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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우닝가 10番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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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우닝가 10番地
2002年 當時 英國 總理인 토니 블레어 와 美國 副統領 딕 체니 가 다우닝가 10番地 玄關門 앞에서 歡談하는 모습

다우닝가 10番地 (다우닝 街 10番地, 英語 : 10 Downing Street )는 英國의 總理 가 머무르는 官邸이다. 18世紀 에 지어져 300餘年에 達하는 歷史를 자랑한다. 本來 第1大藏經 을 위한 邸宅이었으나 19世紀 들어 英國 總理가 第1대장경을 兼任하게 되면서 自然스럽게 總理 官邸가 되었다. 다우닝가 10番地는 런던에서 가장 有名한 駐召命이기도 하며, 英國에서는 '넘버 텐'(Number 10)이라고만 부르기도 한다.

英國 런던 의 中心部, 시티오브웨스트민스터 다우닝가 에 자리해 있다. 官邸 內部의 放은 100個가 넘으며, 3層에는 個人 居住 空間이, 地下層에는 調理室이 있다. 나머지 層에는 會議室과 事務空間, 接受處, 待機室과 晩餐室 等이 있어, 總理가 業務를 보고 政府官僚, 代表人士, 外國 高位官吏 等이 만나 宴會를 갖는 用途로 쓰인다. 建物 뒤便에는 안뜰이 있어 約 2000 m² 크기의 庭園이 造成되어 있고, 이곳을 내려다보는 테라스度 있다. 周邊에 있는 세인트 제임시즈 公園 과 맞닿아 있으며 英國 國王 이 사는 버킹엄 宮殿 , 英國 議會 國會議事堂 웨스트민스터 宮殿 過度 가깝다.

1732年 조지 2歲 로버트 월폴 卿에게 다우닝가 10番地 一帶를 하사하였다. 當時 그곳에는 집 3채가 자리해 있었다. 월폴 卿은 該當 土地를 自己 個人用이 아닌 英國 大藏經의 官邸로 使用하라는 條件을 받아들였다. 以後 윌리엄 켄트 라는 建築家에게 세 집을 큰 집 하나로 합치는 工事를 依賴하였고, 그 結果 只今의 다우닝가 10番地 建物이 誕生하였다.

다우닝가 10番地 建物은 規模도 크고 國會議事堂 近處에 있어 位置도 適切했지만, 처음에는 별다른 關心을 받지 못했고 들어와 사는 總理도 少數에 그쳤다. 또 維持費用 問題도 있었으며 放置되고 낡아가면서 撤去 危機에 놓인 적이 한두番이 아니었다. 그러나 結局에는 살아남아 수많은 政府官僚 및 英國의 歷史的 事件들과 聯關되는 場所가 되었다. 1985年, 10番地 建物이 完工 250周年을 맞이하자 마거릿 對處 當時 英國 首相은 이 建物이 "英國의 遺産 中에서 가장 所重한 보배"일 것이라고 表現한 바 있다.

用度 [ 編輯 ]

現在 다우닝가 10番地에 居住하는 者는 다음과 같다.

그리고 英國 內閣會議가 進行되는 內閣會議室이 자리해 있으며, 다우닝가 10番地 入住者인 里市 수낵 總理가 會議를 主宰한다. 또 英國 政府의 運營計劃과 外交政策을 다루는 總理 執務室도 있다. [1]

歷史 [ 編輯 ]

다우닝가의 起源 [ 編輯 ]

다우닝가 10番地에는 元來 세 채의 建物이 들어서 있었다. 먼저 세인트 제임시즈 公園 을 내려다보는 '더 하우스 앳 더 백' (The House at the Back)이란 이름의 邸宅 이 있었고, 그 뒤便에 聯立住宅 커티지 (시골집)가 있었다. 聯立住宅은 1682年~1684年에 조지 다우닝 準男爵 이 지은 建物 中 하나였다. 只今의 建物을 두고 '타운하우스'라 부르는 것의 由來가 되기도 했다.

