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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寧하세요. 안영배 記者입니다.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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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06~2024-05-06
旅行 67%
文化 一般 17%
社會一般 10%
經濟一般 3%
美術 3%
  • 열두집 선, 巡禮者 섬… 藝術과 ‘썸’

    ‘天使(1004)의 섬’이라 불리는 新安郡 別名과 썩 어울리는 섬이 있다. 最近 ‘巡禮者의 길’로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진 全南 新安郡 증도면 起點小岳島다. 이름도 낯선 5個 작은 섬(大奇點島 所期點도 小岳島 딴섬 屛風도)이 썰물 때만 노둣길로 이어져 한 몸처럼 變身하는 곳이기도 하다. 노둣길은 西海 갯벌 地帶에서 나타나는 ‘모세의 奇跡’ 體驗 現場이다. 이곳 섬 사람들은 썰물 때 이 섬 저 섬으로 건너다니기 위해 갯벌에다 징검다리를 놓듯 바윗돌로 노둣길을 만들어 놓았다. 하루 두 次例 서너 時間 노둣길로 이어졌던 섬들은 밀물 때가 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서로 갈라선다. 이 老둣길을 따라 巡禮者의 길이 設置돼 있다. 한겨울에 걸어도 춥지 않은 데다 大部分 平地여서 걷기 좋은 巡禮길이다. 2021年 行政安全部가 選定한 ‘國內 찾아가고 싶은 33섬’ 中 ‘걷기 좋은 섬’으로도 뽑히기도 했다. 全國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힘들어하는데도 이 섬을 찾는 觀光客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는 게 권성옥 全南文化觀光해泄瀉의 말이다. 巡禮길은 新安郡 押海島 송空港에서 出發하는 旅客船을 타고 大奇點島 船着場에서 내리면서부터 始作된다. 船着場에는 그리스 산토리니風의 둥글고 푸른 지붕에 흰 灰壁이 印象的인 ‘健康의 집’李 觀光客들을 맞이하고 있다. 밤에는 燈臺 役割을 하고, 待合室이 없는 大奇點島의 休憩所 役割도 하는 이 집에는 巡禮길의 出發을 알리는 작은 鐘이 設置돼 있다. 巡禮者들은 謙遜한 마음으로 몸을 낮춰 이 鐘을 치면서 健康한 몸과 마음으로 巡禮하기를 빈다. 여기서부터 總 12km 距離의 巡禮길 곳곳마다 12個의 작은 집이 設置돼 있다. 1km 안팎으로 떨어진 집들은 우리나라와 프랑스, 스페인의 建築·美術家 10餘 名이 그리스도 12弟子를 모티브로 삼아 建築한 作品들이다. 그래서 이 巡禮길은 ‘12社도 巡禮길’ 或은 스페인의 산티아고 巡禮길을 따라 ‘섬티아고 巡禮길’ 等의 別稱도 갖고 있다. 그런데 이곳은 基督敎人들에게는 禮拜堂이 되고, 佛子에게는 조그만 庵子가, 가톨릭교人들에게는 自身만의 작은 公所가 된다. 宗敎가 없는 이들에겐 暫時 쉬면서 冥想과 생각에 잠길 수 있는 自身만의 空間이 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작은 聖所(聖所)인 것이다. 各 聖所는 저마다 自然 環境에 맞는 獨特한 建築美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나에게 맞는 聖所’를 찾아다니는 재미도 있다. 大奇點島에는 모두 5個의 聖所가 있다. 船着場의 第1聖所(健康의 집)에서 大奇點島 海岸 길을 따라가면 屛風島로 이어지는 노둣길을 만나게 되는데, 그 初入에 제2성소(생각하는 집)가 자리 잡고 있다. 해(밀물 象徵), 달(썰물 象徵) 等 별을 意味하는 構造物이 印象的인 이 聖所는 特히 푸른 눈의 고양이 石像(石像)李 守護神처럼 지키고 있는 게 눈에 띈다. 지붕 尖塔 위의 두 마리 고양이 造形物도 저 멀리 海邊을 監視하고 있는 듯하다. 오래前 大奇點島 사람들의 쉼터였던 이곳 聖所가 고양이를 象徵物로 採擇한 데는 理由가 있다. 大奇點島에는 사람보다 고양이가 더 많이 살고 있다고 할 程度로 고양이 天國이다. 30餘 年 前 마을이 들쥐로 인해 莫大한 農事 被害를 입게 되자 쥐를 退治하기 위해 고양이를 섬으로 들여와 키우기 始作한 게 契機가 됐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고양이를 害치는 개들은 退出시킨다는 內部 規則도 있다고 한다. 밤에 移動하다 보면 여기저기서 불쑥 나타나는 길고양이들 때문에 깜짝깜짝 놀랄 程度다. 숲속 작은 오두幕집을 연상시키는 第3聖所(그리움의 집)는 우리나라 傳統美를 剛하게 풍긴다. 붉은 기와와 통나무로 된 처마에다 室內는 新羅 聖德大王神鐘의 ‘飛天像’에서 靈感을 얻은 浮彫가 設置돼 있다. 第4聖所(生命平和의 집)는 生命의 誕生과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圓筒形의 構造物이 印象的이고 제5성소(행복의 집)는 메타세쿼이아 나무를 물고기 비늘 文樣으로 잘라 겹겹이 얹은 尖塔型 지붕이 獨特하다. 張미셀, 파코 슈발 等 프랑스 出身 作家들이 툴루즈 地方의 建築 傳統을 따라 지은 聖所라고 한다. 特히 第5聖所에서는 季節과 時間, 물때에 따라 變化하는 바다와 老둣길 風景을 鑑賞할 수 있다. 大奇點島의 第5聖所에서 노둣길을 건너면 바로 所期粘度로 이어진다. 그런데 섬과 섬을 連結하는 노둣길이 밀물이면 잠기기 때문에 미리 國立海洋調査員의 조석 豫報를 確認해 時間을 잘 맞춰야 건너갈 수 있다. 小奇點島엔 第6聖所(感謝의 집)와 第7聖所(因緣의 집)가 있다. 집 全體가 스테인드글라스로 製作된 第7聖所는 唯一하게 接近이 不可能하다. 湖水 中央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湖水 各 位置와 햇빛에 따라 作品의 色이 달라 보여 異國的인 情趣를 자아낸다. ○살아 있는 갯벌 所期粘度를 지나 小岳島로 넘어가는 老둣길 中間에는 第8聖所(기쁨의 집)가 設置돼 있다. 밀물 때는 當然히 바다 위에 떠 있는 집이 된다. 이슬람 寺院을 聯想시키는 金빛 돔 지붕이 印象的인 이곳은 놀랍게도 知己(地氣) 또한 배어 있다. 이곳에서는 新安 갯벌의 생생한 모습도 鑑賞할 수 있다. 올해 유네스코 世界自然遺産으로 登載된 新安갯벌은 面積이 約 1100km²에 達해 國內 最大를 자랑한다. 新安갯벌은 陸地의 江에서 모인 堆積物이 潮流에 밀려 1004個 섬 周邊에서 形成됐다. 只今도 現在進行形으로 形成되고 있는 ‘살아 있는’ 갯벌이다. 反面 다른 나라의 갯벌들은 大槪 바다에 쌓여 있던 堆積物이 潮流에 依해 陸地로 밀리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갯벌에서는 굴, 조개, 망둑어, 칠게, 籠게, 짱뚱어, 갯고둥, 낙지 等이 잡히고 있다. 干潟地엔 대나무나 참나무 가지가 우뚝우뚝 서 있다. 이 가지에 김이 달라붙어 자라게 하는 樣式이다. 이 方法은 김을 날마다 一定 期間 동안만 햇빛을 받을 수 있도록 調節하기 때문에 다른 樣式으로 기른 金보다 비타민A, B, B2街 많이 含有돼 있고 蛋白質, 食餌纖維, 無機質 等 營養素가 豐富하다고 한다. 아무튼 노둣길의 第8聖所를 지나 小岳島(連陸化한 진섬 包含)로 進入하면 제9성소(소원의 집), 第10聖所(稱讚의 집), 第11聖所(사랑의 집)가 기다리고 있다. ‘漁夫의 祈禱所’로 考案된 第9聖所에는 안房처럼 便히 누울 수 있는 나무 마루가 깔려 있어 한잠 늘어지게 자고 싶은 衝動을 일으키기도 한다. 三角形의 뾰족지붕이 돋보이는 第10聖所, 파리 凱旋門을 빼닮은 제11성소를 參拜하고 나면 마지막으로 남은 제12성소(지혜의 집)가 老둣길 건너 딴섬에서 기다리고 있다. 예수를 배반한 가롯 유다를 象徵하는 이 집은 꼭 流配의 섬 같은 雰圍氣가 난다.○바다 위의 맨드라미 꽃동산 聖所 巡禮를 마치면 기운을 북돋워주는 屛風島로 가볼 일이다. ‘불타는 사랑’ ‘시들지 않는 熱情’이라는 꽃말을 가진 맨드라미꽃으로 有名한 섬이다. 起點小岳島에서 가장 긴 노둣길을 따라 屛風島로 들어서면 마을 첫 關門인 보기 船着場에서 맨드라미 꽃동산까지 4km 區間에 맨드라미꽃 庭園이 造成돼 있다. 이 섬의 象徵色 또한 핑크빛이다. 그래서 마을 지붕도 모두 빨간色을 하고 있다. 가을 絶頂期를 맞아 12萬 m²에 40餘 品種 200萬 송이의 맨드라미가 華麗하게 피어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닭 볏 模樣부터 촛불 模樣, 여우 꼬리 模樣 等 다양한 形態와 여러 色깔의 맨드라미를 볼 수 있다. 雅淡한 섬마을 家屋의 붉은 지붕들과 바다 위에 핀 맨드라미 꽃동산을 鑑賞하면서 꽃말처럼 우리 모두의 사랑과 平和를 祈願해본다. 글·寫眞 新安=안영배 記者·風水學 博士 ojong@donga.com}

    • 2021-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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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豐饒로움 샘솟는 두 물줄기… 天才 기르고 ‘漢江의 奇跡’ 낳다

    《‘海邊 개가 山골 富者보다 낫다’는 俗談이 있다. 山에서 生産되는 物産이 아무리 豐富하다 해도 江가나 바닷가에서 이뤄지는 財貨의 規模를 따라갈 수 없다는 比喩다. ‘물길은 財物을 主管한다(水管財物)’는 風水 理論도 이런 背景을 깔고 있다. 물길이 풍요로운 삶과 密接한 關係에 있기에 漢江을 ‘서울의 젖줄’이라고도 한다. 그러니 北漢江과 南漢江이 만나 本格的으로 漢江이 始作되는 競技 楊平 양수리는 풍요로움의 源泉地가 되는 셈이다. 두 江이 하나되는 두물머리(兩水里)는 아름다운 絶景까지 빚어내 漢江8景 中 第1頃으로 꼽히는 名所이기도 하다.》 漢江은 서울, 나아가 韓國 經濟를 豐盛하게 살찌워주는 ‘財物의 江’이다. 오죽하면 우리 經濟의 發展을 ‘漢江의 奇跡’이라고 부를까. 그 기운을 제대로 體驗할 수 있는 곳이 楊平郡 두물머리 一帶다. 저 멀리 金剛山에서 흘러온 北漢江과 江原道 금대봉 기슭에서 發源한 南漢江 두 물줄기가 굽이굽이 흘러와 합쳐지는 곳이다 보니 그 氣勢가 莊嚴하고도 신비롭게 느껴진다. 운길산 자락의 水鐘寺에서는 滔滔하게 흐르는 두 江이 하나로 합쳐지는 모습을 鑑賞할 수 있다. 朝鮮 前期의 文臣 徐居正은 水鐘寺에 올라 韓江의 두물머리를 내려다보면서 ‘東方의 절 中 第一가는 展望’이라고 激讚하기도 했다. 水鐘寺는 朝鮮 中·後記엔 茶를 즐기는 ‘車꾼’들의 據點地이기도 했다. 정약용, 초의선사, 金正喜 等 내로라하는 車 마니아들이 즐겨 이곳을 찾곤 했다. 只今도 서울 一帶의 車꾼들은 으레 이곳 삼정헌(三鼎軒)에 들러 茶 한 盞 마시며 두물머리 風景을 즐기곤 한다.○합수처 물 기운 받은 정약용 遺跡地 日較差가 甚해지는 初가을, 새벽녘의 물안개와 日出 및 日沒이 멋진 두물머리는 人文地理學의 눈으로는 合搜處(合水處) 明堂이다. 두 물이 합쳐 하나가 되면서 地形을 감싸듯 돌아 흐르는 땅에는 에너지(기운)가 强力한 穴(穴)李 存在한다는 게 風水 論理다. 이곳 두물머리 明堂 기운을 제대로 받아 누린 이로 茶山 丁若鏞(1762∼1836)을 꼽을 수 있다. 丁若鏞은 팔당湖水가 마재마을(馬蚿마을·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나고 또 生을 마감했다. 그는 이곳에서 태어나 隣近 水鐘寺에서 工夫하는 等 젊은 時節을 보냈고, 全南 康津에서 17年 넘게 流配 生活을 마친 뒤 다시 故鄕으로 돌아와 75歲를 一期로 生을 마쳤다. 現在 마재마을에는 茶山文化館, 茶山記念館 等 ‘丁若鏞 遺跡地’가 造成돼 있다. 遺跡地 한쪽 드넓은 마당이 펼쳐지는 곳에 丁若鏞이 태어난 집이 있다. 그가 ‘與猶堂(與猶堂)’이라고 이름 지은 生家다. 本來 生家는 1925年 乙丑大洪水로 漢江이 汎濫했을 때 流失됐고, 只今 모습은 1986年 傳統 韓屋 構造로 復元한 形態다. 園生가는 遺跡地 駐車場 附近이라고 傳해지기도 하지만, 새로 復元한 生家 터가 明堂임은 分明하다. 이 터는 木花吐禁輸 五行論(五行論)으로는 數, 卽 물 기운이 豐盛한 곳이다. 丁若鏞도 느낌으로 알았던 것일까, 自身의 집을 ‘水閣(水閣)’이라고도 불렀다. 數는 智慧와 創造的 活動 等을 象徵하며, 數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 사람도 이런 特性이 도드라진다는 게 東洋人文學의 論理다. 實際로 丁若鏞은 創造的 天才性을 유감없이 發揮했다. 그는 正祖 임금이 水原 火星으로 갈 때 漢江을 쉽게 건널 수 있도록 木船들을 連結한 ‘배다리’를 考案하고, 무거운 돌을 들어올리는 擧重器를 設計하는 等 創意的 行動들로 有名했다. 丁若鏞 生家를 한가로이 거닐다 보면 智慧와 創造의 에너지가 몸으로 스며드는 느낌을 받게 된다. 땅에서 기운을 얻는 一種의 吹氣法(取氣法)이다. 그의 生家 바로 뒤便 동산에는 그의 墓가 있다. 그가 直接 점지한 ‘死後의 집’인데, “地官(地官·風水師)에게 물어보지 말라”는 遺言을 子孫에게 남겼다. 生前에 吉凶禍福만 强調하는 風水說을 不信한 그는 ‘山과 물이 거듭 둘러싸서 좋은 氣像을 이룬 곳이 좋은 땅’이라고 밝힌 走者의 風水論은 그대로 따랐다. 그의 墓가 바로 그런 곳이다.○두물머리에서 漢江을 품다 정약용 遺跡地에서 두 江이 만나는 現場인 두물머리(楊平郡 양서면)까지는 車로 10餘 分 걸린다. 두물머리의 象徵은 樹齡 400年 된 늙은 느티나무다. 元來 두 그루가 있었는데 한 그루는 1972年 팔당댐 建設로 水沒됐고, 只今의 느티나무만이 남아 마을을 지키는 把守꾼 役割을 하고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은 ‘都堂할아버지 나무’라고 해서 마을의 安寧을 위한 祭를 지낸다고 한다. 保護樹로 指定된 느티나무는 높이 26m, 둘레 4.8m로 訪問하는 이들에게 休息과 安定을 膳賜하는 힐링 名所이기도 하다. 느티나무 바로 옆에는 靑銅器 時代의 作品인 고인돌 한 祈禱 자리 잡고 있다. 고인돌 덮개돌 윗面에는 크고 작은 홈구멍이 있는데, 北斗七星 等 별자리를 象徵하는 腥血로 알려져 있다. 고인돌이 造成됐다는 것은 이곳이 古代부터 성스러운 場所이자 明堂 터였음을 暗示한다. 우리나라에서 發見되는 고인돌은 거의 大部分 明堂 터에 자리 잡고 있다. 初가을 한낮의 무더위를 避해 느티나무 그늘에서 休息을 取하면 漢江의 물 기운과 터의 明堂 기운을 同時에 쐬는 一石二鳥의 效果가 있다. 이때 江물이 흘러나가는 쪽보다는 흘러오는 쪽으로 視線을 두는 게 좋다. 흘러오는 곳은 그 기운을 取한다는 意味가 있기 때문이다. 느티나무 쉼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特別히 물안개를 잘 鑑賞할 수 있는 물안개 쉼터가 있다. TV 드라마나 映畫 撮影地로 人氣를 끌고 있는 곳이다. 이른 새벽 물안개 絶景과 저녁노을을 담으려는 寫眞家들이 즐기는 쉼터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더 前進하면 두물머리 나루터가 나온다. 한때 江原道 山골에서 나무 等을 싣고 온 뗏木꾼들과 漢陽(서울)을 오가던 길손들로 시끌벅적하던 나루터였다. 그러나 팔당댐 建設과 함께 두물머리는 나루터로서의 機能을 잃어버렸다. 그 代身 只今은 家族이나 戀人들이 平日에도 찾아와 북적북적한 나루터 雰圍氣를 살려준다. 所願을 들어준다 하여 ‘所願나무’로 불리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나루터의 甘草 役割을 하고 있다. 朝鮮時代 이건필의 ‘두강승誘導’와 謙齋 鄭敾의 ‘獨白彈’으로도 남겨져 있는 名勝地 두물머리에서 물 기운을 充分히 누린 後, ‘물과 꽃의 庭園’으로 有名한 세미원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두물머리에서 歲味源 後聞까지는 散策하듯 걸어갈 수 있는 距離다. 물로 막혀 있던 두 場所를 이어주는 ‘배다리’가 印象的이다. 아버지 思悼世子 墓를 參拜하러 漢江을 건너가는 正祖 임금의 孝와 배다리를 設計한 丁若鏞의 智慧를 기리기 위해 造成한 ‘熱水主敎(烈水舟橋)’라고 한다. ‘京畿道 第1號 脂肪庭園’으로 指定된 歲미원은 三面이 물로 둘러싸인 물의 庭園이라고 할 수 있다. 東洋의 傳統 庭園 樣式과 水生植物 等 볼거리가 豐盛하다. 8月 中旬까지만 해도 활짝 핀 蓮꽃을 鑑賞할 수 있지만, 只今의 저문 蓮꽃 또한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또 다른 韻致를 자아낸다. 드문드문 핀 華麗한 修鍊 꽃, 缸아리 模樣의 ‘醬독臺 噴水’, 갈대밭이 茂盛한 오솔길 等은 歲味源 入場料(5000원)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지친 日常生活에서 물의 기운을 받아 回復 에너지로 삼는 旅行地로서는 두물머리 一帶가 제格이다. ○가볼 만한 곳 ▽南楊州 물의 庭園: 두물머리에서 北漢江 쪽 風光을 즐기고 싶다면 南楊州 ‘물의 庭園’을 推薦한다. 물의 庭園은 國土交通部가 2012年 漢江 살리기 事業으로 조성한 水邊生態公園(48萬4188m²)이다. 北漢江邊을 따라 펼쳐지는 廣大한 庭園에는 散策路와 自轉車道路가 잘 造成돼 있다. 물의 定員을 象徵하는 다리인 뱃나들이校를 건너면 江邊 散策路를 따라 大規模 草花(草花) 團地가 造成돼 있다. 9月에는 울긋불긋한 코스모스가 長官이다. ▽陵內譯 肺疫: 南楊州 조안면에 있는 陵內譯 肺疫은 옛 汽車驛의 鄕愁를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덕지덕지 때 묻은 看板, 코딱지만 한 待合室, 歷史 안팎에 걸린 낡은 黑白寫眞, 入口에 나무로 만든 빨간 郵遞筒 等이 있는 이 肺疫은 最近 復古 烈風을 타고 人氣를 끌고 있다. 陵內譯은 1956年 開通돼 地域 住民들의 서울 通學·通勤用으로 愛用되다가 2008年 京義中央線 鐵道 路線이 變更되면서 肺疫이 됐다. 鐵路邊에 自轉車 專用道路가 놓이면서 北漢江邊을 즐기는 自轉車 同好人 사이에 입所聞이 난 以後 觀光客들의 追憶旅行地로 浮上했다. 글·寫眞 楊平=안영배 記者·風水學 博士 ojong@donga.com}

