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헌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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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헌충
張獻忠
第1代 大暑 皇帝
在位 1644年 2月 9日 ~ 1646年 12月 20日
後任 손可望
大暑王
在位 1643年 ~ 1644年
이름
장헌충
張獻忠
身上情報
出生日 1606年 9月 18日 ( 1606-09-18 )
出生地 明나라 陝西省 儒林視 정변현
死亡日 1647年 1月 2日 ( 1647-01-02 ) (40歲)
死亡地 鉏나라 四川省 聖徒 에서 戰士
正當 無所屬
王朝 鉏나라
家門 鉏나라
配偶者 皇后 1名, 後宮 1名
宗敎 佛敎

장헌충 (張獻忠, 1606年 9月 18日 ~ 1647年 1月 2日)은 中國 明末淸楚 時期 農民 叛亂軍 指導者이다. 後에 泗川 에서 大暑國 을 세우고 皇帝를 自稱하였다.

韓國의 《朝鮮王朝實錄》에는 그의 이름이 장현충 (張顯忠)으로 記載되어 있다. [1]

生涯 [ 編輯 ]

섬서(陝西) 沿岸位(延安衛) 流水간보(柳樹澗堡) [2] 出身으로 元來는 軍的(軍籍)에 올라 있었던 것을 法을 어겨서 除籍되었다. 숭정(崇禎) 3年( 1630年 ) 王家尹(王嘉胤)李 亂을 일으켰을 때 未知縣(米脂縣)에 있던 장헌충은 이에 呼應하고 팔大王(八大王)을 自稱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영상(高迎祥) 麾下로 來投해서 東쪽으로 進出하였고 산서(山西)와 河南(河南)을 돌며 戰鬪를 벌였다.

明末淸楚의 情勢 속에서 이자성 (李自成)의 麾下에 投身한 장헌충은 스스로를 裝備 (張飛)의 後裔라 내세웠고, 後날 이자성과의 反目으로 고영상의 죽음을 招來하였고 黃河(黃河) 流域으로 進出한 이자성과 갈라서서 長江(長江) 流域으로 進出하여 湖南(湖南)과 江西(江西)에서 泗川(四川)으로 侵入하여 獨立 勢力을 形成하였다. 숭정 10年( 1637年 )에 名의 總兵官(總兵官) 진양옥 (秦良玉) 部隊의 攻擊으로 장헌충의 軍은 큰 損害를 입고 本人도 죽을 뻔하였다.

한때 官軍에 降伏하여 숭정 11年( 1638年 )에는 湖北省(湖北省) 곡성현(穀城縣)의 部長(副將)李 되어 王家下(王家河)에 駐屯하였고 이듬해인 숭정 12年( 1639年 )에는 다시금 明朝에 對한 反旗를 들어 四川省 境界 附近에서 戰鬪를 벌였다. 숭정 13年( 1641年 ) 장헌충은 襄陽 (襄陽)을 擊破하고 名義 皇族인 양왕(襄王) 駐匿名(朱翊銘)을 죽이고, 1643年 武昌(武昌)을 據點으로 '大暑王(大西王)'을 稱하였다.

스스로를 辰王(秦王)이라 稱하고 泗川으로 向한 장헌충의 軍은 숭정 17年( 1644年 ) 8月 9日에 泗川의 聖徒部(成都府)를 陷落시켰으며, 순무(巡撫) 龍文觀(龍文光)과 皇族 觸王(蜀王) 住持朱(朱至澍) 및 그 아내는 모두 自決하였다. 장헌충은 60萬 大軍이라 稱하며 四川省의 大部分을 制壓하였고 8月 15日에는 聖徒部를 據點으로 大暑皇帝(大西皇帝)를 稱하고 대筍(大順)이라 開院하며 성도를 書經(西京)으로 삼았다. 大暑政權은 名 王朝의 殘存 勢力도 倂合하고 命 王朝의 官制를 본떠 官僚 組織을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그리스도교 傳道를 위해 泗川에 와 있던 예수회 宣敎師 루이스 不길로(Louis Buglio, 中國名 二流社利類思)와 가브리엘 데 마갈량이스(Gabriel de Magalhaes, 中國名 안文士安文思)가 장헌충의 傘下로 들어갔다. [3] 韓國의 『朝鮮王朝實錄』 仁祖 23年( 1645年 ) 死亡한 소현세자 의 죽음에 調劑한 것에 辭意를 표하고 겸해서 새로운 世子 의 冊封을 要請하기 위해 請으로 派遣되었던 州廳舍의 書狀官으로 歸國한 조수익(趙壽益)은 當時 장현충(張顯忠, 장헌충)과 이자성(李子成)李 섬서(陝西)·私薦(四川) 等地를 占據하고 있으며(다만 李子晟은 5月에 死亡하였다) 顯忠의 病勢(兵勢)가 自省보다 낫다고 傳하고 있다. [4]

