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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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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대
出生 1962年 10月 12日 ( 1962-10-12 ) (61歲)
大韓民國 全北特別自治道 群山市 삼학동
性別 男性  위키데이터에서 편집하기
國籍 大韓民國
居住地 大韓民國 京畿道 光明市
本館 南原 [1]
學歷 서울大學校 學士
經歷 동아일보 政治, 經濟, 社會部 記者
第17代 總選 열린우리당 中央選擧對策위 代辯人
열린우리당 首席副代辯人
中國 國立 우한大學校 客座敎授
민주당 光明乙 地域委員會 委員長
延邊科學技術大學校 名譽敎授
第17代 光明市長(再選)
第21代 國會議員
宗敎 天主敎 ( 洗禮名 : 베드로 )
議員 選手 1
議員 臺數 21
正當 더불어民主黨
地域區 京畿 光明市 을 (21)
웹사이트 國會議員 양기대 블로그

양기대 (梁基大, 1962年 10月 12日 ~)는 大韓民國 의 記者 出身 政治人이다. 第16·17代 京畿道 光明市長 을 歷任했고, 제21대 國會議員이다.

生涯 [ 編輯 ]

幼年期 [ 編輯 ]

양기대는 1962年 全北特別自治道 群山市 삼학동에서 3男 中 長男으로 태어났다.

記者 時節 [ 編輯 ]

양기대는 1988年 4月 東亞日報 記者로 入社했다. 當時 言論은 全斗煥 軍事獨裁 時節代와 같이 國民의 눈과 귀를 가리고, 權力을 批判하지 못했다. 양기대는 言論을 바로 세워 正義로운 世上을 만드는데 寄與하겠다는 뜻을 세웠다.

記者 初年 時節 양기대는 어디서나 바른 말을 거침없이 하는 것 때문에 '럭비공'이라는 別名으로 불리었다.

그는 權力의 非理와 腐敗問題에 執拗하게 매달렸는데, 이는 腐敗한 權力이 腐敗한 世上을 만든다는 事實을 正確히 꿰뚫은 양기대의 信念 때문이었다.

腐敗와의 戰爭에 臨한 양기대는 ' 特種 '記事를 많이 썼다. 1991年 稅務公務員 非理 特種을 始作으로 1992年 組暴頭目 김태촌 庇護勢力 暴露 記事가 이어졌다. 또 現職 勞動部 長官 受賂 事件, 김현철 非理 事件, 閑步의 YS大選資金, 北風造作 安企部 文件暴露, 安企部 洞 選擧資金 流用 特種 等 우리나라 積弊를 드러내는 記事들을 쏟아냈다.

1995年 김영삼 政權 當時 양기대는 이형구 勞動部 長官의 受賂 嫌疑를 捕捉했다. 그러나 當時까지만 해도 現職 長官이 拘束된 적이 單 한番도 없을 만큼 權力의 힘이 莫强한 時節이었다. 양기대가 보기에 以前의 權力型 非理 事件처럼 이 事件도 內査段階에서 흐지부지 終結될 可能性이 높아보였다. 이에 양기대는 多角的인 取材와 더불어 各種 資料 等을 檢討한 以後 이형구 長官에 對한 嫌疑를 確信했고 果敢히 記事를 쓰며 살아있는 權力에 挑戰했다. 그날 밤 양기대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來日 新聞에 記事가 뜰건데 내가 拘束될 수도 있어."

양기대는 韓國記者協會가 制定한 ' 이달의 祈子床 '을 7番이나 받은 ' 最多 受賞者 Archived 2018年 1月 16日 - 웨이백 머신 '이다. 1995年과 1997年에는 韓國祈子床 을 받았다.

政治 活動 [ 編輯 ]

政治入門 [ 編輯 ]

양기대는 記者生活을 거치면서 機會가 닿으면 언젠가 政治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건 單純히 出世를 위해서가 아니라 꿈을 實現해보고 싶은 所望 때문이었다. 이러한 苦悶을 안은 채 지내다가 機會가 주어져 美國 샌프란시스코 버클리 大學에서 訪問硏究員 資格으로 1年間 硏修를 한 뒤 歸國했다. 歸國後 東亞日報 會社 經營陣은 이제 初級幹部(次長)가 돼야 할 양기대 記者에게 友好的이지 않았다. 特種記者 양기대 뿐만 아니라 會社 經營陣에게 順從하는 양기대를 願하는 것 같았다. 昇進 發表 當日 當時 社會部長이 午前만 해도 昇進될 것이라며 祝賀를 해주었다. 그런데 저녁 무렵 會議時間에 社會部長이 社會部長이 어두운 얼굴로 昇進에서 빠졌다고 말해주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會社 最高經營陣이 마지막 瞬間에 틀어서 昇進에서 漏落되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忠誠心'에 問題가 있다는 얘기였다. 이미 동아일보는 權力을 監視하고 合理的이고 客觀的인 論調로 是是非非를 가리는 그런 新聞의 모습과는 자꾸 멀어져 갔다. 차츰 失望이 쌓여갔다.

