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軍 裝甲車에 依한 中學生 壓死 事件

事故車와 같은 種類의 裝甲車
M88A2 장갑차
M88A2
M88A1 장갑차
M88A1

美軍 裝甲車에 依한 中學生 壓死 事件 或은 洋酒 國도 事件 ( 英語 : Yangju highway incident )은 2002年 6月 13日 當時 조양중學校 2學年이던 신효순, 심미선이 京畿道 楊州郡 광적면 효촌리 所在 國家支援地方道 제56호선 에서 갓길을 걷다 駐韓 美軍 美 步兵 2師團 大隊 戰鬪力 訓鍊을 위해 移動 中이던 副校 運搬用 裝甲車 에 깔려 現場에서 숨진 事件이다. 洋酒 訓鍊 事故 ( 英語 : Yangju training accident ) 或은 國家支援地方道 제56호선 事件 ( 英語 : Highway 56 Accident )으로도 알려져있다.

事件 發生과 進行 [ 編輯 ]

2002年 6月 13日 은 木曜日이며 地方自治團體長 選擧 가 있는 날이였다. 광적면 효촌2里에 살고 있던 신효순과 심미선(當時 14살)은 國道를 따라 언덕을 넘어 덕도리 쪽으로 300m만 가면 있는 親舊(김다희)가 사는 草家집이라는 이름의 食堂에 모여 議政府 에 놀러가기로 하였다. 學生들은 卒業生이 10名(그 中 女學生은 여섯名)에 不過한 효촌初等學校 를 나온 同窓으로, 다음날은 孝順孃의 生日이기도 해서 女學生 다섯名이 모이기로 約束했었다. [1]

事故가 난 길은 片道 1車路(幅 3.3m)에 不過한 地方도 이며, 現場은 法院里(西쪽)와 덕도리(東쪽) 사이의 골짜기로 急傾斜에 曲各地로 南쪽은 山을 깎아 道路를 만들어 別途 印度가 없어 車가 온다면 사람이 避할 곳이 없는 길이다. 西쪽의 法原理에서 한참 내리막을 달려오던 車가 마을 앞에서 갑자기 道路 事情이 바뀌어 오르막이 始作되는데 오른 쪽(南쪽)으로는 山을 끼고 휘어져 올라간다. [1]

이날 낮 10時 30分 頃 두 女學生은 마을을 나와 親舊 집으로 길을 따라 올라가고 있었다. 그 뒤에서는 駐韓 美軍 美 步兵 2師團 44 工兵大隊 所屬 副校 運搬用 裝甲車가 法院里 쪽에서 내려와 若干 왼쪽으로 틀어 막 언덕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車輛 行列은 先頭 案內車輛 1代, 兵力 輸送 裝甲車 , 그 뒤로 事故車輛, 一般 空甁軌道 車輛 3代, 後尾 案內車輛 1臺였다. 이때 맞은便에서 M2/M3 브래들리 機甲 戰鬪車輛 5臺가 덕도리에서 무건리 訓鍊場으로 오고 있었다. 事故가 난 道路의 幅은 3.3m 程度인데 反해 事故車輛의 幅은 3.65m다. 事故車輛이 中央線을 侵犯하지 않으려면 갓길을 걷고 있던 學生을 치지 않을 수 없다. [1]

事故가 난 道路는 印度도 따로 없는 片道 1車線의 좁은 道路로, 住民들은 平素 갓길을 引渡삼아 通行해 왔다. 2002年 6月 13日 事故가 난 以後 遺族들은 "當時 事故 車輛의 너비가 道路 幅보다 넓은 데다 마주오던 車輛과 無理하게 郊行을 試圖했다는 點에서 이番 事故는 이미 豫見된 殺人行爲였다"라고 主張했다.

美軍 當局은 事故 當日 美8軍 司令官의 遺憾의 뜻을 傳하고, 다음날인 6月 14日에는 美 步兵 2師團 參謀長 等이 焚香所를 直接 訪問해 問喪하고, 被害 遺家族에게 各各 慰勞金 100萬원을 傳達하는 等 事故 收拾에 나섰다. 美軍 側은 15日 葬禮式을 치르면 師團長과 面談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約束했으나 葬禮式을 마친 後 美軍 側은 飜譯賞의 失手를 理由로 面談 約束을 破棄하였다.

