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日 포스코 광양제철소에서 韓國勞總 傘下 全國金屬勞動組合聯盟의 김준영 事務處長이 7m 높이의 鐵製 構造物에서 高空籠城을 하던 途中 警察과 衝突했다. 金 事務處長은 크레인을 타고 籠城場으로 接近하는 警察에게 정글度를 휘두르거나 쇠파이프를 내리쳤다. 警察도 鎭壓棒으로 對應했고 金 事務處長은 피를 흘리며 끌려 내려왔다. 이 場面은 各各 全南警察廳과 韓國勞總 側에 依해 다른 버전의 映像으로 言論에 公開됐다. 言論들은 各自의 性向에 맞는 場面을 寫眞으로 캡處해 報道했다. 一部 言論은 피 흘리는 金 事務處長의 모습을 强調했고, 다른 言論은 金 事務處長이 휘두르는 칼에 焦點을 맞췄다. 한날한時에 일어난 事實을 두고 言論社의 프레이밍(framing)에 따라 行動 主體에 對한 評價가 달라진 것이다. 프레이밍이란 어떤 事實을 둘러싼 다양한 視點 中 特定 觀點으로 解釋한 뒤 일정한 틀에 맞춰 報道하는 行爲를 말한다. 最近 같은 寫眞을 두고 서로 다른 解釋이 適用된 事例도 있었다. 國家報勳處(現 國家報勳部)가 第43周年 5·18民主化運動 記念日을 맞아 트위터에 올린 寫眞을 두고 政治權과 인터넷에서 論難이 일었다. 該當 寫眞은 戒嚴軍과 光州 市民들이 對峙하는 모습을 君의 등 너머로 撮影한 것이었다. 이를 두고 野黨과 進步 性向의 누리꾼들은 戒嚴軍의 視線으로 본 民主化 運動이냐며 反撥했고 論難이 커질 것을 念慮한 報勳處는 該當 寫眞을 削除했다. 그러나 그 寫眞은 5·18記念財團에서 直接 提供한 것이며 直前 政府에서도 公式 홈페이지에 揭載했던 寫眞이다. 그때는 問題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사람들은 같은 寫眞이라도 머릿속으로 自身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解釋을 붙인다. 言論뿐만 아니라 政治人과 讀者들도 프레이밍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事實을 보여주는 報道 寫眞도 뉴스 生産者와 讀者의 性向에 따라 解釋이 달라지곤 한다. 寫眞記者도 現場에 갔을 때 主觀에 휘둘릴 수 있다. 四角의 틀 속에서 主題를 定하고 무엇을 더하고 무엇을 뺄지 取捨選擇을 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現場에서 客觀性을 가지라고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뉴스 生産 過程에서 編輯돼 最終的으로 紙面에 反映되기 前 1次 生産者인 寫眞記者는 있는 그대로 現實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寫眞記者들 中 뷰파인더를 볼 때 두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이 많다. 뷰파인더 안에서만 일어나는 모습에 치우치지 않고 밖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끊임없이 視線을 돌리기 때문이다. 또한 報道寫眞의 獨自的이고 本質的인 機能은 記錄性이기 때문에 只今 當場 紙面에 使用되지 않더라도 記者가 撮影한 寫眞은 그 自體로 歷史의 資料가 된다. 처음 寫眞記者를 始作하던 時節 先輩 記者가 ‘現場에 나가면 360度를 담으라’고 가르쳐 준 理由다. 앞서 있었던 광양제철소 現場에 寫眞記者들이 있었다면 當然히 兩側 場面을 모두 카메라에 담았을 거라는 건 疑心의 餘地가 없다. 한便 記者가 撮影한 寫眞으로 眞實이 歪曲되는 건 아닌지 늘 注意한다. ‘情報 過剩의 洪水 속에서도 寫眞이 第一 刺戟的’이라는 수전 손태그의 말처럼 잘못된 프레이밍에 휘둘린 애꿎은 犧牲者가 發生할 수 있다. 歷史를 바꿨던 寫眞 中 AP 寫眞記者 에디 애덤스가 1968年 撮影한 ‘사이公式 處刑’도 잘못된 프레이밍의 代表的인 事例다. 남베트남 軍人이 셔츠 차림의 베트콩을 길거리에서 拳銃으로 卽決 處刑하는 모습이 담긴 寫眞이었다. 이 衝擊的인 寫眞으로 美國에서는 反戰 輿論이 들끓었다. 美國의 支援을 받는 남베트남 軍人은 惡人, 被害者는 애꿎은 庶民이라는 이미지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眞實은 달랐다. 사살당한 男子는 남베트남 將校의 집에 侵入해 그의 아내와 다섯 名의 子女, 80歲 老母를 殘忍하게 殺害한 戰鬪員이었다. 卽決 處刑을 執行했던 軍人은 戰爭에서 敗北한 뒤 美國으로 亡命했지만 平生을 殘忍한 殺人魔로 非難받았다. “그는 베트콩을 죽였고, 나는 그를 카메라로 죽였다. 사람들은 寫眞을 믿지만, 寫眞은 造作하지 않아도 거짓말을 한다. 寫眞은 折半의 眞實일 뿐이다.” 十數 年이 지난 뒤에야 言論과의 인터뷰를 통해 眞實을 告白한 애덤스의 말이다. 송은석 寫眞部 記者 silversto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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