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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新銳 畫家 김수수 “鎔鑛爐에서 人生 봤다”|동아일보

무서운 新銳 畫家 김수수 “鎔鑛爐에서 人生 봤다”

  • 뉴시스
  • 入力 2019年 1月 11日 16時 36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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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年 己亥年, 60年 만에 찾아온 黃金돼지해, 누구보다 遠大한 꿈을 갖고 힘찬 날갯짓을 하는 젊은 作家를 만났다.

올해로 스물여섯 살, 畫家로 公式 데뷔하는 무서운 新銳다. 오는 15日 서울 조선일보美術館에서 生涯 첫 個人展을 앞두고 있다.

‘2018 大韓民國美術大典’에서 大賞을 受賞한 김수수 作家다. ‘불-沈默의 言語’를 타이틀로 색면 抽象化 50餘點을 展示한다. 조선일보미술관이 20代 作家에 展示場을 내준 건 처음있는 일이다. 空間(150坪)李 큰 탓에 그동안 中堅 元老作家들이 主로 展示했다. 招待展이 아닌 大觀展이지만 이 美術館에서 展示는 쉽지 않은 일이다.

“윤진섭 美術評論家가 序文을 써주신 게 힘이 됐어요. 運이 좋았고요”

國際美術評論家協會 副會長인 윤진섭은 韓國의 ‘單色畫’를 世界美術市場에 알린 評論家다. 單色畫(Dansaekhwa)의 英語 單語를 固有名詞로 만들었다. 批評家인 그가 序文(作品評)을 썼다는 건 作品을 認定한다는 뜻이다.

評論家 윤진섭은 “20代 中盤 젊은 나이에 屈指의 公募展에서 그의 作品이 注目받고 構想과 非具象 作品을 넘나드는 廣幅(廣幅)의 作品世界를 선보이는 點이 흥미로웠다”고 했다. 特히 “캔버스에 담아낸 內容은 나이에 비해 老熟하며 세련됐다. 덧없는 人生에 對해 많은 것을 喚起시켜 준다”고 評했다.

김수수 作家는 지난해 下半期에만 國內를 代表하는 公募展인 2018 檀園美術祭 本像과 大韓民國美術大典 大賞을 連거푸 受賞했다. 그가 世上에 내놓은 그림은 ‘불’의 聯作이다. 시리즈 題目과 달리 뜨거움보다는 서늘한 抽象化다.

作品은 赤, 靑, 皇, 黑, 백 等 五方色이 한 畵面에서 다양한 變奏를 이루고 있다. 陰과 孃 等 相反된 ‘極과 劇의 하모니’를 時刻化시켰다. 國內 美術市場에 烈風을 일으킨 ‘單色畫’와는 결이 다르지만, 젊은 作家의 흔치않은 색면禍여서 注目된다. 現在 國內 젊은작가들은 大槪 팝아트, 極事實畫 作業을 하고 있는 趨勢다.

곱고 진득하게 漆해진 抽象化 앞에서 그는 “불의 모습을 그렸다”고 했다.

“2年前 한 日刊紙 新聞의 記事를 읽다가 아주 흥미로운 場面에 꽂혔어요. 畵面을 꽉 채울 만큼 엄청난 불길을 마주하며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는데, 그것을 보는 瞬間 妙한 興奮感이 일었죠. 無作定 寫眞 속의 場所를 찾아 나섰습니다.”

浦項 製鐵所였다. 단단했던 쇳덩이들이 벌건 쇳물이 되는 건 瞬息間이었다. 어느새 물처럼 녹아내려 아무런 痕跡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場面은 그를 얼어붙게했다. “鎔鑛爐가 열리면서 뜨거운 熱氣가 온 天地에 터져 나오는 光景과 불의 色이 周邊의 環境과 融合되는 場面은 너무나 印象的이었습니다.”

精神없이 寫眞을 찍다 멈춘채 無我之境에 빠졌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온갖 感情들로 때 묻고, 많은 關係 속에 傷處받으며, 수많은 施行錯誤로 덕지덕지한 우리의 삶도 一瞬間에 덧없이 사라진다는 것을… 鎔鑛爐 안에서 들끓는 쇠의 모습에서 우리의 人生을 發見했다고나 할까요?“

鎔鑛爐에서 본 人生의 興亡盛衰와 生滅에 對한 循環의 法則, 그 感興은 고스란히 畫幅에 옮겨졌다. “물과 흙이 불을 만나 단단한 陶瓷器가 되고, 아무리 단단한 돌이나 쇠라도 불을 만나 다시 原形의 本體로 녹아내리는 모습을 最大限 單純美를 살려 表現했습니다.”

시뻘건 鎔鑛爐 앞에서 直接 體驗한 ‘불’은 빛의 色인 五方色으로 派生됐고, 온終日 쇳덩이를 때리는 勞動者처럼 그도 ‘그림 勞動者’가 됐다.