    • 2021-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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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數十萬 年이 차곡차곡… 굽어보니 福주머니 올려보니 玄武巖 커튼

    《名所에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아름다운 景觀, 뛰어난 建築美, 歷史的 人物들의 스토리가 묻어 있는 場所일수록 그렇다. 거기에 名所 自體의 좋은 터 기운이 보태진다면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더욱 剛해진다. 京畿 포천시엔 그런 名所 明堂이 적잖다. 지루한 가을장마, 잠깐 날이 갠 틈을 타 名所를 찾는 ‘번개 旅行’을 했다.》 ○福주머니 名所, 漢灘江邊의 비둘기낭 瀑布 抱川에는 서로 競爭을 하듯 對比되는 두 곳의 名所가 있다. 2020年 7月 유네스코 世界脂質公園으로 引證된 ‘漢灘江 世界脂質公園’과 肺採石場을 文化藝術 空間으로 탈바꿈시킨 ‘抱川아트밸리’가 바로 그곳이다. 하나는 自然이 빚어낸 天惠의 名所이고, 다른 하나는 人爲的으로 造成한 名所다. 漢灘江 世界脂質公園은 不過 물이 빚어낸 自然의 彫刻品이다. 北韓 江原道 쪽에서 暴發한 火山 鎔巖이 西쪽 臨津江까지 흘러가면서 곳곳에 巨大하고도 平平한 玄武巖質 鎔巖大地를 만들었는데, 그 위로 오랜 歲月 江물이 흐르면서 20∼40m의 깊은 峽谷을 만들어놓은 地形이다. 漢灘江 世界脂質公園은 地上에서 푹 꺼진 玄武巖 峽谷과 기둥 模樣의 柱狀節理 等 地質學的 特性과 아름다운 景觀 德分에 世界로부터 認定받은 文化遺産이 됐다. 그中에서도 斷然 으뜸은 ‘비둘기낭 瀑布’다. 峽谷으로 떨어지는 瀑布와 玉色 물 빛깔이 印象的인 곳이다. ‘비둘기낭’은 山비둘기들이 이곳에 形成된 河蝕洞窟 및 垂直 絶壁에 크고 작은 둥지를 틀어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1950年代 6·25戰爭 當時에는 사람들의 隱密한 避亂處로 使用됐고, 1970年代에는 5軍團 休養地로 將軍들의 비밀스러운 避暑地가 되기도 했다. 最近에는 TV 드라마와 映畫 撮影地로 脚光받고 있다. 비둘기낭 瀑布는 乾期에는 마른 瀑布이기 쉽다. 마침 가을장마가 한바탕 스친 後 찾았을 때는 콸콸 내리는 물줄기가 시원하고도 壯快했다. 거기다 웅덩이처럼 움푹 파인 峽谷 일대로 햇빛이 비치는 모습은 마치 빛 기둥을 탄 仙女가 湖水에 下降하는 듯한 雰圍氣를 자아낸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峽谷 아래로 들어서는 瞬間부터 마음이 便安해지고 氣分이 爽快해짐을 느끼는 體驗을 하곤 한다. 바로 이곳이 知己(地氣), 卽 天然의 터 기운이 부드럽고도 剛하게 서린 곳이기 때문이다. 비둘기낭 瀑布는 風水的으로도 福笊籬型 或은 둥지型 明堂이라고 할 수 있다. 비둘기낭 瀑布 隣近에는 漢灘江의 뛰어난 絶景을 鑑賞할 수 있는 몇몇 포인트가 있다. 먼저 비둘기낭 瀑布에서 徒步로 15分 程度 걸리는 ‘漢灘江 하늘다리’는 漢灘江 峽谷을 眺望할 수 있는 最高의 名所다. 柱狀節理를 이룬 漢灘江 兩쪽 垂直 絶壁 사이에 높이 50m, 길이 200m로 設置한 출렁다리다. 다리 바닥 一部에는 透明琉璃가 設置돼 있는데, 출렁거리는 다리 위에서 琉璃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江물은 아찔함을 膳賜한다. 이어 하늘다리 건너 山등성이를 따라 10分 남짓 階段을 타고 걷다 보면 또 다른 魅力을 가진 ‘마당교’를 만나게 된다. 마당校를 지나 왼쪽으로 夜自매트 길을 따라 5分 程度 걸으면 또 다른 風光이 펼쳐진다. 메밀꽃이 群落을 이룬 들판이다. 탁 트인 空間에서 눈송이처럼 흰 메밀꽃이 활짝 滿開한 모습은 절로 歎聲을 지르게 한다. 아직 一般人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漢灘江의 숨은 名所다. 이곳에서는 峽谷에서 느낄 수 있는 莊嚴함과 神祕함과는 달리 平和로움과 餘裕를 즐길 수 있다.○인공미의 絶頂, 抱川아트밸리 사람의 손을 탄 人工的 自然美가 壓卷인 抱川아트밸리는 元來 花崗巖 採石場이었다. 1960年代부터 無慮 30年間 이곳에서 採石된 花崗巖은 材質이 단단하면서도 아름다워 靑瓦臺, 國會議事堂, 大法院, 仁川國際空港 等 國家 主要 機關 建築物 材料로 使用됐다. 그러다가 1990年代 들어 良質의 花崗巖 生産量이 減少하면서 肺採石場으로 放置된 後 抱川市가 2004年부터 2009年까지 親環境 複合藝術文化公園으로 再탄생시킨 것이다. 천주산 頂上 附近에서 屛風처럼 깎아지른 花崗巖 絶壁, 그 아래 그림같이 펼쳐진 에메랄드빛 湖水(천주호)는 언뜻 人爵(人作)李 아닌 自然의 淺酌(天作)으로 錯覺할 程度다. 이곳에는 밤하늘의 별을 觀察할 수 있는 天文科學館, 抱川 花崗巖을 利用한 30餘 點의 彫刻品을 展示한 彫刻公園, 45m 花崗巖 職壁을 活用해 다양한 公演이 펼쳐지는 湖水公演場(미디어 파사드) 等이 있다. 抱川아트밸리로 오르는 길은 너무 경사져서 大部分 모노레일을 利用하는 便이다. 그리고 頂上엔 花崗巖 職壁을 眺望할 수 展望카페가 있는데 놀랍게도 이곳이 明堂 터다. 30餘 年間 爆藥과 망치로 毁損된 採石場 한 모퉁이에서 知己가 사라질 法도 한데, 只今까지 좋은 땅 기운을 維持해오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程度다. 頂上에 오르느라 흘린 땀을 카페에서 販賣하는 팥빙수로 식히면서 明堂 기운을 쐬고 나니 한결 기운이 살아나는 듯했다. ○夫婦 和合 다지는 직두리 夫婦송 家族旅行으로 抱川을 찾는다면 직두리 夫婦송(군내면 직두리 191)과 抱川鄕校(군내면 구읍리)도 둘러보길 勸한다. 먼저 2005年 天然記念物 第460號로 指定된 직두리 夫婦송. 얼핏 보면 한 그루 우거진 소나무처럼 보이지만 두 그루의 소나무 가지가 서로 얽혀 마치 하나처럼 이어진 모습이다. 이 夫婦송은 가지의 끝部分이 아래로 처지는 特徵을 가진 品種으로서 守令은 約 300年, 높이는 約 7m에 達한다. 夫婦송 앞에서 夫婦가 所願을 함께 빌면 이뤄진다는 傳說도 傳해 내려온다. 實際로 夫婦송을 보며 祈禱를 할 수 있도록 덱까지 設置해 놓았다. 現在도 夫婦宋의 傳說을 좇아 每年 적잖은 夫婦 或은 戀人들이 찾아온다는 게 現地 住民들의 말이다. 夫婦송 앞에서 無作定 빈다고 해서 所願이 이뤄질까 싶지만 이곳이 기운이 凝縮된 明堂이라고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基(氣) 에너지가 넘치는 곳에서의 懇切한 祈禱는 當事者의 마음과 肉體에 肯定的 影響을 주고, 結局 祈禱에 副應하는 行動으로 이어져 좋은 結實을 가져올 수도 있지 않을까. 夫婦송 앞에서 夫婦가 한마음으로 所願을 비는 것만으로도 夫婦의 사랑과 家庭의 和睦을 다지는 契機가 될 수 있을 것이다. 夫婦宋에서 車로 5分 距離인 수원산 頂上에는 夫婦송을 形象化한 展望臺도 있다. 이곳에서는 포천의 秀麗한 景觀을 한눈에 眺望할 수 있다. 夫婦송이 夫婦 或은 戀人을 위한 自然 警官이라면 抱川鄕校는 子女들을 위한 名所다. 高麗 明宗 3年(1173年)에 처음 지어진 抱川鄕校는 地方民의 敎育과 敎化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敎育機關이다. 現在의 모습은 6·25戰爭 때 破壞된 것을 1962年에 고쳐 세운 것이다. 抱川鄕校 내 가장 눈여겨볼 곳은 大聖殿이다. 大成殿은 孔子를 비롯한 中國 儒學者들과 薛聰, 최치원, 安珦, 鄭夢周 等 韓國의 偉大한 學者 18絃(賢)의 位牌를 모시고 있다. 터 自體도 學問 기운이 出衆한 곳이다. 이 기운은 鄕校 뒤便의 山줄기와도 이어진다. 바로 半月城이 자리한 청성산(283m) 자락이다. 三國時代에 祝聖된 半月城은 둘레가 1080m인 城郭인데, 抱川 市內가 훤하게 내려다보인다. 이곳은 후고구려를 세우고 스스로 彌勒을 自處한 弓裔와도 깊은 因緣을 맺고 있다. 弓裔는 半月城을 南進을 위한 主要 軍事 據點으로 삼아 兵士들을 指揮했다. 이처럼 半月城을 머리에 두르고 있는 청성산은 山 自體가 무(武)의 氣像이 剛한 곳이다. 그러니 청성산 자락의 抱川鄕校는 門(文)의 기운과 無의 氣像이 함께 녹아든 곳이라고 할 수 있다.글·사진 抱川=안영배 記者·風水學 博士 ojong@donga.com}

    • 2021-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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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福 내려온다’ 비둘기낭…所願 들어주는 夫婦송…武의 기운 품은 抱川[안영배의 都市와 風水]

