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모에 高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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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모에 高젠
巴御前
無事 情報
時代 헤이안 時代
別名 ?, ??
主君 미나모토盧 요시나카
主要 參戰 겐페이 戰爭
氏族 起訴 나카하라氏(木? 中原氏)
父母 아버지 : 히구치 겐코? 또는 나카하라 겐토?
어머니 : 치즈루 젠?
兄弟姊妹 히구치 카네미츠?
이마이 카네히라?
이마이 카네미츠?
宗敎 佛敎

도모에 高젠 ( 日本語 : 巴御前 土毛에 高젠 [ * ] , 生沒年 未詳 ) [1] 은, 헤이안 時代 末期의 시나노 武裝이다.

군談小說 《 헤이케 이야기 》에는 武裝 미나모토盧 요시나카 의 便女(便女) [2] 로, 《겐페이 鬪爭錄》(源平?諍?)에는 히구치 街네미쓰(?口兼光)의 딸, 《겐페이 盛衰機》(源平盛衰記)에는 나카하라노 가네토(中原兼遠)의 딸이자 히쿠치 街네미쓰·이마이 가네히라(今井兼平)의 딸로 요시나카의 妻가 되었다. 으레 夫人으로 解釋되지만, 미나모토盧 요시나카의 아내는 도모에가 아니다.

略歷 [ 編輯 ]

《헤이케 이야기》에는 ‘起訴의 最後[木曾最期]’에서만 도모에의 이름이 登場한다. 그女가 平生의 主人이자 郞君으로 섬겼던 미나모토盧 요시나카(源義仲)의 麾下 將帥였던 히쿠치 街네미쓰, 이마이 가네히라, 그리고 네노이 유키치카(根井行親)와 다테 지카타다(楯親忠) 等 ‘起訴 四天王’과 함께 요시나카를 따라 헤이케 打倒에 從軍해, 큰 칼과 억센 활을 들고 싸웠던 女子 武士로 描寫되고 있으며, “요시나카 功은 시나노에서 도모에와 야마부키(山吹), 두 名의 便女(便女)를 거느리고 왔다. 야마부키는 病이 있어 首都에 머물렀다. 도모에는 흰 皮膚에 머리는 길었으며, 容貌가 몹시 아름다웠다. 强弓의 精兵으로 혼자서 능히 千 名을 맞섰다.”라고 되어 있다.

《헤이케 이야기》에는 교토에서 헤이케를 몰아냈지만 교토의 治安 回復은 勿論 法皇과의 關係 回復에도 失敗하고, 요시쓰네에 쫓겨 달아나던 미나모토盧 요시나카가 300基를 가지고 여기저기서 出沒하는 軍士들에 맞서서 끝까지 싸웠지만, 다 싸워 이기고 보니 남은 것은 다섯 基밖에 되지 않았다. 다섯 氣 가운데는 圖謀에도 包含되어 있었다. 요시나카는 自身의 不利함을 깨닫고 도모에에게 “너는 女子니 어디로든 避해라. 나는 戰死할 覺悟를 한 몸, 붙잡히게 된다면 自決할 것이다. 마지막까지 女子나 끼고 있었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라며 도모에를 避身시키려 했다. 도모에는 떠나려 하지 않았지만, 요시나카가 끝까지 도망칠 것을 勸하자 “마지막 奉公(奉公)으로 제가 싸우는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마침 30基를 거느리고 나타난 무사시의 장사 온다 모로시게 에게 달려가, 모로시게 옆에 말을 대고 힘껏 잡아채서 自身이 타고 있던 安葬 앞가리개에 밀어붙인 다음 목을 비틀어 베고 집어던져 버렸다. 그리고 甲胄를 벗어 던지고 東쪽을 向해 달아나는 것으로 《헤이케 이야기》 속에서 자취를 감춘다.

이건 街쿠이치本(覺一本)이고, 野史카본(八坂本) 《헤이케 이야기》에서는 도모에를 쫓아온 敵將을 거꾸로 攻擊해 쓰러뜨린 뒤 다시 요시나카에게 왔다. 自身을 떠나지 않으려는 도모에에게 “너의 後嗣를 잇는 것이 네가 나를 爲해 할 수 있는 마지막 奉公이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서야 東쪽을 向해 사라졌다고 되어 있다.

