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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五署-데이비드 윌슨, 연아를 방긋 웃게 만든 두 男子|東亞日報

브라이언 五署-데이비드 윌슨, 연아를 방긋 웃게 만든 두 男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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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入力 2010年 3月 3日 15時 39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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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오서는 캐나다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브라이언 誤書는 캐나다의 살아있는 傳說이다.
꿈은 重要하다. 꿈을 꾼 當事者가 그 꿈을 이루지 못할 것이 明白해졌더라도 꿈꾸길 멈춰선 안 될지 모른다. 꿈이 다른 누군가에게 傳해져 이뤄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때론 數十年의 歲月, 世代를 건너뛰어 實現되기도 한다. 이젠 世界 女子 피겨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金姸兒(19·高麗大)의 境遇가 딱 그렇다.

피겨 選手는 김연아의 어머니 박미희(51)氏의 어린 時節 꿈이었다. 朴氏는 어린 時節 겨울이면 꽁꽁 언 집 近處 昌慶苑(現 昌慶宮) 蓮못에서 얼음을 지쳤다. 어쨌든 그건 그저 ‘어린 時節’ 잠깐의 漠然한 꿈이었다. 나이가 들고, 結婚하고, 京畿 군포시에 定着하고, 아이들이 생기고. 이런 式으로 우리네 삶이란 어린 時節 꿈과는 漸漸 더 먼 쪽으로 흘러가는 法.

브라이언 戰鬪

그런데 朴氏가 38歲, 둘째딸 金姸兒가 6歲이던 1996年 7月 朴氏의 집 近處에 생긴 果川市民會館 室內 氷上場이 永永 사라질 수도 있었던 朴氏의 어린 時節 꿈을 불러냈다. 朴氏는 큰딸 애라(23)와 연아, 두 딸의 손을 붙잡고 얼음판을 찾았고 둘째딸 연아에게서 自身의 꿈을 代身 이룰 수도 있겠다는 希望을 보았다. 金姸兒가 스케이팅을 좋아한데다 才能도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1990年 9月生인 金姸兒가 世上에 태어나기 2年 半 남짓 前인 1988年 2月 캐나다 캘거리. 當時 27歲의 캐나다人 피겨 選手인 브라이언 五署(48)는 自身의 피겨 人生에서 가장 큰 꿈, 가장 큰 目標에 挑戰하고 있었다. 曺國 캐나다에서 열린 冬季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男子 싱글에서 金메달을 따는 것이었다.

올림픽 金메달, 平生에 걸친 그 꿈의 實現은 이제 아주 가까워졌다. ‘미스터 트리플 악셀’이라는 別名의 이 사내는 世界 男子 피겨 選手 中 3바퀴 半 점프(트리플 악셀)를 가장 잘 驅使했다. 4年 前인 1984年 사라예보 冬季올림픽에서 銀메달을 딸 때 그는 올림픽 舞臺에서 트리플 악셀을 驅使한 첫 番째 選手였다.

캘거리 올림픽이 열리기 바로 前해인 1987年 피겨 世界選手權大會에서 優勝도 차지해 이番 大會 가장 有力한 金메달 候補로 꼽혔다. 1981年부터 88年까지 8年 連續 캐나다 챔피언이기도 한 그는 캐나다 피겨 스케이팅의 얼굴이었다.

캘거리 冬季올림픽은 더구나 自身의 홈그라운드, 바로 캐나다에서 열리는 大會였다. 誤書에 對한 캐나다 國民의 期待는 컸다. 大會 開幕式에서 캐나다 選手團의 旗手로 나섰다. 프리스케이팅 演技가 끝나고 그는 만족스러운 表情을 지었다. 故國의 팬들 앞에서 優勝해야 한다는 重壓感이 있었지만 그는 꽤 좋은 演技를 펼쳤다. 單 한 番도 넘어지지 않았다. 優勝하기에 充分한 演技라고 그는 생각했다.

五署, 연아를 만나다

當時 피겨 採點은 9名의 審判이 8名의 選手에 對해 相對 評價한 것을 土臺로 順位를 가렸다. 9名의 審判 中 4名은 鼯鼠가 가장 잘했다고 採點했다. 하지만 5名은 美國人 選手인 브라이언 보이打盧哥 가장 잘했다고 採點했다. 5名 中 한 名의 採點表에서 보이打勞와 誤서의 點數 車는 0.1點에 不過했다. 그 0.1點에 金빛이 될 수도 있었을 誤서의 메달 色깔은 銀빛으로 바뀌었다.

一生一帶, 絶好의 機會에 誤書는 結局 올림픽 金메달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피겨 選手로서 最高의 榮光인 올림픽 金메달은 바로 傳해 世界選手權大會에서 誤書에 밀렸던 보이打奴에게 돌아갔다. 그게 피겨다. 이런 게 스포츠인 것이다. 둘의 熾烈한 라이벌戰은 두 사람의 이름을 따 ‘브라이언 戰鬪(Battle of the Brians)’로 命名됐다.

