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年 始作된 ‘드레퓌스 事件’은 프랑스 現代史에서 重要한 意味를 지닌다.
유대系 陸軍 大尉 알프레드 드레퓌스(寫眞)는 軍事 機密을 獨逸에 넘긴 嫌疑로 逮捕됐다. 軍部는 祕密 裁判을 열고 反逆罪를 適用했다. 決定的 證據가 없었음에도 當時 프랑스 社會에 蔓延된 反유대主義에 便乘해 犧牲羊으로 만든 것. 正義가 땅에 떨어지는 瞬間이었다.
12年이 지난 1906年 7月 12日, 드레퓌스는 最高法院에서 無罪를 宣告받았다. 뜻 있는 이들의 줄기찬 鬪爭이 이뤄 낸 勝利였다. 프랑스에 正義가 回復된 날이다.
그로부터 100周年. 最近 프랑스에서는 드레퓌스 事件을 기리는 展示會와 討論會가 이어지고 있다. 드레퓌스의 무덤을 팡테옹으로 옮기자는 主張도 나오고 있다. 소르본대 近處에 있는 팡테옹은 볼테르, 빅토르 위고, 퀴리 夫人 等 爲人들이 묻혀 있는 곳.
歷史學者인 뱅상 뒤클레르 氏는 英國의 日刊紙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絶望的 狀況에서도 眞實을 위해 싸웠던 드레퓌스는 오늘날 우리에게 切實히 要請되는 價値를 代表한다”면서 “요즘도 사라지지 않은 反유대主義에 警鐘을 울리는 次元에서라도 墓를 移轉해야 한다”고 主張했다.
法院 高位 幹部인 張 루이 나달 氏도 라디오 인터뷰에서 “팡테옹이 爲人을 위한 場所라면 正義를 위해 싸운 드레퓌스는 當然히 그곳에 있어야 한다”고 同意했다. 팡테옹 以前 決定은 大統領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들은 자크 시라크 大統領이 革命 記念日인 7月 14日에 墓所 移轉을 宣言해 주기를 期待하고 있다.
팡테옹에는 드레퓌스 事件의 물줄기를 바꿔 놓은 小說家 에밀 졸라의 墓所도 있다. 드레퓌스가 終身刑을 宣告 받고 流配된 뒤 眞犯의 輪廓이 드러났지만 當時 社會 雰圍氣 때문에 누구도 眞實을 말하지 못했다. 졸라는 그런 雰圍氣를 깨고 1898年 新聞 ‘輅路르(새벽)’에 大統領을 向한 公開書翰을 發表하고 드레퓌스의 無罪 方面을 主張했다. ‘나는 告發한다’로 始作하는 有名한 글이다.
그런 졸라와의 因緣 때문에 墓所 移轉을 要求하는 이들은 現在의 몽파르나스 墓地보다 팡테옹에 있는 졸라의 墓所 옆이 드레퓌스에게 더 어울린다고 主張한다.
파리=금동근 特派員 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