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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慰安婦問題 매듭지어야… 良心的 韓日 知識人들이 解決策 찾자”|동아일보

“慰安婦問題 매듭지어야… 良心的 韓日 知識人들이 解決策 찾자”

  • 東亞日報
  • 入力 2015年 12月 7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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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記者의 사람이야기]‘帝國의 慰安婦’로 起訴된 박유하 세종대 敎授

그의 서재에서 만난 ‘제국의 위안부’ 저자 세종대 박유하 교수. 박 교수는 자신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읽히는 책에 대해 답답함을 호소했다. 검찰의 기소 처분이 나온 뒤에는 너무 충격을 받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라고 한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그의 書齋에서 만난 ‘帝國의 慰安婦’ 著者 世宗大 박유하 敎授. 朴 敎授는 自身의 意圖와는 正反對로 읽히는 冊에 對해 답답함을 呼訴했다. 檢察의 起訴 處分이 나온 뒤에는 너무 衝擊을 받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할 程度라고 한다. 변영욱 記者 cut@donga.com
《세종대 日語日文學科 박유하 敎授(58)가 펴낸 冊 ‘帝國의 慰安婦’는 이렇게 始作한다. ‘慰安婦의 存在를 일찍이 世上에 알린 사람은 韓國人이 아니라 日本人이었다. 센다 街코라는 저널리스트로 1973年 ‘목소리 없는 8萬 名의 告發, 從軍慰安婦’라는 冊을 냈다.…센다는 1964年 마이니치新聞社가 寫眞集 ‘日本의 前歷(轉歷)’을 發行했을 때 滿洲事變부터 敗戰까지 2萬5000張의 寫眞을 選別하는 일을 맡았는데, 軍隊와 함께 行軍하던 朝鮮人 女性뿐 아니라 日本 中國 女性들의 모습이 실린 ‘異常한’ 寫眞들을 보았다고 한다. 그 어느 說明에도 ‘慰安婦’라는 說明은 없었다. 그러나 센다는 이 女性들의 實體를 쫓았고 처음으로 ‘慰安婦’라는 存在를 알게 된다.’ 》

慰安婦를 世上에 알린 日本人


허문명 기자
허문명 記者
이어 朴 敎授는 센다가 ‘慰安婦’를 ‘軍人’과 마찬가지로 戰爭 遂行을 위해 自身의 몸을 犧牲해 가며 도운 ‘愛國’韓 存在로 理解하고 있었으며 軍人들에 對한 補償은 있는데 왜 慰安婦에게는 없느냐는 主張을 펼친다고 덧붙인다. 그러면서 이런 結論을 맺는다.

‘日本軍이 長期間 戰爭이라는 ‘非日常的’ 狀況에 놓이게 된 兵士들을 ‘慰安’한다는 名目으로 ‘慰安婦’라는 存在를 發想(생각)하고 募集한 것은 事實이다.…일본은 이 問題에서 責任을 져야 하는 첫 番째 主體이다. 더구나 規制를 했다고는 하지만 不法的인 募集이 橫行하고 있다는 事實을 알면서도 募集 自體를 中止하지 않았다는 點에서 日本軍의 責任은 크다. 默認은 곧 加擔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언뜻 봐서도 日本 政府에 對한 責任을 묻고 있는 이 冊의 著者 朴 敎授는 最近 檢察에 依해 慰安婦 被害者들을 貶毁하고 傷處를 주었다는 名譽毁損 嫌疑로 不拘束 起訴돼 論難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檢察은 著者가 日本軍에 依한 慰安婦 强制動員 또는 强制連行 事實을 否定하면서 ‘日本軍 慰安婦는 基本的으로 賣春의 틀 안에 있는 女性’ ‘自發的 賣春婦’라거나 ‘日本 帝國의 一員으로서 日本국에 對한 愛國心 또는 自矜心을 갖고 日本軍과 同志的 關係에 있었다’고 表現한 대목들을 問題 삼았다.

하지만 朴 敎授는 冊에서 ‘慰安婦에 對한 ‘强制性’을 묻는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植民地主義와 國家와 家父長制의 强制性을 먼저 물어야 한다. 同時에 이런 構造의 實踐과 維持에 加擔한 이들(朝鮮人과 日本人 業者들)의 强制性도 함께 追窮되어야 한다’고 적고 있다. 慰安婦를 만들어낸 責任이 日本 政府를 넘어 當時 貧困한 조선인 女性들을 ‘돈벌게 해 주겠다’고 꾀어 팔아넘긴 朝鮮人과 日本人 人身賣買 業者의 責任을 함께 묻는 것까지 向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檢察은 이런 대목들을 筆者가 日本軍의 强制連行 事實을 否定하는 것으로 解釋하고 있었다. 朴 敎授는 또 ‘自發的 賣春婦’란 表現도 日本의 右翼들이 하는 말을 批判한 대목에서 쓴 것이라고 했다.

