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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戰爭 停戰 50돌] <下>韓半島 冷戰克服의 길|東亞日報 </下>

[韓國戰爭 停戰 50돌] <下>韓半島 冷戰克服의 길

  • 入力 2003年 7月 25日 17時 57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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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半世紀 동안 어렵게 維持되어온 停戰協定 體制는 이제 時代의 變化에 걸맞게 이를 整備해야 할 必要性에 直面해 있다. 그러나 北韓의 一方的인 停戰協定 無力化 움직임 및 北-美 平和協定 締結 主張으로 南北韓은 平和協定 問題를 論議할 接點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果然 現在의 停戰體制를 克服해 韓半島의 恒久的 平和를 摸索할 수 있는 方案은 무엇일까.

▼關聯記事▼

- <中>挑戰받는 停戰協定
- <上>우리社會에 끼친 影響

▽平和協定 締結에 對한 視角差=停戰協定을 平和協定으로 轉換하는 問題는 그동안 여러 次例 提起됐으나 實質的인 協商으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停戰體制를 마무리짓기 위한 첫 試圖는 1954年 제네바에서 열린 6·25戰爭 參戰國間의 政治會談이었지만 이는 아무런 成果를 거두지 못했다.

南北韓과 美國 中國이 韓半島 平和와 安定을 위해 97年 12月부터 99年 8月까지 6次에 걸쳐 開催한 4者會談 亦是 別 進展을 보지 못했다. 北韓이 駐韓美軍 撤收를 主張하면서 北-美 平和協定 締結 問題가 議題로 論議되지 않는다는 것을 問題 삼아 會談 續開를 拒否했기 때문이다.

北韓은 韓國이 停戰協定의 署名 當事者가 아니라는 理由로, 平和協定을 韓國을 排除한 가운데 北-美間에 論議, 締結해야 한다고 主張한다. 그러나 이는 조약 署名者(signatory)와 條約 當事者(party)를 恣意的으로 解釋한 것이라는 것이 國際法 專門家들의 指摘이다.

마크 클라크 隊長이 停戰協定에 署名했을 때 그는 美軍司令官이 아닌 유엔軍司令官 資格으로 署名했다. 美國은 16個 參戰國의 一員에 不過하므로 設令 앞으로 北-美間 平和協定이 締結된다 해도 이는 두 나라 사이의 새로운 雙務協定日 뿐, 停戰協定을 代替할 수는 없다.

平和協定이 모든 問題를 解決할 수 있을 것인지도 疑問이다. 歷史的으로 볼 때 平和協定 締結에도 不拘하고 紛爭이 持續되거나, 協定 締結에 數 많은 時間이 所要되는 境遇도 있었다.

中東戰爭 以後 締結된 이집트-이스라엘 平和協定과 美國-베트남 平和協定이 代表的 事例.

4次 中東戰爭 以後 締結된 이집트-이스라엘 平和協定(79年 3月)은 敵對的이었던 兩國 關係를 安定的으로 維持하는 데 肯定的 役割을 했다. 兩國은 이를 基礎로 93年 오슬로 平和協定을 締結했으나 유대人과 아랍人이 모두 聖地로 여기는 예루살렘 問題에 對한 異見은 如前히 解消되지 않고 있다. 最近 中東 平和를 위한 外交的 努力이 一部 進展을 거두고 있음에도 테러가 끊이지 않는 等 不安한 狀態가 持續되고 있다.

베트남 平和協定(73年 1月) 締結은 美國과 共産 越盟間의 戰爭을 종식시켰지만 結局 베트남의 敗亡과 赤化를 招來하고 말았다. 特히 美國과 越盟間의 祕密協商에 베트남이 排除됐기 때문에 베트남은 自身들의 立場을 反映할 機會조차 얻지 못했다.

第1次 世界大戰 以後 獨逸과 聯合國間에 締結된 베르사유 條約은 代表的인 平和協定의 하나이지만 나치 政權이 賠償을 拒否하면서 1933年에 破棄됐다. 結局 平和 維持는 失敗했고, 第2次 世界大戰의 勃發도 막을 수 없었다.