장헌충은 以前부터 泗川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섬서로 移動하기 위해서는 軍事的인 要衝地였던 韓中(漢中)을 占領해야 할 必要가 있었다. 脣齒 (順治) 2年( 1645年 )에는 最小 두 次例에 걸쳐서 韓中 攻擊을 試圖하였으나, 當時 韓中을 占據하고 있던 靑軍은 이를 여러 次例 擊破하였다. 이를 契機로 장헌충이 實行했던 政權 內部 團束 强化는 커다란 抵抗을 불러왔고, 泗川 各地에서 장헌충에 對한 叛亂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叛亂은 政權의 內部 崩壞로 이어졌고, 大暑 政權 上層部 大部分이 장헌충에 依해 殺害되기에 이른다.

李子晟이 滅亡하고 勢를 키운 靑軍의 壓迫으로 순치 3年( 1646年 ) 8月 4日 장헌충은 泗川을 버리고 故鄕인 섬서로 가기 위해 署經을 떠났으나 섬서에는 이르지도 못하고 10月 20日에 염정현 (鹽亭縣) 鳳凰山(鳳凰山)에서 淸의 肅親王(肅親王) 好惡거 (豪格)의 軍勢와 交戰 中에 射殺되었다. 西京을 떠났을 때에도 7百 名 程度밖에 되지 않았던 大暑君은 이 무렵에는 25名밖에 남지 않았다. 한便 장헌충 死後 그의 殘黨들은 脣齒 16年( 1659年 )에 重慶(重慶)李 陷落될 때까지 抵抗을 繼續하였다.

圖囑(屠蜀), 泗川에서의 大虐殺 [ 編輯 ]

많은 記錄에서 장헌충은 殘虐한 殺戮을 즐겼으며 「圖囑」(屠蜀) 또는 「刀泉」(屠川)이라 불리는 無差別 虐殺로 泗川의 人口를 急激히 감소시켰다고 적고 있다. [3] 萬曆 6年( 1578年 ) 人口 310萬 2073人 [5] 이었던 泗川은 靑 康熙 24年( 1685年 )에는 18,090人으로 人口가 줄어 있었다. [6] 때문에 淸 王朝 初期 1671年 에서 1776年 까지 湖北省(湖北省) ? 湖南省(湖南省) ? 廣東省(廣東省) 等地에서 數百萬 名의 住民을 四川省으로 이주시켰다. 이를 豪光전사천(湖廣塡四川)이라 한다. [7] 오늘날의 쓰촨 地域 사투리인 서남관火(西南官話)가 베이징(北京)의 푸퉁화(普通話)에 가까운 것도 이때 장헌충에 依해 泗川 地域의 人口가 거의 絶滅 直前에 몰렸기 때문에 古代 泗川人들이 壞滅되어 버렸기 때문일 可能性이 크다고 解釋되고 있다.

日本의 歷史學者 아사미 마사카즈(?見雅一)는 장헌충에 關한 史料는 大部分이 後代의 것들임을 指摘하며 장헌충 當時의 史料로써 다음과 같은 資料들을 擧論한다. [3]

