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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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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李五德
作家 情報
出生 1925年 11月 14日 ( 1925-11-14 )
日帝强占期 慶尙北道 永川郡
死亡 2003年 8月 25日 ( 2003-08-25 ) (77歲)
大韓民國 忠淸北道 忠州市
國籍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學歷 慶尙北道 盈德高等農林學校 卒業
活動期間 1954年 ~ 2003年
장르 兒童文學, 童話, 同時, 隨筆
受賞 第2回 韓國兒童文學像
第3回 단재상

이오덕 (李五德, 1925年 11月 14日 ~ 2003年 8月 25日 )은 大韓民國 敎育者이자 兒童文學家 이다.

生涯 [ 編輯 ]

慶尙北道 永川郡 현서면 (現在는 靑松郡 에 編入)에서 農事꾼 아들로 出生하여 慶尙北道 靑松郡 에서 成長한 그는 敎職 生活을 하던 中 1954年 〈少年世界〉라는 雜誌에 《진달래》라는 童詩가 當選되어 첫 登壇하였다. 以後 童話作家로 轉向하였다.

農事를 지으면서도 冊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아버지의 影響으로 어려서부터 冊을 좋아했으며, 普通學校 를 卒業한 後 가난해서 2年 間 農事를 짓다가 돈이 안 드는 2年制 農業學校에 들어갔다.

그는 學窓 時節 봄, 여름, 가을에는 밭 매고 菜蔬를 가꾸었으며, 비가 오면 敎室에서 工夫했다. 農業學校에서 그는 “땀 흘리며 일하는 것과 밥을 해서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을 배웠다.

卒業 後 영덕군청에 事務員으로 일하다가 1944年 敎員試驗에 合格하여 [1] 靑松 의 不動初等學校에 赴任했다. 1986年 까지 43年 동안 初等學校 敎師와 校監, 校長을 지내면서 童話와 童詩를 쓰고, 韓國 말과 글의 아름다움을 發見하고 다듬는 일을 해서 우리말 지킴이로 불렸다. 1954年 兒童文學家로서 李元壽 先生이 내던 <<少年世界>>에 同時 <진달래>를 發表하면서 登壇했다. 主로 農村 地域에 勤務하면서 어린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고 이를 위한 敎育을 硏究 實踐해 왔다. 漢字말과 外來語, 外國語의 거센 물결 속에서도 아주 고집스레 韓國말을 지키고 되살리는 일에 平生 동안 온몸을 바쳤다.

밖에서 들어온 잡스런 말을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 첫째는 中國글字말이요, 둘째는 日本말이요, 셋째는 西洋말이다. 이 세 가지 바깥말이 들어온 歷史도 中國글字말-日本말-西洋말의 次例가 되어 있는데, 中國글字말은 가장 오랫동안 우리 말에 스며든 歷史를 가지고 있지만, 日本말은 中國글字말과 西洋말을 함께 끌어 들였고 只今도 끊임없이 끌어들이고 있다는 點에서 그 깊은 뿌리와 뒤엉킴을 잘 살펴야 한다. 正말 이제 우리가 精神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넋이 빠진 겨레 가 될 地境에 이르렀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겠다.
 
— 代表作〈우리글 바로쓰기〉의 들어가는 말 [2]

言語民衆主義者, 言語民族主義字로, 어린이詩集이나 批評集 等 生前에 50卷이 넘는 冊을 펴냈다.

知識人이나 學生들이 冊床 앞에 앉아서 말을 만들어내는 것은 官廳의 官吏들이 제멋대로 말을 만들어내는 것과 다름없이 겨레말을 어지럽힌다. [3]

오늘날 우리가 그 어떤 일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外國 말과 外國 말法에서 벗어나 우리말을 살리는 일이다. 民主 統一 이고 그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을 하루라도 빨리 이루는 것이 좋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3年 뒤에 이루어질 것이 20年 뒤에 이루어진다고 해서 그 民主와 統一의 바탕이 아주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말이 아주 變質되면 그것은 永遠히 돌이킬 수 없다. 한番 잘못 병들어 굳어진 말은 政治 로도 바로잡지 못하고 革命 도 할 수 없다. 그것으로 우리는 끝장이다. 또 이 땅의 民主主義는 남의 말과 남의 글로써 創造할 것이 아니라 우리말로써 創造하고 우리말로써 살아가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면서, 시골할머니度 잘 알 수 있는 말, 어린아이들도 누구나 알아듣는 말을 지키고 살리고 가꾸려고 하였다. [5] 또한 生前에 "아이들을 위해 썼다는 詩가 예쁘장하고 귀여운 것이 되지 못해서 한마디 해야겠습니다. 나는 緋緞 같은 말로 아이들을 눈가림하여 속이는 것이 싫습니다. 童詩가 沙糖菓子나 장난감이 아니고, 더욱 커다란 感動스런 世界를 創造하는 詩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나로서는 오늘날 이 땅 아이들의 참모습을 正直하고 眞實하게 노래하면서 그들의 靈魂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6]

