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주 (1905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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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주
金龍周
出生 1905年 7月 29日 ( 1905-07-29 )
大韓帝國 慶尙南道 咸陽郡 유림면
死亡 1985年 1月 26日 ( 1985-01-26 ) (79歲)
美國 하와이주 호놀룰루 와이키키
性別 男性  위키데이터에서 편집하기
國籍 大韓民國
本館 金海 (金海)
學歷 釜山제이公立商業學校 卒業
職業 企業家 , 外交官 , 政治가
經歷 대한해운公社 社長
전남방직 社長
民主黨 院內總務
民主黨 參議院
전남방직 會長
韓國經營者總協會 會長
한국생산성본부 會長
韓國經營者總協會 名譽會長
馬山大學校 招聘敎授
浦項水産初級大學 特任講師
配偶者 방연숙(三聚 否認)
강정순(離婚 初配)
강신팔(死別 計杯)
子女 4男 1女
宗敎 儒敎 ( 性理學 ) → 佛敎 天主敎 (洗禮名:바오로)
議員 選手 1
正當 無所屬

김용주 (金龍周, 日本式 이름: 金田龍周( 가네다 類슈 ), 號(號)는 해村(海村), 1905年 7月 29日 ~ 1985年 1月 26日 )는 日帝 强占期와 大韓民國의 企業人 利子 政治人 이다. 慶尙南道 咸陽 에서 出生하였고 지난날 한때 慶尙南道 金海 에서 暫時 幼兒期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그 後 慶尙北道 영일 에서 成長하였다. 김창성 前 한국경영자총협회 會長과 金武星 國會議員의 아버지이다.

生涯 [ 編輯 ]

1905年 7月 29日 慶尙南道 咸陽郡 함안면 신관리에 아버지 김재두(金載斗)와 어머니 慶州 金氏 (慶州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용주는 成宗 때 史觀 김일손 (金馹孫)의 兄 김기손(金驥孫)의 後孫이다. 15代祖 김부영(金富榮)은 연산군 戊午士禍 로 禍를 입고 그 家族이 夜半逃走하여 全羅北道 任實 에서 숨어 살았다. 그 뒤 燕山君이 廢位되고 復權돼 다시 서울에 올라갔으나 이미 집도 없어지고 더 以上 살 수 없어 財産을 整理해서 다시 全羅道 長壽 에 내려와 살았다. 先祖들이 長水에서도 相當期間을 살았고, 先山까지 마련했으나 또다시 일은 터지고 말았다. 高祖父 김달문(金達文)李 名當 묫자리를 두고 扶安 金氏 였던 고을 員님 집안과 다투었다. 先山 墓所에서 밀障이 發見됐고, 是非 끝에 주먹다짐이 있었는데 그만 相對便 사람이 죽고 말았다. 더 以上 長水에서 살수 없게 되어 또다시 夜半逃走를 해야 했고, 그렇게 到着한 곳이 慶尙南道 咸陽 이었다.

1923年 20살 무렵 浦項에서 朝鮮殖産銀行 에서 勤務하면서 迎日郡 浦項邑 에 定着했다. 讀書會를 組織하고 勞動夜學을 組織하여 敎師로 活動했다. 1926年 三日 民族運動의 精神을 본받는다는 뜻으로 三逸上廻(三一商會)을 設立했다고 한다. 1926年 5月 讀書會를 組織했다는 理由로 逮捕되었으나 無罪로 釋放됐다. 1927年 7月 22日 新幹會 英日支會 政治部 幹事로 活動하기도 했다. 以後 1936年 3月 浦項 永興學校 引受하여 民族敎育을 하였으며 檀君廟 建立을 主張했다.

1937年 朝鮮總督府에서 全國 13度 道廳의 諮問機關으로 設置한 慶尙北道 都會 評議員에 當選되어 解放이 될 때까지 活動했다. 太平洋戰爭 이 勃發하자 김용주는 가네다 類슈(金田龍周)로 創氏改名하고 代表的인 朝鮮人 親日團體였던 ‘國民總力 慶尙北道聯盟’과 ‘조선임전보국단 慶北道支部’에 加入하여 活動했다. 內鮮一體를 象徵하는 ‘大邱國體明澄館 建立’에 1千 원을 獻納했고 皇國臣民化를 위한 ‘大邱紳士 建立’에 2千 원을 獻納했다. 다시 美國과 英國을 擊滅할 軍用機 5臺를 獻納하고 徵兵制 實施에 對한 感謝의 뜻을 決議하는 內容을 私私히新聞(朝日新聞)에 廣告를 하였다. 電線公職者大會(全鮮公職者大會)에 參席하여 徵兵을 督勵하는 演說을 하며 親日行跡을 하였다.