誤書는 그 敗北에서 큰 衝擊을 받았다. 보이打노는 施賞式이 끝나고 라커룸에서 본 吳서의 모습을 只今도 생생하게 記憶한다. 誤書는 스케이트靴度 벗지 않은 채 라커룸 안을 빙빙 돌고 있었다. 입이 벌어진 채 無表情한 얼굴이었고 손에는 施賞式 때 받은 꽃다발이 들린 채였다. 샤워室에 들어선 뒤 誤書는 바닥에 주저앉듯 쓰러졌다. 冬季올림픽 主催國 캐나다는 金메달을 한 個도 따지 못하고 銀메달 2個, 銅메달 3個로 全體 出戰國 가운데 13位에 그쳤다. 誤書는 大會가 끝나고 隱退를 宣言했다.

誤書는 當時 大會 京畿 錄畫 테이프를 그로부터 10年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淡淡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고 告白했다. 敗北의 衝擊을 克服하는 데 꼭 10年이 걸렸다.

피겨系의 歷史冊 속에 묻힐 수 있었던 ‘브라이언 戰鬪’의 傳說은 誤서의 育成으로 金姸兒에게 傳해졌다. 金姸兒를 통해 다시 世界 言論의 입방아에 올랐다. 지난 3月 美國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2009 世界피겨選手權大會를 앞두고였다.

金姸兒에겐 當時 吳서의 强力한 라이벌, 보이打櫓에 못지않은 競爭者가 있다. 日本의 피겨 스타이자 自身과 同甲내기인 아사다 마오. 金姸兒는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五署 코치는 내가 大會에서 어떤 心理的 過程을 거치는지 잘 理解한다. 그는 브라이언 戰鬪를 過去에 겪었고 나는 現在 그 비슷한 것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내게 가장 잘 맞는 指導者다.”

2006年 誤서와 김연아의 만남은 多分히 運命的이다. 이 만남은 서로에게 새로운 地平을 열어주었다. 金姸兒는 當時 技術的으로 相當한 境地에 올라 있는 狀態였지만 어머니 朴氏의 獻身的인 支援과 金姸兒 自身의 犧牲을 바탕으로 한, 劣惡한 韓國籍 訓鍊 시스템 속에서 限界에 到達한 狀況이었다. 2007年 처음 불거진 허리 負傷은 그 시스템의 限界를 克明하게 보여줬다. 새로운 訓鍊 시스템이 切實한 狀況이었으며 새로운 시스템 없이는 金姸兒에게 未來도 없었다.

윌슨의 豐富한 感受性

타고난 勝負師지만 隱退 뒤 아이스쇼에서 主로 活動해온 誤書로선 自身의 勝負師的 氣質을 刺戟해 熱情을 일으킬 弟子가 必要했다. 어머니 朴氏는 金姸兒가 初等學校 3學年 때부터 每年 여름 두 달間 平均 1500萬원假量의 費用이 드는 캐나다 피겨 硏修를 보냈다. 金姸兒는 成人 舞臺 데뷔를 앞둔 2006年 여름 캐나다 토론토의 ‘토론토 크리킷, 스케이팅, 컬링클럽’ 氷上場에서 訓鍊했다. 誤書는 이곳 아이스링크의 責任者였으며 金姸兒는 그에게 指導를 받았다. 이때 誤書는 파트타임 코치였다. 두 사람은 世界選手權大會를 앞둔 2007年 初 마침내 한 팀이 됐다. 鼯鼠가 김연아의 풀타임 코치 提案을 받아들인 것이다.

只今의 金姸兒를 얘기할 때 또 한 名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김연아의 按舞를 擔當하는 데이비드 윌슨(42)이다. 캐나다 온타리오 노블턴 出身의 윌슨은 豐富한 感受性의 所有者로 5歲 때 피겨를 始作해 9歲 때부터 大會에 出戰했다. 어릴 때부터 同性愛的 性向을 드러냈던 그는 學校에서 ‘왕따’를 當하기 일쑤였고 그런 그에게 自身만의 世界를 펼칠 수 있는 얼음 位는 一種의 脫出口이자 逃避處였다.

하지만 選手로서의 生命은 짧았다. 18歲 때 왼쪽 무릎 負傷으로 選手 生活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피겨스케이팅의 公演的 要素와 華麗한 衣裳에 처음부터 끌렸던 윌슨은 “내겐 競爭心 같은 게 元來 없었다”면서 淡淡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무릎 手術 뒤에도 巡廻 아이스쇼團인 ‘아이스 커페이즈’ 團員으로서 스케이팅을 繼續했다. 이 아이스쇼團은 스타일과 藝術性을 重要視했고 그게 윌슨의 適性에 맞았다. 윌슨은 “그곳에서 비로소 피겨스케이팅과 사랑에 빠졌다”고 말했다.

