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冊갈피 속의 오늘]1997年 慰安婦 勳 할머니 歸國|東亞日報

[冊갈피 속의 오늘]1997年 慰安婦 勳 할머니 歸國

  • 入力 2005年 8月 4日 03時 12分


코멘트
古代 그리스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이승의 記憶을 지우기 위해 저승의 다섯 江 中 하나인 레테(忘却의 江)의 물을 마신다고 믿었다. 反對로 靈魂이 눈물의 골짜기(現世)로 돌아오기 위해선 亦是 이 江을 건너야 했다.

韓國人으로 日本人의 아내였던 勳 할머니. 그는 亡者(亡者)처럼 生死를 오간 것은 아니었지만 차라리 죽음보다 못한 삶의 수렁에서 自身의 모든 것을 스스로 잊어버려야 했다.

1942年 18歲의 꽃다운 나이에 日本軍 慰安婦로 끌려와 異域萬里 캄보디아에서 보낸 地獄 같은 날들.

1945年 日本軍 將校 多다쿠마 쓰토무를 만난 것은 그나마 不幸 中 多幸이었다. 난生 처음 겪는 ‘짐승들’을 더 以上 相對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多다쿠마가 지어 준 이름은 하나코(花子). 하지만 꽃처럼 華奢했던 女人에게 그가 남긴 것은 아비 없는 핏덩어리와 屈辱의 歲月이었다.

日帝가 물러가자 駐屯한 프랑스軍은 日本과 關聯된 사람은 모조리 處刑에 나섰다. 이어 政權을 잡은 크메르 루즈는 外國人이라면 無差別 虐殺했다.

이에 滿朔의 몸을 이끌고 정글로 避身한 女人은 진흙탕에서 첫딸 카오를 낳았다. 누가 들을까 呻吟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世上에 내놓았지만, 語尾보다 먼저 저世上으로 떠난 가엾은 딸이었다.

이런 渦中에 모진 목숨이나마 扶持하기 위해선 이름도, 말도, 家族도, 故鄕 山川도 머릿속에서 깡그리 지워버리는 것 外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그래도 生命은 끈질긴 것이어서 女人은 캄보디아人과 再婚해 두 딸과 아들을 낳았다. 이 亦是 幸福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들은 킬링필드 때 잃었고, 衝擊을 받은 男便은 酒酊뱅이가 돼 平生의 짐이 됐다.

多幸히 勳 할머니는 한 韓國人 事業家에 依해 뒤늦게나마 發見돼 1997年 8月 4日 故國 땅을 다시 밟을 수 있게 됐다. 55年 만의 歸國이었다.

하지만 故鄕에서도 그는 便히 쉴 수 없었다. 이듬해 5月에는 캄보디아 生活을 淸算하고 永久 歸國길에 올랐지만 老齡에다 韓國말까지 잊어버려 生活에 큰 不便이 따랐다.

結局 勳 할머니는 몇 個月 만에 캄보디아로 돌아갔고 2001年 2月 15日 “遺骸만은 故鄕에 묻어 달라”는 遺言을 남긴 채 한 맺힌 이 世上과 作別을 告했다.

장환수 記者 zangpab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火나요
    0
  • 推薦해요

댓글 0

只今 뜨는 뉴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