올리버 크롬웰 찰스 2歲 의 스파이로 惡名이 藉藉했던 다우닝 準男爵은 不動産에 投資하여 相當한 富를 쌓았다고 한다. [2] [3] [4] 1654年에는 세인트 제임시즈 公園 南쪽 一帶 敷地를 賃借契約으로 사들였다. 바로 뒤에는 自身의 邸宅이 있었고 國會議事堂까지는 걸어갈 수 있는 距離였다. 다우닝은 "적합한 級(good quality)의 분들이 살 만한" 聯立住宅街를 造成할 計劃을 세웠다. [5] 그가 지은 거리는 自身의 이름을 따서 ' 다우닝가 '가 되었으며, 다우닝가의 建物 中 가장 큰 것이 只今의 다우닝가 10番地가 된 것이다.

조지 다우닝 準男爵 의 肖像. 1675-1690年頃, 토머스 스미스. 포그 博物館 所長.

投資 意志로만 보면 一瀉千里였지만 實際로는 그렇지 못했다. 于先 使用하고자 한 土地의 賃借權을 갖고 있던 햄든 街에서 土地 賣買를 拒絶하였다. 다우닝은 그에 맞섰으나 敗訴하였고, 實際로 工事에 들어가기까지는 30年의 歲月을 더 흘려보내야 했다. [6] 햄든 街의 賃借權이 滿了되자 다우닝은 西쪽 土地로 建設할 수 있는 許可를 받았고, 더 새로운 不動産 開發로 機會삼을 수 있게 되었다. 1682年에 發行된 새 保證書에서는 "조지 다우닝 卿은...서쪽 끝의 言及한 公園의 壁으로부터 14피트 以內에는 짓지 않는다는 條件으로...주택 新築[을 許可한다]"라고 되어 있다. [5] 1682年부터 1684年까지 다우닝은 馬車保管所와 馬廏間, 그리고 公園을 내려다볼 수 있는 空間이 딸린 2層짜리 聯立住宅들이 늘어선 막다른 거리를 造成하였다. 以後 이 洞네의 住所는 數次例 바뀌었으며 1787年에는 5番地가 只今의 '10番地'로 命名되었다. [7]

다우닝은 建築家 크리스토퍼 렌 을 雇用해 住宅 設計를 시켰다. 規模가 크긴 했지만 부드러운 地盤에 얕은 基礎를 놓아 큰 豫算 들이지 않고 建物을 빠르게 쌓아올렸다. 建物 正面은 甓돌 무늬를 흉내내기 爲해 일부러 線들을 그려넣었다. 윈스턴 처칠 은 10番地 建物에 對해 "싸게 먹으려던 契約者가 짓고 自己 이름까지 붙인, 위태롭고 가벼운 建物"이라 表現하기도 했다. [8]

다우닝가의 윗쪽 끝은 세인트 제임시즈 公園路 이어지는 막다른 길이었기 때문에 다우닝가는 조용하고 隱密한 洞네가 되었다. 1720年 廣告에서는 "...꽤나 트인 곳 (特히 안쪽 끝)으로, 매우 큼직하고 잘 지어진 住宅이 네다섯 個 있으며, 훌륭하거나 高貴한 분들께 알맞습니다. 各 住宅에는 태라스 散策路가 딸려, 세인트 제임시즈 公園의 快適한 眺望을 담고 있습니다."라고 弘報하고 있다. [9] [10] 實際로 다우닝가에는 有名 人士들이 여럿 居住하였는데, 1688年부터 1689年까지는 野머스 伯爵夫人 이, 1692年부터 1696年까지는 랜즈다운 警 이, 1699年부터 1703年까지는 그랜텀 伯爵 이 10番地에 머물렀다. [10]

다만 정작 다우닝 준남작은 다우닝가에 살지 않았다. [11] [12] 1675年에 케임브리지로 돌아가 末年을 보냈고, 그곳에서 1684年에 死亡했다. 오늘날 다우닝가 10番地 入口의 休憩室에는 그의 肖像畫가 걸려 있다. [13]

'하우스 앳 더 백' [ 編輯 ]

헨드릭 댕커츠 의 <화이트홀 宮殿> (The Palace of Whitehall, 1660-1679年頃). 세인트 제임시즈 公園 의 西쪽에서 바라본 風景으로 '하우스 앳더백'은 맨 오른쪽에 있으며, 그 옆의 八角形 建物이 투係長이었다.