윌슨은 大學에서 建築과 心理學을 專攻하는 한便 아이스쇼 團員으로 巡廻公演을 다니다 몬트리올 出身의 피겨 演技者인 張 피에르 보이어와 사랑에 빠져 5年餘의 아이스쇼 生活을 접고 몬트리올에 定着해 按舞家로서 새로운 삶을 始作했다. 윌슨은 “10餘 名의 按舞를 해보고 나니 ‘와, 이거 재밌는데’ 하는 느낌이 왔다”고 말했다. 그는 創造를 하고 動作을 재밌게 만드는 點이 좋았다고 回顧했다.

그의 나이 20代 後半 큰 事件들이 연이어 휘몰아쳤다. 27歲이던 1994年 보이어와 갈라섰고 그가 按舞를 짜준 主要 顧客인 캐나다 男子 피겨 選手 세바스티엔 브리튼은 그해 冬季올림픽에서 10位에 그쳤다. 윌슨이 按舞를 통해 追求한 藝術性은 브리튼의 技術的인 部分과 調和를 이루지 못했다. 藝術性을 消化하기엔 技術이 不足했다는 意味다. 그해 末 윌슨의 아버지가 肺炎으로 世上을 떠났고 18個月 뒤인 1996年엔 어머니가 腦 關聯 疾病으로 世上을 떠났다. 一連의 큰일을 겪으면서 윌슨의 按舞엔 그만의 獨特한 特性들이 생기기 始作했다. 按舞家로서 이름을 알리기 始作한 것도 이쯤이었다.

수렁에서 誤書를 救한 윌슨

鼯鼠가 윌슨을 만난 것도 그때쯤이었다. 當時 誤書는 아이스쇼 演技者로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고 얼음판 밖에선 同居하던 男子親舊의 離別 慰藉料 訴訟으로 自身이 同性戀愛者임이 滿天下에 알려져 크게 傷處받았다. 誤書는 當時에 對해 “나는 나 自身에게만 徹底히 依存했고 나 自身의 테두리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自身의 世界에 빠져 墜落하던 誤書를 끌어올린 것은 윌슨의 獨創的 按舞와 피겨에 對한 熱情이었다. 윌슨은 自身에 對해 “一連의 힘든 時期를 겪으며 나 自身의 靈魂을 探索했고 그 過程에서 個個人의 스케이터에게 固有한 길을 찾아주는 데 매우 銳敏해졌다”고 말했다. 誤書는 윌슨이 피겨 選手의 潛在力을 끌어내는 데 뛰어나다고 認定한다. 誤書는 이렇게 말했다. “윌슨의 도움으로 나는 나 自身이라는 박스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는 나를 救했다.”

윌슨은 誤書를 변화시켰듯 金姸兒도 변화시켰다. 무엇보다 金姸兒가 피겨를 즐길 수 있게 했다. 윌슨과 誤書를 만나기 前 金姸兒는 도무지 웃지 않는 하나의 ‘피겨 機械’였다.

2004年 12月 仁川空港에서 金姸兒를 처음 봤을 때가 기억난다. 當時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大會에서 準優勝을 하고 돌아온 錦衣還鄕, 歸國길이었다. 그런데 取材陣 앞에서 金姸兒는 默默不答이었다. 取材陣의 質問에 어느 하나 自身 있게 對答하지 못했다. 國際舞臺에서 좋은 成跡을 거두고 돌아왔는데도 기쁜 氣色이 아니었다. 表情 自體가 없었다고 해도 過言이 아니다.

김연아의 生活을 들여다보니 充分히 理解가 갔다. ‘學業과 피겨’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을 수 없어 學校는 抛棄했다고 어머니 朴氏는 말했다. 김연아의 日常은 오로지 訓鍊의 連續이었다. 게다가 訓鍊 與件은 劣惡하기 짝이 없었다. 제대로 된 아이스링크가 없는 데다 對官時間이 맞지 않아 밤 10時 넘어 始作해 새벽에야 하루 日課를 마무리하는 ‘올빼미’ 生活이었다.

金姸兒에게 氷上 以外의 生活은 存在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試驗 볼 때만 學校에 갔다. 親舊가 있을 理 없었다. 그 얘기를 傳해 듣고 當時 김연아의 홈페이지를 찾아 들어가본 記憶이 난다. 서로 安否를 묻는 芳名錄에 글을 남기는 것은 當時 金姸兒를 指導하던 코치뿐이었다.