    明堂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거기에 아름다운 景觀, 뛰어난 建築, 歷史的 人物들의 香氣까지 덧붙여지면 吸引力이 더욱 剛해진다. 京畿道 抱川市엔 그런 ‘名所 名當’李 적잖다. 柱狀節理와 峽谷 等 內陸에서는 보기 힘든 玄武巖 脂質臺, 빼어난 花崗巖 等으로 有名한 포천은 特히 무(武)의 氣像이 出衆한 곳이기도 하다. 코로나19로 인한 스트레스와 日常에 지친 삶에서 힘이 빠짐을 느낀다면 抱川을 찾아볼 일이다. 福주머니 名所, 漢灘江邊의 비둘기낭 瀑布 抱川에는 서로 競爭을 하듯 對比되는 두 곳의 名所가 있다. 2020年 7月 유네스코 世界脂質公園으로 引證된 ‘漢灘江 世界脂質公園’과 肺採石場을 文化藝術 空間으로 탈바꿈시킨 ‘抱川아트밸리’가 바로 그곳이다. 하나는 自然이 빚어낸 天惠의 名所이고, 다른 하나는 人爲的으로 造成한 名所다. 먼저 漢灘江 世界脂質公園은 不過 물이 빚어낸 自然의 彫刻品이다. 北韓 江原道 쪽에서 暴發한 火山 鎔巖이 西海岸쪽 臨津江까지 흘러가면서 곳곳에 巨大하고도 平平한 玄武巖質 鎔巖大地를 만들었는데, 그 위로 오랜 歲月 江물이 흐르면서 20~40m의 깊은 峽谷을 만들어놓은 地形이다. 地上에서 푹 꺼진 玄武巖 峽谷과 기둥 模樣의 柱狀節理 等 地質學的 特性과 아름다운 景觀 德分에 世界로부터도 稱讚받는 文化遺産이 됐다. 그 中에서도 斷然 으뜸은 ‘비둘기낭 瀑布’다. 峽谷으로 떨어지는 瀑布와 玉色 물 빛깔이 印象的인 곳이다. ‘비둘기낭’은 山비둘기들이 이곳에 形成된 河蝕洞窟 및 垂直 絶壁에 크고 작은 둥지를 틀어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또는 洞窟이 비둘기 둥지 같은 模樣이어서 그렇게 불린다는 얘기도 있다. 비둘기들만 이곳을 愛用했던 것은 아니다. 1950年代 6·25戰爭 當時에는 사람들의 隱密한 避難處로 使用됐고, 1970年代에는 5軍團 休養地로 將軍들의 비밀스런 避暑地가 되기도 했다. 最近에는 TV 드라마와 映畫 撮影地로 脚光받고 있다. 비둘기낭 瀑布는 乾期에는 마른 瀑布이기 쉽다. 마침 가을 장마가 한바탕 스친 後 찾았을 때는 콸콸 내리는 물줄기가 시원하고도 壯快했다. 거기다 웅덩이처럼 움푹 패인 峽谷 일대로 햇빛이 비추이는 모습은 마치 빛 기둥을 탄 仙女가 湖水에 下降하는 듯한 雰圍氣를 자아낸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峽谷 아래로 들어서는 瞬間부터 마음이 便安해지고 氣分이 爽快해짐을 느끼는 體驗을 하곤 한다. 바로 이곳이 知己(地氣), 卽 天然의 터 기운이 부드럽고도 剛하게 서린 곳이기 때문이다. 비둘기낭 瀑布는 風水的으로도 福笊籬型 或은 둥지型 明堂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 福을 듬뿍 받아간다는 마음만으로도 즐거워진다. 비둘기낭 瀑布 隣近에는 漢灘江의 뛰어난 絶景을 鑑賞할 수 있는 몇몇 포인트들이 있다. 먼저 비둘기낭 瀑布에서 徒步로 15分 程度 걸리는 ‘漢灘江 하늘다리’는 漢灘江 峽谷을 眺望할 수 있는 最高의 名所다. 柱狀節理를 이룬 漢灘江 兩쪽 垂直 絶壁 사이에 높이 50m, 길이 200m로 設置한 출렁다리다. 다리 바닥 一部에는 透明琉璃가 設置돼 있는데, 출렁거리는 다리 위에서 琉璃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江물은 아찔함을 膳賜한다. 하늘다리에서는 저 멀리로 ‘抱川 밀리터리 서바이벌 게임場’이 보인다. 市街地를 연상시키는 模型物에서 벌이는 戰鬪 게임場으로 요즘 젊은층 사이에서 流行이라고 한다. 無의 性格이 剛한 抱川 땅과 어울리는 文化 體驗場이라고 할 수 있을 것같다. 이어 하늘다리 건너 山등성이를 따라 10分 남짓 階段을 타고 걷다 보면 또다른 魅力을 가진 ‘마당교’를 만나게 된다. 柱狀節理를 形象化한 入口가 돋보이는 마당敎는 하늘다리의 縮小版이라고 할 수 있다. 마당校를 지나 왼쪽으로 夜自매트 길을 따라 5分 程度 걸으면 또다른 風光이 펼쳐진다. 메밀꽃이 群落을 이룬 들판이다. 탁 트인 空間에서 눈송이처럼 흰 메밀꽃이 활짝 滿開한 모습은 절로 歎聲을 지르게 한다. 아직 一般人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漢灘江의 숨은 名所다. 이곳에서는 峽谷에서 느낄 수 있는 莊嚴함과 神祕함과는 달리 平和로움과 餘裕를 즐길 수 있다. 人工美의 絶頂, 抱川아트밸리사람의 손을 탄 人工的 自然美가 壓卷인 抱川아트밸리는 하늘다리에서 南쪽으로 自動車로 30分(藥 25km) 남짓 걸리는 距離에 있다. 이곳은 元來 花崗巖 採石場이었다. 1960年代부터 無慮 30年間 이곳에서 採石된 花崗巖은 材質이 단단하면서도 아름다워 靑瓦臺, 國會議事堂, 大法院, 仁川國際空港 等 國家 主要 機關 建築物 材料로 使用됐다. 그러다 1990年代 들어 良質의 花崗巖 生産量이 減少하면서 肺採石場으로 放置된 後, 抱川市가 2004年부터 2009年까지 親環境 複合藝術文化公園으로 再탄생시킨 것이다. 천주산 頂上 附近에서 屛風처럼 깎아지른 花崗巖 絶壁, 그 아래 그림같이 펼쳐진 에메랄드빛 湖水(천주호)는 언뜻 人爵(人作)李 아닌 自然의 淺酌(天作)으로 錯覺할 程度다. 이곳에는 밤하늘의 별을 觀察할 수 있는 天文科學館, 抱川 化感癌을 利用한 30餘 點의 彫刻品을 展示한 彫刻公園, 45m 花崗巖 職壁을 活用해 다양한 公演이 펼쳐지는 湖水公演場(미디어 파사드) 等이 있다. 코로나19 以前엔 延人員 40萬 名이 찾아든 포천의 代表的 名所였다. 抱川아트밸리로 오르는 길은 너무 경사져서 大部分 모노레일을 利用하는 便이다. 그리고 頂上엔 花崗巖 職壁을 眺望할 수 展望카페가 있는데 놀랍게도 이곳이 明堂 터다. 30餘 年 間 爆藥과 망치로 毁損된 採石場 한 모퉁이에서 知己(地氣)도 사라질 法도 한데, 只今까지 좋은 땅 기운을 維持해오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은 程度다. 頂上에 오르느라 흘린 땀을 카페에서 販賣하는 팥빙수로 식히면서 明堂 기운을 쐬고 나니 한결 기운이 살아나는 듯했다. 夫婦 和合 다지는 직두리 夫婦송 家族旅行으로 抱川을 찾는다면 직두리 夫婦송(군내면 직두리 191)과 抱川鄕校(군내면 구읍리)도 둘러보길 勸한다. 먼저 2005年 天然記念物 第460號로 指定된 직두리 夫婦송. 얼핏 보면 한 그루 우거진 소나무처럼 보이지만, 두 그루의 소나무 가지가 서로 얽혀 마치 하나처럼 이어진 모습이다. 이 夫婦송은 가지의 끝部分이 아래로 처지는 特徵을 가진 品種으로서 守令은 約 300年, 높이는 約 7m에 達한다. 夫婦송 앞에서 夫婦가 所願을 함께 빌면 이뤄진다는 傳說도 傳해져 내려온다. 日帝强占期에 凡常치 않은 이 소나무를 보고 日本人들이 나뭇가지 열 個를 잘라냈다는 얘기도 있다. 實際로 夫婦송을 보며 祈禱를 할 수 있도록 데크까지 設置해 놓았다. 現在도 夫婦宋의 傳說을 좇아 每年 적잖은 夫婦 或은 戀人들이 찾아온다는 게 現地 住民들의 말이다. 夫婦송 앞에서 無作定 빈다고 해서 所願이 이뤄질까 싶지만, 이곳이 기운이 凝縮된 名當 이라고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흔히 所願을 잘 들어주는 것으로 소문난 祈禱處는 땅 기운이 充滿한 곳이 많다. 基(氣) 에너지가 넘치는 곳에서의 懇切한 祈禱는 當事者의 마음과 肉體에 肯定的 影響을 주고, 結局 祈禱에 副應하는 行動으로 이어져 좋은 結實을 가져올 수도 있지 않을까. 夫婦송 앞에서 夫婦가 한마음으로 所願을 비는 것만으로도 夫婦의 사랑과 家庭의 和睦을 다지는 契機가 될 수 있을 것이다. 夫婦宋에서 車로 5分 距離인 수원산 頂上에는 夫婦송을 形象化한 展望臺도 있다. 이곳에서는 포천의 秀麗한 景觀을 한눈에 眺望할 수 있다. 夫婦송이 夫婦 或은 戀人을 위한 自然 警官이라면 抱川鄕校는 子女들을 위한 名所다. 高麗 明宗3年(1173)에 처음 지어진 抱川鄕校는 地方民의 敎育과 敎化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敎育機關이다. 現在의 모습은 6·25戰爭 때 破壞된 것을 1962年에 고쳐 세운 것이다. 抱川鄕校 내 가장 눈여겨볼 곳은 大聖殿이다. 大成殿은 孔子를 비롯한 中國 儒學者들과 薛聰, 최치원, 安珦, 鄭夢周 等 韓國의 偉大한 學者 18絃(賢)의 位牌를 모시고 있다. 터 自體도 學問 기운이 出衆한 곳이다. 이 기운은 鄕校 뒤便의 山줄기인 구읍리 石佛立像으로도 이어진다. 高麗 初期에 세워진 것으로 推定되는 이 石佛은 現地人들 사이에서는 彌勒佛로 불린다. 그 앞에는 이곳에 찾아온 이들이 쌓아놓은 돌塔도 보인다. 바로 이곳이 明堂의 穴을 이루고 있으며, 鄕校의 大聖殿 터와도 連結된 것이다. 한便 鄕校의 뒷山 卽 珠算(主山)인 청성산(283m) 頂上에는 半月城이 있다. 三國時代에 祝聖된 半月城은 둘레가 1080m인 城郭인데, 抱川 市內가 훤히 내려다 보인다. 이곳은 후고구려를 세우고 스스로 彌勒을 自處한 弓裔와도 깊은 因緣을 맺고 있다. 弓裔는 半月城을 南進을 위한 主要 軍事 據點으로 삼아 兵士들을 指揮했다. 이 때문인지 구읍리 石佛立像을 흔히 ‘弓裔彌勒’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이처럼 半月城을 머리에 두르고 있는 청성산은 山 自體가 무(武)의 氣像이 剛한 곳이다. 그러니 청성산 자락의 抱川鄕校는 門(文)의 기운과 無의 氣像이 함께 녹아든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곳에서 偉大한 學者들과 勇猛한 將軍들의 行跡을 子女에게 알려주는 것으로도 알찬 名所 旅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글·寫眞=안영배 記者·風水學 博士 ojong@donga.com}

    • 2021-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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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ood&Dining]東西食品 ‘맥심 티오피’… 커피 本然의 맛 그대로

    무더위가 氣勝을 부리면서 購買 後 바로 즐길 수 있는 RTD(Ready To Drink) 커피 需要가 꾸준히 늘고 있다. 市場調査機關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지난해 國內 RTD 커피 市場 規模는 1兆3230億 원으로 2024年까지 年平均 6% 成長할 것으로 展望된다. 커피專門企業 동서식품이 선보인 RTD 커피 ‘맥심 티오피(Maxim T.O.P)’도 이 같은 上昇勢를 타고 있다. 會社 側은 “맥심 티오피가 最高級 아라비카 원두 100%를 使用하고 自體 노하우로 開發한 에스프레소 抽出 方式을 통해 커피 本然의 맛과 香을 그대로 담아낸 戰略이 消費者의 滿足度를 높여준 것”이라고 說明했다. 이 會社는 또한 맥심 티오피를 購買한 顧客을 對象으로 親環境 프로모션인 ‘맥심 티오피 熱情 마일리지 2021 Passion for the Green!(始作해요, 親環境을 向한 熱情)’을 10月 末까지 進行한다. 맥심 티오피 製品 라벨 뒤에 印刷된 亂數 番號를 모바일을 통해 入力하면 스탬프가 積立되고 스탬프 10個를 모으면 맥심 티오피 캔 275mL 1個를 받을 수 있는 모바일 交換券을 贈呈한다. 또 親環境 素材인 타이벡, 原木 및 親環境 再生가죽 商品 等 景品 應募券度 준다. 안영배 記者 ojong@donga.com}

    • 2021-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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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ood&Dining]無라벨-輕量 페트甁 出市… 動員F&B, ESG經營 拍車

    動員F&B는 最近 페트甁 몸體와 뚜껑에 라벨을 없앤 親環境 生水 ‘動員샘물 라벨프리’를 내놓았다. 페트甁에서 비닐 라벨을 떼어내는 번거로움 없이 分離 排出할 수 있게 해 再活用 便宜性을 높인 製品이다. 페트甁 무게도 크게 줄였다. 動員샘물 500mL 페트甁의 境遇 2013年엔 19g이었으나 26% 줄어든 14g으로 業界 최경량 水準이다. 會社 側은 2013年 環境部와 페트甁 輕量化를 위한 實踐協約을 맺은 後 올해도 4g을 追加로 줄이는 等 플라스틱 低減化를 꾸준히 이어 갈 計劃이다. 動員샘물 라벨프리를 活用한 親環境 프로모션도 推進하고 있다. 페트甁에 기아의 電氣車 EV6 브랜드 로고를 새겨 特別 製作한 動員샘물 라벨프리 30萬 病을 기아 側에 提供했다. 캠페인 期間 동안 全國 750餘 곳의 起亞 賣場을 訪問한 顧客들은 該當 製品을 無料로 試飮할 수 있다. 會社 側 關係者는 “動員샘물 라벨프리와 EV6를 利用하는 것만으로도 日常 속에서 親環境 活動을 實踐할 수 있다”며 “기아 側과 함께 企業의 環境 責任을 다하는 ESG 經營을 持續할 것”이라고 밝혔다. 안영배 記者 ojong@donga.com}

    • 2021-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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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角度器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태양 움직임 觀察하는 觀測 道具였다”

