保障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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保障王
寶臧王
第28代 高句麗 國王
在位 642年 10月 ~ 668年 9月 (陰曆)
前任 영류왕
後任 -
조선군왕
在位 677年 ~ 682年
前任 {新設)
後任 高寶元
이름
保障(寶臧) · 長(臧)
시호 -
身上情報
出生日 未詳
死亡日 682年 12月 (陰曆)
死亡地 唐나라
父親 大洋王
母親 未詳
配偶者 未詳
子女 고복남 · 高任務 · 고덕남 · 고덕무
宗敎 道敎
陵墓 힐리加한 무덤 옆

保障王 (寶臧王, ? ~ 682年 )은 高句麗 第28代 國王 (在位 : 642年 ~ 668年 )이다. (臧) 또는 保障 (寶臧)이다. 高句麗는 廟號 를 使用하지 않았으므로 寶藏王의 廟號는 없고, 高句麗가 滅亡했기 때문에 시호 도 받지 못했다. 642年 莫離支의 난 으로 政權을 掌握한 연개소문 에 依해 王位에 올랐다. 비록 王位에 있었지만, 實權은 연개소문에게 있었다. 淵蓋蘇文이 죽고 난 後 연남생 , 연남산 , 연정토 等 內紛이 일어났다. 668年 나·黨 聯合軍의 攻擊을 받아 高句麗 는 滅亡하였다. 以後 唐軍에 逮捕되어 唐나라 로 잡혀가 한때 高句麗 復興運動 을 꾀하였으나 失敗한 뒤 681年 公州(?州)로 流配되어 682年 死亡하였다.

生涯 [ 編輯 ]

卽位 [ 編輯 ]

寶藏王은 평원왕 의 孫子이자 영양왕 의 조카이며 영류왕 의 親同生인 大洋王(大陽王) [1] 의 맏아들이다. 그러니까 榮留王의 조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치 않으며, 642年 陰曆 10月에 연개소문 莫離支의 난 를 일으켜 그의 큰아버지 榮留王을 弑害하고 그를 새 王으로 推戴함에 따라 高句麗의 마지막 王이 되었다.

寶藏王이 卽位하자 나라의 모든 權力은 오직 연개소문 한 사람에게만 集中되었다. 淵蓋蘇文은 스스로 大莫離支 에 오른 後에 政權을 掌握하였으며, 寶藏王은 이름만 王일 뿐 一介 허수아비에 不過했다. 이에 따라 高句麗에는 淵蓋蘇文의 一人獨裁 體制가 成立되고, 이는 後날 高句麗의 滅亡의 原因 가운데 하나가 된다.

2年( 643年 ) 1月 아버지를 大洋王으로 推尊 하였다. 3月 唐나라 道敎 를 求하자, 黨에서 道士(道士) 8名과 《 道德經 》(道德經)을 보내왔다. 尹6月에는 唐 太宗 이 寶藏王을 上柱國 搖動君王 高句麗王(上柱國遼東郡王高句麗王)으로 冊封하였다. [2]

新羅·黨과의 紛爭 [ 編輯 ]

元年( 642年 ) 新羅 에서는 百濟 의 大大的인 攻擊으로 要旨인 대야성 (陜川)을 빼앗기는 等 백제와의 攻防戰에서 戰勢가 漸次 不利해져갔다. 이에 따라 선덕여왕 金春秋 를 高句麗에 使臣으로 派遣해 救援兵을 要請하였으나 淵蓋蘇文은 이러한 新羅의 要請을 拒絶하였다. [3]

2年( 643年 ) 9月 新羅는 唐나라 에 使臣을 보내 백제와 高句麗의 侵略으로부터 도와 달라며 援軍을 보내줄 것을 要請하였다. [2] 當時 淵蓋蘇文이 榮留王을 弑害하고 寶藏王을 擁立해 權力을 掌握한 일을 빌미로 高句麗에 對한 侵略을 計劃하고 있었던 唐 太宗 은 기뻐하면서 高句麗와 백제를 무너뜨리려고 新羅와 손을 잡는다. 新羅와 唐나라가 戰爭 準備를 하고 있다는 諜報를 接한 高句麗는 그들의 侵略에 對備하기 위해 全國에서 軍士를 募集하고, 邊方의 城郭을 修理하며 軍事 訓鍊을 하는 한便 백제와 손을 잡게 된다.

3年( 644年 ) 1月 백제와 高句麗가 함께 新羅를 挾攻하자 唐나라는 高句麗와 백제에게 新羅에 對한 攻擊을 멈추지 않으면 軍士를 일으키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高句麗는 過去에 新羅에 빼앗긴 地域을 되찾기 前에는 戰爭을 멈추지 않겠다며 唐나라의 要求를 拒絶하였다. 이에 唐 太宗은 “蓋蘇文은 그 賃金을 弑害하고 大臣들을 죽이고 그 百姓을 殘忍하게 虐待하고, 只今은 또 나의 命令을 어기니 討伐하지 않을 수 없다.” [4] 고 하며 出戰 準備를 하였다.