解放 以後 敵産企業 中 하나인 전남방직 을 拂下받아 甲富가 되었고 李承晩 이 執權하자 대한해운公社 初代 社長을, 朴正熙 가 執權하자 韓國經營者總協會 初代 會長을 歷任했다.

1985年 1月 26日 美國 하와이주 호놀룰루 와이키키 의 KAL호텔에서 現地時間 基準 午後 8時 30分에 別世했다. 韓國 時間대로는 1985年 1月 27日 午後 3時 30分이었다. [1]

學歷 [ 編輯 ]

論難 [ 編輯 ]

김용주의 家族들은 김용주의 日帝强占期 行跡에 對해 알려진 內容들은 모두 虛僞 事實이라고 主張하고 있으며, 一切 否認하고 있다. [1]

主要 論難에 對한 反駁 [ 編輯 ]

親日 行跡에 對한 反駁

1920年代부터 1940年代에 걸쳐 治安維持犯으로 日帝에 檢擧되기도 했고 新幹會 活動, 朝鮮人을 위한 學校 引受, 道會議원으로 總督府에 맞선 發言 等이 數十 건 根據로 남아 있다. [1]

徵兵制 實施 讚揚 및 戰爭 動員 煽動에 對한 反駁

1943年 10月 열린 電線公職者大會(每日申報 報道)에서 김용주는 “가장 急한 일은…정신적 內鮮一體火를 꾀하여 充實한 皇國臣民이 될 것”이라며 “徵兵을 보낼 半島의 父母로서…귀여운 子息이 護國의 神으로 야스쿠니 神社에 받들어 모시어질 榮光을 充分히 認識해야 한다”고 主張했다. 反面 김용주의 家族은 “1940年 慶北道議會 再選 以後 ‘全國에 檀君廟(檀君廟) 建立’ 主張을 내세우다 苦楚를 겪는 等 民族運動을 이어갔다”고 主張한다. [1]

日帝 敗亡 當時 ‘殺害 對象 1號’에 對한 反駁

김용주의 家族은 그가 反日 行跡으로 因해 太平洋戰爭 末期 日帝의 浦項 地域 銃殺 對象 1戶였다고 主張한다. 朝鮮 戒嚴令 發砲 市 地域 內 主要 朝鮮人 8名의 銃殺 指示가 日本국 司令部로부터 내려왔다는 것. 이런 內容은 지난 8月 出刊된 김용주 評傳 ‘江을 건너는 山’에도 登場한다. [1]

民族問題硏究所의 再反駁
民族問題硏究所는 김용주가 傳해 들은 얘기를 本人 回顧錄과 評傳에 引用한, 客觀的인 根據가 없는 얘기라고 一蹴한다. [1]
朝鮮人을 위한 學校 引受 및 夜學의 成果

評傳에 따르면 김용주는 29歲이던 1933年 存廢 危機에 處한 浦項 永興學校를 引受, 校長職을 겸하고 訓育에도 參與했다. 그러나 東亞日報 1936年 2月 8日子에는 ‘최경성 校長 等이 盡力하였으나 (學校) 經營難은 最後 決定에 達하였다는데…’라고 나와 運營 時期가 엇갈린다는 것이 民族問題硏究所의 主張이며, 日本語도 가르친 夜學을 愛國夜學이라고 할 수 없다고 主張한다. 이에 對해 김용주의 家族은 “朝鮮語 禁止, 新聞廢刊 等 民族抹殺政策이 極에 達했던 當時 狀況을 全혀 無視한 初步的인 指摘”이라고 反駁한다. [1]

飛行機 獻納運動

1944年 7月 아사히新聞은 ‘決戰은 하늘이다. 보내자 飛行機를!’ 廣告主 名單에 김용주 이름을 올렸다. 또 1942年 2月 每日申報에 따르면 김용주는 조선임전보국단 慶北支部에서 軍用機 獻納에 27萬원을 募金했다. 이에 對해 김용주의 家族은 “日帝 末期인 1940年代는 本人 意思와 關係없는 動員 記事·廣告가 많이 나왔으며, 놋수저 하나까지 徵發됐던 當時 狀況을 考慮해야 한다고 反駁한다. [1]

