  • 著者인 계연수 는 果然 實存人物인지도 疑心되고 있으며, 《환단고기》의 傳來 來歷에서 傳하는 行跡과 檀君敎 에서 傳하는 行跡이 完全히 矛盾된다. 1917年에 檀君敎 에 依해서 公開된 〈天符經〉의 傳來 來歷에 따르면 계연수 는 1916年 以前까지 〈天符經〉의 存在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27] 그런데 계연수 가 1911年에 썼다는 《환단고기》에는 〈天符經〉이 실려 있어 1920年代 계연수 의 行跡과 全혀 다르다.
  • 《환단고기》에 收錄된 오형기의 跋文에 따르면 《환단고기》는 1949年에 江華島 대시展 에서 情緖되었다고 하나, 實際 江華島 대시展 이유립 이 敎主로 있는 少數宗敎人 太白校 의 敎堂으로 建立된 羨道가 1969年이다. [28] 卽, 아직 建立되지도 않은 建物에서 淨書하였다는 것이다. [29]
  • 이유립 은 1970年代 初盤부터 《환단고기》의 一部 便木이나 句節을 自身의 著書 《참된 祖國의 上:世界文明動員론》이나 政訓雜誌 《自由》에 公開하고 있다. [30] 이렇게 公開된 部分은 1979年에 公開된 《환단고기》 및 1983年에 다시 出刊한 《환단고기》와 다른 部分이 많으며, 時間이 지나면서 誤謬를 바로잡거나 咬裂하여 나가는 모습을 確認할 수 있다.
  • 《환단고기》의 內容 가운데 相當部分은 《 短期告祀 》 및 《 閨怨士禍 》와 文章 構造까지 完璧하게 一致한다. 一致하는 部分을 分析해 보면 《환단고기》가 다른 두 冊을 結合하여 베껴 썼다는 結論을 내릴 수 있다. [31] 이와 같은 根據를 土臺로 이유립 이 《환단고기》를 1970年代부터 創作 및 造作하여 1979年에 完成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卽, 《환단고기》는 이유립 이 古代 歷史書를 僞裝하여 만든 創作物이라는 것이다. [32]

民族主義 性格에 對한 疑問 [ 編輯 ]

《환단고기》가 民族主義 歷史冊이라는 觀點에 疑問을 提起하기도 한다. [33] 民族主義 , 特히 피植民地 狀態의 民族에게서 두드러진다고 評價되는 抵抗的 民族主義 의 特徵은 다른 民族과 區分되는 排他的인 民族 構成을 重要視한다는 點이다. 그러나 《환단고기》는 이러한 排他性보다는 汎투란注意 或은 日本 帝國 이나 나치 獨逸 等에서 流行한 擴張的 民族主義 의 모습을 보인다. 特히 日本 大東亞共榮圈 과 類似한 點을 보인다. [34]

東北工程 [ 編輯 ]

中國은 東北工程 을 통해 《환단고기》를 利用하여 大韓民國의 歷史學界를 非難하기도 하였다. 東北工程을 主導한 學者 가운데 하나인 유자민은 大韓民國 歷史學界의 古朝鮮에 對한 主張이 非學術的이라 批判하였는데, 그 論據로 《환단고기》를 들고 있다. 實際 大韓民國의 歷史學界에서는 《환단고기》를 緯書로 判斷하여 飼料로서 使用하고 있지 않은데도 不拘하고, 유자민은 《환단고기》에 立脚한 非主流의 見解만을 引用하고 있다. 이러한 歪曲을 통해 國際的으로 大韓民國 歷史學界의 信賴性을 낮추려는 意圖를 疑心할 수 있다. [35] 이러한 事實을 土臺로 一部에서 東北工程에 맞설 수 있는 記錄이라 主張하기도 하는 《환단고기》가 오히려 東北工程에 도움을 주고 있는 아이러니가 指摘되기도 한다. [36]

그 外 [ 編輯 ]

