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알제리臺 蹴球選手였던 프랑스 作家 알베르 카뮈는 蹴球에 熱狂하는 現代人을 ‘蹴球라는 宗敎의 信徒’라고 表現한 적이 있다. 또 그가 그라운드를 聖戰(聖殿)으로, 스타플레이어를 카리스마的인 宗敎指導者로 比喩한 것도 재미있다. 蹴球選手의 一擧手 一投足이 一般人의 注目 對象이 되는 요즘 카뮈의 말이 實感난다.
가깝다고는 하나 亦是 山 설고 물 선 異國 땅인지라 3年 前 아들 곁을 찾아 日本에 건너온 90歲 老親(老親)의 唯一한 樂은 TV로 가끔 放映되는 蹴球競技를 보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蹴球에 關한 論爭이라면 80餘年差가 나는 孫子들과 한치의 讓步도 없다. 假令 아이들이 “야, 베컴이다, 프리킥 솜씨 正말 끝내주네”라고 호들갑을 떨면 “베컴인가 베칼인가 하는 아이 볼 車는 솜씨라야 別 거 아니던데 웬 亂離들이야. 볼 몰고 가는 솜씨는 안정환이가 한 手 위 아니냐?”라며 싸움을 건다.
老親은 日本프로蹴球 J리그 ‘시미즈 S 펄스’ 所屬으로 活躍 中인 안정환 選手의 熱烈한 팬이다. 언젠가 머리를 길러 端正하게 묶은 모습을 한 番 보고는 그만 팬이 됐다. 사내아이가 어릴 때에는 머리를 땋고, 長成하면 상투를 틀어 冠을 쓰게 했던 韓國의 傳統 속에 自然의 攝理에 順應했던 先人의 智慧가 깃들여 있다고 믿는 老親에게는 安 選手의 모습이 퍽 印象的이었던 듯하다.
昨年 월드컵 때의 일이다. 노란色 銀色으로 머리카락을 물들인 日本 選手들이 TV에 비칠 때마다 老親은 혀를 끌끌 찼다. “어허, 내 눈이 沈沈해져서 그러나. 쟤들이 꼭 원숭이 같아 보이는구나. 第 根本을 잃고 딴 精神에 사는구나” 하며 歎息했다. 그後 韓國 選手들 가운데서도 이런 모습이 많아지자 老親은 더없이 시무룩해 했다. 老親은 ‘世上이 모두 變했는데 더 以上 말해 뭐 하겠느냐’는 생각에서인지 이제 慨歎하지도 않는다.
예부터 韓國 어르신들은 장성해 가는 子息들의 머리를 빗겨주며 오순도순 對話를 나누는 것을 큰 기쁨으로 알았다. 어릴 적 내 故鄕에서는 婚談이 오갈 때 仲媒쟁이가 閨秀의 머리카락을 新郞이 될 사람의 집에 傳해 주었다. 閨秀의 머리카락이 바르고 請黑色이면 앞으로 태어날 子息이 바르고 恭遜하다 하여 좋은 閨秀감으로 꼽혔다. 反面 머리카락이 바르지 못하거나, 머릿결이 노랗거나 붉으면 그 閨秀가 낳을 子息들의 心身이 健康하지 못할 것으로 알았다. 봄에 자라나는 草木의 잎이 곧고 茂盛하면 열매 또한 充實하듯 사람 또한 그럴 것이라는 믿음에서였다. 國際結婚이 흔한 요즘에야 통할 말이 아니지만.
勉庵 崔益鉉(勉庵 崔益鉉) 先生이 乙未年 朝廷의 斷髮令에 反對해 올렸던 上疏에서 “神의 머리는 끊을 수 있거니와 神의 머리카락은 끊을 수 없다”고 했던 것을 儒敎的 價値觀의 單純한 固守만으로 보고 싶지 않다. 祖上의 아름답고 지혜로운 精神을 지키려 했던 斷乎한 意志의 表現으로 理解하고 싶다.
월드컵 4强, 韓國의 自尊心을 생각해서라도 머리카락을 물들이는 따위의 어설픈 ‘프로’ 行世는 이제 집어치웠으면 한다. 悠久한 歲月을 통해 어르신들이 우리의 四肢百體(四肢百體)에 심어준 自然的 삶, 野性的 삶의 象徵인 곧은 머리카락. 안정환 選手가 곧은 머리카락을 훨훨 날리며 골을 집어넣는 모습을 期待해 본다.
황용성 日本 '東아시아 傳承文化硏究所' 副所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