  • 장헌충을 섬겼으며 大暑 政權의 崩壞까지 모두 目擊했던 포르투갈 出身의 예수회 宣敎師 가브리엘 드 마갈량이스(Gabriel de Magalh?es, 中國名 안文士安文思)가 로마 敎皇廳에 보낸 1647年 5月 18日子 『私薦 性과 그리스도 敎會의 破壞와 損失에 對하여, 그리고 그 땅에서 루이스 브리오와 가브리엘 데 마갈량이스가 年金의 身世가 된 것에 對한 報告書』 [8]
  • 聖徒(成都) 대자사(大慈寺)에서 벌어졌던 大虐殺의 生存者로 알려진 舊亮直(歐陽直)李 著述한 『具孃氏遺書』(歐陽氏遺書) [9]
  • 1642年 5歲의 나이로 當時 華陽縣令(華陽縣令)으로 赴任한 아버지와 함께 泗川으로 와서 體驗한 것을 土臺로 審順位(沈荀蔚)가 著述한 『촉난서략』(蜀難?略)

中國側의 史料는 淸 王朝의 占領地에서의 恥部(例를 들어 양저우에서 벌어졌던 열흘 동안의 大虐殺)나 淸 王朝를 批判하는 內容을 記錄하고 있지 않다는 點에서 史料의 信憑性에 對한 批判을 避할 수 없으나, 아사미 마사카즈는 이러한 批判에서 比較的 자유로운 포르투갈 宣敎師 마갈量이스의 報告書를 土臺로 中國側의 同時代 資料나 다른 史料를 比較 檢討한 끝에 다음과 같은 結論을 내렸다.

  • 마갈量이스의 報告書는 事實 經過를 敍述한 것이며, 매우 正確한 것이다.
  • 『具孃氏遺書』는 事實 經過에 對한 技術이 斷片的이지만 그 亦是 正確하다.
  • 『基史略』(紀事略)은 날짜 記載에 多少 錯誤가 있기는 하지만 比較的 信憑性이 있으며, 具孃職과 비슷한 立場에 있었던 人物이 著述한 것으로 여겨진다.
  • 『촉기』(蜀記)에 對해서는 날짜가 大部分 錯誤가 있고 事實 經過도 大部分 맞지 않으나, 一部 內容이 『具孃氏遺書』 以上의 詳細한 技術을 담고 있고 그 內容이 마갈量이스의 報告書와도 一致하는 點에서 장헌충에 가까운 立場에 있었던 自家 著述하였을 可能性이 크다.

「圖囑」이라 指稱되는 장헌충에 依한 泗川에서의 大虐殺 事件이 實際 歷史的 事實인가에 對해서는, 實際로 相當한 規模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틀림없지만 泗川을 侵攻했을 때의 破壞, 大暑 政權 內部에서의 叛亂에 對한 鎭壓, 그리고 泗川을 떠나 섬서(陝西)로 向할 때의 組織的인 虐殺의 3段階로 分類할 수 있다. 이러한 大虐殺이 可能했던 要因으로써는 大暑 政權의 成立 當時 장헌충이 相當한 支持를 받고 있었으며 그런 까닭에 그를 中心으로 하는 統治機構가 整備될 수 있었다는 것을 들었다. 卽 大暑 政權의 泗川에서의 大虐殺은 도리어 그러한 大虐殺을 벌일 수 있을 程度의 體系的인 統治組織과 굳건한 支持力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포르투갈 宣敎師의 報告書 [ 編輯 ]

다음은 當時 포르투갈 의 宣敎師로 中國을 訪問했던 마갈量이스의 報告書에 記述된 泗川에서의 虐殺에 對한 記錄들을 모은 것이다. [3]

『暴君(장헌충)은 곧바로 그 크고 人口도 많은 都市(成都)를 原住民이 없는 無人之境의 孤立 狀態로 바꿔버렸다. 周邊을 감싸고 돌던 江은 붉게 물들어 마치 물이 아니라 피 같았다. 게다가 屍體로 가득 차서 바다까지 흘러들어, 아주 數量이 많은 江이었음에도 不拘하고 며칠 동안 航海하는 것이 不可能했다. 江에 隣接한 都市와 마을은 이런 殘虐함에 怯을 먹었고 그 理由를 理解하지 못했다.』 [10]