與黨 戰爭 [ 編輯 ]

645年 陰曆 3月 唐 太宗 은 高句麗를 치기 위해 總 30萬 兵力을 動員하였다. 丈量(張亮)李 이끄는 40,000名의 水軍은 戰艦 500隻에 타고 비사성 으로 向했으며, 나머지 60,000名은 黨 太宗이 直接 거느리고 夭壽 를 건너 陸路로 進軍하였다. 또한 突厥群 거란軍 도 動員되었다. [5]

唐 太宗의 30萬 軍隊가 蓋牟城 , 비사성 , 요동성 , 白巖性 等 高句麗의 크고 작은성 10餘 個를 陷落시키자, 神聖 國內城 에서 40,000名의 軍隊를 보내기도 하였으나 搖動 防禦에는 失敗했다. [5] 唐 太宗은 高句麗의 搖動 防禦線을 最終的으로 무너뜨리기 위해 安市城 으로 進擊하였다. 한便, 高句麗軍의 狀況이 不利하게 돌아가자 淵蓋蘇文은 北部褥薩 高延壽 와 南部褥薩 고혜진 에게 高句麗와 말갈 의 兵士 15萬의 軍士를 내어 安市城을 支援하도록 하였다. [5]

이에 唐 太宗은 高延壽에게 사람을 보내 自身은 高句麗를 征服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다만 君臣關係를 맺기 위해 왔다고 말하면서 臣下의 例만 갖춘다면 빼앗은 領土를 모두 돌려주고 돌아가겠다고 懷柔했다. 그러자 高延壽는 唐 太宗이 攻擊할 意思가 없다고 判斷하고 싸움에 積極的이지 않았다. 唐 太宗은 이 機會를 놓치지 않고 26,000名의 奇襲病을 組織하여 高句麗軍을 急襲하였다. 高句麗軍은 駐筆算 戰鬪 에서 唐나라軍의 急襲을 받자 큰 混亂에 빠졌으며, 그 過程에서 30,000名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高延壽와 고혜진은 直轄部隊 36,000名과 함께 唐나라에 投降하였고, 나머지 兵力은 神聖과 建安城으로 退却하였다. [5]

이 때문에 安市城은 完全히 孤立되었고, 唐나라軍은 安市城을 一齊히 攻擊하기 始作했다. 하지만 星州 楊萬春 의 뛰어난 用兵術에 힘입어 時間이 지날수록 安市城의 士氣는 漸次 올라가는 反面 唐나라軍은 士氣가 低下되기 始作했다. 唐 太宗은 安市城보다 더 높은 土産을 쌓아 攻擊도 해보았으나 이 亦是 失敗로 돌아가고 말았다. 오히려 이 土産 作戰으로 唐나라軍은 많은 物量과 兵力을 잃고 말았다. [5]

唐나라軍의 敗北가 거듭되는 가운데 어느덧 겨울이 다가와 兵士들은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結局 그해 陰曆 10月에 退却을 서둘렀다. 唐나라軍은 退路에서 많은 凍死者가 發生했으며, 이에 따라 軍士들이 大擧 沒殺하는 狀況에 處하기도 하였다. [5]

以後, 本國으로 돌아간 唐 太宗은 敗北를 雪辱하기 위해 以後 몇 次例에 걸쳐 攻防戰을 벌였으나 별다른 成果를 거두지 못하고 싸우는 족족 退却하였다. 結局 唐 太宗은 649年 陰曆 4月에 高句麗 征伐을 中止하라는 諭示를 남기고 죽었다. 이에 따라 高句麗와 唐나라는 一時的인 休戰 狀態에 들어갔다.

하지만 高句麗와 新羅의 戰爭은 持續되었으며, 太宗 武烈王 이 唐나라에 使臣을 急派하여 援軍을 要請하자, 655年 2月 唐나라는 榮州(營州) 都督 정명진 과 左右衛中郞將(左右衛中郞將) 蘇定方 에게 軍士를 내주어 高句麗를 다시 攻擊하게 하였으나 敗北하였다. [6] 658年 6月 唐 高宗 은 다시금 정명진과 우령群中郞將(右領軍中郞將) 薛仁貴 에게 軍士를 내주어 高句麗를 侵掠하였으나, 이 또한 敗하고 退却하였다. [7]

敗亡 [ 編輯 ]

唐나라는 660年 新羅와 함께 백제를 侵略하였다. 百濟는 羅唐聯合軍의 攻勢에 밀려 滅亡하고 만다.