가장 오래된 古本으로 알려진 엔쿄본(延慶本)에는 어린 時節부터 요시나카와 함께 자라고 힘도 武藝도 서로 比等한 사이였던 요시나카에게 도모에는 큰 힘이 되었고, 요시나카의 擧兵에도 從軍하였으며 교토에서 쫓겨난 요시나카를 따라온 軍士가 7機만 남았을 때도 도모에는 左右에서 오는 武士들을 左右 겨드랑이 사이에 끼고 졸라 머리를 떼어 죽였다고 한다. 九里쓰(粟津)에 到着한 뒤에는 요시나카에게 다섯 基밖에 남아있지 않았는데, 그때 이미 도모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겐페이 盛衰機》에서는 구리카라 고개에서 도모에가 大將의 한 名으로서 登場하는데, 이때 나이가 28歲였다고 한다. 요시나카는 사나운 말을 잘 다루고 險難한 비탈길도 잘 다니는 도모에를 戰鬪 때마다 恒常 甲옷을 입히고 큰 칼과 센 활을 들려 指揮官으로 明解 내보냈다고 하니 여기에서도 充分히 活躍했을 것이다. 세타가와라(?田河原) 戰鬪에서도 7期를 죽이고 이름을 떨쳤다(나가토본長門本과도 비슷한 敍述이 있다). 우지 江 戰鬪에서는 하타케야마 시게타다 (?山重忠)와의 싸움이 그려져 있는데 도모에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 시게타다에게 漢字와 로쿠로(半?六?)가 “起訴 나리(木曾殿)의 乳母 나카미勞困老카미(中三?頭)의 딸 도모에입니다. 强弓을 잘 다루고 사나운 말로 능히 길들이며, 유모자(乳母子)이자 妾으로써, 집안에서는 아이를 기르고, 軍에서는 大將軍을 맡아, 이마이·히구치와는 兄弟로서, 두려움의 對象입니다.”라고 對答하고 있다.

後날 와다 요시모리(和田義盛)의 아내가 되어 아사히나노 요시히데 (朝比奈義秀)를 낳았다. 와다 戰鬪 以後 에치故國 (越中?) 後쿠미쓰(福光)의 이시구로 氏(石?氏)에게 依託해 出家하여 죽은 主君과 父親, 兄弟와 아들의 冥福을 빌며 나날을 보냈고 91歲로 生涯를 마쳤다고 한다. 現在 가나가와縣 요코스카 市 , 나가노縣 起訴 軍 起訴마치, 니가타縣 죠에츠 詩 等 各地에 도모에 高젠의 무덤으로 여겨지는 것이 傳하고 있지만, 어느 것도 도모에 高젠의 眞짜 무덤이라고 밝혀진 것은 없다.

한便 街쿠이치本(?一本)엔 나이가 적혀 있지 않지만, 百二十舊本(百二十句本)에는 22~3歲, 엔쿄본에는 30歲로, 나가토本에는 32歲, 《겐페이 盛衰機》에는 28歲로 되어 있다.

日本 學者가 發見한 小行星 4896號 의 이름에도 도모에가 붙어 있다.

歷史로서의 도모에 [ 編輯 ]

女子 武裝에 對한 《헤이케 이야기》나 《겐페이 盛衰機》의 技術은 事實로 다 믿기에는 미심쩍은 部分이 많이 있어 文學的 各色일 可能性도 높다. 다만 가마쿠라 幕府의 正使인 《 아즈마카가미 》(吾妻鏡)에는 겐린 (建仁) 元年( 1201年 )에 에치高(越後)에서 叛亂이 일어났을 때, 에치高 죠씨(越後城氏) 집안의 閑暇쿠 高젠 (坂額御前)이라는 女子의 奮鬪로 幕府의 討伐軍이 큰 被害를 입었다는 記事가 있다. 當時의 가이 ㆍ시나노ㆍ에치高 地方에서는 武士의 집안의 女子들도 第1級에 準하는 戰鬪訓鍊을 받았다는 것은 確實하다.

