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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頭山 定界碑 받침돌 南韓 學者들 처음 確認|東亞日報

白頭山 定界碑 받침돌 南韓 學者들 처음 確認

  • 入力 2005年 8月 4日 03時 11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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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학자들이 최근 처음 확인한 백두산 정계비의 받침돌(앞). 그 뒤에 보이는 하얀 표석은 정계비의 원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북한이 1980년대에 세운 것이다. 사진 제공 고구려연구재단
南韓 學者들이 最近 처음 確認한 白頭山 定界碑의 받침돌(앞). 그 뒤에 보이는 하얀 標石은 定界碑의 原位置를 標示하기 위해 北韓이 1980年代에 세운 것이다. 寫眞 提供 高句麗硏究財團
朝鮮 肅宗 때인 1712年에 세웠던 白頭山 定界碑(定界碑)의 받침돌과 元來 位置를 알려주는 標石이 確認됐다.

最近 北韓의 高句麗 遺跡을 調査하고 돌아온 高句麗硏究財團의 김정배(金貞培·韓國史) 理事長은 3日 “白頭山 頂上에서 東南쪽으로 4km 程度 떨어진 支店에서 白頭山 定界碑를 받쳤던 돌을 確認했다”고 밝혔다. 白頭山 定界碑의 받침돌이 남아있다는 事實을 南韓 學者들이 確認한 것은 이番이 처음이다.

金 理事長은 또 “받침돌 바로 옆에는 定界碑의 位置를 標示하기 위해 北韓이 1980年代에 세운 標石이 있었다”면서 “그러나 北韓 側은 中國을 刺戟하지 않기 위해서인지 이 表石에 아무런 글씨도 새겨 넣지 않았다”고 說明했다.

白頭山 定界碑는 18世紀 初 朝鮮과 淸나라 사이의 國境에 對한 內容을 새겨 넣은 碑石으로 碑文의 一部인 ‘西쪽으로 鴨綠江, 東쪽으로 土門江을 境界로 한다(西爲鴨綠 東爲土門)’와 關聯해 ‘土門’의 實體가 豆滿江인지 土門江인지를 놓고 韓國과 中國이 論爭을 벌여 왔다. 이 定界碑는 1931年 滿洲事變 當時 日帝에 依해 撤去됐는데 現在 어디에 있는지 確認되지 않고 다.

北韓 學者들과 처음으로 高句麗 遺跡을 共同 調査한 硏究財團은 平壤城 耐性(內城)의 南쪽 壁에서 性의 築造 過程에 對한 內容이 새겨진 各석(刻石)을 確認하고 그 寫眞을 公開했다.

최광식(崔光植) 硏究財團 常任理事 兼 高麗大 敎授는 “이番에 講書大廟 수산리古墳 安岳3號墳 等 北韓의 主要 高句麗 古墳에서 各種 壁畫를 仔細하게 調査 實測하고 撮影함으로써 壁畫 硏究에 重要한 資料를 確保하게 됐다”면서 “수산리古墳과 安岳3號墳의 境遇 壁畫를 保存하기 위해 琉璃壁을 만들어 놓은 것도 確認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番에 調査한 壁畫는 그동안 國內에 모두 알려진 것이어서 特別히 새로운 內容은 公開되지 않았다.

이광표 記者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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