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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갈피 속의 오늘]1994年 ‘르네상스’ 박용찬氏 死亡|東亞日報

[冊갈피 속의 오늘]1994年 ‘르네상스’ 박용찬氏 死亡

  • 入力 2005年 8月 23日 03時 08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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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年 무덥던 여름 大邱 향촌동. 6·25戰爭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이곳은 뜻밖의 文化空間으로 거듭난다. 避亂 文人들이 大擧 몰려들면서 바야흐로 ‘大邱 文學의 르네상스’를 謳歌하게 된 것.

오상순 김팔봉 마해송 조지훈 朴斗鎭 構想 최정희 최상덕 전숙희 최태응 정비석 양명문 최인욱 장만영 김이석 김윤성 李相魯 유주현 김종삼 성기원 이덕진 방기환 等 文人과 作曲家 김동진, 畫家 李仲燮 等 韓國을 代表하는 藝術家들이 大邱에서 避亂살이를 始作했다.

이들의 舍廊房은 1951年 1·4後退 以後 향촌동 골목 안에 門을 연 클래식 音樂 感想室 ‘르네상스’. 文人들은 해가 지면 하나 둘 ‘르네상스’로 모여 憂愁에 젖거나 때론 실없는 弄談을 하다가 三三五五 隣近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막걸리 盞을 기울이곤 했다. ‘르네상스’는 요즘 말로 하면, 文化 살롱이었던 셈이다.

陸軍本部와 유엔軍司令部 等이 大邱에 駐屯하던 時節, 外信 記者들은 ‘르네상스’를 보고 “廢墟 더미에서 바흐의 音樂이 들린다”고 놀라워했다. 外信 記者들의 感歎詞처럼 山등성이 한두 個 너머가 바로 戰線이었던 暗鬱한 盆地 大邱에 그만한 音樂 感想室이 자리하게 된 것은 이 집 主人 박용찬 氏 德分이었다.

朴 氏는 湖南 甲富의 아들이었다. 避亂길에도 오로지 레코드 한 트럭만 愛之重之 싣고 내려 왔다는 이야기가 傳說처럼 남아 있을 程度로 音樂 愛好家였다. 그건 돈으로도 안 되고 미쳐야 하는 일이었다. 世上에 富者집 아들은 많아도 그런 音樂 미치광이는 드물었다는 게 生前의 그를 아는 이들의 回顧다.

1953年 戰爭이 끝나자 避亂 文人들도 뿔뿔이 大邱를 떠났다. 마지막까지 大邱를 지켰던 小說家 최태응과 詩人 構想마저 1950年代 後半 서울로 移住해 버리자 大邱 文段은 沈滯와 空白 狀態에 빠졌다. 숱한 話題와 文人들의 紀行과 浪漫이 깃든 향촌동 골목은 다시 무더위에 倦怠만 길게 늘어졌다.

朴 氏도 1959年 서울로 돌아갔다. 그리고 鍾路1街 永安빌딩 4層에 서울의 ‘르네상스’를 열었다. 이곳은 얼마 안 돼 音樂學徒들과 藝術에 목마른 이들에게 音樂에 對한 渴症을 풀어주는 名所로 자리를 잡았다.

朴 氏는 1987年 ‘르네상스’의 門을 닫으면서 1萬3000餘 種에 達하는 各種 音盤과 오디오 機器 等을 文藝振興院 藝術情報官에 寄贈했다. 朴 氏는 1994年 8月 23日 밤 78歲의 나이로 世上을 떠났다.

허문명 記者 ange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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