日本의 小說家 街이온지 쥬故로 (海音寺潮五郞)는 긴지(金刺) 집안이 所有했던 城邑 가운데 ‘야마후키’라는 이름을 가진 姓이 있는 點을 들어, 도모에와 야마후키는 요시나카의 支持 勢力이던 나카하라(中原)ㆍ긴지 집안의 사람 가운데 武藝에 뛰어난 女子를 골라서 副官 乃至 祕書官으로 삼아 派遣했던 것 같다고 推測하고 있다.

傳說 [ 編輯 ]

나가노 縣의 起訴 軍 히요시무라(日義村)에는 도모에街후치(巴之淵)라는 地名이 남아있는데, 元來 도모에가 이 江에 살던 龍의 化身으로서 人間의 모습으로 現身해 요시나카를 도왔다는 이 地方 傳承에서 由來한 이름이다.

또 이런 傳說도 있다. 헤이케 打倒의 領地를 받은 요시나카가 九里카라(?利伽羅)라는 고갯길로 進軍할 때였는데, 隣近 마을에 살던 도모에가 江에서 옷감을 말리는데 거기로 요시나카의 말이 지나가는 바람에 물이 튀어서 옷감이 젖어버렸고, 畫家 한 도모에는 대번에 요시나카를 말을 탄 그대로 확 들어올려 度이데(戶出) 마을로 던져버렸다. 그대로 數十 枚나 되는 논 위로 던져진 요시나카는 그대로 소나무의 가지에 걸려버렸지만, 火내기는커녕 오히려 요시나카는 도모에를 데리고 戰爭에 나아갔다고 한다. 度이데 中心部에는 도모에 情(巴町)이라는 마을이 있고, 해마다 道이데노 神社(戶出野神社)의 가을 마쓰里 때면 마을의 女子아이가 뽑혀 도모에 高젠으로 扮裝하고 參加한다.

요시나카가 말과 함께 걸린 소나무는 後世에 말걸이 소나무(駒かけの松)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나무가 있었다는 場所조차 記錄에 없을 뿐 아니라 도이데에 保管된 資料를 봐도 그런 傳說은 없다. 只今의 誤시미즈 地域에 마을이 생긴 것은 에도 初期의 일이지 헤이안 時代에는 그 地域에 마을이 있지도 않았고, 있었다 해도 隣近 要시즈美(吉住) 마을(只今의 日本 다카오카 市 토이데 要시즈美)의 一部에 不過했다. 다이쇼 8年에 刊行된 토이데 關聯 史料에는 週에이(壽永) 3年( 1183年 ) 5月 11日에 한야노(般若野)에서 究理카라로 向하던 요시나카가 잠깐 쉬느라 말을 매어두었다는 말걸이 소나무(駒?ぎの松)의 傳說만 나온다. 나무는 정작 1894年 (메이지 24年) 9月 11日에 西南쪽에서 불어온 暴風으로 나무의 가지 한 쪽이 꺾였고, 1909年 (메이지 42年) 8月에 全部 베여나가 只今은 痕跡만 남았다.

各州 [ 編輯 ]

  1. '高젠(御前)'이란 말은 貴人이나 貴人의 아내를 가리킬 때 쓰이지만, 미나모토盧 요시쓰네 (源義經)의 愛妾이었던 시즈카 高젠 (靜 御前)이나 《소街모노가타리(曾我物語)》에 나오는 遊女 도라勞苦젠(虎御前)처럼 시라뵤우시나 遊女(妓生)를 가리킬 때도 폭넓게 쓰인 말이다. 도모에의 境遇도 後者와 같은 用例日 것으로 여겨진다.
  2. 便女(便女)란 말 그대로 '便利한 女子', 武裝의 옆에서 그의 시중을 드는 下女라는 意味인데, 이걸 두고 ‘美女’로 解釋하는 境遇도 있곤 하다.

外部 링크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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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