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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運動 百年과 女性]①少女의 꿈…“飛行士가 돼 日總督府를 爆破하겠다”|동아일보

[3·1運動 百年과 女性]①少女의 꿈…“飛行士가 돼 日總督府를 爆破하겠다”

  • 뉴시스
  • 入力 2019年 2月 23日 16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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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날아 日王의 宮에 爆彈을 던질거야"
美國人 曲藝飛行 보고 하늘을 向한 꿈 키워
中國 航空學校 入學 許可까지, 險難한 旅程
中空軍 宣傳飛行 運命의 날…終着地는 도쿄

1935年 6月, 권기옥(1901~1988)은 마음을 다진다. 中國 上海를 出發해 싱가포르, 필리핀을 거쳐 日本 도쿄로 向하는 空軍의 宣傳飛行 日程이 코앞으로 다가온 때문이다.

“나는 곧 日本을 向해 난다. 目標物은 日王(日王)의 宮. 지난 10年 間 늘 죽을 覺悟로 飛行機를 탔다. 다친 적도 여러 番, 죽음은 두렵지 않다. 수많은 危機에도 내가 只今까지 살아남은 理由는 祖國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하늘의 뜻일 테다.”

16살이던 1917年부터 20餘年 동안 꿈을 키웠다. 그 해 5月, 권기옥은 서울 汝矣島 飛行場에서 美國人 曲藝飛行士 스미스가 曲藝飛行을 하는 것을 보고 하늘에 눈을 떴다. 飛行士가 되기로 마음을 굳힌 날이다. 그는 생각했다. “푸른 하늘을 날아 日本으로 爆彈을 몰고 가리라.”

권기옥은 還甲이던 1961年, 雜誌 ‘여원’과의 인터뷰에서 當時를 回想했다. “어린 마음이지만 抗日鬪爭에는 無條件 이었습니다. 監獄이 아니라 죽음도 두렵지 않았지요. 나이가 어리고 女子라는 게 참으로 원통했습니다. 그 때, 하늘을 날며 倭놈들을 쉽게 쳐부술 수 있는 飛行士가 되려고 마음을 다졌지요.”

以後 朝鮮에서 獨立運動을 하다 警察의 監視를 避해 1920年 中國으로 亡命한 권기옥은 上海에서 紅島女子中學을 卒業한 뒤 꿈꾸던 飛行士가 되기 위해 航空學校의 門을 두드렸다.
當時 中國 內 航空學校는 雲南陸軍航空學校를 비롯해 4個. 2個 學校에서는 女子라고 拒絶을 當했고, 다른 한 곳에는 飛行機가 없어 가지 않기로 했다. 雲南學校는 單 하나의 選擇地이자 最後의 堡壘, 꼭 入學해야만 했다.

또 拒絶을 當할까 걱정한 권기옥은 直接 學校를 찾아가기로 했다. 上海에서 出發해 學校가 있던 中國 西南端의 쿤밍까지, 中國 大陸을 가로지를 覺悟를 했다. 獨立戰爭을 위해 軍官陽性을 推進하던 臨時政府가 써 준 推薦書도 所重히 품에 안았다.

꼬박 3株를 움직여 雲南省 軍 司令官 棠谿요와 마주 앉은 권기옥은 이렇게 말했다. “飛行士가 돼 朝鮮總督府를 爆破하고 싶습니다.” 當時 권기옥의 나이는 22살. 떨리는 마음은 애써 감췄다. 작고 어린 朝鮮 處女의 氣槪에 感歎한 棠谿要는 이렇게 말했다고 傳해진다. “下午(好·좋아).” 권기옥의 人生이 바뀌는 瞬間이었다.

권기옥은 後에 “一旦 決心한 일은 하늘이 무너져도 하고야 마는 타고난 (내) 固執을 꺾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雲南學校로 向하던 길을 記憶했다.
1924年에는 猛訓練 끝에 첫 單獨 飛行에 成功했다. 이 때 권기옥은 獨立運動의 스승인 島山 安昌浩에게 寫眞과 함께 便紙를 보내 설레는 마음을 傳하기도 했다.

“倒産先生 앞에. 20餘年 拘束받든 앞은 마음과 쓰린 가슴 上帝州께 呼訴하고 空中女王 冕旒冠을 빼앗스려가나이다. 길이 사랑하여 主審 바라 삼가 이꼴을 눈앞에 올리나이다. 사랑하시는 기옥 올림.”

1925年 3月 권기옥은 雲南學校 第1期 卒業生으로 學校를 마쳤다. 그러나 바로 臨時政府에서 일하지 못하고 臨時政府의 推薦을 받아 中國 空軍의 飛行士가 됐다. 가난한 植民地 朝鮮의 臨時政府가 當時 飛行機는 꿈도 못 꿀 程度로 劣惡했던 탓이다.

日本으로 爆彈을 몰고 가겠다는 꿈을 實現할 機會는 1935年에야 왔다. 그 해 初 장제스의 婦人인 송미령 中國航空委員會 副委員長이 中國 靑年들에게 空軍의 멋짐을 알리겠다며 권기옥을 앞세운 宣傳飛行을 提案하면서다. 宣傳飛行은 上海에서 베이징을 오가는 華北線으로 始作해 火南銑과 남양선 等 3車路 企劃됐다.마지막인 남양선의 終着地는 日本 도쿄, 권기옥의 눈이 빛났다. “日王의 宮殿에 爆彈을 쏟아부을 날이 왔다.”

實務準備는 上海에서 進行됐다. 空軍은 새 長距離 飛行機를 샀고, 이탈리아人 專門 敎官도 招聘했다. 美國人 飛行士의 試驗飛行 中 프로펠러가 부러지는 바람에 多少 延期되기도 했지만, 準備는 着着 마무리 되고 있었다. 日程은 6月 末로 잡혔다.

그렇게 다시 1935年 6月, 권기옥은 하늘과 飛行機를 次例로 보며 되뇌인다. “드디어, 그날이 온다.”

권기옥의 꿈은 그러나 結局 霧散되고 말았다. 宣傳飛行을 이틀 앞두고 日本軍이 베이징에 隣接한 펑타이를 占領하면서다. 베이징에서는 大學生들의 大大的인 抗日 示威가 이어졌다. 프로펠러를 修理하느라 遲延된 日程이 決定的이었다.

航空委員會로 復歸한 권기옥은 空軍圖書館으로 자리를 옮기고 結局 飛行士服을 벗게 됐다. 1300時間, 권기옥이 20餘年 間 祖國의 獨立을 마음 속에 품고 日本을 내리치기 위해 하늘에 머문 時間이다.

▲參考資料: 정혜주 ’날개옷을 찾아서‘(2015), 윤선자 ’韓國獨立運動과 권기옥의 非常‘(2014), 金榮珠 ’韓國最初의 女流飛行士 권기옥‘(2007)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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