다우닝가 10番地를 構成했던 세 建物 中에서 가장 큰 建物인 '하우스 앳 더 백'(House at the Back)은 1530年頃 화이트홀 宮殿 바로 옆에 지어졌던 邸宅이었으며, 그 以後로도 再建築, 增築, 改補修를 여러 番 거쳤다. 元來는 '鬪鷄下宿집'(Cockpit Lodging)이라 부르던 여러 建物 中 하나였는데, 鬪鷄 張으로 쓰던 八角形 建物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17世紀 初 투係長이 公演場과 劇場으로 바뀌었고 名譽革命 以後에는 內閣會議가 祕密裏에 召集되기도 하였다. [14]

'하우스 앳더백'은 화이트홀 宮殿의 管理者였던 토머스 니벳 이 지내던 宿所로 몇年間 쓰였다. 그는 參考로 國王 제임스 1歲 의 暗殺 陰謀를 꾸미美던 가이 포크스 를 逮捕한 것으로도 有名하다. 以前에는 그 옆집에 살았었는데 只今의 다우닝가 10番地 建物 자리와 거의 近接한 位置였다. [15] [16] 何如間 이때부터 '하우스 앳더백'은 王家 一員이나 政府 閣僚들이 種種 들어와 살기 始作했다. 特히 엘리자베스 公州 가 1604年부터 이곳에 머물다 1613年 프리드리히 5歲 폰 팔츠 와 結婚하면서 하이델베르크 로 移徙를 갔다. 엘리자베스의 孫子 조지 하노버의 選帝侯 였으며 後날 英國 國王에도 卽位하였다. 또 曾孫子 조지 2歲 는 1732年 월폴에게 邸宅을 하사하게 된다. [17] 國王 福券에 貢獻한 조지 몽크 는 1660年부터 들어와 살면서 1671年 逝去할 때까지 살았다. 1667年부터 1672年까지 財務委員團 議長을 맡을 當時에는 會計方式을 바꾸고 國王의 支出 權限을 더욱 擴大하기도 하였다. 特히 다우닝가를 조성한 조지 다우닝 準男爵이 그의 祕書로 일하면서 이 같은 改革을 主導했다는 推測이 있다. 조지 몽크는 只今의 第1大藏經과 總理가 사는 집에 居住한 最初의 財務長官이기도 하다. [18]

1671年에는 버킹엄 工作 조지 빌리어스 찰스 2歲 캐벌 內閣 에 合流할 當時 이곳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빌리어스는 相當한 豫算을 들여 집을 다시 지었고, 그 結果 널찍한 邸宅이 誕生하였다. 화이트홀 宮과 나란히 있는 同時에 庭園에서는 세인트 제임시즈 公園의 風景이 펼쳐진 邸宅이었다. [19] 1676年 빌리어스가 隱退하자, 찰스 2世의 딸 샐럿 피츠로이 夫人이 에드워드 리 와 結婚한 뒤 이곳에 들어와 살기 始作했다. 以後 國王이 邸宅 增築 工事를 再嫁하여 3層에 다락房, 地下層까지 지닌 建物이 되었다. 이때 지어진 內部構造는 오늘날 10番地 建物의 뒤쪽 區域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20] (1677年 計劃도 參考) [21] [22] 이 같은 工事를 進行한 데에는 建物 自體가 템스江 隣近의 늪地盤에 자리잡은 탓에 構造的 損傷을 입어 修理가 切實했던 理由가 있었다. [23] (다우닝가 全體가 다 그랬지만) 10番地 建物 亦是 設計 미스로 인해 基盤을 얕게 판 탓에 問題를 種種 일으켰고, 1960年에 와서야 말뚝을 깊게 박고 그 위에 10番地 建物을 다시 지어 解決할 수 있었다. [24]

에드워드 리는 名譽革命 以後 제임스 2歲 를 따라 亡命에 나섰다. 1690年 윌리엄 3歲 메리 2歲 는 오라녜 共의 卽位에 貢獻한 네덜란드 將軍 헨드릭 판 나소-우에르커르크 에게 '하우스 앳더백'을 하사하였다. 나소는 自身의 이름을 英語式으로 '오버커크'로 바꾸고 그곳에서 지내기 始作하였으며, 1708年에 死亡했다. [20] 1720年 오버커크 否認도 世上을 떠나자 '하우스 앳더백'은 王家 所有로 다시 돌아왔다. 재무부는 2,522파운드의 豫算을 策定해 "最高의 狀態, 第一 튼튼한 狀態로 修理하고 맞춰나가기 爲한" 勅令을 내렸다. 여기에는 "다우닝가로 이어지는 뒤쪽 複道를 손보고 새 大門을 낼 것, 새 便所를 지을 것, 예전에 女王님이 事實 적에 다우닝가로 나오려는 侍女들을 위해 만들어진 쓸모없는 複道를 解體할 것, 큰 납收租와 파이프의 鑄物을 새로이 하고 그 水槽에 새 틀을 놓아 首都가 집안으로 들어오도록 할 것"이라는 內容이 담겼다. [25] (1720年頃 다우닝가 10番地와 係長下宿집 자리를 參考할 것) [22] [26]

