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주 (僧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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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담 김경주
瑛潭 金敬注
朝鮮總督府 佛敎 인가 隸下 大本山 범어사 住持勝
任期 1945年 3月 2日 ~ 1945年 6月 1日
君主 히로히토
總督 아베 노부유키

身上情報
出生日 1896年
出生地 朝鮮 慶尙南道 東萊
死亡日 ?
學歷 日本 도요 大學校 佛敎學과 學士
經歷 前 京城 中央佛敎專門學校 校長
正當 無所屬
本館 金海 (金海)
宗敎 佛敎

김경주 (金敬注, 日本式 이름: 金山敬注, 1896年 ~ ?)는 日帝强占期 佛敎 僧侶 이며, 親日 共産主義 運動家이다. 俗姓은 金海 金氏 이며, 佛敎 法名은 영담 (瑛潭)이다.

生涯 [ 編輯 ]

慶尙南道 동래군 出身으로 1908年 東萊 梵魚寺 에서 出家하여 佛敎 僧侶가 되었다. 梵魚寺 在籍 中 京城府 에 留學해 휘문義塾 을 卒業한 뒤, 當時 범어사 住持인 김용曲 의 法脈을 相續받고 日本 도쿄 도요 大學 哲學科에 進學했다.

1921年 여름에 도쿄朝鮮佛敎靑年會 전선순剛斷이 여름 放學을 利用하여 慶南 地域에서 巡廻 講演을 하다가 慶南 警察部에 不穩思想 宣傳 嫌疑로 摘發된 事件이 있었다. 이때 도요 大學 在學 中이던 김경주度 전선순講壇의 一員으로 "宗敎와 文化的 使命" 等의 講演을 했으며, 拘禁된 學生들 가운데 唯一하게 公判에 붙여졌다. 當時 김경주는 共産主義 思想을 紹介했다는 嫌疑를 받았고, 1審에서 懲役 6個月型을 宣告받았다.

1923年 도요 大學校 佛敎學과 學事 學位하고 歸國하여 梵魚寺 명정學校 校長에 就任했다. 이때 김경주는 佛敎 敎理의 새로운 解釋과 電波에 努力했다. 1931年 에는 中央佛敎專門學校 의 講師로 採用되었고, 活潑한 對外 寄稿 活動을 벌이며 佛敎 硏究에 專念하여 1934年 이 學校의 學監에 就任하였다(학감은 副校長 또는 副學長에 該當한다.).

이 무렵은 朝鮮總督府 가 佛敎와 儒敎 系列을 動員해 心田開發 運動이라는 管制 皇民化 運動을 벌일 때였는데, 김경주는 京城放送局 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出演하고 《 每日申報 》에 釋迦牟尼 佛經 과 心田開發을 관련짓는 講義를 펼쳤다.

1937年 中日 戰爭 이 일어난 뒤 戰爭에 協力한 行跡이 있다. 中日 戰爭 勃發 直後인 8月 5日 朝鮮佛敎中央敎務員 이 서울의 開運寺 에서 皇軍 武運장구 將兵安胎 祈願祭라는 行事를 開催하고 時局 講演會를 열었을 때, 김경주는 "나라를 위하여 몸을 돌보지 않는다(?國不?身)"이라는 題目의 講演을 했다. 1938年 新年 初에는 《 佛敎時報 》를 통해 〈時局 認識과 擧國 一致의 信念〉이라는 題目으로 時事門을 發表하였는데, 中國 의 挑發이 戰爭의 原因이라고 明示하고 日本軍 은 正義와 사람의 道理를 위하여 싸우고 있으니 곧 東洋의 平和가 到來할 것이라는 內容을 담고 있다.

김경주는 時局 行事에서 "東洋平和와 不動의 精神", "皇國精神發揚에 對하야" 等의 講演을 繼續했고, 1938年 말에는 中央佛敎專門學校 校長으로 昇進했다. 그러나 이듬해 日本人 校長이 赴任하면서 김경주는 敎授職에서도 물러나, 慶北 5本山이 共同 設立한 烏山佛敎學校 校長에 김동화 의 後任으로 就任했다. 烏山佛敎學校 校長으로서도 講演 및 寄稿 活動을 繼續되었다.

日帝가 太平洋 戰爭 에 敗하기 5個月 前인 1945年 3月에 大本山 범어사 住持로 總督府의 認可를 받았으며, 以後의 行跡은 알려진 바 없다.

事後 [ 編輯 ]

2008年 民族問題硏究所 에서 친일인명사전 에 收錄하기 위해 整理한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中 佛敎 部門에 選定되었다.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

  • 임혜봉 (2005年 3月 1日). 〈김경주 : 中央佛敎專門學校 校長으로 親日에 앞장선 學僧〉. 《親日 僧侶 108人》. 서울: 청년사. 373~386쪽쪽. ISBN   97889727838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