追慕碑와 現場에서 法院里 方向 國道 모습(追慕碑 附近 人道는 事故 以後에 만들어졌다.)
대체 글자=
대체 글자=
대체 글자=


以後의 處理 過程 [ 編輯 ]

美軍 當局은 7月 3日 運轉兵과 管制甁을 過失致死罪 로 美 軍事法院 에 起訴하는 한便, 라포트 駐韓 美軍 司令官의 謝過를 傳했다. 그와 別途로 大韓民國 檢察 도 關聯 美軍에 對해 自體 調査를 벌이기로 했다. 이는 遺族들이 6月 28日 車輛 運轉兵과 管制甁, 美2師團長 等 美軍 責任者 6名을 業務上 過失致死 嫌疑로 議政府支廳에 告訴하고, 美側의 裁判權 抛棄를 要請한 데 따른 것이다. 하지만 美軍 側은 身邊 威脅을 理由로 檢察의 召喚調査에 應하지 않았다. 法務部 7月 10日 , 史上 처음으로 美側에 裁判權 抛棄 要請書를 보냈다. 그러나 8月 7日 美軍 當局은 “洞 事故가 公務 中에 일어난 事故이기에 裁判權이 美國에 있으며, 이제껏 美國이 1次的 裁判權을 抛棄한 前例가 없다.”라는 理由를 들어 裁判權 抛棄를 拒否했다.

以後 11月 18日 부터 11月 23日 까지 東豆川 캠프 케이시 내 美 軍事法廷에서 열린 軍事裁判 에서 陪審員團은 起訴된 美軍 2名 모두에게 公務를 行하던 中 發生한 過失事故임을 根據로 無罪(not guilty) 評決을 내렸다. 그 後 美軍은 無罪 評決이 있은 지 5日 만인 11月 27日 謝罪 聲明을 發表하였다.

한便 反美示威가 繼續 이어지면서 美國의 高位 官吏들이 直間接的으로 謝罪하였고 조지 워커 부시 大統領은 遺憾을 表明하였다.

北韓 [ 編輯 ]

裝甲車에 犧牲된 두 사람을 2003年 에 平壤 牡丹峯第1中學校에 登錄하고 2005年 에는 名譽卒業狀을 授與하였다. [2]

經過 [ 編輯 ]

미군 장갑차에 의한 중학생 압사 사건은(는) 대한민국 안에 위치해 있다
사고현장
事故現場
美軍 裝甲車에 依한 中學生 壓死 事件
  • 2002年 6月 13日 - 中學生이던 신효순, 심미선이 楊州市 광적면 효촌리 所在 56番 地方道에서 갓길을 걷다 駐韓 美軍 美 步兵 2師團의 M88 裝甲車 에 깔려 死亡
  • 2002年 6月 14日 - 美 步兵 2師團 參謀長 等이 焚香所를 直接 訪問해 問喪하고, 被害 遺家族에게 各各 慰勞金 100萬원 씩을 傳達
  • 2002年 6月 28日 - 캠프 하우즈 部隊長 해롤드 大領 出國
  • 2002年 7月 3日 - 裝甲車 運轉兵과 管制甁을 過失致死罪로 美 軍事法院에 起訴
  • 2002年 7月 10日 - 大韓民國 法務部 는 史上 처음으로 美國 側에 裁判權 抛棄 要請書를 보냄
  • 事故 現場에 追慕碑 建立.

事件 發生 10年 後, 미선 孃의 아버지는 "事故를 낸 美軍도 이젠 便히 지내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沈 氏는 "單純한 事故라고 생각하는데 (美軍이) 애들이 미워서 낸 게 아니지 않나"라며 "얼굴도 모르지만 그 美軍들도 이젠 마음의 짐을 덜고 便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孝順 羊의 父親 申炫秀 氏(58)도 事實上 마찬가지 생각일 것이라고 傳했다. [3]

2012年 5月 李明博 政府 時節, 韓美는 駐韓美軍地位協定(SOFA)에 對한 改正에 合意하고 犯罪 被疑者인 美軍 關係者의 身柄을 起訴 前에 韓國 當局에 引導할 수 있도록 協定 運用을 改正하기로 合意했다. [4]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송평인 記者 (2002年 7月 18日). “生日파티길 두 中學生 軌道車輛에 慘變 顚末” . 東亞日報 . 2012年 5月 2日에 確認함 .  
  2. <平壤 牡丹峯中 卒業生된 孝順ㆍ미선 孃>, 聯合뉴스, 2005年 3月 25日
  3. 조영달 (2012年 6月 4日). ““막내딸 미선, 가슴에 묻은지 10年… 反美團體 政治的 追慕行事 不參”” . 東亞日報 . 2012年 6月 5日에 確認함 .  
  4. “[“米?韓 SOFA 改正…‘起訴 前 身柄引渡’ 可能해져”” . 교도통신. 2012年 5月 23日. 2013年 10月 21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2年 6月 5日에 確認함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