    角度를 재는 角度氣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半圓形 角度器의 180이라는 數字는 무얼 根據로 한 걸까. 最近 角度器가 180日 동안 하루 1°씩 움직이는 害를 觀測한 結果라는 흥미로운 科學 實驗 結果가 發表됐다. 韓國初等科學敎育學會 第80次 하계學術大會에서 忠南 문산초등학교 임정규 校長은 ‘角度器 起源에 關한 硏究’ 論文에서 ‘해 그림자 觀測을 통해 달曆 및 해時計를 만드는 過程에서 角度機가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假說을 처음으로 立證했다. 古代人들은 막대기를 利用해 아침 저녁으로 해 그림자의 움직임을 觀測하는 方法인 입간側英(立竿測影)을 통해 180日間 해가 하루 約 1°씩 움직이는 現象을 把握하고 있었다는 것. 林 校長은 이 方式으로 直接 實驗한 結果 이같은 結論을 얻었다고 밝혔다. 이에 依하면 地球 北半球에서는 冬節期 180日間(秋分~春分) 太陽 그림자가 每日 一定 間隔으로 움직여 180° 角度를 이루는데, 冬至날(每年 12月22日 頃)李 되면 角度器의 頂點인 90°를 가리켰다. 反面 夏節期에는 185日間(春分~秋分) 太陽이 約 180° 움직였다. 이같은 現象은 楕圓形의 地球 空轉 現象으로 發生하는 差異다. 360° 原形을 重視하는 古代人들이 同志 前後 180日間을 採擇해 角度器로 使用한 것이나, 夏至보다 同志를 貴重히 여긴 것도 이런 理由에서다. 한便 이러한 事實은 美國海洋大氣局에서 提供한 프로그램을 活用, 最近 120餘 年間의 天文 資料를 分析한 結果에서도 立證됐다. 林 校長은 “이 實驗은 半圓形 角度器가 360° 원을 基盤으로 한 數學 知識에서 나온 게 아니라 自然系에서 나타난 現象을 利用한 것임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論文 交信著者人 仁荷大 福期待 敎授는 “人類가 해時計를 만드는 過程 속에서 角度機가 만들어졌다는 事實은 고(古)천문 硏究에 새로운 方法을 提示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仁荷大 物理學科 이병찬 敎授는 “告天文 起源에 關한 硏究에서 現代物理學을 融合해 角度器 起源을 提示한 것은 놀라운 成果”라고 評價했다. 안영배 記者 ojong@donga.com}

    • 2021-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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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늘에서 내려온 屛風… 무더위마저 한 幅의 그림 같구나

    《相續稅 問題로 世間의 話題가 된 삼성家의 美術品 컬렉션 中 ‘兵塵年 畫帖’(寶物 782號)에는 ‘舍人巖度(舍人巖圖)’라는 그림이 있다. 朝鮮 後期의 天才 畫家 金弘道가 그린 山水畫다. 우람하면서도 壯大한 巖壁이 屛風처럼 펼쳐지고 그 아래로는 溪谷물이 悠悠히 흐르는 이 그림에서는 기운이 살아 꿈틀거리는(氣運生動) 듯하다. 金弘道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現地에서 열흘 남짓 머무르고 1年餘 동안 마음에 담아둔 끝에 完成했다고 傳해진다. 名作의 모델은 忠北 丹陽郡 丹陽8頃 中 하나인 舍人巖(名勝 第47號). 秋史 金正喜도 하늘에서 내려온 한 幅의 그림 같다고 讚歎했던 곳이다. 舍人巖은 여름 무더위를 식히는 溪谷 물놀이 場所이자 明堂 기운까지 덤으로 받을 수 있는 最高의 힐링 名所로 浮上했다. 丹陽 旅行은 舍人巖에서 始作하기를 推薦하는 理由다.》○‘여름 補陽’ 名所 舍人巖 오랜 歲月 風化가 빚어낸 舍人巖은 50m에 이르는 巖壁이 검붉은 色을 띠고 있는 形態다. 마치 누군가가 巖壁을 네모지게 彫刻해 차곡차곡 쌓아올린 듯한 신비스러운 모습이다. 絶景과 함께 巖壁 自體가 名當 穴(穴)을 이루고 있다. 朝鮮의 風流客들이 巖壁 이곳저곳에다 自身들의 이름을 새겨놓음으로써 이곳과 하나됨을 느끼고 싶어 했을 만하다. 舍人巖 밑으로는 맑디맑은 남조천(운계천)李 시원하게 흐르고 있다. 살갗이 따가운 여름 햇볕을 식히려는 물놀이 避暑客들로 溪谷은 多少 붐볐다. 물眼鏡을 쓰고, 고무보트를 타며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들은 避暑를 즐기는 同時에 舍人巖 巖壁의 明堂 기운까지 누리고 있는 셈이다. 사람들을 便安하고도 氣分 좋게 만들어주는 에너지가 放出되는 곳이니, ‘여름 保養’으로 제格이다. 舍人巖 아래 物價 便便한 너럭바위 두 곳에는 바둑板과 將棋板이 各各 새겨져 있다. 바둑板이 그려진 너럭바위를 ‘難假想(爛柯牀)’이라고 表記한 것도 재미있다. ‘神仙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도 모르는(爛柯) 平常(牀)’이라는 뜻이다. 이곳이 바둑이나 將棋를 두며 歲月을 즐기는 神仙의 空間임을 比喩한 듯하다.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現世와 동떨어진 理想的인 空間)의 世界人 舍人巖은 高麗 때부터 이미 소문났다. 丹陽이 故鄕인 高麗 末 儒學者 禹倬(1262∼1342)도 이곳을 즐겨 찾았다. 禹倬은 ‘白髮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는 時調 ‘綻露가’의 저자다. 特히 易學(易學)에 매우 뛰어난 實力을 보여 ‘逆動(易東)先生’으로도 불렸다. ‘高麗史’에서는 禹倬이 ‘力學에 造詣가 깊어 點을 치면 틀림이 없었다’고 記錄했을 程度다. 後에 朝鮮 成宗 때 丹陽郡守를 지낸 임재광이 ‘사인(舍人)’이라는 벼슬을 지낸 禹倬을 기리기 위해 이곳을 ‘舍人巖’이라고 이름 지었다. 舍人巖을 穩全히 鑑賞하기 위해서는 남조천을 가로地로는 출렁다리를 건너가 巖壁 뒤쪽까지 챙겨봐야 한다. 巖壁 틈에 숨은 듯이 들어선 작은 殿閣, 三星角이 있기 때문이다. 청련암의 附屬 建物인 三星角은 元來는 鉏壁情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禹倬 못지않게 端陽을 사랑한 朝鮮의 文人畫家 이윤영(1714∼1759)李 隱居하던 곳이다. 三星角을 둘러싼 巖壁에는 이윤영이 남긴 各自(刻字)가 있다. ‘獨立不拘 遁世무민(獨立不懼 遯世無悶·홀로 서도 두렵지 않고 世上을 등져도 걱정이 없다)’이라는 篆書體 글씨인데 難局을 克服하는 智慧를 알려주는 卦를 가리킨다. 이 터는 舍人巖의 强力한 穴 기운을 直接 누릴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舍人巖 文化觀光解說師는 “現在도 많은 사람이 祈禱나 冥想을 하기 위해 三星角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仙界로 通하는 石門 舍人巖을 充分히 吟味한 後 또 다른 여름 補養 名所로 도담三峯(國家名勝 第44號)과 石門(國家名勝 第45號)을 꼽을 수 있다. 두 곳 모두 丹陽8景에 屬하는 곳으로 서로 至近距離에 있다. 먼저 도담三峯은 單兩强(南漢江)李 휘돌아 나가면서 이룬 깊은 못에 세 봉우리(男便鳳, 처鳳, 疊峯)가 韻致 있게 자리 잡고 있는 形態다. 背信한 男便이 미운 처奉은 男便棒을 外面한 反面에 疊峯은 男便棒에게 嬌態를 부리는 듯한 모습이라는 說明이 재미있다. 도담三峯은 丹陽8頃 中 으뜸으로 손꼽힐 程度로 景致가 뛰어나다. 旌善, 金弘道 等 朝鮮 有名 畫家들의 作品에 단골 모델로 登場했다. 한便으로 朝鮮 開國功臣인 鄭道傳의 號인 ‘三峯’과 이름이 같아서 정도전 關聯 얘기가 傳해 오고 있으나 確認할 순 없다. 그 代身 退溪 李滉, 農巖 金昌協 等 朝鮮의 大學者들은 이곳을 新鮮 世上과 連結시킨 詩를 많이 남겼다. 이곳의 案內 標識板은 도담三峯이 不老長生을 象徵하는 봉래, 方丈, 榮州 三神山(三神山)의 形態를 보여준다고 紹介한다. 그래서일까, 男便鳳 或은 將軍峯으로 불리는 가운데 봉우리는 明堂 기운이 서려 있고 그 한쪽 귀퉁이에는 이를 즐길 수 있도록 精子가 세워져 있다. 三神(三神)의 痕跡은 이웃한 石門(石門)에도 있다. 石文은 石灰洞窟이 무너진 뒤 洞窟 天障 一部가 구름다리 模樣으로 남은 카르스트 地形이다. 뻥 뚫린 門을 통해 보이는 南漢江과 그 건너便 度蕁麻을 風景이 마치 寫眞 프레임처럼 다가온다. 秋史 金正喜는 ‘百 隻의 돌 무지개가 둥그렇게 열렸네(百尺石霓開曲灣)’라는 詩로 아름다운 石文을 讚歎했다. 이와 함께 石門 바로 아래쪽에는 麻姑할미가 살았다는 洞窟이 있다. 麻姑할미는 傳統信仰에서 登場하는 三神할머니를 가리킨다. 石門의 툭 트인 空間을 바라보다 보면 온몸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운도 느껴진다. 石文과 얽힌 麻姑할미 傳說 때문인지 所願을 빌기 위해 石文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정감록’ 十勝之地에서의 하룻밤 丹陽은 아름다운 名所와 함께 좋은 기운을 갖춘 明堂들이 곳곳에 있다. 이런 明堂 기운을 充分히 體驗하기 위해서는 하룻밤 程度 묵어가는 滯留 觀光이 좋다. 丹陽 北東쪽 小白山自然休養林 內에는 ‘鄭鑑錄 名當體驗마을’(영춘면 하리房터길)도 있다. 15個 洞으로 構成된 宿泊施設인데, 朝鮮時代 豫言書인 ‘鄭鑑錄’에 登場하는 十勝之地(十勝之地·戰爭과 疾病 等 患亂을 避하고 居住 環境이 좋은 10個 地域)를 스토리텔링海 지어놓은 곳이다. 雄壯한 小白山의 絶景이 눈앞에 펼쳐지기 때문에 風水 鑑賞에도 좋다. 宿所는 獨채刑으로 構成돼 코로나19로부터 좀 더 安心하며 休息을 즐길 수 있다. 實際로 몇몇 宿所는 名當 穴에 자리 잡고 있어서 明堂 기운을 體驗하기에도 좋다.○둘러볼 만한 곳△滿天下스카이워크: 南漢江 水面에서 90m 높이의 垂直絶壁 위에 세워진 滿天下스카이워크 ‘萬壑千峯展望臺’에서는 단양읍과 周邊에 펼쳐진 小白山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三重琉璃가 깔린 展望臺 바닥 아래로는 南漢江 물이 넘실거리는데, 살얼음板 위를 걷듯 가슴이 울렁거리고 조마조마하다. 展望臺까지는 無料 셔틀버스를 利用해 갈 수 있다. 展望臺에서는 總길이 980m의 집와이어를 利用해 滑降하듯이 내려갈 수 있다. 또 다른 익스트림 體驗 施設인 알파인코스터(모노레일 썰매)도 利用할 수 있는데, 運行 與否를 미리 問議하는 게 좋다. △수양개빛터널: 日帝强占期에 丹陽의 石灰石 資源을 收奪하기 위해 建設된 길이 200m, 幅 5m의 地下 施設物이다. 1985年까지 鐵道로 利用하다가 放置된 後 수양개빛터널이란 觀光 施設物로 再丹粧됐다. 形形色色의 照明을 設置한 터널을 따라가면 幻想 속 東和마을 같은 風景이 펼쳐진다. 丹陽의 밤을 즐길 수 있는 名所로 이름났다. 글·寫眞 丹陽=안영배 記者· 風水學 博士 ojong@donga.com}

    • 2021-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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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人口 줄어도 訪問者는 늘어나…단양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안영배의 都市와 風水]