백제를 멸망시킨 羅唐聯合軍은 그 餘勢를 몰아 高句麗로 進擊하였다. 661年 1月 唐軍은 平壤과 高句麗의 邊方을 攻擊하였다. [8] 백제의 滅亡으로 多急함을 느낀 高句麗는 662年 3月 日本에 使臣을 派遣했다. 이에 왜는 將軍을 보내 옛 백제 地域의 所有城(疏留城) [週 1] 에 兵力을 駐屯시켰다. 이 때문에 唐軍은 高句麗의 南쪽 境界를 侵略하지 못하고 新羅도 高句麗 西쪽의 城樓를 陷落시키지 못했다. [9] 卽, 韓半島 南部에 駐屯해 있던 唐軍과 新羅軍이 高句麗의 南西쪽 國境을 攻擊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처럼 高句麗의 大日本 外交는 威力을 發揮했다. [10] 또한 백제 復興軍이 羅唐聯合軍의 後尾를 치는 바람에 新羅軍이 다시 南進하여 百濟復興軍과 싸워야 했으며, 그 狀況을 利用하여 高句麗는 西北 邊方에 兵力을 집결시켜 唐나라軍을 擊退하였다. [ 出處 必要 ]

同年 4月 唐나라는 다시금 大軍을 거느리고 水陸양공 作戰을 驅使하며 平壤城을 向해 進軍하였다. 하지만 이군구(李君球) 等의 臣下가 出戰을 反對하였고, 高宗이 이에 따라 高句麗 遠征을 中止하였다. [8]

唐나라軍이 물러가자 同年 5月 淵蓋蘇文은 惱音信 에게 軍士를 내주어 新羅의 北漢山城 을 攻掠하게 하였다. 하지만 連日 장마가 繼續되는 바람에 陷落시키지 못하고 退却하였다. [8]

同年 8月 唐나라는 다시 高句麗 征伐에 나섰다. 蘇定方의 10萬 大軍을 태운 唐나라 艦隊가 大同江을 타고 平壤城을 包圍하여 熾烈한 攻防戰을 펼쳤다. 그리고 西쪽에서는 唐나라 陸軍이 鴨綠江 一帶를 向해 밀려왔다. 이에 淵蓋蘇文은 맏아들 연남생 에게 軍士를 내주고 鴨綠江 一帶를 지키도록 하였으나 敗退했다. [8]

662年 방효태 가 이끈 唐나라軍은 淵蓋蘇文이 이끈 高句麗軍과의 師授 戰鬪 에서 敗北하여 沒殺되었다. 平壤城을 攻掠하던 蘇定方의 軍隊는 暴雪이 내리는 바람에 包圍를 풀고 遑急히 退却하였다. [11]

高句麗는 唐나라와의 戰鬪에서 많은 勝利를 거두었지만, 數十 年間의 戰鬪로 말미암아 國力에 엄청난 損失을 입었다. 또한 當時 高句麗의 모든 權力은 연개소문에게만 集中되어 있었는데, 이는 666年 [週 2] 淵蓋蘇文이 죽자 그의 아들들 間에 權力 鬪爭이 벌어지게 되는 原因이 되었다.

淵蓋蘇文이 죽자 그의 맏아들 연남생 이 大莫離支 職位를 이어받았지만, 동생인 연남건 연남산 은 兄의 權力 獨食에 不滿을 품었다. 그래서 연남생이 邊方을 巡幸하는 사이 王命을 憑藉하여 연남생의 側近을 없애고 연남생을 召喚하려 하였다. 이에 연남생은 唐나라로 脫出하여 投降하였다. [12]

666年 8月 寶藏王은 연남건을 大莫離支로 삼고 調整을 再編하였다. 하지만 朝廷은 이미 많은 臣下가 除去되어 어수선하였고, 民心도 연남건 兄弟에게서 등을 돌렸다. 唐 高宗은 이 機會를 놓치지 않고 12月 연남생을 앞장세워 移籍 , 글筆夏曆 , 學處準, 백안六 等에게 軍事를 내주어 高句麗를 再侵略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되자 淵蓋蘇文의 동생 연정토 는 韓半島 쪽의 12個 姓을 가지고 新羅에 投降해 버렸다. [13]

667年 부터 唐나라軍의 大大的인 攻擊을 받아 여러 成果 마을이 陷落되었고, [14] 668年 陰曆 6月 에는 寶藏王이 머무르던 平壤城이 陷落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寶藏王은 降伏을 宣言하고 唐나라로 끌려갔다. 寶藏王이 降伏했음에도 남아있던 高句麗 兵士들은 如前히 唐나라에 맞서 싸웠지만, 結局 高句麗는 滅亡하고 말았다. [15]

죽음 [ 編輯 ]

唐나라로 押送된 寶藏王은 戰爭에 對한 直接 責任이 없다 하여 唐 高宗으로부터 社評太上백(司平太常伯) 院外動靜(員外同正)의 벼슬을 下賜받았다. [15] 그들이 平壤에 設置한 安東都護府 에 머무르다가 677年 에 요동都督(遼東都督) 조선군왕(朝鮮郡王)에 任命되어 搖動에 머물렀다.

