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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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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별 衛星 (KITSAT)은 大韓民國에서 最初로 開發하는 人工衛星 이다. 우리별 衛星은 科學技術衛星으로 이어졌다.

우리별 1號 [ 編輯 ]

1992年 8月 11日 유럽의 아리안 4 發射體(V52)를 利用하여 發射되었다.

우리별 衛星 프로그램은 카이스트 人工衛星硏究센터(當時 訴狀: 최순달 敎授)가 英國 서리 大學校 (University of surrey)와의 協力 프로그램으로 1989年부터 進行되었고 總 10名의 카이스트 卒業生들이 留學生의 身分으로 우리별 1號의 開發에 參與하였다. 하지만 우리별 1號 開發의 全 過程이 英國에서 進行되었기 때문에 或者는 '우리별은 남醫別'이라는 詰難을 하기도 했다.

1992年 8月 11日 南아메리카 프랑스領 기아나 쿠루 에 位置한 기아나 宇宙 센터 에서 美國의 海洋觀測衛星인 토펙스(TOPEX) 衛星의 補助衛星으로 프랑스의 補助衛星 S80/T와 함께 아리안 V52 發射體에 依해 高度 1,300km, 軌道 傾斜角 66.042°의 宇宙軌道上에 올려졌다.

무게 48.6kg, 크기 35.2×35.6×67cm, 設計壽命이 3年인 우리별 1號는 蓄積 및 電送通信實驗(Store & forward packet communication), 地球表面 寫眞撮影 實驗(海上도 2km, 400m), 우리말 放送實驗, 그리고 宇宙放射線實驗 等을 遂行할 수 있는 裝置를 搭載하고 있다. 衛星管制는 카이스트 人工衛星硏究센터에서 이뤄졌다.

우리별 2號 [ 編輯 ]

1993年 9月 26日 유럽의 아리안 4 發射體(V59)를 利用하여 發射되었다. 우리별 2號는, 우리별 1號 開發을 통해 移轉받은 技術을 제대로 消化했는지를 確認하기 위한 目的으로 開發되었다. 이를 위해 우리별 2號 開發의 全過程은 國內에서 이뤄졌으며 國內에서 生産된 部品과 部分品, 試驗裝置를 果敢히 採用하게 된다. 實驗을 위한 搭載體는 우리별 1號에 搭載된 것과 類似한 通信實驗裝置, 地球觀測用카메라(삼성전자가 生産한 컬러 CCD 使用) 外에 카이스트에서 自體的으로 開發한 赤外線 小子 檢證裝置, 低에너지 粒子檢出器가 搭載되었다. 우리별 2號의 開發 및 試驗課程에는 相當數의 出捐硏究所와 國內企業이 直間接的으로 參與하게 된다.

우리별 3號 [ 編輯 ]

1999年 5月 26日 印度 發射體인 PSLV-C2를 利用하여 스리하리코타 發射場에서 發射되었다. 衛星의 크기는 495x604x852mm, 무게 110kg로서, 730km 高度의 原形 太陽動機軌道를 旋回한다. 姿勢制御方式은 3軸 安定化 方式으로 리액션 휠과 自己토커에 依해 制御가 이루어지며, 志向正確度는 0.5度 以內, 最大供給前歷은 180W이다. 遠隔探査龍 15m級 解像度와 3채널의 線形 CCD(change coupled device) 카메라 및 放射能影響測定器, 高에너지粒子檢出器, 精密地球磁氣場測定器, 電子溫度測定器 等이 搭載되어 있다.

3軸 姿勢制御, 共通버스 構造, 展開式 太陽電池板, X밴드 高速데이터電送裝置, 푸쉬브룸타입의 地球觀測用 카메라 等 當時 一般的인 地球觀測衛星에서 使用되고 있던 技術들을 開發, 小型 人工衛星에 搭載하여 그 核心 技術들을 宇宙에서 檢證할 目的으로 開發된 우리별 3號는 카이스트 人工衛星硏究센터에서 1號와 2號의 開發 經驗을 바탕으로 獨自的으로 設計한 것으로서 우리나라 最初의 固有 衛星모델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開發, 檢證된 技術들은 同級 規模의 小型衛星에서는 最初의 것일 뿐만 아니라, 1999年 末, 비엔나에서 開催된 UNISPACE III에서는 最高 性能의 小型衛星으로 評價된 바 있다.

우리별 3號는 1992年 8月 우리별 1號의 發射와 더불어 카이스트 人工衛星硏究센터에 設置된 우리별地上局에서 送信하는 各種 命令이나 프로그램에 依해 調整된다. 地上局에서는 또 우리별 3號로부터 受信된 遠隔檢針情報를 통해 衛星의 狀態를 點檢하고, 搭載體로부터 測定된 實驗資料를 受信하여 貯藏, 處理, 管理함으로써 資料를 必要로 하는 硏究者들에게 供給하고 있다. 特히 우리별 3號의 카메라가 撮影한 約 15미터級의 멀티스펙트럴 映像은 當時 가장 普遍的으로 活用되던 SPOT 衛星(멀티스펙트럴 映像의 解像度는 20미터)과 比較하여 遜色없는 性能을 자랑하였다.

우리별 3號의 開發을 마지막으로 우리별 衛星프로그램은 마무리되고 以後 科學衛星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改編되지만 實質的으로는 同一한 目的을 維持하고 있다. 우리별 3號 開發이 完了된 1999年 末, 카이스트는 人工衛星硏究센터를 敎授와 學生中心의 硏究센터로 그 規模를 大幅 縮小하기로 決定하게 된다. 이로 인해 當時 硏究陣들은 大學과 硏究所, 企業으로 흩어지게 되는데 相當數의 人員들이 衛星輸出을 위한 벤처企業을 設立하게 된다. 그때 設立된 會社가 (週) 쎄트렉아이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