    居住 人口는 갈수록 줄어들지만 찾는 사람은 갈수록 늘어나는 地域이 있다. 忠淸道를 통 털어 人口가 가장 적은 忠北 丹陽郡(2萬9000餘 名)이다. 줄어드는 居住 人口 때문에 消滅危機 地域으로 꼽히는 곳이지만, 코로나19街 流行하기 前인 2019年 端陽을 찾은 觀光客 數는1000만 名을 突破했다. 軍 規模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다. 丹陽에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특별한 것이 있다. 바로 사람의 기운을 북돋우는 名當들이 觀光商品처럼 展示돼 있기 때문이다. ○ ‘기운 補陽’의 名所 舍人巖相續稅 問題로 世間의 話題가 된 삼성家의 美術品 컬렉션 中 ‘兵塵年 畫帖’(寶物 782號)에는 ‘舍人巖度(舍人巖圖)’라는 그림이 있다. 朝鮮 後期의 天才 畫家 金弘道가 그린 山水畫다. 우람하면서도 壯大한 巖壁이 屛風처럼 펼쳐지고 그 아래로는 溪谷물이 悠悠히 흐르는 이 그림에서는 기운이 살아 꿈틀거리는 듯하다. 山水畫에서 最高로 치는 기운生動(氣運生動)의 境地다. 明堂 기운을 담고 있는 實物을 畫幅으로 담으면 그림에서도 그 기운을 느낄 수 있다는 뜻이다. 金弘道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現地에서 열흘 남짓 머무르고 1年 餘 동안 마음에 담아둔 끝에 完成했다고 傳해진다. 名作의 모델은 忠北 丹陽郡 丹陽8頃中 하나인 舍人巖. 秋史 金正喜도 하늘에서 내려온 한 幅의 그림 같다고 讚歎했던 곳이다. 現在 舍人巖은 여름 무더위를 식히는 溪谷 물놀이 場所이자 明堂 기운까지 덤으로 받을 수 있는 最高의 힐링(healing) 名所로 浮上했다. 丹陽 旅行은 舍人巖에서부터 始作하기를 推薦하는 것도 이런 理由에서다. 오랜 歲月 風化가 빚어낸 舍人巖은 50m에 이르는 巖壁이 검붉은 色을 띠고 있는 形態다. 마치 누군가가 巖壁을 네모지게 彫刻해 차곡차곡 쌓아올린 듯한 신비스런 모습이다. 絶景과 함께 巖壁 自體가 名當 穴(穴)을 이루고 있다. 朝鮮의 風流客들이 巖壁 이곳저곳에다 自身들의 이름을 새겨놓음으로써 이곳과 하나됨을 느끼고 싶어했을 만하다. 舍人巖 밑으로는 맑디맑은 남조천(운계천)李 시원하게 흐르고 있다. 살갗이 따가운 여름 햇볕을 식히려는 물놀이 避暑客들로 溪谷은 多少 붐볐다. 물眼鏡을 쓰고, 고무보트를 타며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들은 避暑를 즐기는 同時에 舍人巖 巖壁의 明堂 기운까지 누리고 있는 셈이다. 사람들을 便安하고도 氣分 좋게 만들어주는 에너지가 放出되는 곳인 만큼 ‘여름 기운 步兩用’으로 제格이다. 舍人巖 아래 物價 便便한 너럭바위 두 곳에는 바둑板과 將棋板이 各各 새겨져 있다. 바둑板이 그려진 너럭바위를 ‘難假想(爛柯牀)’이라고 表記한 것도 재미있다. ‘神仙 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도 모르는(爛柯) 平常(牀)’이라는 뜻이다. 이곳이 바둑이나 將棋를 두며 歲月을 즐기는 神仙의 空間임을 比喩한 듯하다.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現世와 동떨어진 理想的인 空間)의 世界人 舍人巖은 高麗때부터 이미 소문났다. 丹陽이 故鄕인 高麗末 儒學者 禹倬(1262-1342)도 이곳을 즐겨 찾았다. 禹倬은 ‘白髮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는 時調 ‘綻露가’의 저자다. 特히 易學(易學)에 매우 뛰어난 實力을 보여 ‘逆動(易東)先生’으로도 불렸다. ‘高麗史’에서는 禹倬이 ‘力學에 造詣가 깊어 點을 치면 틀림이 없었다’고 記錄했을 程度다. 아마도 ‘神仙 資格證’ 中 하나인 叡智力까지 갖춘 禹倬은 이 땅의 凡常치 않은 氣運을 눈치채 舍人巖을 즐겨 찾았던 것으로 推定된다. 後에 朝鮮 成宗 때 丹陽郡守를 지낸 임재광이 ‘사인(舍人)’이라는 벼슬을 지낸 禹倬을 기리기 위해 이곳을 ‘舍人巖’이라고 이름지었다. 舍人巖을 穩全히 鑑賞하기 위해서는 남조천을 가로地로는 출렁다리를 건너가 巖壁 뒤쪽까지 챙겨봐야 한다. 巖壁 틈에 숨은 듯이 들어선 작은 殿閣, 三星角이 있기 때문이다. 청련암의 附屬 建物인 三星角은 元來는 鉏壁情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禹倬 못지 않게 端陽을 사랑한 朝鮮의 文人畫家 이윤영(1714-1759)李 隱居하던 곳이다. 三星角을 둘러싼 巖壁에는 이윤영이 남긴 各自(刻字)가 있다. ‘獨立不拘 遁世무민(獨立不懼 遯世無悶; 홀로 서도 두렵지 않고 世上을 등져도 걱정이 없다)’이라는 篆書體 글씨다. 主役 67卦 中 28番째 卦인 擇풍대과(澤風大過)에서 나온 말인데, 冢弟的 難局을 克服하는 智慧를 알려주는 卦를 가리킨다. 이 터는 舍人巖의 强力한 穴 기운을 直接 누릴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곳에 오랫동안 머물다 보면 世上의 어떤 어려움도 克服할 수 있는 智慧와 힘을 얻을 수도 있을 것 같다. 舍人巖 文化觀光解說師는 “現在도 많은 사람들이 祈禱나 冥想을 하기 위해 三星角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 仙界로 通하는 石門 舍人巖을 充分히 吟味한 後 또다른 여름 補養 名所로 도담三峯(國家名勝 第44號)과 石門(國家名勝 第45號)을 꼽을 수 있다. 두 곳 모두 丹陽8景에 屬하는 곳으로 서로 至近距離에 있다. 먼저 도담三峯은 單兩强(南漢江)李 휘돌아 나가면서 이룬 깊은 못에 세 봉우리(男便鳳, 처鳳, 疊峯)가 韻致있게 자리잡고 있는 形態다. 背信한 男便이 미운 처奉은 男便棒을 外面한 反面, 疊峯은 男便棒에게 嬌態를 부리는 듯한 모습이라는 說明이 재미있다. 도담三峯은 丹陽8頃中 으뜸으로 손꼽힐 程度로 景致가 뛰어나다. 旌善, 金弘道 等 朝鮮 有名 畫家들의 作品에 단골 모델로 登場했다. 한便으로 朝鮮 開國功臣인 鄭道傳의 號인 ‘三峯’과 이름이 같아서, 정도전 關聯 얘기가 傳해져 오고 있으나 確認할 순 없다. 代身 退溪 李滉, 農巖 金昌協 等 朝鮮의 大學者들은 이곳을 新鮮 世上과 連結시킨 詩를 많이 남겼다. 이곳의 案內 標識板은 도담三峯이 不老長生을 象徵하는 봉래, 方丈, 榮州 三神山(三神山)의 形態를 보여준다고 紹介한다. 그래서일까, 男便鳳 或은 將軍峯으로 불리는 가운데 봉우리는 明堂 기운이 서려 있고 그 한쪽 귀퉁이에는 이를 즐길 수 있도록 精子가 세워져 있다. 三神(三神)의 痕跡은 이웃한 石門(石門)에도 있다. 石文은 石灰洞窟이 무너진 뒤 洞窟 天障 一部가 구름다리 模樣으로 남은 카르스트 地形이다. 뻥 뚫린 門을 통해 바라보이는 南漢江과 그 건너便 度蕁麻을 風景이 마치 寫眞 프레임처럼 다가온다. 秋史 金正喜는 ‘百 隻의 돌 무지개가 둥그렇게 열렸네(百尺石霓開曲灣)’라는 詩로 아름다운 石文을 讚歎했다. 이와 함께 石門 바로 아래쪽에는 麻姑할미가 살았다는 洞窟이 있다. 麻姑할미는 傳統信仰에서 登場하는 三神 할머니를 가리킨다. 願하는 일이 뜻대로 이뤄짐을 의미하는 ‘麻姑搔癢(麻姑搔痒)’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때의 마고가 바로 그 三神 할머니이다. 石門의 툭 트인 空間을 바라보다 보면 온몸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운도 느껴진다. 石文과 얽힌 麻姑할미 傳說 때문인지 所願을 빌기 위해 石文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鄭鑑錄’ 十勝之地에서의 하룻밤 丹陽은 아름다운 名所와 함께 좋은 기운을 갖춘 明堂들이 곳곳에 있다. 이런 明堂 기운을 充分히 體驗하기 위해서는 하룻밤 程度 묵어가는 滯留 觀光이 좋다. 丹陽 北東쪽 小白山自然休養林內에는 ‘鄭鑑錄 名當體驗마을’(영춘면 하리房터길)도 있다. 15個 洞으로 構成된 宿泊施設인데, 朝鮮時代 豫言書인 ‘鄭鑑錄’에 登場하는 十勝之地(十勝之地; 戰爭과 疾病 等 患亂을 避하고 居住 環境이 좋은 10個 地域)를 스토리텔링海 지어놓은 곳이다. 雄壯한 小白山의 絶景이 눈앞에 펼쳐지기 때문에 風水 鑑賞에도 좋다. 宿所는 獨채刑으로 構成돼 코로나19로부터 좀더 安心하고 休息을 즐길 수 있다. 實際로 몇몇 宿所는 名當 穴에 자리잡고 있어서, 明堂 기운을 體驗하기에도 좋다. 以外에도 丹陽에는 上仙巖, 사선대 等 明堂 터가 觀光商品으로 꾸며져 사람들이 즐겨 찾는 名所가 된 곳이 적잖다. 人口 적은 丹陽에서 流動 人口만큼은 豐盛한 理由다.안영배 記者·風水學 博士 ojong@donga.com}

    • 2021-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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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神仙이 사랑한 西海의 寶石… 내 마음까지 붉게 물들이네

    《群山 앞바다에 둥둥 뜬 섬들인 古群山群島로 간다. 群山과 扶安을 連結하는 世界 最長의 防潮堤(33.9km)가 있는 곳이자 新侍島 巫女圖 仙遊島 大將도 等 여러 섬이 다리로 連結돼 한 몸처럼 된 곳이다. 臨津·精油 戰爭 當時 李舜臣 將軍이 머문 水軍 陣地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水軍 陣地가 只今의 群山으로 옮긴 以後 이 섬들은 ‘옛 群山도’, 卽 古群山群島가 됐다. 資金은 開闢 天地가 된 古群山群島로의 旅行은 이곳과 因緣이 깊은 歷史的 人物과 함께한다. 同行하는 ‘스토리 旅行’의 主人公은 有線(儒仙·儒學者 新鮮)으로 推仰받는 고운 崔致遠(857∼?). 우리나라 各地에는 1000餘 年 前 統一新羅 末期의 人物인 崔致遠이 남긴 痕跡이 적잖게 있다. 그런데 唯獨 群山과 古群山群島 一帶에서 그의 誕生 說話를 비롯해 珍貴한 이야기가 많이 傳해 내려온다.》 ○自薦對에 숨겨진 최치원 文書 崔致遠의 자취를 좇아 처음 찾은 곳은 自薦對(紫泉臺). 崔致遠이 노닐던 精子로 紹介한 朝鮮의 人文地理書 ‘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西海岸에 있으며, 地勢(地勢)가 平平하고 넓으며, 샘과 돌을 즐길 만한 곳”이라고 說明한다. 古群山群島가 눈앞에 보이는 下劑浦口(군산시 옥서면 선연리)가 바로 그곳이다. 元來는 섬이었다. 日帝强占期 大規模 干拓工事(1920∼1923年)로 陸地로 變한 後, 1934年 日本軍이 群山飛行場을 建設하면서 下劑浦口 바위山에 있던 自薦對는 옥구鄕校로 移轉했다. 원봉연 群山 文化觀光解說社는 이 一帶에 아직도 남아 있는 한 바위山을 가리키며 “元來의 自薦對와 비슷한 形態”라며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擇里志’(1751年)의 著者 理中丸도 自薦對에 關心이 많았던 模樣이다. 그는 “작은 山기슭 한 줄기가 바닷가로 뻗어 들어가는데 그 위에 두 個의 돌函이 있었다. 新羅 때 崔致遠이 太守가 돼 函 속에 祕密文書를 감춰두었다고 한다”고 紹介했다. 崔致遠이 自薦對 돌函에 숨겨놓았다는 文書의 內容은 무엇이었을까. 최인학의 ‘朝鮮傳說集’(1977年)에서는 석룡(石龍)으로 불리는 이 돌함은 가뭄을 물리치는 效驗이 있어서 많은 이들이 구경하러 왔다고 傳한다. 儒學者이면서도 神仙의 面貌를 剛하게 풍긴 최치원이기에 可能한 說話인 듯하다. 그는 慶州 出身 6頭品 집안, 唐나라에서 成功한 中國 留學派, 腐敗한 新羅를 改革하려던 政治人, 筆力으로 ‘黃巢의 亂’을 물리친 大文章家 等 履歷이 華麗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儒敎, 佛敎, 道敎에 通達해 3橋 모두에서 두루 欽慕하는 先覺者라는 點, 우리 固有 文化에 對한 洞察力이 뛰어났던 時代의 風流家라는 點이 그의 眞짜 魅力일 것이다. 그는 ‘난랑비서’(花郞 난랑을 위해 세운 碑石)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라에 玄妙한 道가 있으니 風流(風流)라 이른다. 이는 3校를 包含하여 衆生을 敎化한다”고 했다. 三敎의 核心的 가르침이 이미 우리 固有의 風流도(風流道)에 담겨 있다는 破天荒的인 宣言이다. 그러나 崔致遠 當代의 世上은 그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百姓들을 잘살게 하고 싶었던 그의 努力은 腐敗한 政治權力에 依해 挫折됐다. 以後 全國 坊坊曲曲을 노니는 風流 生活이 始作됐다. ‘옥구구地(沃溝舊誌)’에서는 “崔致遠이 母國에 돌아왔을 때 世上이 極度로 어지러워 民心이 洶洶해지자 그 홀로 自薦對에 올라 茫茫大海를 바라보며 讀書三昧로 시름을 달랬다”고 傳한다. 崔致遠은 亡해가는 新羅를 보면서 “鷄林(鷄林·新羅)은 黃葉(黃葉·누런 잎)이고, 곡령(鵠嶺·高麗)은 靑松(靑松·푸른 솔)”이라고 말했다고 한다(‘삼국사기’). 高麗 建國의 正當性을 確保하기 위해 누군가가 지은 圖讖이라는 指摘도 있지만, 亡國의 길을 가던 唐나라를 現場에서 目擊한 바 있는 崔致遠이 時代의 變化를 모를 理 없었다. ○黃金돼지와 하늘 별자리 奎星(奎星) 崔致遠은 自薦對에 올라 눈앞에 펼쳐지는 未來의 古群山群島를 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일까. 古群山群島에는 崔致遠의 痕跡이 곳곳에 남아 있다. 崔致遠은 뗏木 같은 風船(風船)을 타고 섬으로 들어갔지만, 只今은 自動車로 새만금防潮堤 道路를 쭉 따라가면 夜味島를 거쳐 新侍島로 바로 이어진다. 新侍島는 崔致遠이 한때 居住했던 곳으로 알려진 섬이다. 그는 新侍島에서 우뚝 솟아 있는 月靈峯(198m)을 名山이라고 稱讚했다고 한다. 山 頂上 附近에 돌담으로 居處를 만들어 월영대라 이름 짓고 글을 읽었는데 그 소리가 中國에까지 들렸다는 傳說이 傳해진다. 月影奉은 古群山群島 ‘宣諭 8景’ 中 하나로 가을 丹楓이 長官을 이루는 名勝地이기도 하다. 最近 新侍島에는 國立新侍島自然休養林이 開館했다. 古群山群島에서 唯一하게 大型 宿泊施設을 갖춘 이곳에 묵으면 休養과 함께 絶景을 鑑賞할 수 있다. 또 電動 스쿠터 等을 利用해 崔致遠 關聯 說話가 담긴 古群山群島 곳곳을 찾아다녀보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다. 新侍島에는 월영대 外에도 崔致遠이 크게 깨달음을 얻은 곳이라고 하는 대각산(大覺山)과 지風琴 마을 뒷山의 최치원 新黨 터가 있다. 新侍島 住民들은 최치원 新黨에서 每年 祭를 올렸다고 한다. 이 新黨의 存在를 記錄한(‘조선무속고’) 李能和는 “섬사람들이 先生의 人格을 思慕해 祠堂을 세우고 天神(天神)처럼 받들고 있다”고 說明했다. 卽, 崔致遠을 神으로 받든 全國 唯一의 新黨인 것이다. 아쉽게도 新黨은 古群山群島 連結道路 建設로 인해 쪼개진 節槪地 위에 그 痕跡만 남아 있다. 新侍島에서 섬 連結道路를 利用해 巫女圖를 거쳐 仙遊島로 들어가면 崔致遠의 誕生 說話가 담긴 襟度치窟이 있다. 이곳은 群山 內陸의 내초도(섬이었으나 陸地로 變함) 金돈試掘(金豚始窟)과 함께 崔致遠을 始祖로 받드는 慶州 崔氏가 ‘돼지 崔氏’로 불리게 된 說話와 連結된다. 崔致遠이 黃金빛 돼지가 사는 굴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사람이 돼지 어미에게서 태어날 수는 없는 法이다. 이는 崔致遠이 東洋의 별자리 中 하나인 奎星(奎星·안드로메다 별자리)의 기운을 이곳에서 받아 태어난 것을 比喩한 表現으로 볼 수 있다. 16個 別로 構成된 叫聲은 ‘하늘 돼지(天豕)’로 불리는데 文章과 文人을 主管하는 별자리로 取扱됐다. 結局 崔致遠이 돼지 어미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은 崔致遠이 文章家의 기운을 타고났음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미래의 希望 古群山群島를 바라보다 風水에도 밝았던 崔致遠은 古群山群島의 特異한 配置에 注目했을 수도 있다. 古群山群島는 仙遊島 망주봉을 中心으로 여러 섬이 빙 둘러싸고 있는 形象이다. 仙遊島와 連結된 大將도 대장봉(142.8m) 頂上에서 굽어보면 이런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치 仙遊島 망주봉이 蓮꽃 봉우리이고 周圍 섬들이 蓮잎으로 감싸고 있는 듯하다.흥미롭게도 巖壁으로 된 癌·數 봉우리가 치솟아 있는 망주봉에는 千年 都邑을 建設할 王을 기다린다는 傳說도 내려온다. 새 나라를 建設할 왕이 北쪽에서 仙遊島로 온다는 말에 젊은 夫婦가 나란히 서서 기다리다 지쳐 바위로 굳어졌다는 傳說이다. 또 망주봉을 中心으로 千年王國의 宮闕이 들어선다는 豫言은 이곳 사람들에겐 매우 具體的으로 提示됐다. 새 宮闕의 序文(西門)은 管理도 쇠코바우가 되고, 北門(北門)은 防築島 구녕바위, 同門(東門)은 仙遊島 나매기(남악리)의 襟度치굴, 南門(南門)은 新侍島의 구녕바위로 設定됐다.그러나 섬이 王國의 都邑地가 되기는 어렵다. 이곳이 陸地가 돼야 한다. 朝鮮時代 全羅監司 이서구(李書九·1754∼1825)는 이 一帶가 앞으로 뭍으로 變한다고 豫言했다. 그는 “수저(水低) 30張(丈)이요, 지고(地高) 30張(丈)이라”고 했다. 群山과 변산의 앞바다가 30張(藥 90m) 깊이로 물이 빠지고 海底의 땅이 30張 위로 솟구친다는 뜻이다. 全北 사람들은 새만금防潮堤가 놓인 바다가 陸地(서울 面積의 3分의 2 크기)로 變하게 됨으로써 이서구의 豫言이 들어맞았다고 놀라워들 한다. 鳴沙十里로 有名한 선유도해수욕장에서 宣諭 8頃 中 第1京仁 落照를 鑑賞하면서, 이 一帶가 陸地로 變身했을 모습을 想像해본다. 어쩌면 千年王國 傳說이 不可能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바다가 땅으로 開闢되는 새 世上을 崔致遠은 미리 보았던 걸까. 글·寫眞 群山=안영배 記者·風水學 博士 ojong@donga.com}