아이들을 試驗 點數 따는 機械로 만들라는 指示와 命令을 밀어내고, 아이들이 참답게 클 수 있도록 삶을 느끼게 하고 自然을 부대끼게 했다. 아이들한테 글쓰기를 가르치고 그림그리기를 함께하고 노래를 즐겁게 부르면서 自然을 보여주었고, 父母들이 하는 일을 느끼게 했고 이웃사람들과 마을을 돌아보도록 했다. [5]

親한 사람 [ 編輯 ]

어린이 文學家 李元壽 와 硏修모임 같은 곳에서 가까이에 모셨다. [5] 1970年 代 初 〈강아지똥〉을 읽은 先生은, 安東 에 蟄居하던 권정생 作家를 만나러 갔다. 서로 통하자 마자 12살의 나이差異에도 不拘하고 平生知己가 된 두 作家는 어린이文學에 對한 苦悶, 世上에 對한 省察, 不合理한 現實에 對한 憤怒 等을 서로 慰勞하고 북돋웠다. 事後 遺言에 따라 권정생 作家의 〈밭 한 뙈기〉와 이오덕 作家의 〈새와 산〉이 적힌 是非가 무덤가에 마주보고 서있다. 2003年 가을 두 作家가 쓴 便紙가 冊으로 나왔다.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 (한길사) [7]

敎職을 떠나다 [ 編輯 ]

敎育行政의 지나친 干涉과 劃一主義, 入試進學 出世主義를 批判하는 생각으로 敎育當局의 미움을 받아 18番이나 學校를 옮기면서도 敎育現場을 지켰다. 1986年 에 아이들 便에서 敎育行政에 對해 批判하는 글을 쓴 理由로, “ 大韓民國 全斗煥 軍部政權이 하도 發惡을 하고 거기에 시달리다 보니까 그만 몸서리가 나서 [8] ” 스스로 學校를 떠났다. 1986年 마지막 勤務地는 慶北 星州郡 大暑初等學校였다. 以後 社會의 敎師로서 “知識人들의 有識病”을 고치기 위해 大學校에서 글쓰기 講義를 하기도 했으며, “우리말 硏究所”를 세워 韓國 말과 글을 바로 쓰는 運動을 펼치기도 했다.

1987年 全國敎師協議會, 1989年 全國敎職員勞動組合 (全敎組) 設立 運動, 敎育·學校 民主化 運動 等 現場에서 벌어진 民主敎育 運動에 좋은 影響을 끼쳤으며, ‘ 敎師 勞動者 가 아니라 敎育者’라는 말에 反駁했다. 참敎育을 하려면 아이들이 즐겁게 일(놀이)을 하도록 해야 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先生님들도 아이들과 같이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敎師는 基本的으로 ‘일하는 사람’이라고 主張했다. 다만, 敎師는 自身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 敎育運動을 하는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著書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삶과 믿음의 敎室>, <이땅에 살아갈 아이들 위해>는 그가 잘못된 敎育風土를 바로잡으려 苦悶한 痕跡이다. [1] [5]

이오덕 先生은 일하는 사람들이 쓰는 日常의 言語野 말로 가장 자연스럽고 올바른 것이라는 생각으로 特히, 勞動現場에서 땀 흘려 일하는 것이 바른 삶을 살아가는데 반드시 必要함을 힘주어 말하곤 했는데, 그 例로 일하는 사람들의 글인 《 작은책 》에 "글은 有識한 사람들이 쓰는 것이라고 흔히 잘못 알지만 勞動하는 사람들의 삶이 담긴 글이 참글"이라고 했다. “우리 文章 쓰기”, “우리 글 바로 쓰기” 執筆과 共同代表를 지냈다. 또한 “우리말 살리는 겨레 모임” 等에서 活動하면서 韓國 말의 誤用을 叱責하고 '한글만 쓰기'(한글 專用)에서 더 나아가 '우리말 살려쓰기' 運動을 벌이기도 했다. 外國語의 밀물로 韓國말이 退化하는 것을 두고 “ 民衆 들이 다 쉽게 알아듣는 말을 써서는 知識人 의 權威가 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權威主義 때문” 이라며 批判했다.

死亡 [ 編輯 ]

退任 以後 京畿道 果川 에서 살았으나, 1999年 警 持病인 腎臟炎과 胃炎이 惡化하자 忠淸北道 忠州市 신니면 수월리 自宅으로 居處를 옮겼다. 2003年 8月 25日 78歲로 自宅에서 持病으로 死亡했으며, “집안 사람들 만으로 簡素하게 葬禮를 치르고, 訃告는 葬禮 後에 알리며, 一切의 賻儀金과 弔花도 받지마라”고 遺言했다. [4] 2003年 8月 19日 아침 우리말과 아이들을 사랑했던 先生은 病室에서 詩 한 數를 마지막으로 남겼다.

