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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가키 마토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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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가키 마토메
宇垣纏
出生地 日本 오카야마현 오카야마시
死亡地 日本 오키나와縣
服務 日本帝國 海軍
服務期間 1912年 ~ 1945年
最終階級 중장 中將(中?)
指揮 聯合艦隊 參謀長
第1全代 司令官
第5航空艦隊 司令長官
主要 參戰 第2次 世界 大戰

우가키 마토메 ( 日本語 : 宇垣纏 , 1890年 2月 15日 ~ 1945年 8月 15日 )는 日本 帝國 海軍 의 軍人으로, 오카야마현 出身者이다. 太平洋 戰爭 當時 階級은 所長으로, 聯合 艦隊 參謀長이었다.

人物 [ 編輯 ]

그의 日記 "前草綠"은 太平洋 戰爭 의 一級 資料가 실려있는 高級資料로 評價되고 있다. 어릴 적부터 그는 自尊心이 높은 人物로, 上官에게도 그다지 敬禮를 잘하지 않고, 同期들 中에서도 成績이 自己보다 아래인 者는 無視했으나, 下級者로부터 敬禮를 받으면 "五友"하며 自慢에 차 있어, 海軍內에서는 그다지 評이 좋지 못했다고 한다.

이에 그의 傲慢한 表情에 "黃金假面"이라는 別名이 있을 程度였다.

行跡 [ 編輯 ]

우가키는 對艦巨砲主義者로 航空力을 無視했다. 그러나 聯合艦隊 司令長官人 야마모토 異所로쿠 (山本五十六)의 參謀長으로 就任하자, 對艦거抱主의 思想을 버리고 야마모토의 主張에 同調하며 眞珠灣 攻擊을 許諾하지 않는 軍令部에 對해 說明과 說得을 擔當했다고 한다.

미드웨이 海戰市 航空母艦 4隻을 비롯해 損害가 커져가자, 大敗를 冷靜히 收拾하여 危機 管理 能力이 뛰어난 人物로, 參謀로서의 能力은 높았지만, 指揮官으로서의 能力은 떨어진다고 批判하는 評도 많다.

海軍 在職時 事故로 負傷을 當해, 治療 後 聯合艦隊 第1司令長官과 마리아나 海戰 , 레이테 灣 海戰 에 參加했으나, 不充分한 情報와 事態把握處理에 늑장이어서, 指揮官으로는 無能할 程度로 悽慘한 敗北를 當한다.

以後 그는 가미카제 自殺 特攻隊 養成에 힘써, 最後의 한 名까지 祖國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主張한다. 하지만, 治亂과 오키나와 方面의 가미카제 部隊를 指揮하던 中, 1945年 8月 15日 에 天皇의 終戰 宣言을 듣게 된다.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말한 直屬上官인 오자와 지사부로 (小澤治三郞) 中將에게 特供攻擊 敢行을 主張, 그러나 애初에 가미카제를 反對했던 오자와 中將이 이를 默殺해버렸고, 自己 意見이 默殺되자 오자와를 無能한 자라 辱하고는, 自身의 麾下 11名의 部下들을 이끌고 오키나와를 출격해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게 된다. 이 事實을 알게 된 오자와 中將은 激怒했다.

1945年 8月 15日 이른 아침, 그는 艦上爆擊機 5基를 準備하라고 部下인 나카쓰루 大尉에게 命한다. 當時 特供氣는 普通 6基에서 11期가 출격했는데 우가키가 5機만 準備하라고 指示하자 다른 部下들이 全員같이 가겠다하여 正午에 發表된 天皇의 降伏 放送을 듣고도 "前初期" 마지막을 쓴 後 나카츠루 大尉가 操縱하는 彗星 43刑期에 올라 타 部下 11名과 함께 오키나와를 出擊한다.

出擊 前, 그는 웃는 얼굴로 最後의 寫眞을 찍고 中將 階級의 軍服을 입고 날아올랐다. 그 날 저녁, 오키나와 海岸 駐屯 美軍 텐트 가까이 1基의 日本紀가 墜落했다. 안에는 操縱士로 보이는 젊은 將兵과 飛行服이 아닌 服裝의 壯年 男子 1名이 正坐한 流體로 發見되었다.

前 後 [ 編輯 ]

出擊 前의 寫眞으로 判斷해 이것이 우가키 中將이라 보는 意見이 많았는데, 戰艦이 아닌 텐트쪽으로 突進한 것은 停電命令을 違反할 수 없는 나카쓰루 大尉가 일부러 墜落했다는 말도 있고, 안에서 短刀가 發見되어 自決했다는 意見도 나왔는데 只今까지도 日本에서는 이를 公式 確認하지 않고 있다. 그 때문에 正確한 死亡 原因과 地點을 모른 채, 或者는 그가 敵艦에 突入해 죽었다는 主張까지 存在하고 있다.

이 때문에 우가키는 포츠담 宣言 受諾 後 正式 命令을 받지 않고, 特供을 行하였기에 戰士로 取扱되지 않아 大將으로 追敍되지 못했다. 또 停電命令을 違反한 海軍刑法 31條를 어겼다는 意見이 大多數였다.

또 天皇의 放送 後 출격해 兵士들의 犧牲을 强要한 點도 遺族들에게 非難의 對象이 되었다. 聯合艦隊司令長官인 오자와 지사부로 는 "自決하려면 혼자 하지 왜 젊은이들을 끌어넣나"라고 激怒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는 死後에도 야스쿠니 神社 에 들어가지 못했으나, 只今은 合祀가 이루어져 우슈칸의 常設 展示場에 우가키를 取扱한 코너가 存在한다.

또 그의 出身地인 오카야마 護國 紳士 境內에 그와 部下의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그의 部下 나카쓰루 大尉의 아버지는 왜 그가 아들을 끌고 갔는지 모르겠다며 이를 갈며 分解했는데, 그 後 遺族들의 NHK 放送 證言에 依하면, 晩年에 우가키의 짓을 "어쩔 수 없는 行動"이라며 挫折했다고 傳한다.

같이 보기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