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이름을 가진 文化公報部 次官을 지낸 大韓民國의 言論人에 對해서는
김은호 (1930年)
文書를 參考하십시오.
김은호
(金殷鎬,
日本式 이름:
鶴山殷鎬
쓰루야마 마사시怒氣
,
1892年
6月 24日
~
1979年
2月 7日
)는
大韓民國
의
東洋畫家
,
韓國畫가
이다. 兒名(兒名)은
金孃은
(金良殷)이며 雅號는 ‘이黨(以堂)’이다.
.
作品 및 畫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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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國 畫家로는 드문 北宗畫 系統의 畫家로서 採火(彩畵)를 통하여 韓國의 風俗畫를 새로운 境地로 끌어갔으며, 中國 明代(明代)의 구영(仇英)이나 日本의 우키요에(浮世繪)와도 比肩할 士女度(仕女圖) 形式의 韓國的 畫風을 樹立한 畫家로 評價된다. 그外 彩色畫로서 算數·人物·花鳥 等 다양한 作品世界를 展開시켰고 在來 圖畫署風의 肖像畫도 많이 남겼다. 作品으로 〈香爐(香爐)〉 等이 있다.
[1]
抗日과 親日 論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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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年
3·1 運動
에 參加했다가 逮捕된 적도 있으나, 1920年代 後半
日本
에 留學하여 日本式 彩色畫 技法을 익히면서 親日本籍人 모습을 보이기 始作했다. 즐겨 그린 그림은 〈僧舞도〉 聯作으로 대표되는 美人圖와 新鮮度, 花鳥圖 等이다.
中日 戰爭
勃發 直後인
1937年
에
愛國금차回
의 活動 모습을 담은 〈금차捧納도〉를 製作하여
朝鮮總督府
總督
미나미 지로
에게 贈呈
[2]
하는 等
太平洋戰爭
期間 中 美術界에서 積極的인 親日派로 活動했다.
朝鮮美術家協會
의 日本化部에 參加하여 戰爭 支援을 위한 親日 美術 作品을 審査하거나 展示하는데에도 여러 次例 參與했다.
光復 後에는 뚜렷한 親日 經歷 때문에 大部分의 美術人들이 網羅된
朝鮮美術建設本部
에서 除外되었으나, 以後 다시 美術界의 中心에 復歸했다. 김은호는 일찍부터 後進 養成에 關心을 보이고
후소회
를 통해 弟子를 많이 輩出하여 東洋花壇에서 단단한 人脈을 갖고 있었다.
韻譜 김기창
李 代表的인 金殷鎬의 弟子이다.
[3]
[4]
2008年
民族問題硏究所
가
친일인명사전
에 收錄하기 위해 整理한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美術 部門에 選定되었다. 文化藝術界 人士를 많이 選定하지 않은
2002年
發表
親日派 708人 名單
에도 美術 分野에
심형구
와 함께 包含되어 있으며
2009年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가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705人 名單
에도 包含되었다. 두드러진 親日 履歷과 日本風으로 疑心받는 畫風과 關聯하여, 金殷鎬가 그린
論介
와
춘향
의 影幀을 撤去하자는 主張과 論難이 있었다.
[5]
學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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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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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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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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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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