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핀 캠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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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핀 이턴 筆 캠벨 (Josephine Eaton Peel Campbell, 1853年 4月 1日 ~ 1920年 11月 12日 )은 美國 의 監理敎 指導者이자 敎育者, 看護師이며, 淸나라 朝鮮 에 派遣된 改新敎 남감리敎會 女性 宣敎師의 한사람이다. 1897年 10月 朝鮮 에 到着하여 改新敎 宣敎活動을 하였으며 가난한 女子 어린이를 데려다가 글을 가르치다가 나중에 學校를 세운다. 培花學堂 ( 排貨女子高等學校 , 排貨女子大學 의 前身)의 創設者이며, 宗敎敎誨, 自校敎會의 母胎가 된 루이스 워커 禮拜堂의 設立者였다.

1886年 부터 1897年 까지 淸나라 傷害 燒酒 에서 宣敎活動을 하였고, 1897年 부터 1918年 까지 大韓帝國 日帝强占期 朝鮮 漢城府 에서 宣敎事業을 推進했다.

1897年 10月 9日 仁川 濟物浦 港을 거쳐 漢城府 에 到着, 漢城府 인달房 高간동(종로구 내자동) 近處에서 宣敎 活動을 始作하였으며, 京城府 鍾路房(서울 종로구와 中區) 地域에서 宣敎活動을 하였다. 宣敎 活動 外에도 病者들의 看護와 診療 活動을 竝行하며 監理敎會 宣敎活動을 擴張시켰고, 윤치호 , 이상재 等 朝鮮人 改新敎 指導者들의 支援을 받았다. 1898年 10月 캐롤라이나 學堂을 設立하고, 1901年 '루이스 워커 記念 禮拜堂'(Lousie Walker Memorial Chapel [1] )을 獻堂하였다. 韓國式 이름은 강모인(姜慕仁)이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期 [ 編輯 ]

조지핀 筆 캠벨 1853年 4月 1日 美國 텍사스 에서 出生했다. 1874年 텍사스의 작은 開拓敎會 牧使였던 조지프 캠벨(Joseph Campbell)와 結婚하여 1男 1女의 子女를 두었다. 그러나 1880年 男便 캠벨 牧師가 갑자기 죽어 死別하고, 子女들도 數年 內 모두 잃었다. 그 뒤 周邊에서 再婚하라는 勸誘와 誘惑이 들어왔지만 信仰心으로 이를 모두 克服하였다. 갑자기 不幸을 연이어 겪었지만 挫折하지 않고 그는 人生의 새로운 轉機를 맞게 되었다. 그는 信仰에 精進하기로 했으나 信仰의 힘으로 自身의 苦痛과 絶望을 克服하면서 다시 뜻을 승화시켜 "一生(一生)을 다른 사람을 위하여 貢獻(貢獻)하기로 決心하고" 시카고의 看護員 養成所에 入學하여 看護 敎育을 받았다. 또한 神學 工夫도 게을리하지 않고 海外 宣敎師로서 福音을 傳하기로 作定했다. 1886年 看護員 養成所를 修了, 그해 美國 남감리敎會 海外 宣敎師를 派遣할 때 自願하여 海外宣敎社로 갔다. 첫 派遣地는 淸나라 였다.

宣敎 活動 [ 編輯 ]

그는 中國 淸나라 江蘇省 傷害 에 派遣되어 宣敎 活動을 始作, 上海와 燒酒 (蘇州) 等地에서 看護員으로 活動하면서 看護와 宣敎를 竝行, 10餘 年 間 奉職하며 敎會 設立과 宣敎 活動에 나섰다.

그 뒤 캠벨의 能力과 獻身性을 높이 산 美國 基督敎 남監理會는 그女를 美國으로 불러들이려 하였으나 그는 海外 宣敎일을 自請하였다. 이어 美國 남監理會 海外 女子宣敎部 (Woman's Board of Foreign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에서 朝鮮 에 派送하는 監理敎 最初의 女子 宣敎師로 1897年 9月 배便으로 出港, 그해 10月 9日 仁川 濟物浦 港을 거쳐 漢城府 에 到着했다. 監理敎 宣敎師 中 女性 宣敎師로는 最初로 派遣된 것이었다. 韓國으로 오면서 强小 性 宣敎 時節 養女(養女)로 入養한 中國人 養女 여도라(Dora Yui, 余小姐)를 데리고 왔다. 캠밸은 宣敎 事業과 同時에 看護, 若干의 治療, 診療를 하였는데, 養女 여도라는 亦是 看護師로, 敎師로, 傳道者 等으로 活動하면서 캠벨의 宣敎事業을 도왔다.