한 달 동안 病院에서/ 밤낮 노래를 들었다./ 며칠 뒤에는 고든朴골 病室로 옮겨/ 햇빛 환한 寢臺에 누워/ 새소리 바람소리 벌레소리를 듣는다./ 아 내가 멀지 않아 돌아갈 내 本鄕/ 아버지 어머니가 기다리는 곳/ 내 어릴 적 동무들 자라나서 사귄 벗들/ 모두모두 기다리는 그 곳/ 빛과 노래 가득한 그 곳/ 그리고 보니 나는 벌써/ 그곳에 와 있는 것 아닌가/ 그곳에 半쯤 온 것 아닌가/ 나는 가네 빛을 보고 노래에 실려
 
— 빛과 노래

이오덕學校 [ 編輯 ]

이오덕學校는 忠州市 신니면 광월리에 있는 代案學校다. 이오덕 先生이 이끌던 社團法人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에서 始作됐다. 硏究會는 1983年 京畿道 果川에서 現職 敎師 47名이 放課 後에 모여 글쓰기 硏究를 하던 모임이다. 이오덕 先生은 學校를 退職한 뒤 무너미 마을로 移徙와 글쓰기 硏修院을 짓고, 이를 中心으로 마을共同體를 꾸리고 있었다. 그러다 學校를 세우기로 決心하고 2000年 學校定款을 만들었는데 뜻밖에 癌 宣告를 받고 3個月 만에 世上을 떠났다.

現 校長인 맏아들이 先親의 뜻을 이어 2003年 學生 30名으로 學校 門을 열었다. [9]

經歷 [ 編輯 ]

作品 [ 編輯 ]

어린이詩集 [ 編輯 ]

詩集 [ 編輯 ]

  • 2005年 〈무너미마을 느티나무 아래서〉 (한길사)
  • 2005年 〈고든朴골 가는길〉 (실천문학사)

隨筆 [ 編輯 ]

  • 2004年 〈나무처럼 山처럼〉1,2 (山처럼)

文學批評 [ 編輯 ]

敎育批評 [ 編輯 ]

  • 1986年 〈이 땅에 살아갈 아이를 위해〉
  • 1986年 〈우리 언제쯤 참先生 노릇 한番 해볼까〉 ( 한길사 )
  • 1990年 〈참敎育으로 가는길〉 (한길사)
  • 1977年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 1978年 〈삶과 믿음의 敎室〉 ( 한길사 )
  • 2005年 〈내가 무슨 先生 노릇을 했다고〉 (삼인)

어린이 글 모음집 [ 編輯 ]

  • 1979年 〈우리도 크면 農夫가 되겠지〉 (청년사)
  • 1984年 〈우리 班 순덕이〉, 〈理事 가던 날〉, 〈나도 쓸모 있을걸〉, 〈웃음이 터지는 敎室〉, 〈우리 집 토끼〉, 〈참꽃 피는 마을〉
  • 1986年 〈封止 낳는 아이들〉, 〈産으로 가는 고양이〉
  • 1998年 〈허수아비도 깍窟로 德새를 넘고 〉

各州 [ 編輯 ]

  1. “이오덕” . 이화듀. 2003年 10月 1日 . 2010年 8月 15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 이오덕 (1993年 1月 25日). 《우리글 바로쓰기》. 한길사. 17쪽. ISBN   8935600075 .  
  3. 韓國日報 (2006年 4月 25日). “이오덕의 우리글 바로쓰기” . 韓國日報. 2007年 8月 18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8月 14日에 確認함 .  
  4. 박도 (2003年 8月 26日). “겨레의 큰 스승 이오덕 先生 고이 잠드시다” . 오마이뉴스 . 2010年 8月 14日에 確認함 .  
  5. 최종규 (2006). 《지난 두 해 동안 이오덕 先生님에게 배운 것 - 敎育思想家列傳》. 敎育批評. 270쪽.  
  6. l 釜山日報 l 2009.03.28. l 백현충 記者
  7. “이오덕 先生 무덤가에 권정생 ‘是非’ 놓인 까닭은…” . 한겨레. 2003年 11月 14日. 2010年 11月 13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8月 15日에 確認함 .  
  8. “이오덕 先生은 누구?” . 한겨레. 2003年 5月 26日 . 2010年 8月 15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9. 오마이뉴스(市民記者),. " 우리는 몸으로 생각할 수 있는 아이를 키웁니다 " . OhmyNews . 2020年 4月 9日에 確認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