    • 2021-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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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ood&Dining]靑年들에 ‘創業의 날개’… 200億 원 쏜다

    國內 最大 치킨 프랜차이즈 企業 제너시스BBQ그룹(會長 윤홍근)李 2030世代들의 꿈과 希望을 펼쳐주기 위해 마련한 ‘靑年스마일 프로젝트’가 社會 進出을 앞둔 靑年들로부터 注目받고 있다. ‘靑年스마일 프로젝트’는 就業難과 雇傭 不安定 等으로 社會 進入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靑年들이 事業家로 成功할 수 있도록 包裝·電送(配達) 專門 賣場인 BSK(BBQ Smart Kitchen)가 事業 基盤과 機會를 提供하는 創業 프로젝트다. 30日까지 2人 1個 팀으로 應募 可能… BBQ, 채널A, 잡다 홈페이지 통해 支援이 프로젝트는 6日 募集을 始作한 後 2030世代들의 支援이 大擧 몰렸다. 하루 100餘 件의 問議와 接受 日程 延長 要請이 잇따라 제너시스BBQ는 채널A, 마이다스人 等 프로젝트 파트너社와 相議해 30日까지 募集 期間을 延長키로 했다. BBQ, 채널A, 잡다(JOBDA) 홈페이지를 통해 支援 申請할 수 있다. 프로젝트 參與 資格은 2人 1팀을 基準으로 하되, 2030世代가 팀의 代表者로 支援한다면 파트너의 年齡은 制限을 두지 않는다. BBQ는 서울과 京畿, 講院, 忠淸, 嶺南, 湖南 6個 圈域으로 나눠 參加者를 募集하며 最終 200팀을 選定한다고 밝혔다. 會社 側은 申請者들의 스펙과 背景을 排除한 狀態에서 參加者들의 成功하고자 하는 懇切함과 熱情을 主로 評價할 計劃이다. 공정한 選拔을 위해 HR 專門企業인 마이다스仁義 支援을 받아 人工知能(AI) 力量檢査를 導入하기로 했다. 最終 合格者는 8000萬 원 相當 支援받아… 고기 잡는 法 배울 것 프로젝트에 最終 選定된 팀은 BSK 賣場을 비롯해 인테리어, 施設, 初期 運營資金 等 8000萬 원 相當을 支援받게 된다. 프로젝트에 200億 원 以上을 支援하는 제너시스BBQ그룹은 靑年들에게 單純히 金錢的인 도움을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靑年들이 經濟的 自立 基盤을 다져 成功한 事業家로 成長해 갈 수 있도록 支援하는 것을 目標로 한다고 밝혔다. 제너시스BBQ그룹 윤홍근 회장은 “코로나19로 인한 景氣 沈滯와 靑年 就業難으로 社會에 걸음을 내디뎌야 할 靑年들이 제대로 된 機會조차 얻지 못하고 挫折하는 것이 안타까웠다”며 “물고기를 잡아주기보다는 잡는 法을 가르쳐줘 靑年들이 霸氣와 熱情을 가지고 挑戰할 機會를 만들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해 6月 配達과 包裝 專門賣場으로 론칭한 BSK는 1年 만에 300號店을 突破하는 等 順航하고 있다. 제너시스BBQ그룹은 靑年 일자리 創出을 위해 BSK와 하나은행이 손잡고 1% 超低金利 貸出인 ‘하나銀行 프랜차이즈론‘을 통해 現在까지 100餘 名의 2030世代가 惠澤을 받도록 하는 等 創業 支援의 손길을 내밀었다. 안영배 記者 ojong@donga.com}

    • 2021-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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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衆生들의 精神 渴症 풀어주는 깨달음의 두레박

    《코로나19街 불러온 非對面 온라인 社會,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4次 産業革命 時代, 가늠되지 않는 未來…. 混沌스러운 世上에서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새 時代를 살아갈 慧眼과 智慧가 懇切한 요즘이다. 바로 그럴 때 찾는 곳 中의 하나가 忠南 瑞山(瑞山)의 ‘상서로운 기운(瑞氣)’이 밴 땅이다. 只今보다 더 고통스럽고 險難했던 日帝强占期, 社會의 精神的 燈불 役割을 했던 鏡虛(鏡虛·1846∼1912)와 滿空(滿空·1871∼1946) 船社 等 善知識(善知識·禪宗에서 修行者들의 스승을 이르는 말)들의 體臭가 剛하게 묻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當時 韓國人들의 尊敬을 받았던 ‘큰어른’들의 行跡을 더듬어보는 동안 절로 마음이 便安해짐을 느끼게 된다. 또 그들이 머물고 遂行했던 터는 精神的, 肉體的으로 힐링할 수 있는 最高의 明堂이기도 하다.》 ○高僧들이 알아본 名當 隨行 터 善知識을 만나는 巡禮는 忠南 瑞山市 천장사(天藏寺)에서 始作한다. 633年 백제 때 創建한 것으로 알려진 이 寺刹 入口에 들어서자 ‘최인호 文學의 金字塔 ‘길없는 길’의 舞臺―天障癌’이라는 標識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過去 天障癌(天藏庵)으로 불린 천장사의 來歷도 함께 記載돼 있다. ‘이곳 연암산 天障癌은 鏡虛 大禪師께서 18年(1886∼1904年)間 主席하신 精神的 度量으로서 그의 手法 弟子인 수월, 慧月, 萬공이 遂行했던 곳입니다. 作家 최인호(1946∼2013)는 그 內容을 主題로 하여 小說 ‘길없는 길’을 썼고, 이로써 天障癌은 韓國文學史에 길이 傳하는 名所가 되었습니다.’ 天障社가 近現代 韓國 佛敎에 커다란 足跡을 남긴 高僧들을 輩出한 절이라는 自負心이 느껴지는 글이다. ‘天障癌’이라고 表記된 因法堂(因法堂·僧侶가 居住하는 空間에 佛像을 함께 奉安한 殿閣)의 供養間 쪽에는 ‘鏡虛 涅槃 100周年 記念塔’이 세워져 있다. 朝鮮의 抑佛崇儒 政策과 日帝의 朝鮮佛敎 抹殺政策으로 숨이 끊기기 直前의 韓國 佛敎를 中興시킨 鏡虛를 기리는 塔이다. 그리고 이 塔에서 正面으로 바라보이는 곳이 ‘깨달음의 房’이다. 鏡虛가 1年 동안 訪問을 틀어막은 채 장좌불와(長坐不臥·決코 눕지 아니하고 꼿꼿이 앉은 채로 遂行하는 方法)韓 끝에 깨달음을 圓滿히 이루었다고 해서 원성문(圓成門) 또는 원構文(圓求門)으로 불리는 房이다. 窓門 하나 없는 房 안은 가로 2.3m, 세로 1.3m로 1坪(3.3m²) 크기도 되지 않았다. 홀로 눕기에도 비좁아 보이는 房이지만 鏡虛의 隨行 香氣가 只今도 가득 배어 있는 듯했다. 鏡虛의 房 바로 왼쪽으로는 滿空 等 弟子들이 스승을 侍奉했던 月面當(月面堂)이 있다. 月面黨과 바로 붙어 있는 供養間은 鏡虛의 맏上佐인 수월(1855∼1928)李 불을 때다가 三昧에 들어 膀胱(放光)을 한 곳으로 有名하다. 山 밑 寺下村 사람들이 절에서 나오는 膀胱 現象을 發見하고 火災가 난 줄 알고 몰려들었다는 얘기가 只今까지도 傳해진다. 高僧이 明堂을 알아보고 거기서 遂行하는 걸까, 아니면 明堂 터가 高僧을 排出해내는 걸까. 事實 연암산 中턱 깎아지른 듯한 絶壁 위에 자리 잡고 있는 天障癌 自體가 대단한 에너지를 갖춘 名當 길지다. 宗敎를 떠나 누구든 이곳에서 冥想이나 修行을 하다 보면 깨침을 얻을 것 같다. 하늘이 숨겨 놓았다는 이름답게 곳곳에 明堂이 숨은 듯이 자리 잡고 있는 天障癌을 뒤로 하고 비탈길을 따라 下山했다. 그런데 길목에서 만난 標識板을 보고는 微笑를 감출 수 없었다. ‘鏡虛와 滿空의 바랑이쉼터’라는 標識板에 적힌 內容은 이랬다. 鏡虛와 萬공이 托鉢을 다녀오는 길, 바랑을 멘 滿空은 鏡虛의 뒤를 힘겹게 따르고 있었다. 갑자기 鏡虛가 물동이를 人 洞네 아낙에게 입을 맞추고 줄行廊을 쳤다. 滿空度 精神없이 줄달음쳤다. 山길로 접어든 鏡虛가 길가 널찍한 바위에 걸터앉으며 입을 열었다. “滿空아! 아직도 바랑이 무거우냐?” 스승은 무거운 바랑에다 짚신까지 해어져 不平하는 弟子에게 縮地法으로 便히 架柱겠다고 約束했던 참이었다. 그리고 절 아래 마을의 金氏 處女(김광조 천장사文化解說師 證言)에게 입맞춤한 뒤 마을 사내들로부터 逢變을 避하기 위해 ‘걸음아 날 살려라’ 하는 줄行廊 縮地法을 썼다. 바랑이쉼터의 널찍한 바위는 스승이 弟子에게 가르쳐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의 現場이다. ○ 韓國, 世界逸話(世界一花)의 中心 될 것 천장사에서 自動車로 30分 남짓한 距離의 간월암(看月庵)으로 갔다. 鏡虛의 애弟子 滿空의 祈禱 기운이 서려 있는 곳이다. 간월암은 밀물 때는 바닷물에 갇혔다가 썰물 때 陸地와 連結되는 地形에 있다. 朝鮮 創業主 李成桂의 王師인 無學大師가 得道한 곳으로도 有名하다. 滿空은 1942年 衰落한 간월암을 重創佛事했다. 간월암 懸板도 萬공이 쓴 것이다. 滿空은 以後 千日祈禱에 들어갔다. 太平洋戰爭 時期 僧侶에게까지 創氏改名과 徵集을 强要하는 日帝에 맞서 滿空은 日本 巡査들의 接近이 어려운 섬의 절집에서 日帝의 罪惡 7가지(우리말 못 쓰게 한 罪, 徵用·徵兵을 恣行한 罪 等)를 멈추게 하고 우리나라의 自主獨立을 念願하는 祈禱를 올렸다. 간월암에서 올린 懇切한 祈禱가 통했을까. 千日祈禱를 마친 지 3日 後인 1945年 8月 15日 우리나라는 光復을 맞았다. 法堂 옆 우거진 나무 그늘 아래 明堂 기운이 旺盛한 椅子에 앉아 그때를 回想해본다. 滿空과 함께 祈禱에 同參했던 이들은 바로 이 절 마당에서 太極旗를 들고 모여 大韓獨立萬歲를 외쳤다. 感激의 눈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光復 다음 날인 1945年 8月 16日, 滿空은 나라의 象徵 꽃인 無窮花의 꽃잎에 붓으로 ‘世界逸話(世界一花)’라는 글씨를 썼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 이 世上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다. 머지않아 이 朝鮮이 ‘世界逸話’의 中心이 될 것이다. 지렁이 한 마리도 部處로 보고, 저 미웠던 倭놈들까지도 部處로 봐야, 이 世上 모두가 便安할 것이다.” 그가 남긴 解釋이다. ○‘뜬 바위’ 검은여의 傳說 간월암에서 自動車로 18km 距離에 있는 瑞山 浮石寺(浮石寺)에도 鏡虛와 滿空의 자취가 남아 있다. 新羅 義湘大師가 創建한 以後 朝鮮의 無學大師가 重唱한 浮石寺에는 萬공이 遂行하던 土窟이 있다. 또 浮石寺가 位置한 도비산(351.6m)의 地脈(地脈)李 간월암까지 이어진다. 두 절은 땅 因緣으로도 이어지는 것이다. ‘第2의 元曉’라고 불릴 程度로 無愛行(無애行)을 하던 鏡虛는 萬공이 遂行하던 浮石寺를 즐겨 찾았다고 한다. 浮石寺 內 심검당(尋劒堂·智慧의 칼을 찾는 곳)과 목龍欌(牧龍莊·龍처럼 非凡한 人材를 키워내는 곳) 懸板 글씨는 鏡虛가 直接 썼고, 浮石寺 懸板은 滿空의 作品이다. 鏡虛가 머물렀다는 심검당 退마루에 앉았더니 滿空의 土窟 祈禱 터 못지않게 기운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심검당 돌階段 바로 아래쪽 藥水터 또한 明堂의 기운을 받은 德分인지 물맛이 남달랐다. 浮石寺 道場 自體가 퍼질러 누운 소의 形象으로 지어졌고, 藥水터는 소의 젖가슴에 該當한다는 風水的 解釋도 있다. 이에 따르면 藥水는 乳汁(乳汁)에 該當할 것이다. 浮石寺는 절의 規模는 작지만 歷史가 깊은 절이다. 慶北 영주의 浮石寺와 이름 및 創建說話마저 똑같다. 寺刹의 山神閣에는 이를 證明하듯 中央에 山神, 右側과 左側에 各各 鮮妙 娘子와 龍王을 모셨다. 一般 寺刹에서는 잘 볼 수 없는 配置다. 鮮妙 娘子는 浮石寺 創建 說話에 登場하는 人物이다. 衣裳을 欽慕했으나 사랑 告白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바다에 몸을 던졌고 以後 龍이 돼 衣裳의 佛事(佛事)를 도왔다는 中國 唐나라 때 女人이라고 한다. ‘空中에 뜬 돌’이라는 意味를 가진 ‘浮石’社의 傳說을 뒷받침하는 바위도 있다. 淺水灣 干拓地域에 있는 검은여(검은 바위·서산시 浮石面 갈마리 所在)다. 干拓이 되기 前까지 西海 바닷물은 밀물 때 도비산 아래까지 이르렀는데, 그때 검은여가 마치 바다에 떠 있는 듯하다 해서 ‘浮石’이라고 지어졌다고 한다. 검은여 所在地인 浮石面의 知名度 여기서 由來한다. 浮石寺는 2012年 日本 쓰시마섬 관음사에서 竊盜犯에 依해 國內로 密搬入된 金銅觀音菩薩坐像의 袁 所長處다. 現在도 所有權 問題로 韓日 間 裁判이 進行 中인 佛座像이 元來 있던 곳으로 돌아가길 바란다. 모든 文化財的 價値가 있는 遺物은 元來 터에 있을 때 제 빛을 發할 수 있다. 明堂에는 그에 걸맞은 主人이 자리를 잡아야 하는 게 順理다. 글·寫眞 瑞山=안영배 記者·風水學 博士 ojong@donga.com}