”鎔鑛爐에서 본 感動은 불의 色感과 匠人精神을 뿜어내는 勞動者들의 모습입니다. 鎔鑛爐의 門이 열리면서 虛空과 바닥을 瞬息間에 하나의 기운으로 아우른 벌건 ‘불’色은 이 世上에 나서 처음 보는 感興을 傳해줬습니다. 그런데 그 시뻘겁고 뜨거운 鎔鑛爐에서 거리낌 없이 불을 調律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야말로 匠人精神을 느꼈습니다. 鎔鑛爐 그림을 그리다 보니 저 또한 쇳덩어리를 每日 두드리는 勞動者들의 行爲와 같아지더라고요“

‘불’을 畫幅에 담기 위해 反復에 反復을 거듭했다. 아침 7時, 職場人 처럼 作業室로 出勤해 하루終日 畫幅과 씨름했다. 캔버스에 油畫 물감이 平等하고 곱게 쌓이게 하는 건 時間이 藥이었다. ”作品을 보면 몇時間씩 作業하냐고 물어보는데, 實은 잘 모르겠어요. 낮과 밤, 몇時間의 區分은 제게 無意味해요.“

무엇을 그렸는지 어려운 抽象畫지만 알고보면 쉽다. 作品속 붉은色과 흰色은 쇳덩이와 흰 再이기도 하고, 불이기도 하다. 검은 것(固體)李 붉은 狀態(液體)를 거쳐 흰色(氣體)으로 變換되는 過程은 태어나서 成長하다가 衰退해서 죽음에 이르는 人生의 循環過程을 色으로 表現했다.

鎔鑛爐의 불을 통해 人生의 要諦를 깨달은 作家의 色綿花에 對해 윤진섭 評論家는 ‘後記 單色畫’로 規定했다. ”김수수의 巨大한 색면繪畫는 假令 美國의 巨大한 大地性을 暗示하는 바넷 뉴먼(Barnet Newman)의 색면會話(Color Field Painting)가 지닌 崇高美의 表出과는 다르다. 數없이 바탕色을 漆하는 行爲의 反復性은 建造의 기다림에 따른 時間의 推移, 卽 時間性이 介入돼 있는 바, 이 部分은 電氣 單色畫의 特徵 가운데 하나인 反復의 傳統을 따르고 있다“고 評價했다.

들끓는 불의 이미지를 單色으로 잠재우기 위해 붓도 製作했다. 大型 붓 5~6個를 묶은 2m가 넘는 붓으로 單番에 긋는 作業을 遂行한다. 畵面 全體를 한 番의 붓질로 덮는 ‘全面日筆法(全面一筆法)’李 特技다. 大略 10號(53×45cm) 以下의 小品이든, 100號(162×130cm) 以上의 大作이든 例外는 없다.

“畵面의 크기에 따라 一筆로 마무리하기 위해서 便便한 붓 여러 個를 나란히 붙인 特殊한 붓을 自體 製作해서 使用합니다. 비록 캔버스에 油畫물감을 使用하는 西洋畫이지만, 마치 畫宣紙에 一筆의 痕跡으로만 完成하는 東洋 傳統繪畫의 ‘一筆揮之 技法과 省略의 ‘餘白精神을 念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림의 마지막 完成段階에서 發揮되는 내리긋기의 簡潔하고 單純한 美學은 作品의 冥想的 깊이를 더해주는 아주 重要한 要素라고 생각합니다. ”

그래서 作品의 主題를 ‘몰아(沒我)’로 삼았다. “굳이 ‘自己를 잊고 있는 狀態’ 或은 ‘自身을 숨기거나 特性을 없애다’라는 辭典的 意味를 들지 않더라도, 最小限의 色調로 節制된 美感을 傳하려 努力했습니다”

몰아일체의 作業은 感情 싸움의 勝利에서 나온다.

그는 ”혼자 그림을 그리면서 가장 힘든 건 感情 다스리기“라고 했다. ”그림을 그리는데 붓이 어긋나면 火가 나요. 그런데 또 잘 그려지면 氣分이 막 좋아지고. 여러가지 感情들이 있는게 처음에 힘들었어요. 왜 갑자기 火가 났다가 기뻤다가 하는지, 火가났죠. 그러다가 어느 瞬間부터 繼續 생각했어요. 그러다 火가 나면 火가 난 만큼, 기쁘면 기쁜 만큼 表現하니 그런 氣分이 相殺돼서 便安한 狀態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그림에 感情이 없어 보인다는 말을 듣고 氣分이 좋았어요.“

끊임없는 붓질은 遂行(修行)이었다. 沒入을 통해 平靜心을 찾고 熟考하며 成長한 德分일까. 20代 中盤인 그는 ”이젠 그림을 그리면 마음이 便하다“며 元老 畫伯같은 말을 내뱉었다.

‘畫家’가 되기 위해 달려온 길은 熾烈하다. 最近 ‘서울대 醫大’를 가기 위한 入試 敎育 現實을 다룬 放送 드라마 ‘SKY 캐슬’이 보여주듯 ‘요즘 애들’의 自己管理는 父母의 背景과도 연관있다.