▽韓半島 平和體制로 가는 길=중앙대 제성호(諸成鎬·法學科) 敎授는 “韓半島 平和라는 名目 下에 서둘러 平和協定을 締結하려다간 오히려 安保構造의 急激한 變化를 招來해 平和를 위태롭게 할 可能性이 있다”고 말한다. 平和協定이라는 文書만으로 平和가 維持되는 것이 아니며, 그보다는 當事國間의 政治的 意志가 더 重要하다는 指摘이다.

게다가 南北이 平和協定을 締結하기 위해 넘어야 할 山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平和協定은 基本的으로 敵對行爲 終了, 占領軍 撤收, 押留財産 返還, 捕虜 送還 等의 一般條項과 損害賠償, 領土의 割讓, 要塞의 把握 等 特殊條項으로 構成된다. 한국외국어대 李長熙(李長熙·法學科) 敎授는 “果然 南北이 50年 前의 是是非非를 따져가며 이 같은 平和協定 要件을 協議할 수 있겠느냐”며 “南北이 戰爭 終結宣言을 하는 것은 可能하지만 나머지 問題를 解決하지 못한다는 點에서 平和協定 締結은 事實上 어렵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不安全한 停戰協定도, 不可能해 보이는 平和協定 締結도 아니라면 어떤 方式이 可能할까. 專門家들은 넓은 意味에서 軍備統制를 包含한 戰爭억지 裝置를 마련하는 것이 重要하다고 指摘한다. 平和統一이라는 長期的인 目標로 나가는 過程에서 平和體制 構築이 要求된다는 것이다.

相互交流와 外交關係 樹立 等은 敵對行爲를 實質的으로 종식시키는 만큼 南北은 實質的 交流를 통해 信賴를 構築하는 것이 急先務이다.

實際로 第2次 世界大戰 終戰 後 敵對國家들은 平和協定이 아닌 國家間의 關係 正常化 措置를 통해 敵對關係를 解消한 事例가 있다. 第2次 世界大戰 後 日本과 聯合國 48個國間에 締結된 샌프란시스코 講和條約(51年 9月 調印)에 參加하지 않은 舊 蘇聯, 폴란드, 체코는 日本과 國交回復 協定을 締結함으로써 戰爭 狀態를 公式 終結했다.

제 敎授는 “南北韓이 眞摯한 交流協力과 함께 政治軍事的 信賴關係를 쌓아 가면서 北韓이 國際社會의 正常的인 一員으로 자리 잡기 위해 努力하는 것이 韓半島 平和體制를 構築해 나가는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世界 主要 平和協定 事例

캠프데이비드協定 파리平和協定 오슬로平和協定 베르사유조약
締結 當事者 이집트, 이스라엘 美國, 越南, 越盟, 베트남民族解放戰線(베트콩)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第1次 世界大戰 聯合國과 獨逸間 個別的 締結
締結時期 1979.3.26 1973.1.23 1993.9.13 1919.6.28
締結 背景 4次 中東戰爭 結果 이집트의 休戰要請 腐敗한 越南政權에 對한 지나친 軍事支援에 따른 美國의 負擔 캠프데이비드協定 以後 全面戰 中斷 獨逸의 第1次 世界大戰 敗北에 따른 파리平和會議 結果
平和協定 保障裝置 安定 保障을 위한 유엔非上군(UNEF) 駐屯 및合同위 設置 國際統制監視委員會 設置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와 요르단江 西安에서 段階的撤軍 獨逸 軍備減縮 및 軍縮
協定 成功- 失敗 要因 美國 等 第3國의 仲裁 및 平和定着 監視檢證 裝置 마련(成功) 共産越盟을 남겨둔 채 美軍이 一方的 撤收. 效率的인 監視 檢證裝置 未備. 1975年 4月 베트남 敗亡 이스라엘이 約束한 領土返還 遲延으로 인티파다(民衆蜂起) 始作. 東예루살렘 主權 問題 未解決 지나친 賠償金(330億달러) 支給으로 因한 獨逸의 不滿 高調. 나치 登場後 軍備增强에 對한 檢證 失敗

김영식記者 spear@donga.com

▼“목숨걸고 祖國山河 지킬겁니다”▼

“半世紀 전 목숨을 바쳐 이곳을 지키신 할아버지처럼 저 亦是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祖國의 山河를 死守할 것입니다.”