'하우스 앳더백'이라는 이름 亦是 집主人에 따라 바뀌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리치필드 하우스였다가 1690年에는 오버커크 하우스로 바뀌었고, 1720年에는 다시 보트마 하우스로 改名하였다. [27]

第1大藏經의 邸宅 [ 編輯 ]

로버트 월폴은 조지 2世로부터 下賜받은 하우스 앳더백과 다우닝가의 住宅 두 채를 第1大藏經 執務室로 처음 使用하게 되었다.

보트마 伯爵이 死亡하자 '하우스 앳더백'은 다시 王室 所有로 돌아갔다. 조지 2歲 는 英國 最初의 總理로 불리는 로버트 월폴 에게 이 建物을 하사하였는데, 財政을 安定시키고 平和를 維持하며 하노버 王家의 承繼를 確固히 하는 等, 나라에 奉仕한 바가 크다는 것이 그 理由였다. 또 조지 2世는 10番地를 비롯한 다우닝가 住宅 두 곳의 賃借權을 갖고 있어, 이 둘도 월폴에게 下賜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월폴은 國王의 下賜品을 바로 받지는 않았다. [28] 代身에 該當 邸宅을 自身이 아닌 第1大藏經의 邸宅으로서 하사해달라고 要請하였고, 조지 2世는 이를 受諾하였다. 이로써 월폴은 現任 第1大藏經으로서 그곳에서 살 수 있게 되었으나 언젠가는 後任에게 비워주도록 한 것이었다. [29]

以後 邸宅 擴張의 必要性을 느낀 월폴은 옆집 코티지의 貰入者였던 치킨 氏에게 다우닝 街의 다른 집으로 移徙가면 안되겠느냐고 說得하였다. [30] 그런 뒤 코티지와 뒷쪽의 邸宅을 10番地로 編入하였다. 월폴은 當代 이름난 建築家였던 윌리엄 켄트 에게 이들 建物들을 하나로 합치는 工事를 進行해달라고 依賴하였다. 켄트는 이들 建物 사이에 2層짜리 構造物을 덧대어 하나의 큰 집으로 묶는 方式을 썼다. 1層에는 긴 房 하나가 있고 그 위로는 여러 個의 房이 있는 構造였다. 남은 內部空間은 안뜰로 바꾸었으며, 다우닝가와는 複道 로 連結되도록 하였다. 建物이 하나의 構造로 統合되자 켄트는 그 內部를 모조리 撤去하고 다시 工事하였다. 그리고는 하우스 앳더백의 3層에 페디먼트 를 올렸다. 또 월폴이 國會議事堂으로 서둘러 갈 수 있도록 세인트 제임시즈 公園 쪽으로 나가는 北쪽 大門을 閉鎖하고 다우닝가 쪽에 大門을 내었다.

여기까지의 모든 工事는 總 3年이 걸렸다. 1735年 9月 23日 <런던 데일리 포스트>에서는 "어제 로버트 월폴 警께서 女史님과 家族분들과 함께 세인트제임스 廣場의 自宅에서 나와 세인트 제임시즈 公園 쪽 재무부와 맞닿아 있는 새 邸宅으로 移徙하였다 한다"고 傳했다. [31] 工事 費用이 얼마나 들어갔는지는 傳해지지 않지만, 처음 豫想費用은 8,000파운드에 達했으며 最終的으로는 20,000파운드를 넘지 않았을까 하는 推測이 있다. [32]