한便 2003年 下半期 政治權은 地域構圖 打破와 全國政黨 建設, 金權政治 打破 等 政治改革을 前面에 내걸고 열린우리당이 誕生했다. 所謂 '盧武鉉 正當'이 만들어진 것이다. 양기대는 그해 12月 中旬頃 2004年 4月로 豫定된 第17代 總選 出馬를 깊게 苦悶했다. 政治權에 入門해 當選되지 못했을 때 家族들이 겪게 될 精神的, 經濟的 苦痛을 생각하니 걱정이 많이 되었다. 그러나 '설마 家族들을 굶기겠느냐, 꿈을 펼치기 위해 挑戰하자' , 오랜 苦悶 끝에 내린 結論이었다. 出馬를 위한 大長程이 始作된 것이다. 出馬해야 할 政黨은 열린우리당으로 定했다. 黨 支持率은 10%臺로 바닥을 헤매고 있었다. 中央黨에 言論人 迎入 케이스로 들어가 앉아있으려니 낯설고 未來에 對한 不安도 가끔式 몰려왔다. 동아일보라는 '保護膜'이 없어진 狀況에서 아무런 事前 準備 없이 熱情과 霸氣만으로 入門한 政治權은 그야말로 荒凉한 沙漠이었다.

17代 國會議員 選擧 落選 [ 編輯 ]

양기대는 2004年 1月 처음으로 光明 땅을 밟았다. 光明은 傳統的으로 한나黨의 텃밭이었다. 地域의 黨員과 市民들의 反應은 엇갈렸다. 落下傘 公薦의 可能性을 問題 삼는 사람도 있었고, 一部 노사모 出身은 양기대가 동아일보 出身이란 點을 들어 拒否感을 나타냈다. 實際로 노사모 會員들과 選擧事務室에서 檢證 討論會를 열기도 했다. 選擧區는 大部分 아파트 地域이고 서울로 出退勤하는 職場人이 많은 地域이었다. 平日에는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없었다. 그래도 希望과 霸氣를 가지고 구름山, 도덕산, 早起蹴球會 各種 行事場을 뛰고 또 뛰었다. 그런데 選擧를 한 달 앞둔 2004年 3月 豫期치 않았던 盧武鉉 大統領 彈劾이 이뤄졌다. 世上이 갑자기 變했다. 政治環境이 180度 바뀌었다. 言論의 各種 輿論調査에서 양기대 候補가 전재희 候補를 20~30% 程度 앞서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當選을 旣定事實로 받아들이는 雰圍氣였다. 그러나 如前히 민주당 核心支持者들은 열린우리당 創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結局 민주당 候補가 出馬하게 되었다. 이제는 민주당 候補를 끌어들여 單一化를 하는 것도 큰 宿題 中 하나였다. 選擧 3日 前인 4月12日 민주당 候補를 돕던 核心支持者들이 만나자고 提議해 왔다. 양기대를 돕고 민주당 候補를 辭退시키는 方案을 論議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敵은 內部에 있었다. 미리 캠프에 와 있던 一部 人士들이 候補를 單一化하고 選擧캠프를 합치면 自身들은 캠프를 떠나겠다고 威脅했다. 그때는 모든 것이 서툴고 政治力이 不足했다. 그래서 候補 單一化를 이뤄내겠다고 만나자고 했던 분들을 만나지 못하고 전재희 候補에게 3千3百票 差異로 졌다. 민주당 候補가 3千8百票를 얻었으니 候補 單一化를 했다면 전재희 候補를 分明히 이겼을 것이고 그것도 單一化 效果로 依해 많은 票로 이겼을 것이다.

두 달 半의 熱情的이었던 時間들이 走馬燈처럼 스쳐갔다. 支持해주신 분들에게 너무도 未安했다. 現實이 믿기지 않았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敗北를 認定하고 전재희 候補에게 祝賀의 電話를 해주었다. 이렇게 어설픈 첫 總選 挑戰은 失敗로 歸結되었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는 것은 街黑한 試鍊이었다.