이때 그는 高句麗의 再建을 노려 말갈 과 함께 軍士를 일으키려다가 發覺되어 681年 唐나라 公州(?州)에 流配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682年 에 死亡하였다. 唐나라 調整은 寶藏王의 屍身을 長安으로 옮겨 突厥의 일릭 카간 (?利可汗)의 무덤 옆에 장사하고 비를 세웠으며, 위僞經(衛尉卿)으로 追贈하였다. [16]

家族 關係 [ 編輯 ]

朞年 [ 編輯 ]

保障王 元年 2年 3年 4年 5年 6年 7年 8年 9年 10年 11年 12年 13年 14年 15年
西曆 642年 643年 644年 645年 646年 647年 648年 649年 650年 651年 652年 653年 654年 655年 656年
短期 2975年 2976年 2977年 2978年 2979年 2980年 2981年 2982年 2983年 2984年 2985年 2986年 2987年 2988年 2989年
干支 壬人 癸卯 甲辰 乙巳 丙午 정미 무신 己酉 庚戌 신해 임자 癸丑 甲寅 乙卯 丙辰
保障王 16年 17年 18年 19年 20年 21年 22年 23年 24年 25年 26年 27年
西曆 657年 658年 659年 660年 661年 662年 663年 664年 665年 666年 667年 668年
短期 2990年 2991年 2992年 2993年 2994年 2995年 2996年 2996年 2998年 2999年 3000年 3001年
干支 正史 戊午 기미 更新 辛酉 壬戌 癸亥 甲子 乙丑 丙寅 丁卯 無盡

寶藏王이 登場한 作品 [ 編輯 ]

映畫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內容主 [ 編輯 ]

  1. 走流性 으로 推定된다
  2. 664年 或은 665年 이라는 說도 있다.

參照週 [ 編輯 ]

  1. 太陽王(太陽王)이라고도 한다.
  2. 《三國史記》 勸第21 高句麗本紀 第9 保障王 2年(643)
  3. 《三國史記》 勸第21 高句麗本紀 第9 保障王 1年(642)
  4. 《三國史記》 勸第21 高句麗本紀 第9 寶藏王 3年(644)
  5. 《三國史記》 勸第21 高句麗本紀 第9 寶藏王 4年(645)
  6. 《三國史記》 勸第22 高句麗本紀 第10 保障王 14年(655)
  7. 《三國史記》 勸第22 高句麗本紀 第10 保障王 17年(658)
  8. 《三國史記》 勸第22 高句麗本紀 第10 寶藏王 20年(661)
  9. 《日本書紀》 卷27 天命開別天皇 天智天皇 元年(662)
  10. 徐瑛敎 (2009). 《新羅人 이야기》. 살림. 134쪽. ISBN   9788952210739 . 高句麗는 日本에도 손을 내밀었다. 660年에 羅唐 聯合軍이 百濟를 치자 多急함을 느낀 高句麗는 日本에 使臣들을 派遣했다. 『日本書紀』〔卷27, 덴地天皇 元年(662) 3月條〕에는 이와 같은 記錄이 있다. “高(舊)閭家 우리에 救援을 要請했다. 우리는 將軍을 보내 백제 地域의 所有城에 兵力을 駐屯시켰다. 이 때문에 唐軍은 高(舊)려의 南쪽 境界를 侵略하지 못하고 新羅도 高(舊)려 西쪽의 城樓를 陷落시키지 못했다.” 高句麗의 大日本 外交는 威力을 發揮했다. 韓半島 南部에 駐屯해 있던 唐軍과 新羅軍이 高句麗의 南西쪽 國境을 攻擊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11. 《三國史記》 勸第22 高句麗本紀 第10 保障王 21年(662)
  12. 《三國史記》 勸第22 高句麗本紀 第10 寶藏王 25年(666)
  13. 《三國史記》 勸第6 新羅本紀 第6 문무왕 6年(666)
  14. 《三國史記》 勸第22 高句麗本紀 第10 保障王 26年(667)
  15. 《三國史記》 勸第22 高句麗本紀 第10 寶藏王 27年(668)
  16. 서영대, 保障王 《韓國民族文化大百科》. 韓國學中央硏究院
前 代
영류왕
第28代 高句麗 國王
642年 - 668年
後 臺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