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匣의 摩耶’ 事件.
1969年 5月 釜山의 한 성냥工場이 事故를 쳤다. 스페인 畫家 고야의 名畫 ‘裸體의 摩耶’를 성냥匣에 印刷해 大量으로 販賣한 것. 當時 25원 하던 성냥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問題의 성냥이 바로 ‘유엔 성냥’이다. 유엔 성냥은 只今의 40, 50代에겐 한 世代 前의 싸한 鄕愁를 불러일으키는 追憶 속의 風物이다.
會社는 結局 音畫(淫畵) 製造 및 販賣 嫌疑로 起訴됐다. “世界가 알아주는 名畫가 어떻게 우리나라에서는 淫畫일 수 있느냐”는 게 會社側의 抗辯. 그러나 大法院은 “名畫도 配布 樣式과 目的에 따라서는 淫亂일 수 있다”는 判決을 내렸다.
같은 해 7月에는 염재만의 小說 ‘反盧(叛奴)’가 걸려들었다.
1審에서 3萬원의 罰金刑을 宣告하자 作家는 卽刻 抗訴했다. 猥褻是非로 國內 文學作品이 法廷에 선 것은 처음이었고 學界와 文壇은 들끓었다.
檢察이 問題 삼았던 한 대목. ‘當身 사타구니를 봅시다. 얼마나 도도한지 봅시다… 서로의 國富가 嬌面스러운 빛을 發散하면서 限껏 浮彫되고 그 위에 온갖 衝擊이 요동쳐 갑니다….’
7年의 法廷攻防 끝에 大法院은 作家의 손을 들어줬다.
檢察이 ‘反盧’와 유엔 성냥을 問題 삼았던 1969年은 朴正熙 政權이 3選改憲을 앞두고 ‘頹廢 剔抉’의 旗幟를 내걸 때였다. 性(性)에 關한 한 紊亂하기만 했던 權力이 ‘頹廢와의 戰爭’을 벌인다? 참으로 孟浪한 時節이었다.
墮落한 權力일수록 誠意 빗장을 굳게 잠근다고 했다.
1992年 小說 ‘즐거운 사라’로 된통 紅疫을 치렀던 마광수 敎授는 反問한다. “韓國의 거리에는 性이 넘쳐나고 사람들은 그 속에 파묻혀 지낸다. 그런데도 짐짓 딴전을 피우는 이 嚴肅主義는 뭔가?”
誠意 爲先(僞善)과 까발림, 그 永遠한 不和(不和)는 宿命인지도 모른다.
‘베드 神의 描寫는 한 나라의 文化의 尺度’라고 했던가. 다만 우리 時代의 일그러진 城에 덧漆을 하고 생채기를 내는 게 能事는 아닐 것이다.
이기우記者 keyw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