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숙손
(崔淑孫, ? ~
1457年
?)은 朝鮮 禮賓寺職場 職責을 지낸 朝鮮朝 武臣이다. 字는 文弱이며, 本貫은
通川(通川)
이다. 端宗復位事件에서 死六臣의 한名인 李塏와 連累되어 귀양을 갔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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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父는 高麗末 朝鮮初期의 名將인 洋裝공
최운해
將軍이고, 아버지는 世宗朝의 左議政 整列공
최윤덕
將軍이다. 太祖楚에 昌原 武陵村에서 崔潤德의 莊子로 태어났다.
武科로 登科하여, 1422年(世宗 4年) 禮賓寺職場을 거쳐, 1427年(世宗 9年) 五位의 辭職으로 王世子 侍從官이 되었다.
1433年(世宗 15年)에 整列공
최윤덕
의 軍官으로 파저강의 女眞族征伐을 扈從하였으며
[1]
, 이때의 專攻으로 6月에 折衷上護軍에 올랐다. 1435年(世宗 17年)에는
僉知中樞院使
, 1437(世宗 19年)에는 4軍 地域인 平安道 여연의 판女聯都護府使에 除授되어 4郡의 設置와 北方의 安定에 힘썼다.
이어 中央으로 돌아와 1442年(世宗 24年)
中樞院副使
에 祭需되고, 1443(世宗 25年)에는 全羅道
水軍都按撫處置使
가 되고, 1444年(世宗 26年)에
동지중추원사
를 거쳐 11月에 慶尙道 右島都節制使가 되었다.
1445年(世宗 27年)에 慶尙道 都節制使에 臨機하다 12月 整列공 崔潤德의 父親喪을 當하여 3年間 侍墓살이를 하고 復歸하여, 1449年(世宗 31年)에 또 한番 平安道의 판昌盛大都護府使가 되어 北方의 安定에 힘썼다.
1452年(文宗 2年) 文宗이 逝去하니 윤암, 弛緩, 二齡等과 함께 中樞院副使로 宮城赦免節制使가 되어 萬若의 變亂에 對備하였다.
[2]
1452年(端宗 卽位年)에 동지중추원사로
社은정사
가 되어 明나라에 갔다. 明나라를 다녀온 以後에 1453年(端宗 1年)에는 全羅道兵馬節制使가, 1455年 全羅道 都節制使가 되었다. 같은 해 世祖가 王位에 오른 以後 中央으로 돌아와 10月에 中樞院副使가 되었고, 다시 知中樞院事가 되었다. 이 해에 아우인
최영손
이
금성대군
의 事件에 連累되어 죽었다.
[3]
이듬해 人 1456年(世祖2年) 端宗을 復位시켜려는
死六臣
事件이 發生하였다. 이때 死六臣의 한名인
耳介
와 連累되어 長子 맹한, 조카 季漢과 함께 먼 地方에 琉璃安置 되었다.
[4]
1458年(世祖 4年) 2月에 같이 安置되었던 長子 猛悍과 조카 季漢의 安置된 곳을 옮겨주었을 때의 記錄에는 빠졌는데, 이 記錄으로 보아 琉璃安置 된 後 國文의 後遺症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死亡한 것으로 보인다.
[5]
以後 1476年(成宗 7年)에 이르러 사면 復權되었다.
家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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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曾祖 :
최록
(大義功臣-高麗)
- 祖父 :
최운해
(充軍佐命功臣-高麗),(開國原從功臣-朝鮮)
- 部 :
최윤덕
- 某 : 팔거陶氏
- 本人 : 최숙손
- 背違 : 昌寧조氏
- 第:
최경손
,
최광손
,
최영손
(斷種忠臣團 背向)
- 者 :
최맹韓
,
최중한
,
최흡韓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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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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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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