停戰 50周年을 이틀 앞둔 25日 午前 講院 麟蹄郡 某 陸軍 部隊의 對空哨所. 장준용(張埈龍·22.寫眞) 一兵이 팽팽한 緊張感 속에 北쪽 地域을 監視하는 곳이다.

“夜陰을 틈탄 適期의 浸透 威脅에 徹底히 對備하고 있습니다. 對空 警戒勤務는 한瞬間도 緊張을 늦출 수 없습니다.”

軍事分界線(MDL)에서 不過 1.8km 떨어진 前方 地域에서 警戒勤務 中인 張 一兵에게 停電 50周年의 感懷는 남다르다. 50餘年 前 6·25戰爭에 參戰했던 그의 할아버지가 1951年 바로 이 地域에서 北韓軍과 熾烈한 戰鬪를 벌이다 戰死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士兵으로 이 一帶의 여러 戰鬪에 參加하셨습니다. 어릴 적부터 할머니로부터 戰爭의 慘狀과 할아버지에 對한 말씀을 많이 들었죠. 빛바랜 寫眞帖 속의 할아버지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려옵니다.”

이 같은 家族史가 있었지만 大部分의 젊은이들처럼 張 一兵도 入隊 前엔 ‘戰爭’이나 ‘休戰’에 對해 深刻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TV나 映畫 속에 登場하는 일이나 먼 남의 나라 일 程度로 생각했죠. 또 只今의 平和는 當然한 것이고 永遠히 持續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前方 地域에서 勤務하면서 그는 停電의 意味를 切感하게 됐다. 힘든 勤務로 心身이 지칠 때도 砲煙이 자욱한 戰場에서 祖國을 지켰을 할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힘을 낸다고 그는 말했다.

“入隊 直前 할머니께서 ‘할아버지가 恒常 널 지켜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只今 할아버지께서 凜凜한 모습의 孫子를 보고 자랑스러워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그는 一部 젊은 世代의 盲目的인 反美感情이나 北韓에 對한 漠然한 幻想을 接할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北韓은 如前히 우리의 빈틈을 노린다는 冷嚴한 現實을 모두가 되새겼으면 합니다. 지난해 西海交戰이나 最近 發生한 非武裝地帶(DMZ)內 北韓軍의 銃擊事件과 같은 武力 挑發이 바로 그 證據가 아닐까요.”

윤상호記者 ysh1005@donga.com

▼‘反戰페스티벌’等 南-北-美 記念行事 多樣▼

停戰協定 50年을 맞아 韓國 美國 兩國에선 26, 27日 다양한 記念行事가 열린다.

韓國戰爭 參戰國인 뉴질랜드의 헬렌 클라크 總理도 訪韓해 25日 노무현(盧武鉉) 大統領과 頂上會談을 가진 데 이어 26日 釜山 유엔記念公園을 參拜하는 等 여러 行事에 參加한다.

停戰協定 締結日을 ‘祖國解放戰爭 勝利記念日’로 부르는 北韓도 27日 大大的인 群衆集會 行事를 열 豫定이다.

停戰 50周年 記念行事 豫定
行事 一時 場所 內容
休戰 50周年 記念式 27日 午後5∼8時 서울 龍山區 戰爭記念館 廣場 國防部 儀仗隊 示範, 記念式, 象徵造形物 除幕式 等
停戰協定 調印 記念式 27日 午前10時 京畿 파주시 板門店 午後 10時엔 서울 南山에서 불꽃놀이
反轉·平和 靑年 페스티벌 27日 午後 汝矣島公園 鳶날리기 大會
韓國戰爭 參戰勇士 訪韓 26日 國家別 參戰記念碑 在鄕軍人會, 參戰 21個國에서 參戰勇士 1000餘名 招請
헬렌 클라크 뉴질랜드 總理 訪韓 26日 27日 釜山 유엔記念公園 서울 유엔司令部 參拜 休戰協定 50周年 記念式 參席
韓國戰 戰歿勇士 追悼式 27日 (現地時間) 워싱턴 DC 韓國戰 參戰記念碑 停戰協定 調印記念式 行事도 함께 進行
韓國戰 參戰勇士 퍼레이드 27日 (現地時間) 하와이 호놀룰루

김승련記者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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