    • 2021-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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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뜨거운 가슴이 있어 외롭지 않은 西海의 獨島

    日本이 虎視眈眈 노리는 獨島만큼이나 中國이 군침을 흘린 西海의 외딴섬. 忠南 泰安郡 新津島港(안흥外航)에서 直線距離로 55km, 中國 산둥半島와는 268km 떨어진 忠南 最西端의 섬 격렬비列島다. 사람이 살지 않다 보니 行政線이나 낚싯배를 利用해야만 가볼 수 있는 섬이다. 그것도 하늘과 바다가 날씨를 ‘許諾할’ 境遇에만 出入이 可能하다. 깎아지른 海岸 絶壁과 바위 洞窟, 奇巖怪石들마저 獨島를 연상시키는 격렬비列島! 이 섬으로 ‘水土(搜討·神聖한 땅을 지키기 위한 國土 巡禮) 旅行’을 하는 理由가 있다. 只今도 西海를 自國의 內海(內海)로 만들려는 中國의 野慾에 맞선 ‘西海의 獨島’이기 때문이다. ○ 中國 西海公正 侵略의 現場 여름 못지않은 熱氣를 품은 6月의 太陽이 떠오르는 새벽, 뱃멀미 藥으로 단단히 武裝한 뒤 新津島項에서 泰安郡 漁業指導船(泰安格庇護)에 몸을 실었다. ‘격렬비列島 지킴이’를 自處하는 ‘社團法人 大寒사랑’ 會員들과 함께였다. 제법 거친 風浪을 뚫어가며 2時間 남짓 茫茫大海를 달리자 멀리서 3個 섬이 視野에 들어왔다. 바다 안개 속에서 稀微한 姿態를 드러낸 격렬비列島는 마치 구름 위에 두둥실 떠 있는 섬 같은 錯覺을 불러일으켰다. 격렬비列島는 暗礁 9個가 달린 큰 섬 3個가 나란히 늘어선 모습이 마치 새가 列을 지어 날아가는 것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섬이다. 3個 섬을 따로 떼서 부를 때는 ‘激烈非道(或은 格非度)’라고 하는데, 북격렬비도가 左右로 桐·서격렬비도를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다. 2015年부터 誘引 燈臺가 運營되고 있는 북격렬비도는 國有地, 無人島인 桐·서격렬비도는 事由지다. 이 中 가장 西쪽에 있는 徐격렬비度가 우리나라 海洋 國境線을 결정짓는 섬이다. 線上에서 섬을 한 바퀴 돌아보는데 太極旗가 새겨진 領海起點 標示 施設物이 눈에 들어왔다. 바위 絶壁에 燈臺 模樣으로 造成한 이 施設物은 이곳이 大韓民國 管轄 海域의 劃定 起點이며, 여기서부터 더 西쪽으로 12海里(藥 22km)까지가 우리 海域이라는 뜻이다. 이런 施設物이 들어선 데는 섬 이름처럼 ‘激烈’했던 事緣이 숨어 있다. 서격렬비도는 2014年 朝鮮族을 앞세운 中國 資本에 依해 20億 원에 팔려나갈 뻔했다. 國土交通部가 그해 말 부랴부랴 이 섬에 對한 外國人土地去來制限措置를 내려 去來를 막았지만 如前히 말썽의 素地는 있다. 韓國人을 내세운 中國 資本이 섬을 사들인 뒤 漁場權 等 漁業 權利를 主張하거나, 僞裝 買入한 섬을 中國人들이 사는 有人島로 만들어 占有權을 主張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中國은 西海를 自國 안바다로 設定한 ‘西海公正(西海工程)’ 政策을 固執하고 있다. 中國은 이미 2013年에 우리 軍에 東經 124度 西쪽은 自身들의 作戰區域이므로 넘어오지 말라고 一方的으로 通報했다. 東經 124度線을 韓中 海洋 境界線으로 設定할 境遇 西海의 70% 以上이 中國 管轄에 들어가고 만다. 西海工程을 멈추지 않는 中國이 우리나라 23個 領海 起點 中 하나인 이 섬을 所有했을 境遇 南中國海 못지않은 領土 紛爭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게 海洋 軍事 專門家들의 警告다. 이처럼 地政學的으로 重要한 서격렬비도는 뛰어난 絶景을 자랑하는 섬이기도 하다. 波濤의 浸蝕으로 生成된 海蝕 洞窟과 絶壁이 안개와 어우러져 神祕한 姿態를 뽐낸다. 촛臺처럼 생긴 바위섬도 눈길을 끄는데, 海岸가 巖石이 波濤의 影響으로 기둥 모습으로 變形된 時스택(sea stack) 現象이다. 隣接한 동격렬비도는 徐격렬비度와는 또 다른 風光을 보인다. 서격렬비도가 優雅한 女性的 느낌을 준다면, 동격렬비도는 세 섬 中 가장 큰 데다 깎아지른 듯한 柱狀節理, 벌집처럼 구멍이 난 巖石인 타포니(風化血), 빛이 들어오는 巨大한 洞窟 等으로 雄壯한 男性的인 雰圍氣를 演出한다. 동격렬비도는 1978年 겨울 泰安 住民 12名이 44日 동안 大韓民國 最長期 無人島 遭難事故를 記錄한 곳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봉우리가 가장 높아(133m) 燈臺가 設置된 북격렬비도는 西海의 밤바다를 지키는 守門將 役割을 맡고 있다. 이 섬은 唯一하게 배를 댈 수 있는 臨時 船着場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風浪이 너무 거세 보트로 上陸할 수 없었다. 외로운 燈臺지기를 激勵하기 위해 陸地에서 가져온 수박 한 桶도 傳達하지 못한 채 線上에서 섬을 둘러봐야 했다. 油菜꽃과 冬柏나무가 섬을 裝飾하고 있는 가운데 하늘에서는 무리지어 나는 바닷새들의 飛行이 長官을 이루었다. 섬 頂上에는 높이 107m에 이르는 흰 콘크리트 構造物인 燈臺가 우뚝 서 있다. 約 7000萬 年 前 火山 噴出로 생겨난 바위섬人 격렬비列島는 우리나라 最初의 火山섬으로 꼽힌다. 460萬 年 前에 생긴 獨島나 100萬 年 前에 생긴 濟州島보다 오랜 섬이다. 高麗·朝鮮時代에 倭寇가 자주 出沒해 擄掠질을 하자 住民들을 撤收시킨 後 只今처럼 無人島가 됐다고 한다. 그 代身 가마우지, 괭이갈매기, 박새 等이 둥지를 트는 바닷새들의 보금자리가 됐다. 滅種危機種인 매의 繁殖地이기도 하다.○ 韓中 바다 高速道路 休憩所에서 세 섬을 찬찬히 案內해준 泰安格庇護 이주봉 船長은 “격렬비列島는 中國 산둥半島와 直接 連結되는 海上 交通路인 데다 周邊 海域이 농어, 廣魚, 가리비, 玉돔 等 高級 魚種이 豐富해 中國 漁船들의 不法 操業으로 우리 海警과 잦은 衝突이 벌어지는 現場”이라고 말했다. 只今은 이 섬이 韓中 海上 摩擦의 한가운데에 있지만, 過去엔 韓中 外交와 交易의 重要한 交通路였다. 백제와 中國 南北朝, 高麗와 宋나라, 朝鮮과 名·淸나라 等 兩國 使臣들이 季節風을 利用해 往來할 때 거쳐 가던 곳이 바로 격렬비列島 앞바다였다. 船上 探訪을 마친 뒤 격렬비列島를 뒤로하면서 韓中을 오가던 使臣들을 생각해본다. 산둥半島에서 出發한 使臣들은 목숨을 걸고 險하고도 멀디먼 大洋을 건너오면서 격렬비列島를 만나고 나서야 安堵의 한숨을 쉴 수 있었을 것이다. 이어 陸地 쪽으로 案內하듯 점점이 뻗어 있는 難度와 궁시도, 石島, 屛風도, 옹도, 賈誼島 等을 座標 삼아 안흥항에 닿게 된다. 當時 民家가 있던 궁시도 等 몇몇 섬들은 바다 高速道路 休憩所 役割을 하기도 했다. 또 新津島는 高麗 末부터 朝鮮 後期까지 中國과의 貿易이 活潑하였던 곳이다. 안흥內港에서 바로 눈앞에 바라다보이는 新津島의 後望奉은 宋나라로 떠나는 高麗 使臣이 山祭를 지내며 淸明한 날씨를 기다린 곳이며, 안흥8景 中 하나인 능허대 白雲鄭은 中國 使臣들이 안흥의 가을 달을 즐기던(능허추월·凌虛秋月) 名所였다. 한便 안흥內航 뒷山에 있는 안흥진性(안흥성·泰安郡 근흥면 정죽리)에도 海上 交易의 痕跡이 남아 있다. 中國에서 온 使臣을 迎接하던 곳이던 이 城은 “朝鮮에 가거든 안흥성을 보고 오라”는 말까지 생겼다고 할 程度로 蕃盛했던 朝鮮의 代表的 水軍津性(水軍鎭城)이다. 또 城 頂上에 있는 泰國社는 百濟 武王 때 지어진 寺刹인데, 鬱陶項처럼 물살이 거세기로 有名한 안흥 앞바다(관장목)를 오가는 배들이 無事히 航海하기를 祈願하는 祈禱度量이었다고 한다. 안흥항을 지나는 內外 使節團도 出港 前後로 절에 들러 無事 航海를 祈願했다. 泰國社에서는 안흥浦口와 앞바다가 툭 트여 이곳이 軍事的 要衝地임을 實感케 한다. 격렬비列島에서 新津島와 안흥성에 이르는 바다 高速道路 歷史를 이대로 묵히기는 아깝다. 격렬비列島를 國家管理沿岸港으로 豫備 指定하는 데 앞장서온 加勢로 泰安郡守는 “격렬비列島와 隣近 섬들을 連繫한 觀光資源을 開發하고, 國家史跡으로 指定된 안흥진聖徒 復元할 計劃”이라고 말했다. 泰安이 新海洋都市로 다시 注目받게 될지 지켜볼 일이다. 글·寫眞 泰安 격렬비列島=안영배 記者·風水學 博士 ojong@donga.com}

    • 2021-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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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國이 노리는 ‘西海 獨島’ 격렬비列島를 가다[여행 이야기]

