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哲學者 소크라테스는 自身이나 그 當時 아테네 사람들 모두가 無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 自身은 自己가 無知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테네 사람들은 自己들이 無知하다는 것을 모른다는 差異가 있다고 했다.
無知에도 두 種類가 있다. 하나는 無知하기는 하지만 自己의 無知를 알고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無知하면서도 그 無知를 모르는 것이다.
無知하면서도 無知를 아는 것은 希望이 있는 무지다. 自己의 無知를 自覺하기 때문에 언제나 謙遜한 姿勢와 열린 마음으로 참된 앎을 찾아 精進하는 態度를 갖게 된다. ‘마음이 가난한 者’의 態度다.
이런 無知는 眞理의 深奧함과 人間이 지닌 生來的인 認識 能力의 限界性을 眞情으로 깨달은 사람에게 찾을 수 있다. 中世 哲學者 쿠자누스는 이를 두고 ‘박학한 無知(docta ignorantia)’라고 했다. 아인슈타인도 “내가 알면 알수록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더욱 切感하게 된다”고 말했다.
無知하면서도 自己의 無知함을 모르는 것은 ‘곱빼기 無知’로서 希望이 없는 무지다. 우리의 宗敎的 삶에 致命的인 要素로 作用할 수 있다. 내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모자란 것이 없다’고 큰 소리를 친다.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나의 內面에서 나오는 소리나 빛이 있어도 이를 拒絶한다.
基督敎的으로 말하면 ‘聖靈을 거스르는 일’로 ‘容恕받을 수 없는 罪’에 屬하는 것이다.
선(禪)에 對해 다 안다고 생각한 사람이 어느 船社(禪師)를 찾아왔다. 自己가 아는 것을 털어놓으며 떠들고 있는 동안 禪師는 조용히 茶盞에 茶를 따랐다. 差가 茶盞에 가득 차고 드디어 넘쳐 흐르기 始作했다. 그 손님이 車가 넘친다고 하자 禪師는 드디어 말했다.
“그대가 비어있지 않은데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只今 “내가 아는 眞理는 完全無缺하다. 나는 모르는 것이 없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모두 眞理에서 먼 사람이다”라고 하는 곱빼기 無知의 犧牲者가 아닌가.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宗敎學科 敎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