『注目할 것은 이 暴君이 管理 및 이들에 關한 다양한 事項과, 生員 稱號에 關한 모든 事項에 對해 갖고 있던 憎惡이다. 이 繼母와 같은 邪惡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그는 公的인 布告에 따라 다음과 같이 命令했다. "大大的으로 過去를 열어 그의 宮闕과 王國을 맡을 사람들을 뽑고 싶으니, 過去를 準備하는 者이거나 이미 官職을 맡고 있는 者이거나 關係없이 모든 巨人(擧人)과 모든 生員은 首都의 宮廷으로 와야 한다." 이 사람들은 이에 魅惑되었고, 官吏의 名譽에 對한 貪慾 때문에 이 暴君이 知識人을 對象으로 저지른 處刑과 殘虐한 行爲를 알고 있었음에도, 모두 그에게 服從하기에 餘念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붓이 아닌 칼을, 먹이 아닌 그들의 피를 주었다. 그들에 對한 不信으로 그들을 '그릇된 思想의 所有者'라 불렀으며, 한 사람도 容恕하지 않고 總 1萬 3千 名을 斬首하였다. 』 [11]

『暴君은 自身의 모든 軍隊를 이끌고 떠났고 어른도 아이도, 少年도 老人도 죽였다. 그는 都市와 거리와 마을을 모두 태워버렸고 그 結果 모든 것이 잿더미로 變했고 單 한 채도 남지 않았다.』 [12]

『1年 後 우리가 타타르人(靑 王朝의 管理)과 함께 돌아왔을 때 泗川 誠意 여러 땅을 다녀보니, 그곳은 한때 사람이 居住하던 땅이 아니라 이미 野生 숲으로 變하여, 사람이라기보다는 虎狼이나 다른 猛獸의 우리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해 보였다.』 [13]

『觸壁』(蜀碧)의 記錄 [ 編輯 ]

장헌충의 叛亂 記錄 가운데 하나인 『觸壁』(蜀碧)이라는 文獻에 따르면, 장헌충은 「私薦 사람은 아직 죽지 않은 것인가. 내 손으로 얻었으니 내 손으로 없애버릴 것이다. 單 한 사람이라도 남을 위해 남겨두지는 않겠다」고 宣言하였다고 하며, 또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던(즉 아무도 죽일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던) 어느 날 밤에 문득 「오늘 밤에는 죽일 놈이 하나도 없단 말이냐?」라며 自身의 妻와 愛妾 數十 明과 子息까지 죽였다.

장헌충의 虐殺 方法은 다음과 같았다.

  • 포노(?奴) - 손발을 切斷하기
  • 邊地(?地) - 등줄기를 두 동강 내기
  • 설秋(雪鰍) - 空中에서 等을 窓으로 꿰뚫기
  • 관희(貫?) - 아이들을 불타는 城에 가두고 태워죽이기

장헌충의 司祭者(四弟子) [ 編輯 ]

서 太祖 高賑濟 장헌충 이정국 애能記 손可望 幽門垂 의 師傅(師父)이자 主君(主君)이기도 하였다.

各州 [ 編輯 ]

  1. 朝鮮王朝實錄 固有名詞用語集(國史編纂委員會)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 오늘날의 中華人民共和國 [[산시省 (陝西省)|]](陝西省) 위린視 (楡林市) 딩볜현 (定??) 學蘭香(?灘?) 有居村(劉渠村).
  3. ?見雅一、「 ??史料を通してみた張?忠の四川支配 」『史?』 1990年 59? 2/3? p.49-91, 三田史??
  4. 仁祖實錄 46卷, 仁祖 23年 12月 23日 新築 1番째 記事
  5. 『명회요』(明會要) 50卷
  6. 佳境(嘉慶) 『泗川도지』(四川道志) 卷17.
  7. 신경진, 『古刹名: 中國都市 이야기』, 文學동네, 2013
  8. Gabriel de Magalh?es(安文思),Archivum Romanum Societatis Iesu,Jap.Sin.127,ff.1-35.Relacao da perda e destruicao da Provincia e Christandade de Su chu?n,e do que os Padres Lus Bulhio,e Gabriel de Magalhaes passarao em seu captivero.(로마 예수회 文書館 所藏)
  9. 『觸壁』(蜀碧) 卷3
  10. Jap.Sin.127,ff.11.
  11. Jap.Sin.127,ff.12v.
  12. Jap.Sin.127,ff.15.
  13. Jap.Sin.127,ff.15.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