朴 敎授를 만난 것은 그가 自身의 立場을 表明한 記者會見을 한 이틀 뒤인 4日 서울 自宅에서였다. 그는 몹시 疲困해 보였다. 차분하고 부드러운 容貌나 목소리에서는 記者會見까지 열면서 檢察이라는 法 執行機關과 맞서고 있는 剛한 사람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았다. 朴 敎授는 “무엇보다 檢察의 調査 過程에서 받은 傷處와 衝擊이 너무 컸다”고 한다.

“昨年 11月부터 올해 2月까지 檢察 調査를 다섯 番 받았습니다. 搜査官들이 調査했는데 인터넷에서 저를 誹謗하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資料를 들이대면서 自身들이 만든 ‘犯罪 리스트’라며 묻는 質問 53個에 예스와 노로 對答하라고 하더군요. 正말 답답한 狀況의 連續이었습니다.”
“學問을 法으로 斷罪하려는 檢察”

―具體的으로 어떤 質問들이었죠.

“‘賣春’이란 表現을 썼느냐 안 썼느냐, 慰安婦 할머니들과 日本 軍人들을 두고 ‘同志的 關係’라는 表現을 썼느냐 안 썼느냐 이런 式이었습니다. 冊에 그런 表現을 쓴 것은 저의 主張이 아니라 文獻과 飼料, 證言을 引用한 것이며 前後 論理 展開와 앞뒤 文脈을 읽어 보면 왜 그런 表現이 나왔는지 理解가 갈 텐데도 그런 式으로 追窮하니 正말 難處했습니다.”

檢察은 朴 敎授에게 그를 告訴한 ‘나눔의 집’에서 세 가지 條件을 받아들이면 合意하겠다고 傳했다고 한다. 첫째, 할머니들에게 謝罪할 것. 둘째, 削除版까지 아예 絶版할 것. 셋째, 第3國에서 나온 것과 日本에서 나온 日本語版까지 (一部 文句) 削除版을 내라는 것이었다.

“첫째와 둘째는 어떤 式으로든 받아들인다고 해도 세 番째는 제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事案이 아니었습니다. 調整은 失敗로 끝났고 檢察은 저를 ‘公共善에 反하는 戰爭犯罪를 容認하는 사람’이라는 原告 쪽 主張을 받아들여 起訴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제 個人的 處地나 主張의 옳고 그름의 問題가 아니라 歷史와 學問의 領域을 이런 式으로 裁斷한다면 어느 누가 남과 다른 생각이나 主張을 마음 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제가 冊을 내면서 眞情으로 바랐던 것은 되도록 많은 資料와 證言을 통해 慰安婦 할머니들을 좀 더 理解하고 韓日 間의 協力에 더 傍點을 찍기 위한 다양한 論議의 場을 만들자는 것이었는데 말이지요.”

記者는 그와 만나기 前 A4用紙 100餘 張에 이르는 關聯 記事를 一讀했다. 그의 冊이 나온 것은 2013年 8月이었다. 當時 國內 言論들이 紹介한 書評을 훑어보면 一部에서 ‘論旨가 잘못됐다’는 指摘도 있었지만 約 8 對 2의 比率로 ‘다른 목소리를 낸 勇氣 있는 觀點’ ‘慰安婦 問題 解決을 위해 다가서려는 眞摯한 接近’이라고 好評하는 記事가 더 많았다. 하지만 昨年 6月 朴 敎授가 告訴를 當하고 檢察이 起訴하기까지에 이르자 그를 斗頓하는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이런 狀況에서 重要한 것은 學問 硏究에 對한 眞情性日 것이다. 그에게 日本과의 因緣을 물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高等學校를 卒業할 무렵 父母님이 일 때문에 日本으로 가게 되어 따라갔습니다. 日本에 對해서는 많은 韓國 사람이 갖고 있었던 反日感情을 가졌던 平凡한 ‘反日 少女’였지요. 日本에 살다 보니 日本이 더 알고 싶어졌고 大學(게이오大)에 入學해 日本文學을 工夫하게 되었습니다. 大學을 마치고 碩士·博士課程(와세다大)에 들어가서는 當時 日本 文學의 最高 英雄이었던 나쓰메 소세키의 作品을 專攻으로 學位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工夫를 하다 보니 日本 帝國主義에 批判的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나쓰메의 日本觀이나 朝鮮觀에 問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게 무엇이었나요.