朝鮮 에 到着한 캠벨 宣敎師는 윤치호 의 마중을 받았으며 南大門 近處의 남송현(南松峴) 監理敎 宣敎部에 定着했다. 漢城府 남송현에는 리드(韓國名 二德(李德)) 宣敎師 夫婦가 이미 훌륭하게 宣敎事業을 進行하고 있었으며, 監理會의 상동病院과 북장로회의 濟衆院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地域을 開拓하고자 했다. 이어 윤치호 等의 도움을 얻어 1898年 8月 1日 漢城府 인달房 高간동(漢城府 仁達坊 古磵洞)의 '高架나무골'(只今의 내자동) 마을 李恒福의 집터로 宣敎地를 옮겨 宣敎活動을 始作했다. 高架나무골은 主로 內觀 들이 살던 곳으로, 內官들은 에서 일을 하는 엘리트 들이지만, 內官의 存在를 否定하게 보던 朝鮮人들의 눈치를 보던, 改新敎 宣敎師들도 가기 꺼려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캠밸은 이곳에서 宣敎 活動과 同時에 診療, 看護 活動을 始作하였다. 어느날 때묻고 더럽고 無知한 어느 少女를 보고 놀란 그는 女性 學校의 必要性을 切感하고, 그해 9月 初부터 그는 本格的으로 女性 寄宿學校(Boarding School)를 育成했다.

敎育 活動 [ 編輯 ]

1898年 10月 2日 남監理會의 代表的 女學校인 캐롤라이나 學堂(後날의 培花學堂)을 創設했다. 그가 처음 校名을 캐롤라이나 學堂으로 지은 것은 美國 사우스캐롤라이나주 地域의 各 敎會에서 들어온 어린이 獻金과 牧師들이 十匙一飯으로 나눠서 보내온 敎會 獻金들이 一部 쓰여졌기 때문에 이를 記念하기 위해 '캐롤라이나 學堂'(Carolina Institute)이라 했던 것이다. 當時 敎師(敎師)는 養女 여도라 外에 2名이었고, 科目(科目)은 한글과 漢文이었다. 學生은 6名으로 첫 學生은 宣敎師 舍宅 守衛로 雇用했던 朴氏의 딸이고, 다른 學生은 캠벨이 巡廻 傳道하며 데려온 가난한 집 女子 아이들이다. 그러나 初期 授業 때 캠벨은 英語로 밖에 말할 수 없어 손짓, 발짓, 無言劇으로 表現했다. 이 같은 敎育은 춤을 추듯한다하여 “발레 授業”이라 했다. 그러나 學校 養成을 위해 그는 윤치호 에게 한글을 배웠는데, 스스로도 밤세워가며 한글 을 익히는 수고를 보였고, 1個月 만에 流暢한 한글을 驅使, 一般 朝鮮人들과 通譯 없이 對話가 可能하였다.

그는 敎育을 받지 못한 朝鮮의 女性들에게 敎育의 必要性을 切感했으나 大部分 冷笑的이었고, 어린 少女들을 데려다가 글을 가르치기 始作했다. 이 後 學生들 數가 늘어 1903年 12月 培花學堂이 되었으며 敎育課程은 算術, 讀本, 生理學, 地理, 歷史 等으로 擴大되었다. 學校의 校名은 윤치호 가 지어주었는데 排貨(培花)란 “꽃을 기른다”는 뜻이며, 培花學堂(培花學堂)이란 “女性을 아름답게 기르고, 꽃 피워 내는 배움의 터전”을 의미했다. 그 後 培花學堂은 1909年 培花女學校로 認可를 얻어 卒業生을 定期的으로 輩出했다. 캠벨 宣敎師는 1898年부터 1912年까지 初代 校長으로 奉職했다.

禮拜堂 獻堂 [ 編輯 ]

1900年 4月 15日 그는 復活主日에 禮拜에 반드시 參席하였다. 그리고 1901年 美國에서 루이스 워커(Lousie Walker) 等이 宣敎 後援으로 보내준 돈으로 培花學堂 內에 禮拜堂을 建築·獻堂하고, 이를 '루이스 워커 記念 禮拜堂'(Lousie Walker Memorial Chapel)이라 했다. 이곳에서 始作된 禮拜 모임은 後날 宗敎敎誨 [2] 와 自校敎會의 母體가 되었다. 後日 宗敎敎誨가 設立되자 윤치호 는 이 敎會에 熱心히 다니며 長老이자 敎會 살림에 獻身하였다.