18代 國會議員 選擧 落選 [ 編輯 ]

양기대는 2004年 落選 後 臥薪嘗膽하며 나름대로 最善을 다해 地域區를 누볐다. 그러나 政權이 바뀌어 이명박 政權과 한나라당에 對한 期待感이 높아지고 있었다. 雪上加霜으로 有力한 保健福祉部 長官으로 擧論되던 전재희 議員이 이番에는 한나라당에서 總選 戰略上 入閣을 미뤄야 한다고 이명박 當選人에게 建議했다는 記事가 나오면서 大勢가 기우는 듯 했다. 그즈음 中央言論社에서 各 地域區 總選競爭者들에 對한 輿論調査를 實施했는데 전재희 議員이 59%, 양기대 13%가 나왔다. 慘澹한 結果였다. 그것으로 게임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난 4年間 人間關係를 맺었던 분들 中 事業을 하거나 政權과 直間接 關聯이 있는 분들이 양기대를 돕기 어렵다며 떠나갔다. 그동안 양기대에 期待를 걸었던 周邊사람들도 이番에도 어렵겠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캠프 側近들이나 核心 黨員들도 士氣가 떨어져 落膽하는 雰圍氣였다. 退路가 없는 죽음의 길로 가야만 하는 狀況이었다. 그러나 양기대는 흔들리지 않고 탱크처럼 밀고 나갔다. 전재희 議員이 나름대로 强點이 있지만 그동안 地域區를 爲해 特別히 한 일이 없다는 輿論이 擴散되어가고 있는 데다 양기대에 對한 好感도 過去보다는 꽤 높아져 있어 地域民들의 期待와 呼應이 적지 않았다. 또 다시 모든 것이 不足한 狀況에서 選擧를 치렀다. 劣惡한 政治環境 뿐 아니라 組織, 돈, 모든 面에서 劣勢였다. 投票日 막판에 '양기대 一兵' 求해야 한다는 輿論이 일기 始作했지만 이미 大勢가 기운 것을 直感할 수 있었다. 2008年 4月9日 開票結果 전재희 候補 59%, 양기대 候補 36.1% 로 20% 포인트 1萬 票差로 두 番째 苦杯를 마셨다. 開票 當日 밤 집에 있다가 選擧 事務室로 核心黨員과 支持者들을 激勵했다.

16·17代 光明市長 [ 編輯 ]

2008年 4月 두 番째 苦杯는 양기대의 몸과 마음을 모두 오그라들게 하였다. 總選이 끝나고 1週日쯤 光明(甲)에서 當選된 백재현 議員이 양기대에게 술이나 한盞 하자고 電話가 왔다. 그날 白 議員은 慰勞하면서 市場 出馬 얘기를 꺼냈다. 慰勞의 말이겠지만 그게 양기대가 市場 出馬와 關聯한 얘기를 들은 게 처음이었다. 總選에서 두 番씩이나 苦杯를 마신 後輩를 위해 百 議員이 眞情으로 한 말이였지만 양기대에게는 別로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光明市長 出馬 問題는 그동안 한 番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時間이 갈수록 양기대에게 市場 出馬를 勸하는 사람이 늘어갔다. 시장하면서 일을 熱心히 해서 광명시의 位相을 높이고 市民들에게도 認定을 받으라는 말이었다. 市場 出馬를 勸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고 이들 中에는 單純히 민주당 支持者뿐 아니라 한나라당 性向의 사람들도 꽤 있었다. 地域 元老分이나, 地域 維持 等 많은 분들이 市場 出馬를 勸했다. 또 한가지는 光明市 發展이 停滯되어 있고 光明의 政治的 이미지 또한 나빠지고 있으니 光明市 發展과 市民들의 삶의 質 改善을 위해 熱心히 일해 달라는 말씀이었다. 2009年이 되면서 丁世均 代表를 비롯한 민주당 指導部도 光明市長 出馬를 勸誘했다. 너무 오랫동안 院外에서 苦生하는 양기대를 慰勞하면서 그 可能性에 期待를 거는 모습이었다.

두 番의 國會議員 選擧 때는 양기대 혼자 뛰는 形局이었다. 周邊에서 도와주는 사람들도 周邊 評價가 썩 좋지 못한 사람들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番에는 달랐다. 自發的으로 양기대를 돕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를 쓰고 있었다. 양기대를 둘러싼 雰圍氣가 友好的으로 變하고 있음을 肉感的으로 느낄 수 있었다. 어느 公職에 계신 分의 助言이 "決心은 細心하게, 行動은 果敢하게" 準備 없이 뛰어든 政治판에서 양기대는 그間 값비싼 代價를 치루었다. 그 아픔이 成熟이라는 過程을 거쳐 希望으로 바뀌었다. 希望은 힘이 쎄다. 양기대는 '希望'이라는 끈을 놓지 않았다. 양기대는 16代 光明市長 當選, 17代 光明市長 選擧에서는 京畿道內 得票率 1位를 記錄했다.

