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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청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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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本 情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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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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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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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亡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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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年 9月 2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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選手 情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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守備 位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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投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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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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選手 經歷
監督 經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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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 國家代表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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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選手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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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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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청옥
(金淸玉, ? ~
2021年
9月 21日
)은
KBO 리그
롯데 자이언츠
의 前 코치이다. 實業 野球
農協 野球團
에서 選手 生活을 했으며
서울
에서 열린 1963年 아시아 野球 選手權 大會 國家代表로 出戰해 優勝했다. 隱退 後
農協 野球團
監督職을 歷任했으며
1984年 夏季 올림픽
野球 示範 鉗忌에 代表팀 監督職을 歷任했다.
選手 時節
[
編輯
]
1960年
경남고등학교
를 卒業, 농협에 入團했다.
[1]
新人 選手로서
[2]
1962年 열린 第8回 全國 아구 選手權 大會에 出戰해 농협이 優勝을 차지했고 大會 MVP를 受賞했다.
[3]
1963年 入隊해 새로 創團한 海軍憲兵監室 野球團 所屬으로 軍 服務를 마쳤다.
[4]
해헌 所屬 當時
서울特別市
에서 열리는
1963年 아시아 野球 選手權 大會
에 拔擢되었다. 9月 26日
필리핀
戰에서 先發 登板했으며 이날 9番 打者로 出戰해 4回 2壘打를 記錄했다.
[5]
大會 마지막 날
日本
科의 對決에서 勝利하며 大會 開催以後 처음으로 大韓民國이 優勝했다.
[6]
軍 服務를 마친 以後 다시 農協 野球團으로 復歸했다. 농협의 州 側 選手로 活動했으나
[7]
60年代 末 농협이 繼續해서 下位圈을 記錄하자 旣存 選手들을 交替하기로 決定하면서 1970年 初 隱退했다.
[8]
隱退 以後
[
編輯
]
隱退 以後 實業 野球 審判敎育을 받아 專屬審判으로 競技에 나오기도 했으며,
광주일고
監督職을 1976年부터 1979年 歷任했다.
[1]
[9]
以後 實業 野球
農協 野球團
의 監督職을 歷任했다. 1983年에 아시아 野球 選手權 大會, 1985年 大陸間컵에
大韓民國 野球 國家代表팀
코치로 拔擢되었고 1年 뒤에 열린
LA 올림픽
에 監督을 맡았다. 3, 4位戰까지 進出했으나
臺灣
에 0-3으로 敗하며 4位를 記錄했다.
[10]
1986年 시즌 後
프로野球
롯데 자이언츠
에 投手 코치職을 提案받아 87年부터 3年間 契約金 3千萬 원, 年俸 2千7百萬 원에 契約했다.
강병철
當時 롯데 監督은 그를 비롯해 코치陣 改編에 反對했으나 롯데가 강병철 監督과 再契約 하지 않기로 하며 正常的으로 프로 코치職에 歷任할 수 있게되었다.
[11]
1987年 시즌 뒤 새로 赴任한
어우홍
監督은 投手코치를 2名 두기로 決定해 在日同胞
김정행
을 플레잉코치로 昇格하려 했다.
[12]
같은 팀 에이스이자 看板 投手
최동원
과 不便한 關係라 失敗했다.
[
出處 必要
]
1989年 롯데 자이언츠가 最下位를 記錄했고,
허구연
打擊코치와의 不和說 等이 나오자 코치陣 改編에 關한 이야기가 나왔고, 1989年 6月 29日부터 2군 投手코치로
[13]
자리를 옮겼다.
그 뒤,
어우홍
監督이 1989年 시즌을 끝으로 물러난 後
金晋榮
前 청보 監督이 같은 해 11月 2日부터 2年 契約 形式으로 롯데 監督에 就任하면서
[14]
斷行된 改編에 따라 팀을 떠나야 했으며 本人의 後任으로는
金晋榮
監督의 삼미-청보 時節 弟子인
장명부
가 같은 달 30日부터 1年 契約 形式으로 赴任했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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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年
9月 21日
死亡해
京畿道
龍仁市
平穩의 숲에 安葬되었다.
[16]
各州
[
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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