“그의 著作物 곳곳에는 朝鮮人에 對한 差別, 帝國主義와 日本人에 對한 優越的 視線, 女性卑下, 國家主義에 對한 龍仁이 많이 담겨 있었습니다. 以後 日本近代文學會에서 ‘소세키와 國家主義’라는 論文을 發表하고 學會誌에 싣기도 했습니다. 자랑 같아 쑥스럽지만 外國人이 쓴 日本 文學坪이 처음 실린 境遇였습니다.”

―文學硏究者가 어떻게 慰安婦 問題에 關心을 갖게 된 건가요.

“1993年 歸國 直前 우연한 機會에 慰安婦 할머니들의 通譯 自願奉仕를 하게 되었는데 間接的으로만 듣던 할머니들의 證言을 直接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던 經驗이 있습니다. 歸國해 學校에 자리를 잡았는데 韓國人들이 日本을 너무 모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批判도 相對를 제대로 잘 알아야 效果的일 텐데, 無條件的인 民族感情만 앞세우고 合理的인 批判은 설 자리가 없어 보였습니다. 及其也 弟子들이 ‘日本語를 工夫하고 싶긴 하지만 罪責感을 느낀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問題意識을 더 深刻하게 갖게 되었지요.”

貧困層 女性들과 家父長的 制度에 犧牲돼 온 女性들에게 注目해왔던 페미니즘 問題를 비롯해 脫民族主義, 脫植民地主義 批評을 함께 硏究했던 朴 敎授에게 慰安婦 問題야말로 그 모든 矛盾이 凝縮된 問題로 다가왔다. 以後 執拗한 探究와 證言 聽取를 통해 慰安婦 問題에 對한 폭넓은 資料 調査를 해낼 수 있었다.

“‘帝國의 慰安婦’라는 題目을 두고도 一部에서는 ‘帝國을 代辯한 慰安婦’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反對로 ‘帝國이 動員한 慰安婦’라는 말의 줄임말입니다. 序文에서도 썼지만 제가 冊을 냈던 出發點은 ‘왜 慰安婦 問題가 20餘 年이 다 되어가도록 解決의 幾微가 보이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周邊國의 오랜 批判에도 不拘하고 日本이 變하지 않고 있다면, 或은 變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면 거기에는 批判을 하는 사람들의 形式과 內容에도 問題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自省도 必要하다는 생각이었죠.”
“理性的 論議-公論의 張 必要”

그는 목이 마른지 찬물 한 컵을 들이켠 뒤 말을 이었다.

“慰安婦 問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以上으로 複雜하며 그런 複雜함을 보기 위해서는 本格的인 論議와 公論의 場이 必要합니다. 憤怒와 非難이 채워진 ‘堅固한 記憶’을 걷어내고 되도록 많은 情報와 知識을 土臺로 相對를 說得시킬 수 있는 合理的인 길을 摸索하기 위한 理性的 努力이 先行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慰安婦 問題를 몇몇 當事者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問題로 만드는 試圖가 優先돼야 한다는 생각이며 이 생각은 只今도 變함이 없습니다.”

朴 敎授 起訴 以後 많은 韓日 學者는 朴 敎授 主張의 옳고 그름을 떠나 學者의 主張을 法의 이름으로 斷罪할 수 없다는 聲明을 냈다. 朴 敎授 主張에 同調하지 않는 國內 學者들조차 “硏究者의 指摘에 對해 法廷에서 刑事責任을 묻는 方式으로 斷罪하는 것은 適切하지 않다”며 “公開 討論을 하자”고 提案했다.

日本의 學界 文藝系 政界가 網羅된 54名의 人事도 지난달 26日 記者會見까지 열며 抗議 聲明을 냈다. 聲明書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은 와카미야 요시浮靡(若宮啓文) 前 아사히신문 主筆, 社會學者인 우에노 지즈코(上野千鶴子) 도쿄대 名譽敎授를 비롯해 1993年 고노 談話를 發表한 高老 요헤이(河野洋平) 前 關防長官, 1995年 무라야마 談話를 發表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前 總理, 노벨 文學賞 受賞者인 吳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 先生까지 網羅돼 있다.

朴 敎授의 말이다.

“韓日 兩國뿐만 아니라 東아시아의 평화로운 時代를 만들려면 하루速히 慰安婦 問題를 매듭지어야 합니다. 오히려 慰安婦 問題 解決過程은 韓日協力의 새집을 짓는 주춧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려면 政府 間 對話도 重要하지만 慰安婦 問題의 實體와 本質, 責任과 補償에 對해 良心的 知識人 學者 政治人들이 여러 見解를 내놓고 虛心坦懷하게 對話하고 合意를 導出해 내는 게 重要합니다.”

兩國 知識人들의 큰 共感을 불러일으킨 學者에 對한 檢察의 起訴는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다.

허문명 記者 angelhuh@donga.com
#慰安婦 #韓日 #박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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