  • 환단고기(桓檀古記)의 으로 읽어야 한다는 主張이 있다. [11] 그러나 國立國語院에 따르면 이 主張은 아직 根據가 未洽하다는 結論이다. [37] 前近代 中國의 韻書(韻書)들을 살펴보면 黨運이나 廣韻에서는 桓에 對해 "好關節(胡官切)으로 소리는 圜(丸)이다"라 明示하고 있으며, 黨運보다 앞서 南北朝時代에 編纂된 玉篇에서도 亦是 "호돤절(胡端切)"이라고 되어 있다. 端을 現代 韓國語 讀音으로는 '單'이라 읽지만 玉篇에서는 "度環節(都丸切)"이라 하므로 當時의 音은 '돤'으로 재구된다. [38]
  • 大韓民國 의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흔히 《환단고기》와 같은 冊을 信奉하고 환단고기를 基礎로 韓半島와 滿洲 地域을 합친 廣範圍한 領域을 古代 韓國의 領土라고 主張하는 이들 [39] 을 俗稱 환빠 라 부른다. 이는 환단고기 追從者를 卑下하여 부르는 말이다. 또한 反對로 환단고기를 批判하는 이들을 卑下하여 환까 라고 부르기도 한다. [40] [41]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書店街, 「檀君神話」 바람, 《東亞日報》, 1986.6.10.
  2. 檀君은 神話가 아니다, 《경향신문》, 1986.10.2.
  3. 主要 見解로는
    김상호, 〈古朝鮮 問題를 둘러싼 勞爭과 今後의 課題〉, 《 창작과비평 》 1988年 가을號.
    박광용, 〈大倧敎 關聯 文獻에 僞作 많다〉, 《역사비평》 10號, 1990年.
    이도학, 〈재야사서 解除 《환단고기》〉, 《民族知性》, 1986年 11月號.
    이순근, 〈古朝鮮 位置에 對한 除雪의 檢討〉, 誠心女子大學校, 1987年.
    以上市, 《檀君實査에 關한 文獻考證》, 고려원, 1990年.
    조인성, 〈《閨怨士禍》론添補〉, 《鏡臺사론》 3, 경남대학교, 1987年.
    조인성, 〈現傳 《閨怨士禍》의 史料的 性格에 對한 일檢討〉, 《李丙燾 九旬記念 韓國史學論集》, 1987年.
    조인성, 〈《閨怨士禍》와 《환단고기》〉, 《韓國史市民講座》 2輯, 1988年.
    조인성, 〈한말단軍關係司書의 再檢討 - 神壇實記·短期告祀·환단고기를 中心으로 -〉, 《국사관論集》 3, 1989年.
    文革, 〈《환단고기》에 對한 飼料學的 檢討〉, 社會科學院-한국학술진흥재단, 2006年
    等을 參照.
  4. ‘確認되지 않는 文獻’은 該當 文書가 現存하지 않아 그 存在 與否를 確認할 수 없는 것들이다. 《조대기》와 《震域遺棄》의 境遇, 該當 文獻을 引用했다는 《 閨怨士禍 》의 內容과 一致하지 않는 部分이 있다.
  5. 계연수는 《환단고기》를 열 세 살이었던 이유립에게 건네면서 '庚申年에 公開하라'라고 했다고 하나, 그 出處가 確認되지 않는다. 계연수와 이유립을 찾아서 , 《신동아》, 2007.9.
  6. 김유경, '박창암과 장도빈 - 局社찾기운동', 프레시안뉴스, 2003.12.13.
  7. 가지마 노보루 驛, 《환단고기》, 新國民社, 1984
  8. 정연종, 《한글은 檀君이 만들었다》, 조이정 인터내셔날, 1996
  9. 《신동아》2007年 9月號, 〈환단고기의 眞實〉
  10. 김은수 譯註, (註解)《환단고기 - 檀君은 아시아를 統一했다》, 가나出版社, 1985年.
  11. 임승국 註解, 《한단고기》, 精神世界史, 1986年
  12. 大體로 單刃은 桓因과 똑같이 본다.
  13. 조인성, 〈國粹主義史學科 現代의 韓國史學〉, 《韓國史市民講座》20, 1997 / 박광용, 〈大檀君 民族主義의 展開와 兩面性〉, 《역사비평》19號, 1992 / 박광용, 〈大倧敎 關聯 文獻에 僞作이 많다 - 閨怨士禍와 환단고기의 性格에 對한 再檢討〉, 《역사비평》10號, 1990
  14. 고준환, 《신명나는 韓國史》人間과 自然死, 2005 / 문영, 《만들어진 韓國史》, 波瀾미디어,2010
  15. 김막순, 〈韓國民族의 形成에 關한 硏究: 《환단고기》를 中心으로〉, 國防大學院, 2000年, 8쪽.
  16. 이종호(科學著述家) (2004年 5月 22日). “(科學으로 푸는 우리遺産) 古朝鮮人은 韓國人인가” . 國政브리핑(네이버) . 2012年 1月 3日에 確認함 .  
  17. 이용원(論說委員) (2005年 1月 27日). “古天文學” . 서울新聞 . 2012年 1月 3日에 確認함 .  
  18. 이억주(科學東亞북스 編輯長) (2012年 3月 23日). “科學歷史小說 ‘개川機’ 펴낸 박석재 韓國天文硏究院 硏究委員” . 新東亞 . 2013年 2月 10日에 確認함 .  
  19. 以下 內容은 '문영, 《만들어진 韓國史》, 波瀾미디어, 2010'를 參照
  20. 文革, 《환단고기》에 對한 飼料學的 檢討, 2006
  21. 김육불, 《발해국地長篇》, 1935 / 김육불, 《東北統社》下, 東北亞歷史財團, 2007
  22. 전용훈, 〈檀君世紀의 行星職列 記錄은 造作되었다. - 오성聚合은 王朝 興亡의 徵兆?〉, 《科學東亞》2007年 12月號, 138~141쪽
  23. 김한식, 「上古史 硏究에 關聯되는 文獻批判」, 《敎授論叢 36輯》, 國防大學校, 2004.
  24. 정영훈, 〈檀君民族主義와 그 政治思想的 性格에 關한 硏究: 韓末-政府樹立氣를 中心으로〉, 檀國大學校 , 1993年.
  25. 박창범·라대일, 〈檀君朝鮮時代 天文現象記錄의 科學的 檢證〉, 《韓國上古史學報》 14, 1993年, 95쪽,
    金炳基·신정일·李德一, 《古朝鮮은 大陸의 支配者였다》, 歷史의 아침, 2007年.
  26. 이문규, 〈현대 天文學을 利用한 歷史 解釋에서 나타나는 問題〉, 全國歷史學大會 科學史分課 發表文, 2003年.
  27. 김택영, 《韶護堂全集》, 1922
  28. 이강오, 《韓國의 檀君四廟》, 韓國新興宗敎硏究資料便 第2部, 전북대학교, 1970, 56페이지
  29. 문영, 《만들어진 韓國史》, 波瀾미디어, 40~41페이지, 2010
  30. 이유립, 《참된 祖國의 上:世界文明動員론》, 단단學會, 1973 / 이유립, 〈東洋文明서원論을 批判한다〉, 月刊《自由》 1976年 5月號
  31. 문영, 《만들어진 韓國史》, 波瀾미디어, 2010
  32. 문영, 《만들어진 韓國史》, 波瀾미디어, 59~74페이지, 2010
  33. '박광용, 「代宗敎 關聯 文獻에 僞作 많다」, 《역사비평》, 1990'에서는 다음과 같은 根據를 提示한다.
    • 《환단고기》가 著述되었다는 1911年 은 抗日民族鬪爭記인데, 凡例에서는 "世界 人類가 對等하게 모여서 함께 存在함을 祝賀하기 위해서"라고 著述하고 있어 民族主義 와 어긋난다.
    • 高麗 禑王 末期에 記錄되었다는 《太白일사》에 倭寇 와의 싸움에 對한 言及이 없다.
    • 《단군세기》에는 소시모리 가 3度를 據點으로 天王 을 自稱하였다는 記錄이 있어 日本 神話 에서 나타나는 스사노오노 美코토 를 연상시키며, 日선同調론 에 利用될 素地가 充分하다.
  34. 상동
  35. 《2005年度 中國의 高句麗史 硏究 論文集》, 東北亞歷史財團, 2007, 6~7페이지
  36. 문영, 《만들어진 韓國史》, 波瀾미디어, 31~32페이지, 2010
  37. 國立國語院 '자주 찾는 質問'
  38. 大鐘言語硏究所 '桓(굳셀 圜)과 檀(단단할 單)에 關한 文字學籍 考察'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39. ““歷史 被害意識 벗고 IT時代 遊牧民 精神 再發見해야”” . 東亞日報. 2009年 1月 25日 . 2010年 4月 27日에 確認함 .  
  40. “‘歷史的 事實과 다를 수 있습니다’ 史劇에 警告文句를” . 스포츠칸. 2007年 10月 12日 . 2010年 4月 28日에 確認함 .  
  41. 오마이뉴스 記事: 환빠, 환까 들어보셨습니까

