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凌霄花가 뚝뚝 떨어지던 지난해 秋夕, 제 車가 마을을 돌아 큰길로 접어들 때까지 힘없는 팔을 높이 들어 내내 흔들어주시던 모습이 여태 제 마음을 아프게 해요.
지난봄은 또 어떻고요. 모처럼 언니 집에 오셨을 때 말이에요. 約束 時間보다 한참 늦게 언니 집에 到着한 저를 보고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하루 終日 네가 올 때까지 저 窓門 너머 길가만 바라보고 있었느니라.” “아휴, 아버지, 좋아하시는 冊도 읽고 新聞도 보지 그러셨어요” 하는 내 말에, “네가 온다는데 冊이나 新聞이 눈에 들어올 게 무어냐” 하셨지요. 그 瞬間 저는 遑急히 化粧室로 들어가 幸여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보일세라 거울을 外面한 채 엉엉 울고 나왔지요.
光州民主化抗爭 때는 아버지, 아버지 學校 學生들과 敎師들 모두가 學校의 公式的 承認 아래 盜聽 촛불示威에 參與했잖아요. 不義를 못 참는 아버지의 펄펄 살아있는 正義感과 信念 때문에 말이에요. 光州抗爭 期間 내내 銃알을 뚫고 自轉車로 學校를 둘러보고 오시곤 해서 저희들 애肝腸을 얼마나 녹이셨어요. 平生을 敎育에 바친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지요. “사람에게 希望을 갖지 않는 敎育은 아니함만 못하다”고 말이에요.
엄마를 비롯해 온 家族이 제 結婚을 決死的으로 反對할 때도, 大門 밖에서 밤새 무릎을 꿇고 있던 막내 사위가 될 靑年을 새벽에 불러 이렇게 이야기하셨지요. “그래, 자네가 그토록 내 딸을 사랑한다면 말리지 않겠네.” 그러면서 아버지는 엄마 몰래 모아놓았던 用돈을 노란 封套에 넣어 그 사람 손에 쥐어주셨지요.
아버지, 세 살 적부터 저를 無等山에 데리고 다니셨잖아요. 그리고 제가 中學校에 갓 入學했을 즈음부터는 山을 오를 때면 “맑실아, 約 準備해라” 하곤 하셨지요. 그러면 저는 엄마가 집에서 담근 葡萄酒랑 人蔘酒를 水桶에 채워 背囊에 넣었지요. 山에 올라 그 藥을 아버지랑 단둘이 달게 마신 德에 전 只今 술고래가 됐잖아요. 그게 다 아버지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였다는 걸 한참 있다 알았어요. 아버지, 곧 찾아뵐게요.
고미석記者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