只今의 다우닝가 10番地 建物은 特有의 검은色 大門으로 有名하지만, 월폴이 처음 入住할 當時만 하더라도 그런 門은 없었고 40餘年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設置되었다. 켄트의 設計圖에서 그려진 大門은 큼직하고 優雅한 空間을 감추기라도 한 듯,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平凡한 門에 지나지 않았다. 反面 邸宅 內에는 堅木과 大理石바닥, 反哭 몰딩 마감, 멋진 기둥, 大理石 壁暖爐선반 等으로 꾸며진 60餘個의 房이 있었고, 西쪽方面으로는 세인트 제임시즈 公園의 아름다운 眺望이 可能했다. 그 中에서 가장 큰 房은 書齋로, 40 × 20피트 크기에 巨大한 窓이 달려 있고 그 窓을 통해 公園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設計圖에서는 '閣下의 書齋' (My Lord's Study) [33] 라 붙여진 이곳은 後날 總理와 內閣人士들이 모이는 內閣실 (Cabinet Room)이 되었다. [34]

월폴은 理事 直後 書齋 바깥의 땅 一部를 테라스와 庭園으로 조성하라는 指示를 내렸다. 1736年 4月 發行된 特許狀 에서는 "...國王陛下의 세인트 제임시스 公園에 位置한, 그리고 只今은 國王陛下의 財務相 閣下께서 居住하시는 邸宅에 屬해 隣接해 있는 庭園 敷地 一部는,...국왕의 이름으로... 얼마前에 만들어 造成되었다"고 적고 있다. 또 같은 文書에서 다우닝가 10番地는 "國王陛下의 財務性 廳舍로 合倂, 統一되었으며, 當分間 國王陛下의 第1隊長이 使用하고 居住할 곳으로 남게 된다"고 밝혔다. [35]

'크고 멋적은 집' [ 編輯 ]

윌리엄 피트 는 首相으로서는 歷代 最長 期間인 20餘年間 다우닝가 10番地에 머물렀다. 피트는 10番地를 "나의 크고 멋적은 집"이라 부르곤 했다.

월폴은 1742年까지 10番地 建物에서 살았다. 처음부터 後任 第1大藏經 에게 자리를 물려주고자 한 空間이었지만, 월폴 以後의 다섯 名은 各自 自身의 邸宅에서 살았으며 實際로 後任이 들어와 살기까지는 21年이 더 걸렸다. 이처럼 10番地 建物을 忌避하는 性向은 20世紀 初까지 이어져, 1735年부터 1902年까지 總 31名의 大藏經이 赴任하였지만 그 中 16名 (월폴 包含)만이 10番地 建物에서 살았다. [36]