'變節者'라는 主張에 對한 反駁

김용주가 靑年期엔 民族意識을 보였고 新幹會·靑年團體 讀書會 活動 等은 認定되지만, 日帝 侵略이 本格化되는 1930年代부터 完全히 돌아섰다. 이에 對해 김용주의 家族은 “1926年 3·1運動 精神을 이어받은 三逸上廻 設立, 1938年 强制 綿花栽培 政策에 對한 國家 補償 要求 等 當時 狀況에서 可能한 救國活動을 했다”고 否認하고 있다. 1940年 1月 동아일보에 따르면, 김용주가 永興 學校에 私財 2萬원을 寄附하는 等 民族運動을 類推할 만한 證據들도 나온다. [1]

當時 每日申報의 信憑性

民族問題硏究所는 主要 證據로 活用한 每日申報에 對해 “總督府 機關紙인 京城日報의 姊妹誌였다고 해서 史料 價値가 없는 것은 아니며,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위가 親日人士 1006名의 名單을 發表했을 때도 每日申報를 主要 飼料로 삼았다”는 立場이다. 그러나 김용주의 家族은 “當時 當事者 同意 없는 强制 寄稿, 虛僞事實 收錄에 對한 證言이 많아 全的으로 믿기 어렵다”고 主張한다. [1]

친일인명사전 登載에 對한 論駁

김무성은 “硏究所가 10年 동안 300萬餘件을 檢討했다던 事前에 여태껏 登載하지 않다가 金 代表가 與黨 代表가 되고 나니 態度를 바꿨다”

民族問題硏究所의 再反駁
“2009年 첫 出刊 當時 資料 不足으로 海外·地方 親日反民族行爲를 全面調査할 수 없었다”며 “김용주에 對해서는 追加 調査가 必要했기 때문에 保留했고 發刊된 改訂版에는 漏落됐던 人士가 多數 登載될 것”이라고 答辯했다. [1]
한겨레와의 訴訟

<한겨레>가 2015年 8月1日치 土曜版에 ‘김용주 아들 金武星’(온라인 題目 ‘‘親日’ 金武星 아버지가 愛國者로 遁甲하고 있다’) [2] [3] 을 싣자 김무성 새누리당 代表는 父親의 親日 行跡을 報道한 <한겨레>를 相對로 1億원의 損害賠償과 反論報道를 請求하는 民事訴訟을 提起했다. [4] 서울중앙지법 民事25部(裁判長 이흥권)는 2016年 10月 김무성 새누리당 議員이 <한겨레>를 相對로 낸 反論報道 및 損害賠償 請求 訴訟에서 原告 敗訴 判決했다. 김무성 前 議員 아버지의 親日 行跡을 報道한 <한겨레>가 反論報道를 낼 必要가 없다고 法院이 判斷했다. [5]

同名異人 [ 編輯 ]

愛國活動 事例 22個 中 2個는 同名異人

김용주는 1931年 6月 동아일보에 ‘忠武公 遺跡 保全을 위한 誠金 一級 市廛을 냈다’고 나와 있다. 또 같은 해 11月 재만避亂同胞 衛護金品(滿洲 同胞를 위한 誠金募金)으로 一金 三十前을 냈다고 한다. 그러나 記事에 忠武公 誠金을 낸 이는 ‘馬山 居住 김용주’로 나온다. 浦項에서 活動했던 김용주와 同名異人이라는 反論이다. 滿洲同胞 誠金 寄附者도 ‘京城府 애優秀소羊少年回 김용주’로, 서울 少年團體에 김용주가 加入되었을 理 없어 서로 다른이라는 主張이다. [1]

著書 [ 編輯 ]

  • 《風說 70年》

家族 關係 [ 編輯 ]

各州 [ 編輯 ]

  1. 이재연, 한재희 (2015年 11月 7日). “民族問題硏究所側 “皇國臣民 되겠다던 記事 있다” 김무성 代表側 “檀君廟 主張해 苦楚 겪었다”” . 서울新聞 . 2015年 11月 30日에 確認함 .  
  2. “‘親日’ 金武星 아버지가 愛國者로 遁甲하고 있다” . 한겨레. 2015.08.01.  
  3. “金武星의 집안…敵産企業 拂下 받아 전남방직 만들어” . 한겨레. 2015.08.01.  
  4. “아버지 김용주의 發言이 가장 길고 고약했더라” . 한겨레. 2015.11.29.  
  5. “法院 “한겨레, 金武星 父親 親日行跡 反論報道 必要 없다”” . 한겨레. 2016.10.27.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