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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쿠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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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쿠다이 屛風도》(미쓰이 文庫 所長)

주라쿠다이 ( 日本語 : 聚?第 駐라쿠테이 [ * ] )는 아즈齒모모야마 時代 도요토미 히데요시 교토 의 나이야에 지은 大邸宅이다. 주라쿠 情 (聚?亭)이라고도 불린다. 一種의 垓子가 있는 性으로 볼 수 있어, 주라쿠 性 (聚?城)으로도 불린다.

槪要 [ 編輯 ]

주라쿠다이는 간파쿠 히데요시가 政務를 보던 정청 兼 邸宅으로 1586年 2月에 着工하여 다음해 9月에 完成했다. 규슈 征伐 을 마친 히데요시는 오사카城 에서 이곳으로 와 政務를 執行하였다. 1588年 5月 9日 고요제이 天皇 의 流行 [1] 을 맞이하여 饗宴을 倍풀었다. 또한 1591年 예수회 의 東日本 觀察使 알렉산드로 발리냐노 一行과 덴쇼 少年使節團 도요토미 히데요시 의 謁見度 여기에서 이루어졌다.

超豪華 建物 [ 編輯 ]

金箔을 입힌 기와를 使用하는 等 모습이 호화로웠다. 다이(第)는 元來 邸宅이라는 意味지만, 여기에는 천수가 中心에 있는 魂마루와 니노마루 等이 있었고, 周圍를 垓子로 둘러서 防禦하는 日本 性의 特徵도 갖추고 있었다. 이 建物을 描寫한 예수회 新婦 루이스 프로이스 는 그의 著書 《日本史》에 이 建物을 이렇게 描寫했다.


建物은 周邊이 반리나 되었고 石壁의 돌은 촘촘하지는 않았지만 灰반죽으로 接合되었고, 技術이 뛰어나고 壁이 두꺼웠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石造建物로 錯覺할 程度였다고 한다. 이 建物에 쓰였던 돌의 大部分은 드물게 볼 程度 크기로 먼 地方에서 사람이 메고 運搬해온 것인데, 때로 돌 하나 옮기는데 3000~4000名의 일손이 必要하기도 하였다. 放課 客室 그밖의 空間에는 最良의 木材가 쓰였고 大部分은 杉나무의 香氣를 내뿜고 있었다. 內部는 모두 黃金色으로 빛나고 갖가지 그림으로 裝飾 되었으며 너무나도 淸潔하고 完璧하며 또한 調和가 이루어져 있는 點에 사람들은 驚歎을 禁치 못하였다. [2]

기타 [ 編輯 ]

邸宅內에는 日本의 다調(茶祖)로 불리는 히데요시의 茶道 스승인 센盧 리큐 의 집도 지어졌으며 1587年 10月에는 기타노 神社 앞에서 多都會人 기타노 誤差盧油 가 열렸다.

1591年 12月 히데요시가 간파쿠 職을 조카인 도요토미 히데쓰구 에게 물려주면서 駐라쿠다이도 히데쓰구의 居處가 되었다. 以後 고요제이 天皇이 디시 여기에 들러 머물렀다. 1594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후시미性 祝聖을 着手했는데 다음해에 간파쿠 히데쓰구에게 割腹 을 命하고 주라쿠 다이는 撤去시켜 버린다. 히데요시는 駐라쿠다이의 建物 大部分을 후시미 城에 옮겨 쓰도록 하였다.

各州 [ 編輯 ]

  1. 流行(遊幸): 임금이 大闕밖으로 擧動函 = 悻悻(行幸)
  2. 國立晉州博物館《프로이스의 日本史를 通해 다시보는 壬辰倭亂과 土曜토미 히데요시》(부키,P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