캠벨 宣敎師는 女性 敎育 事業과 竝行하여 傳道夫人의 必要性과 重要性을 認識하고 傳道夫人 養成事業度 注力했다. 이 모든 費用은 그女의 個人 財産, 後援金, 그女의 活動을 본 캐롤라이나, 텍사스 地域 牧師들의 獻金 送金과 診療 物品, 醫療機構 支援 等도 追加되었다. 또한 朝鮮人으로는 윤치호 이상재 가 寄託金을 寄附, 그女의 活動을 도와주었고 警備員과 通譯士와 食母, 車輛 等을 마련해주었다. 그女의 傳道 活動, 治療와 診療를 竝行한 宣敎活動으로 信者들의 數는 늘었고, 처음에는 培花學堂 學父母들 中心이었으나 學父母 外에도 學生들의 家族, 親戚, 이웃, 洞里 사람들 等 信者 數가 急激히 增加했다. 牧會者는 따로 없는 작은 禮拜堂이었고 그女가 直接 禮拜堂을 管理하였다.

그 뒤 루이스 워커 禮拜堂의 規模가 擴張되면서 正春秋 傳道師와 洪다비다 傳道夫人 中心의 信仰 共同體는 外部로 獨立하여 宗敎敎誨(宗橋敎會)가 되었다. 宗敎敎誨가 設立되자 윤치호 는 每日 出席하며 平信徒의 身分으로 이 敎會를 積極 支援하였다. 그리고 윤상은 傳道師와 루이스 워커 記念禮拜堂 殘留 敎人들이 中心이 되어 自校敎會(紫橋敎會)로 發展했다고 한다.

出國과 再入國, 最後 [ 編輯 ]

1918年 安息年으로 美國에 돌아갔다가 1919年 되돌아오려고 費用 마련을 위해 勞動에 從事하였고, 日帝强占期 朝鮮으로 돌아오려 準備하던 中 過勞로 身柄을 얻어 病院에 入院하였다. 그의 親知들은 病이 回復된 뒤에 旅行하라고 勸誘했으나 事業을 中斷할 수 없다며 病이 낫지 않았는데도 退院, 1919年 8月 無理하게 韓國으로 돌아와 病勢는 더욱 惡化되었다. 그러나 當時 朝鮮에는 변변한 病院하나 存在하지 않았고, 1920年 11月 12日 京城府 鍾路情 高간동(종로구 高간동, 現 내자동)에서 別世했다. 享年 67歲였다.

葬禮式은 1920年 11月 15日 培花學堂張으로 擧行되었고, 윤치호 , 이상재 , 金性洙 , 송진우 等 朝鮮人 指導者들이 그의 葬禮式에 參與하여 배웅하였다. 京城府 楊花津 第1墓域 나-7號에 安葬되었으며 碑文에는 그가 生前에 남긴 말 中 한마디인 '내가 朝鮮에서 獻身하였으니 죽어도 朝鮮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가 記錄되었다.

史上 [ 編輯 ]

그의 生涯와 信仰의 特徵은 그리스도를 통한 救援의 確信을 體驗한 福音主義 信仰에 기초하였다. 自身을 穩全히 하나님께 맡기며 어떠한 狀況에서도 하나님께 感謝하고, “하나님 中心” 信仰을 지니고 있었다. 셋째, 徹底한 祈禱와, 큰 理想과 抱負를 가지고 未來를 내다보며 實行했다. 過去와 現在, 近代文明과 基督敎 信仰의 調和를 追求하며 日帝 强占期 朝鮮에 對한 깊은 愛情을 가지고 宣敎活動을 했다. 그는 宣敎活動 外에도 治療와 診療 等을 竝行함으로써 自然스럽게 朝鮮人들 사이에 信望과 信賴를 얻고ㅡ 監理敎 宣敎를 活性化시켰다.

衛生狀態가 不潔하고 無知하였으며, 外國人을 怪物로 認識하던 朝鮮人들을 無視하지 않고 現地人들의 偏見과 無視, 侮辱을 견뎌내며 꾸준히 宣敎活動을 하며 돈이나 費用負擔을 要求하지 않고 獻身했던 것 亦是 윤치호 , 이상재 等을 비롯한 朝鮮人 知識人부터 一般 民衆들에 이르는 다양한 朝鮮人들을 感動, 信賴를 얻는 動因이 되었다.

各州 [ 編輯 ]

  1. 宗敎敎誨와 自校敎會의 母胎로 創設 當時에는 牧會者가 없는 信仰共同體 形式의 禮拜堂이었다.
  2. 鐘針校 近處에 設立되었다 하여 宗敎敎誨라 하였다.

參考 文獻 [ 編輯 ]

  • 排貨百年史
  • 監理敎 人物辭典
  • 宗敎自校敎會史

같이 보기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