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아버지(이춘광·55) 어머니 (김미자·49)를 부둥켜 안고 펑펑 울었습니다.최우수선수로 뽑히고 나니 먼저 그때의 아쉬움이 떠올랐습니다』
修能試驗에서 40點을 넘지 못해 그렇게 바라던 漢陽大 進學 꿈을 접은 채 프로野球 유니폼을 입을 수밖에 없었던 李承燁(21·三星).》
2日 97프로野球 MVP로 選定된 그는 3年前의 「그 日」李 走馬燈처럼 떠오르는지 가장 기쁜 자리에서 닭똥같은 눈물을 흘렸다.
97프로野球 페넌트레이스 最高의 별로 選定된 「아기 獅子」 이승엽은 지난 94年 當時 高卒 新人으로서는 最高額인 契約金 1億3千2百萬원을 받고 投手로 三星 유니폼을 입었다.
그러나 그는 94年末 왼쪽 팔꿈치 뼈조각 除去 手術을 받아 마운드에 오를 수 없었다.
이승엽이 投手를 抛棄, 打者로 轉業한 것은 그의 天賦的 打擊 才能을 아까워한 우용득監督의 說得에 따른 것. 以後 3年만에 이승엽은 프로野球 最高의 打者로 거듭 났다.
柔軟한 몸과 부드러운 스윙, 임팩트 瞬間의 爆發力을 골고루 갖춘 이승엽을 백인천監督은 『가장 信賴할 만한 打者』라고 稱讚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試鍊은 끝나지 않았다. 95年 0.285, 96年 0.303의 불방망이를 휘두르던 그에게 지난해 겨울 突然 허리 痛症이 찾아온 것.
『뒤늦게 日本 오키나와 訓鍊캠프에 合流하기는 했지만 事實 올시즌을 抛棄하려 했어요. 박흥식코치가 눈물이 날만큼 魂을 내지 않았더라면 나는 올시즌 벤치나 지키는 身世였을 겁니다』
6月 들어 다시 打擊폼이 흐트러졌다. 이때 이승엽은 스스로 슬럼프를 헤쳐 나왔다. 「眞正한 努力은 背信당하지 않는다」는 座右銘에 따라 同僚들이 깊이 잠든 새벽 배트를 휘두르며 이를 악물었던 것.
『처음 두 해는 짧게 치며 正確한 打擊을 꾀했습니다. 그러나 올해는 팀의 中心打者로 「큰 것」을 노리고 打席에서 마지막 瞬間까지 功을 지켜본 것이 홈런王 登極의 祕訣입니다』
프로野球 最年少 最優秀選手에 選定된 李承燁. 그는 『즐겁게 미팅나가는 親舊들이 가장 부럽다』고 말하는, 아직도 여드름이 남아 있는 美少年이다.
그러나 負傷으로 받은 뉴그랜저 乘用車를 아버지께 드리겠다는 孝子이기도 하다. 亦是 强한자는 부드럽다.
〈김호성記者〉
-
- 좋아요
- 0
個
-
- 슬퍼요
- 0
個
-
- 火나요
- 0
個
-
- 推薦해요
- 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