學歷 [ 編輯 ]

經歷 [ 編輯 ]

  • 1988.04~2004.01: 동아일보 政治, 經濟, 社會部 記者
  • 2004.03~2004.04: 第17代 總選 열린우리당 中央選擧對策委員會 代辯人
  • 2004: 美國 버클리大學校 招請 硏究員
  • 2006: 열린우리당 首席副代辯人
  • 2006: 大統領直屬 東北亞 時代委員會 諮問委員
  • 2006~2008: 中國 國立 우한大學校 客座敎授
  • 2008.09~2010.08: 민주당 黨代表 言論特報
  • 2009: 일자리放送 일자리 弘報大使
  • 2010.07~2014.06: 第16代 民選 5期 京畿道 光明市長
  • 2012: 延邊科學技術大學校 名譽敎授
  • 2014.07~2018.03: 第17代 民選 6期 京畿道 光明市長
  • 2018.05: 社團法人 유라시아平和鐵道포럼 常任代表
  • 2018.08~2019.08: 國立韓國交通大學校 特任敎授
  • 2020.03~: 더불어民主黨 京畿道當 光明市 을 地域委員會 委員長
  • 2020.08~2022.10: 더불어民主黨 京畿道當 副委員長
  • 2021.05~2022.10: 더불어民主黨 政策委員會 常任副議長
  • 2021.06~2022.10: 民主硏究院 常任副院長

議政 活動 [ 編輯 ]

  • 2020.05~: 第21代 國會議員(京畿 광명시 을, 더불어民主黨 )
    • 2020.06~2022.05: 第21代 國會 前半期 行政安全委員會 委員
    • 2020.06~2021.05: 第21代 國會 前半期 豫算決算特別委員會 委員
    • 2020.09~2021.05: 第21代 國會 前半期 豫算決算特別委員會 豫算決算審査小委員會 委員
    • 2021.07~2022.05: 第21代 國會 前半期 豫算決算特別委員會 委員
    • 2021.11~2022.04: 第21代 國會 中央選擧管理委員會 委員(문상부) 選出에 關한 人事聽聞特別委員會 委員
    • 2022.07~: 第21代 國會 後半期 企劃財政委員會 委員
    • 2023.02~: 第21代 國會 人口危機 特別委員會 委員

受賞 [ 編輯 ]

  • 1995 韓國言論對象
  • 1995 韓國祈子床
  • 1997 韓國祈子床
  • 2012 大韓民國 인터넷疏通/소셜미디어對象 ‘소셜CEO賞’
  • 2013 全國 基礎自治團體長 매니페스토 優秀事例 競進大會 ‘일자리公約 分野’ 最優秀賞, ‘公約履行 分野’ 優秀賞
  • 2014 大韓民國 有權者 對象
  • 2015 大韓民國 幸福나눔奉仕 ‘地方自治發展部門’ 對象
  • 2015 大韓民國 有權者 對象
  • 2015 韓國을 빛낸 創造經營人 ‘革新經營 部門’ 對象
  • 2015 全國 基礎自治團體長 매니페스토 優秀事例 競進大會 ‘公約履行 分野’ 最優秀賞
  • 2015 韓國의 最高 經營引上 創造經營部門 大賞
  • 2015 서울 석세스 어워드 政治部門 基礎團體長 對象
  • 2016 조선일보 韓國의 影響力 있는 CEO 選定(創造經營部門)
  • 2016 每日經濟 第2回 韓國經濟를 빛낸 人物 選定
  • 2016 茶山牧民對象(本相)
  • 2016 大韓民國 有權者 對象
  • 2017 韓國經濟를 움직이는 CEO賞
  • 2017 大韓民國 有權者 對象

著書 [ 編輯 ]

  • 變革의 리더(크림북스, 2018)
  • 廢鑛에서 奇跡을 캐다(메디치미디어, 2017)
  • 양기대의 熱情(그래픽 神話, 2014)
  • 期待하시라, 光明(메디치미디어, 2012)
  • 希望은 힘이 세다(서광애드, 2010)
  • 半 腐敗 戰爭 從軍記(미디어집, 2004)
  • 도둑共和國 權力과 財閥의 한판 잔치(동아일보사, 1997)

歷代 選擧 結果 [ 編輯 ]

實施年度 選擧 臺數 職責 選擧區 正當 得票數 得票率 順位 當落 備考
2004年 總選 17代 國會議員 京畿 光明市 을 열린우리당 32,713票
42.83%
2位 落選
2008年 總選 18代 國會議員 京畿 光明市 을 統合민주당 18,699票
36.06%
2位 落選
2010年 地方 選擧 16代 市場 京畿 광명시 民主黨 79,786票
57.16%
1位 初選 , 民選 5期
2014年 地方 選擧 17代 市場 京畿 광명시 새政治民主聯合 95,924票
61.12%
1位 再選 , 民選 6期
2020年 總選 21代 國會議員 京畿 光明市 을 더불어民主黨 58,130票
64.09%
1位 初選

各州 [ 編輯 ]

  1. “양기대 人物情報” . 《朝鮮日報》.  
前任
이효선
第16·17代 京畿道 光明市長 (民選)
2010年 7月 1日~2018年 3月 15日
後任
(權限代行) 강희진
박승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