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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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오 (鄭以吾, 1351年 [1] ~ 1434年 8月 11日 )는 高麗 朝鮮 初期의 文臣이며 學者이다. 자는 수가(粹可), 號는 校은(郊隱), 本貫은 晋州 (晉州)이다. 정을보 (鄭乙輔)의 曾孫이자 情分 (鄭?)의 아버지이다.

生涯 [ 編輯 ]

일찍이 스스로 過去를 보기 위해 恒常 異色 (李穡)· 정몽주 (鄭夢周)와 交遊했다.

1374年 (恭愍王 23) 文科에 及第했으며, 1376年 (禑王 2) 藝文館檢閱(藝文館檢閱), 이듬해 三四道士(三司都事), 공양왕 (恭讓王)組에 工曹正郞(工禮正郞), 禮曹正郞(禮曹正郞), 全校部令(典校副令)을 歷任했다.

朝鮮이 開國된 後인 1394年 (太祖 2) 地選注射(知善州事)로 나갔으며 [2] , 1398年 (太祖 7) 奉常寺소경(奉常寺少卿)으로서 左政丞(左政丞) 照準 (趙浚) 等 5名과 함께 『社鼠竊요 四書切要』를 찬술(撰述)해 바쳤다. [3]

1400年 (正宗 2) 惡政(樂正)으로서 會案軍 (懷安君)의 麾下에 있었던 眞무소(鎭撫所)의 甲紗(甲士) 3百 名의 革罷를 請했는데, 王이 이를 받아들였다. [4]

以後 病朝議郞(兵曹議郞), 校書監(校書監), 藝文館直提學(藝文館直提學)을 거쳐 四星(司成)李 되었으며, 1403年 (太宗 3) 大司成(大司成)으로 昇進했다. [2]

1405年 (太宗 5) 右代言(右代言) 金과(金科)와 함께 生員試(生員試)를 主管해 조서로 (趙瑞老) 等 100名을 뽑았는데, 공정하지 못하다는 理由로 司憲府(司憲府)의 彈劾을 받았다. [5]

같은 해 共助右參議(工曹右參議), 1407年 (太宗 7) 公安部尹(恭安府尹)을 거쳤으며 [2] , 1410年 (太宗 11) 同知春秋館事(同知春秋館事)로서 領春秋館事(領春秋館事) 河崙 (河崙), 知春秋館事(知春秋館事) 流管 (柳觀) 等과 함께 『太祖實錄』의 編纂을 始作했다.

이듬해 檢校판한성府使(檢校判漢城府事), 1413年 (太宗 13) 藝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을 거쳤으며 [5] , 1418年 (世宗 卽位年) 議政府贊成社(議政府贊成事), 이듬해 판友軍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로 致死(致仕)했다.

1434年 (世宗 16) 拙했으며, 諡號는 문정(文定)이다. [2]

著書 [ 編輯 ]

  • 《校은집》(郊隱集)

各州 [ 編輯 ]

  1. 『朞年偏枯』·『考慮列朝登科錄』에 享年 84歲로 記錄되어 있다.
  2. 『世宗實錄』
  3. 『太祖實錄』
  4. 『定宗實錄』
  5. 『太宗實錄』
前任
이귀령
第26代 판한성府使
1411年 陰曆 11月 19日 ~ ?
後任
변계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