大藏經들이 10番地 建物에 들어와 사는 것을 忌避한 理由는 于先 모두들 그보다 더 크고 훌륭한 邸宅을 所有하고 있던 貴族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에는 10番地 建物이 平凡한 建物에 不過했다. 이 때문에 大藏經들은 10番地 建物의 所有權을 自身이 直接 들어와 살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政治的 補償으로서의 特權으로 活用하기도 하였다. 大部分 財務長官이나 그 麾下, 하니면 親舊나 親戚들에게 10番地 建物을 賃貸해 주었다. [37] [38] [39] [40] [41] [42]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Trump and May to meet for talks in Davos after ‘special relationship’ tested” . 2018年 1月 20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8年 3月 15日에 確認함 .  
  2. Bolitho, pp. 16?21.
  3. Jones, pp. 24?32.
  4. Feely, pp. 17?31.
  5. Minney, p. 28.
  6. Feely, pp8?31.
  7. Jones, p. 41.
  8. Bolitho, p. 20.
  9. 原文: "... a pretty open Place, especially at the upper end, where are four or five very large and well-built Houses, fit for Persons of Honour and Quality; each House having a pleasant Prospect into St James's Park, with a Tarras Walk"
  10. Minney, p. 34.
  11. Jones, p.32.
  12. Feeley, p. 32.
  13. Jones, see back cover picture credited to Robert Hill @ BBC.
  14. Minney, p. 23.
  15. Jones, pp. 16?18.
  16. Minney, pp. 23?24.
  17. Minney, p. 24.
  18. Minney, pp. 24?25.
  19. Jones, pp. 20?21.
  20. Jones, p. 21.
  21. “fig50” . 브리티시 히스토리 온라인 . 2013年 3月 15日에 確認함 .  
  22. British History Online. 원出處 - ' No. 10, Downing Street Archived 2014年 8月 29日 - 웨이백 머신 ', Survey of London: volume 14: St Margaret, Westminster, part III: Whitehall II (1931), p. 113?141. 2008年 7月 22日 確認.
  23. 새뮤얼 피프스 는 화이트홀이 江물에 잠길 程度로 潮水差가 컸으며, 이 一帶 建物은 沈降을 막으려면 基礎를 깊게 파야 할 것이라고 남긴 바 있다.
  24. Minney, p. 25.
  25. Jones, p. 23.
  26. “fig51” . British History Online . 2013年 3月 15日에 確認함 .  
  27. Jones, Nigel R. (2005). 《Architecture of England, Scotland, and Wales》 . Greenwood Publishing Group. 187쪽. ISBN   978-0-313-31850-4 . 2016年 10月 13日에 確認함 .  
  28. See letter, dated, "Downing Street, 30 June 1742", from Horace Walpole to Sir Horace Mann : "I am writing to you in one of the charming rooms towards the Park: it is I am willing to enjoy this sweet corner while I may, for we are soon to quit it. Mrs. Sandys came yesterday to give us warning; Lord Wilmington has lent it to them. Sir Robert might have had it for his own at first: but would only take it as First Lord of the Treasury. He goes into a small house of his own in Arlington Street, opposite to where we formerly lived". (Horace Walpole's Letters, ed. Cunningham, 1857, I, p. 246.) British History Online, 원出處 - ' No. 10, Downing Street Archived 2014年 8月 29日 - 웨이백 머신 ', Survey of London: volume 14: St Margaret, Westminster, part III: Whitehall II (1931), pp. 113?141. 2008年 7月 21日 確認.
  29. Feely, p. 34.
  30. Bolitho, p. 25.
  31. Minney, p. 50.
  32. Seldon, p. 16.
  33. Jones, p. 46.
  34. Miney, p. 47.
  35. Minney, pp. 46?47.
  36. Jones, p. 51.
  37. Minney, p. 29.
  38. Jones, p. 52. Henry Pelham, for example, had his own spacious home and had no need for Number 10. In what one historian called a piece of "blatant political corruption", he allowed his son-in-law, Henry Clinton , Earl of Lincoln, to live there from 1745 to 1753 even though Clinton was not involved in politics.
  39. Minney, pp. 173 and 179. Lord Liverpool assigned it to his two Chancellors of the Exchequer, Nicholas Vansittart (1812?1823) and Frederick Robinson (1823?1827).
  40. British History Online, Letter (B.M. Addl. MS. 38292, f. 11) from Lord Liverpool to Charles Ellis, dated 22 January 1823, is of interest. "When you spoke to me some time ago upon the subject of the House in Downing Street, I was under the impression, as you were yourself, that the house was the King's & that he might dispose of it in any manner he might think proper. Upon Inquiry, however, it appeared that the House was attached to the Treasury as a Part of the Office. That the First Lord of the Treasury occupies it if he thinks proper. If he declines it, the Chancellor of the Exchequer occupies it, not as Chancellor of the Exchequer, but as second in the Commission of the Treasury. That if he declined it, it would go to the next in the Commission, or it might possibly be disposed of by the Board to any Member or Officer of the Treasury; but could not, & never has been detached from it. You are mistaken in supposing that Mr. Vansittart is the only Chancellor of the Exchequer who, without being first Lord of the Treasury, occupied it. Lord North certainly occupied it during the two years he was Chancellor of the Exchequer only. I believe Mr. Charles Townshend occupied it, but I know Mr. Dowdeswell did, & it is remarkable that he is, I believe, the only instance of a Chancellor of the Exchequer upon Record who was not in the Cabinet. The House stands in fact upon the same footing as the Houses of the Admiralty, which could not be assigned to any Person not belonging to that office".
  41. Bolitho, p. 116. A few peers lived in Number 10 out of necessity. The Duke of Wellington, for example, grudgingly lived there for eighteen months between 1828 and 1830 because his own home, Apsley House, was undergoing extensive renovations. He left as soon as it was finished.
  42. At the end of the 19th century, Lord Salisbury lived in his house on Arlington Street and the Cecil estate Hatfield House . During his last ministry from 1895 to 1902, Arthur Balfour , his nephew lived in Number 10. Minney, p. 322.

外部 링크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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