參考 文獻 및 링크 [ 編輯 ]

單行本 [ 編輯 ]

  • 《高朝鮮歷史開館》, 허종호, 社會科學出版社 南- 圖書出版 中心 펴냄, 2001年.
  • 《檀君實査에 關한 文獻考證》, 以上市, 고려원, 1990年.
  • 《精神哲學 桶便(精神哲學 通編)》, 전병훈 , 1919年.
  • 《韓國史 卷4 - 初期國家 ? 古朝鮮·扶餘·삼한》, 김정배, 國史編纂委員會, 1997年.
  • 《韓民族의 뿌리史上》, 송호수, 가나出版社, 1985年.
  • 《杏村 茸巖의 生涯와 思想》, 한영우 外, 일지사, 2002年.
  • 《환단고기》, 환單學會 篇, 광오理解社, 1979年 - 限定版 100部 發行
    • 가지마 노보루(鹿島?) 驛, 《환단고기》, ?史と現代社 (新?民社), 1982年 - 日本에서 出刊된 最初의 飜譯本
    • 김은수 驛, 《환단고기》, 가나出版社, 1985年 - 韓國에서 出刊된 最初의 飜譯本

論文 [ 編輯 ]

  • 이도학, 〈환단고기〉, 《民族知性》 9, 1986年 11月, 民族知性社.
  • 조인성, 〈韓末 檀君關係司書의 再檢討: 《神壇實記》·《短期告祀》·《환단고기》를 中心으로〉, 《국사관論叢》 第3輯, 1989年 10月, 國史編纂委員會.
  • 안창범, 〈 환단고기 위序論 批判 〉, 《韓國宗敎史硏究》 通卷 第10號, 2002年 2月.

寄稿文 및 記事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