金 作家도 中學校때부터 入試美術을 工夫했다. 이미 初等學校 4學年때 ‘第5回 全國學生寫生大會’에서 最優秀賞을 受賞하면서 經歷을 管理했다.

1993年生 외동아들이다. ”커서 뭐가 될래?“ 물으면 ‘畫家’였다. 3살 때부터 스케치북과 크레파스가 親舊였다. “그것만 있으면 온終日 그림만 그렸던 것 같아요”

畫家이자 美術事業을 하는 아버지 德分이기도 했다. 展示場에서 그림을 보는건 宿題가 아니라 當然한 일이었다. 高等學校 3學年때 大學 選擇 갈림길에 섰다. 儒學이 一般化된 狀況에서 美國이나 中國의 大學校로 進學하고 싶었다. 美術界에 있는 아버지 知人들은 中國을 推薦했다. 2011年 中國 北京中央美術大學 油畫科에 入學했다. 1950年 開校한 中央美術學院은 청화대학 美大와 함께 中國에서 가장入學하고 싶은 1順位 미대다.

”10名이 定員이었는데 싱가포르, 저 韓國人 2名을 빼고는 모두 中國人 學生이었요.“

처음으로 父母와 떨어진 삶의 生涯 처음으로 苦生과 直面케 했다. ‘그림’과 ‘言語’는 가장 힘든 宿題였다. 中國에서 내로라 하는 그림實力으로 入學한 親舊들의 作業態度는 韓國보다 더 熾烈했다.

”모두 오늘만 살 것처럼 그림을 그리는 雰圍氣입니다“ 德分에 刺戟이 됐다. 하루 14時間씩 그림에 沒頭했다. 시골에서 올라온 中國 親舊때문이기도 했다. 가난한 親舊는 學校가 最高의 演習室이었다. 모델과 材料가 提供되고 이젤이 있는 學校를 떠나면 안되는 親舊의 懇切함은 그에게로 옮겨왔다. 特히 油畫科 敎室은 韓國과 달리 天障에 等이 없다. 自然光으로만 그림을 그린다. 放學때는 畫家의 집에서 中國語도 배우고 그림도 그렸다.

오로지 그림을 위한 留學生活은 公募展에서 頭角을 냈다. 韓國에서 軍隊를 마치고 試圖한 公募展에서 大賞(2014年 第4回 大寒美國 護國美術大典)을 受賞하면서 自信感이 생겼다. 中國에서도 學期中인 3學年때 2016年 홍군대章程 80周年戰 3等賞 (中國 北京 中國美術館)을 受賞했다.

2017年 中國에서 大學을 卒業하고 韓國에 들어온 건, 美國 留學 準備 때문이다. 그 사이 挑戰한 公募展은 畫家의 길을 굳게 다지는 터닝포인트가 됐다. 지난 1年間 그린 作品만 200餘點에 達한다.

”제게 그림은 여러 생각들을 同時에 품고 있는 靜中動(靜中動)의 第 고요한 深淵을 옮기는 過程입니다.“

미니멀한 抽象繪畫는 勞動의 所重함을 傳한다. ‘한 番의 붓질’로 쓸어내려 完成시키기까지 스스로를 담금질했다. 단단한 쇳조각이 불을 만나 물처럼 本然의 形體를 벗어버리듯, ‘불’ 聯作을 통해 眞正한 自我를 찾아가는 遂行의 過程을 녹여냈다.

生涯 첫 個人展을 앞둔 그는 ”아직도 덤덤하다“며 感情을 드러내지 않다가 가슴에 손을 얹고 이렇게 말했다.

“畵面에 무엇인가 具體的인 狀況이나 形象을 表現한다기보다, 視覺的으로 具現하고 싶은 것을 얼마나 效果的으로 節制할 것인가에 對한 苦悶이 많았어요. 그래서 平素 畵面을 마주하고 暫時 눈을 감거나, 深呼吸을 자주 했는데,이는 感情을 節制하고 다스리기 위한 習慣이었습니다. 觀覽客들이 제 作品을 보고 그 些少한 感情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괜찮다’라든지, 어? 나도 그리겠는데‘라는 그런 反應도 제게 무척 所重함으로 다가올 거예요. ’期待하지 말자‘라고 마인드 컨트롤하고 있는데 展示가 다가오니까 설레네요. 하하”

100歲 時代, 比較的 일찍 畫家로 데뷔하는 그에게 그림은 ’小確幸‘(小少하고 確實한 幸福)이다. 苦行과 遂行사이 誕生한 미니멀한 抽象 繪畫는 勞動의 所重함, 反復의 힘을 傳하는 ’沈默의 言語‘다. 다람쥐 體바퀴같은 人生을 바꾸는 건 自身이다. 準備된 사람이 運도 機會도 잡는다. 展示는 21日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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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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