김연아의 매니지먼트社인 IB스포츠의 구동회 副社長은 最近 한 新聞에 連載한 글에서 金姸兒를 아사다와 比較하며 아사다는 조용하고 귀여우며 女性스럽고 內省的인 反面 金姸兒는 疏脫, 快活하고 外向的이라고 썼다. 그것이 金姸兒가 타고난 本性이었을지 모르지만 只今으로부터 不過 몇 年 前 김연아의 모습은 全혀 딴판이었다.

연아를 웃긴 두 男子

‘危機의 五署’를 求했던 윌슨은 ‘危機의 金姸兒’도 救했다. 윌슨은 2006年 여름 金姸兒를 처음 만났다. 金姸兒 側이 프리스케이팅 프로그램을 손보기 위해 윌슨에게 付託을 했던 것이다. 윌슨은 “함께 온 韓國 피겨聯盟 關係者들이 注文한 것이 있다. 金姸兒를 幸福한 피겨 選手로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고 當時를 回顧했다. 윌슨은 “金姸兒가 微笑짓게 하는 데에 꼬박 一週日이나 걸렸다”고 記憶했다. 鼯鼠가 金姸兒를 體育館 안에서만 만난 反面 윌슨은 種種 金姸兒와 體育館 밖에서도 많은 時間을 보냈다. 金姸兒는 캐나다에서 두 사람과 함께하면서 徐徐히 피겨를 즐기고 自身의 생각과 느낌을 率直하게 表現하는 豁達한 10代의 모습을 되찾아갔다.

윌슨은 그 後 金姸兒와 專屬 按舞 契約을 맺었다. 2010年까지 金姸兒 프로그램의 모든 按舞를 짠다. 올해 世界選手權大會에서 김연아의 프리스케이팅 演技를 보고 나서 윌슨은 “競技를 보고 소름이 돋았다. 金姸兒가 내가 만든 프로그램의 100% 以上을 보여줬다”고 極讚했다. 윌슨에게 金姸兒는 프로그램의 完成度를 높여 自身이 追求하는 藝術을 具現해낼 수 있는 演技者로 매우 重要한 意味를 갖는다. “金姸兒는 이제 單純한 選手가 아니라 藝術家에 가깝다. 예전에는 힘들어도 無條件 참고 訓鍊했지만 只今은 自身의 몸 狀態를 點檢하면서 피겨를 즐긴다. 너무도 똑똑하게 自己 管理를 한다”고 윌슨은 말했다.

윌슨이 김연아의 가슴속에서 熱情과 藝術性을 끄집어내고 피겨의 즐거움을 일깨워줬다면 誤書는 成功한 피겨 選手라면 반드시 맞닥뜨리게 되는 冷酷한 勝負의 世界에서 가져야 할 態度를 가르쳤다. 올림픽이나 世界選手權大會 같은 큰 舞臺에서 重要한 것은 점프와 스핀 같은 技術的 部分이 아니라 熾烈한 競爭을 두려워하지 않고 勇敢하게 맞설 수 있는 마인드컨트롤 그 自體다. 피겨는 ‘失手 매니지먼트’다.

연아의 煞풀이

金姸兒는 피겨 不毛地이던 韓國에, 그리고 어머니 朴氏, 캐나다人 五署, 윌슨, 그리고 自身에게 월드챔피언이라는 타이틀을 안겼지만 아직 하나가 남았다. 올림픽 金메달. 이番 世界選手權大會 施賞式 舞臺에서 요 몇 年 환하디환했던 金姸兒가 愛國歌와 太極旗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그건 그동안의 이루 말할 수 없는 苦生에 對한 一種의 煞풀이요 씻김굿이었다.

윌슨은 이제까지 數十名에게 프로그램을 짜줬지만 아직까지 自身이 짠 프로그램으로 올림픽에서 金메달을 딴 選手는 없었다. 五瑞 코치도 다시금 올림픽 金메달의 꿈을 꾸기 始作했다. 이番 大會에서 그는 ‘브라이언 戰鬪’의 라이벌인 보이打櫓를 다시 만났다. 보이打노는 2008~2009 시즌 美國 女子 싱글 챔피언인 알리사 시즈니(22)의 코치를 맡고 있다. 하지만 보이打노는 더 以上 吳서의 라이벌이 아니다. 시즈니는 金姸兒가 女子 싱글 最初로 200點을 넘으며 1位를 차지한 이番 世界選手權大會에서 12位를 차지했다.

밴쿠버 冬季올림픽은 이제 不過 10個月 앞으로 다가왔다. 캐나다에서 冬季올림픽이 열리기는 鼯鼠가 選手로 나섰던 1988年 캘거리 大會 以後 22年 만이다. 그 오랜 歲月을 지나 誤書는 韓國의 金姸兒와 함께 올림픽 舞臺에 나설 것이다. 꿈은 이렇듯 時空을 뛰어넘어 이어진다.
김성규 記者 kimsk@donga.com

* 이 記事는 新東亞 2009年5月號에 실린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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