    日本이 虎視眈眈 노리는 獨島만큼이나 中國이 군침을 흘린 西海의 외딴 섬. 忠南 泰安郡 新津島港(안흥항 外港)에서 直線 距離로 55km, 中國 산둥半島와는 268㎞ 떨어진 忠南 最西端의 섬 격렬비列島다. 사람이 살지 않다 보니 行政線이나 낚싯배를 利用해야만 가볼 수 있는 섬이다. 그것도 하늘과 바다가 날씨를 ‘許諾할’ 境遇에만 出入이 可能하다. 깎아지른 海岸 絶壁과 바위 洞窟, 奇巖怪石들마저 獨島를 연상시키는 격렬비列島! 이 섬으로 ‘水土(搜討:神聖한 땅을 지키기 위한 國土 巡禮) 旅行’을 하는 理由가 있다. 只今도 西海를 自國의 內海(內海)로 만들려는 中國의 野慾에 맞선 ‘西海의 獨島’이기 때문이다. 中國 西海公正 侵略의 現場여름 못지 않은 熱氣를 품은 6月의 太陽이 떠오르는 새벽, 뱃멀미藥으로 단단히 武裝한 뒤 新津島項에서 泰安郡 漁業指導船(泰安格庇護)에 몸을 실었다. ‘격렬비列島 지킴이’를 自處하는 ‘社團法人 大寒사랑’ 會員들과 함께였다. 高速艇이 제법 거친 風浪을 뚫어가며 2時間 남짓 茫茫大海를 달리자 멀리서 3個 섬이 視野에 들어왔다. 바다 안개 속에서 稀微한 姿態를 드러낸 격렬비列島는 마치 구름 위에 두둥실 떠 있는 섬 같은 錯覺을 불러일으켰다. 격렬비列島는 暗礁 9個가 달린 큰 섬 3個가 나란히 늘어선 모습이 마치 새가 列을 지어 날아가는 것 같다고 이름 붙여진 섬이다. 3個 섬을 따로 떼서 부를 때는 ‘激烈非道(或은 格非度)’라고 하는데, 북격렬비도가 左右로 桐·서격렬비도를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다. 2015年부터 誘引 燈臺가 運營되고 있는 북격렬비도는 國有地, 無人島인 桐·西 激烈非道는 事由지다. 이中 가장 西쪽에 있는 徐격렬비度가 우리나라 海洋 國境線을 결정짓는 섬이다. 線上에서 섬을 한바퀴 돌아보는데 太極旗가 새겨진 領海起點 標示 施設物이 눈에 들어왔다. 바위 絶壁에 燈臺 模樣으로 造成한 이 施設物은 이곳이 大韓民國 管轄 海域의 劃定 起點임을 알리고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부터 더 西쪽으로 12海里(藥 22km)까지가 우리 海域이라는 뜻이다. 이런 施設物이 들어선 데는 섬 이름처럼 ‘激烈’했던 事緣이 숨어 있다. 서격렬비도는 2014年 朝鮮族을 앞세운 中國 資本에 依해 20億 원에 팔려나갈 뻔했다. 國土交通部가 그해 말 부랴부랴 이 섬에 對한 外國人土地去來制限措置를 내려 去來를 막았지만 如前히 말썽의 素地는 있다. 韓國人을 내세운 中國 資本이 섬을 사들인 뒤 漁場權 等 漁業 權利를 主張하거나, 僞裝 買入한 섬을 中國人들이 사는 有人島로 만들어 占有權을 主張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中國은 西海를 自國 안바다로 設定한 ‘西海公正(西海工程)’ 政策을 固執하고 있다. 中國은 이미 2013年에 우리 軍에게 東京 124度 西쪽은 自身들의 作戰區域이므로 넘어오지 말라고 一方的으로 通報했다. 東經 124度線을 韓中 海洋 境界線으로 設定할 境遇 西海의 70% 以上이 中國 管轄에 들어가고 만다. 西海工程을 멈추지 않는 中國이 우리나라 23個 領海 起點 中 하나인 이 섬을 所有했을 境遇 南中國海 못지 않은 領土 紛爭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게 海洋 軍事 專門家들의 警告다. 러시아가 크림半島內 러시아系 住民保護라는 名目으로 크림半島를 武力으로 掌握한 後 自國 領土로 合倂시킨 前例가 이곳에서도 벌어지지 말라는 法은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地政學的으로 重要한 서격렬비도는 뛰어난 絶景을 자랑하는 섬이기도 하다. 波濤의 浸蝕으로 生成된 海蝕 洞窟과 絶壁이 안개와 어우러져 神祕한 姿態를 뽐낸다. 촛臺처럼 생긴 바위섬도 눈길을 끄는데, 海岸가 巖石이 波濤의 影響으로 기둥처럼 變形된 시스텍(sea stack) 現象이다. 隣接한 동격렬비도는 徐격렬비度와는 또 다른 風光을 보인다. 서격렬비도가 優雅한 女性的 느낌을 준다면, 동격렬비도는 세 섬 中 가장 큰 데다 깎아지른 듯한 柱狀節理, 벌집처럼 구멍이 난 巖石인 타포니(風化血), 巨大한 洞窟 等으로 雄壯한 男性的인 雰圍氣를 演出한다. 同格別備도는 1978年 겨울 大韓民國 最長期 無人島 遭難事故를 記錄한 곳이기도 하다. 當時 無人島에 갇힌 泰安 住民 12名은 44日 동안 풀뿌리와 조개를 採取해 虛飢를 채우고, 絶壁에서 한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을 받아먹고, 한때 間諜으로 誤認돼 射殺 命令이 내려지기도 하는 等 映畫 같은 場面을 經驗했다. 마지막으로 봉우리가 가장 높아(133m) 燈臺가 設置된 북격렬비도는 西海의 밤바다를 지키는 守門將 役割을 맡고 있다. 이 섬은 唯一하게 배를 댈 수 있는 臨時 船着場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風浪이 너무 거세 보트로 上陸할 수 없었다. 외로운 燈臺지기를 激勵하기 위해 陸地에서 가져온 수박 한 桶도 傳達하지 못한 채 線上에서 섬을 둘러봐야 했다. 油菜꽃과 冬柏나무가 섬을 裝飾하고 있는 가운데 하늘에서는 무리지어 나는 바닷새들의 飛行이 長官을 이루었다. 섬 頂上에는 높이 107m에 이르는 흰 콘크리트 構造物인 燈臺가 우뚝 서 있다. 約 7000萬年 前 火山 噴出로 생겨난 바위섬人 격렬비列島는 우리나라 最初의 火山섬으로 꼽힌다. 460萬 年 前에 생긴 獨島나 100萬年 前에 생긴 濟州島보다 오랜 섬이다. 高麗·朝鮮 時代에 倭寇가 자주 出沒해 擄掠질을 하자 住民들을 撤收시킨 後 只今처럼 無人島가 됐다고 한다. 代身 가마우지, 괭이갈매기, 박새 等이 둥지를 트는 바닷새들의 보금자리가 됐다. 滅種危機種인 매의 繁殖地이기도 하다. 韓中 바다 高速道路 休憩所에서歲 섬을 찬찬히 案內해준 泰安格庇護 이주봉 船長은 “격렬비列島는 中國 산둥半島와 直接 連結되는 海上 交通路인 데다 周邊 海域이 농어, 廣魚, 가리비, 玉돔 等 高級 魚種이 豐富해 中國 漁船들의 不法 操業으로 우리 海警과 잦은 衝突이 벌어지는 現場”이라고 말했다. 最近에도 中國 漁船들이 떼로 몰려와 ‘操業戰爭’이 벌어졌는데, 우리 海警과 漁夫들이 犧牲되기도 했다. 中國人들의 西海 領海 不法操業의 約 60%가 격렬비列島 隣近에 集中돼 있다고 한다. 只今은 이 섬이 韓中 海上 摩擦의 한가운데에 있지만, 過去엔 韓中 外交와 交易의 重要한 交通路였다. 백제와 中國 南北朝, 高麗와 宋나라, 朝鮮과 名·淸나라 等 兩國 使臣들이 季節風을 利用해 往來할 때 거쳐가던 곳이 바로 격렬비列島 앞바다였다. 船上 探訪을 마친 뒤 격렬비列島를 뒤로 하면서 韓中을 오가던 使臣들을 생각해본다. 산둥半島에서 出發한 使臣들은 목숨을 걸고 險하고도 멀디먼 大洋을 건너오면서 격렬비列島를 만나고 나서야 安堵의 한숨을 쉴 수 있었을 것이다. 이어 陸地 쪽으로 案內하듯 점점이 뻗어 있는 難度와 궁시도, 石島, 屛風도, 옹도, 賈誼島 等을 座標 삼아 新津島港에 닿게 된다. 當時 民家가 있던 궁시도 等 몇몇 섬들은 바다 高速道路 休憩所 役割을 하기도 했다. 韓中 바다 高速道路 休憩所에서는 傳說같은 이야기도 傳해져 내려온다. 現在 泰安郡에서 唯一한 有人島이자 몽돌海邊으로 有名한 賈誼島에는 “中國에서 街義라는 사람이 이 섬으로 귀양살이(或은 避身) 해서 賈誼島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며 泰安 가씨(賈氏)가 그 後孫이라고 한다. 또 新津島는 高麗 末부터 朝鮮 後期까지 中國과의 貿易이 活潑하였던 곳이다. 안흥內港에서 바로 눈앞에 바라다보이는 新津島의 後望奉은 宋나라로 떠나는 高麗 使臣이 山祭를 지내며 淸明한 날씨를 기다린 곳이며, 안흥8景 中 하나인 능허대 白雲鄭은 中國 使臣들이 안흥의 가을 달을 즐기던(능허추월·凌虛秋月) 名所였다. 한便 안흥內航 뒷山에 있는 안흥진性(안흥성, 泰安郡 근흥면 정죽리)에도 韓中 交流의 痕跡이 곳곳에 남아 있다. 中國에서 온 使臣을 迎接하던 곳이던 이 城은 “朝鮮에 가거든 안흥성을 보고 오라”는 말까지 생겼다고 할 程度로 蕃盛했던 朝鮮의 代表的 水軍津性(水軍鎭城)이다. 또 城 頂上에 있는 泰國社는 百濟 武王 때 지어진 寺刹인데, 鬱陶項처럼 물살이 거세기로 有名한 안흥 앞바다(관장목)를 오가는 배들이 無事히 航海하기를 祈願하는 祈禱度量이었다고 한다. 안흥항을 지나는 內外 使節團도 出港 前後로 절에 들러 無事 航海를 祈願했다. 泰國社에서는 안흥浦口와 앞바다가 툭 트여 이곳이 軍事的 要衝地임을 實感케 한다. 격렬비列島에서 新津島와 안흥성에 이르는 바다 高速道路 歷史를 이대로 묵히기는 아깝다. 격렬비列島를 國家管理沿岸港으로 豫備 指定하는 데 앞장서온 加勢로 泰安郡守는 “격렬비列島와 隣近 섬들을 連繫한 觀光資源을 開發하고, 國家史跡으로 指定된 안흥진聖徒 復元할 計劃”이라고 말했다. 泰安이 新海洋都市로 다시 注目받게 될지 지켜볼 일이다. 泰安 격렬비列島=안영배 記者·風水學博士 ojong@donga.com}

    • 2021-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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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金浦空港 移轉하면 漢江 西海岸 時代 열릴까[안영배의 都市와 風水]

    서울 江西區 西쪽 끝段에서 汝矣島 面積 3倍 크기 規模로 자리 잡고 있는 金浦國際空港(863萬5937㎡). 空港 側의 遊休 敷地까지 合치면 汝矣島 10倍 크기라는 이곳이 最近 政治權의 도마에 올랐다. 더불어民主黨 朴用鎭 議員 等 與圈 一部 政治人들이 金浦空港을 仁川國際空港으로 移轉하고, 金浦空港 敷地에 20萬 家口 規模의 스마트시티를 建設하자는 主張을 提起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서울 및 首都圈의 住宅難을 一擧에 解決할 수 있고, 西部圈 均衡發展度 可能해진다는 理由에서다. 1939年 金浦平野 地帶에 자리 잡은 後 1958年 國際空港으로 指定된 金浦空港은 그間 우리나라 經濟發展의 象徵과도 같은 位相을 가졌던 곳이다. 空港 隣近 地域인 서울 西部圈(江西區·양천구·九老區 一部)과 景氣 西南部權(金浦市·부천시·仁川市 一部) 사람들은 高度 制限에 따른 財産權 侵害, 航空騷音 等의 不便도 甘受해야 했다. 空港 關聯 業種과 從事者들에 依한 地域經濟 成長 外에도 金浦空港이 大韓民國 하늘 길의 關門이라는 自負心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2001年 永宗島에 仁川國際空港이 開港한 以後 金浦空港은 ‘애物단지’ 取扱을 받게 된다. 一帶 住民들의 經濟的, 身體的 被害를 呼訴하는 集團 民願이 急激히 增加한 것도 이때부터다. 仁川空港이 開港하면서 한때 統合 論議가 擧論됐던 金浦空港이 20年 만에 存立 問題가 불거진 것은 지운(地運:땅 기운의 흐름)의 變化라는 視角에서 보면 興味롭다. 事實 金浦空港은 우리나라 航空物流의 中心이라는 純機能的 役割에도 不拘하고 首都 서울이 均衡的인 發展을 하는 데 支障을 준다는 短點을 가지고 있다. 地形的으로 서울은 東쪽과 北쪽이 山으로 막혀 있어 都市 擴張이 어려운 反面 南쪽과 西쪽은 트여 있는 構造다. 트인 곳으로 都市 擴張이 이뤄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에 따라 서울은 道路와 鐵道 等을 利用해 南쪽 爲主로 都市 擴張을 해왔다. 反面 漢江을 따라 뻗어나갈 수 있는 西쪽은 都市 擴張에서 相對的으로 뒤처졌다. 北韓과 地理的으로 가깝다는 安保上 理由와 함께 鐵甕城처럼 버티고 있는 金浦空港이 擴張性에 制動을 걸었다. 地運의 흐름이 人爲的인 環境에 依해 妨害를 받았던 셈이다. 實際로 金浦空港이 都市開發에 미치는 否定的 影響은 相當히 컸던 것으로 評價된다. 2015年에 調査한 報告書(‘金浦國際空港 周邊地域의 高度制限 緩和 硏究’)에 依하면 서울의 代表的 人口 密集 地域인 江西區 總面積의 97%가 高度制限 規制로 建築 行爲에 制限을 받고 있고, 양천구는 57% 以上, 京畿道 부천시는 43% 以上이 規制 對象 地域에 該當한다. 또 空港을 中心으로 24.6㎢ 地域이 航空機 騷音으로 被害를 받고 있었다. 이는 汝矣島 面積의 3倍나 該當되는 것이다. 世界人 모여드는 韓江의 國際 競技場萬若 地運의 자연스런 흐름에 따라 金浦空港이 移轉하면 어떻게 될까. 空港 隣近 地域은 勿論 서울의 發展軸이 漢江을 따라 東西軸으로 다시 한番 크게 發展할 것으로 豫想된다. 卽 朝鮮時代 輕傷·湖南·忠淸 等 三南 地方의 物産이 漢江을 따라 몰려들어 漢江邊 浦口가 크게 發展한 것과 같은 效果를 期待할 수 있다는 것이다. 朝鮮時代 當時 배를 통한 物品들이 쌓이고 덩달아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蕃盛했던 漢江邊 浦口가 공癌나루(행주大橋 附近), 楊花나루(楊花大橋와 城山大橋), 鉏강나루(西江大橋 附近), 마포나루(麻布大橋 附近), 三銓나루(蠶室大橋 附近), 광나루(廣津橋와 千戶大橋 附近) 等이다. ‘물길은 財物을 管掌한다’는 風水의 論理가 그대로 맞아떨어진 現場이다. 현대에서는 어떨까. 大韓民國의 經濟發展을 ‘漢江의 奇跡’이라고 稱할 만큼 如前히 漢江은 서울과 首都圈을 먹여 살려주는 重要한 물길이다. 이 물길을 따라 世界人들이 몰려들기도 했다. 바로 漢江邊에 들어선 國際스포츠競技場이다. 1984年 蠶室大橋 隣近에 들어선 서울올림픽主競技場(蠶室올림픽主競技場)에서는 1986年 아시안게임과 1988年 夏季올림픽이 開催됐다. 世界人의 注目을 받았던 江南 蠶室 地域은 以後 競技場을 中心으로 飛躍的인 經濟 成長을 이뤘다. 이어 2001年 城山大橋 隣近에 完工된 서울월드컵競技場(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는 2002年 FIFA월드컵 大會가 열렸다. 世界 蹴球팬들의 視線이 集中됐다. 이곳에 專用 蹴球場이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江南圈에 비해 落後된 西北圈域을 開發해야 한다는 서울 均衡發展論이 相當한 役割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蘭芝島 쓰레기 處理場으로 불리던 이곳은 以後 完全히 딴 世上으로 變身했다. 競技場 一帶로는 디지털미디어시티로 불리는 國際 業務團地가 들어섰고, 現在 國內 主要 言論 및 放送社, 엔터테인먼트 關聯 施設들이 續續 들어서 있다. 이런 推移에 따른다면 韓國이 世界的 體典(體典)을 開催할 境遇 主競技場이 들어설 有力한 候補地로 또다시 漢江邊이 될 可能性이 높다. 서울이 다시 올림픽을 開催하게 된다면 아마도 地域 均衡發展論에 따라서 金浦空港이 있는 강서구 漢江邊에 또 다른 競技場이 들어설 可能性이 있다. 올림픽을 두 次例 以上 開催한 그리스 아테네, 英國 런던, 프랑스 파리 等이 매 올림픽을 치를 때 主競技場으로 各其 다른 運動場을 使用했다는 前例도 있다. 서울이 아닌 京畿道라면 漢江 下流 쪽으로 더 내려가 金浦漢江新都市가 建設되고 있는 金浦市(漢江 南쪽)나 一山新都市가 들어선 高陽市(漢江 北쪽)가 有力 候補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特히 金浦漢江新都市內 걸包地球는 漢江으로 빠져나가는 고창천, 羅津抱川, 界陽川 等 여러 水路가 감싸고 있는 곳이다. 이렇게 물길이 여러 겹으로 交叉하는 地域은 風水의 水管財物(水管財物; 물은 財物을 主管함)의 기운이 더욱 剛해진다고 본다.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힘이 强力하다는 뜻이다. 漢江 西海岸 時代 열린다 漢江邊을 따라가는 競技場 論理가 아니더라도 韓國은 이미 ‘西海岸 時代’를 맞고 있다. 事實 西海岸 時代의 白眉는 漢江을 따라 西海 바다로 向하는 김포시와 坡州市, 그리고 西海 바다와 맞닥뜨리고 있는 仁川市 江華郡에서 맞이할 可能性이 높다. 首都圈에 屬하는 이들 地域은 安保上 理由로 一定 部分 發展이 막혀 있는 곳이지만 本格的인 南北 協力時代가 열리면 成長 動力이 無限한 곳으로 指目되기도 한다. 韓江이 西海岸으로 막힘없이 열린다는 것은 서울이 새롭게 始作한다는 意味로도 볼 수 있다. 漢江 東쪽 河南市 慰禮新都市에서부터 蠶室, 서울 汝矣島, 마곡 地球를 거쳐 金浦市 漢江新都市와 江華島까지 連結되는 巨大한 漢江벨트는 漢江이 서울에 膳賜하는 마지막 膳物이 될 것이라는 게 땅기운적 觀點에서 본 解釋이다. 여기에 金浦空港 移轉은 그런 漢江 西海岸 時代를 여는 트리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豫想된다. 그러나 金浦空港 移轉 問題는 地自體와 政策 擔當者, 그리고 理解 當事者間 수많은 葛藤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다만 時代의 흐름과 서울 및 首都圈의 均衡發展이라는 巨視的 視角에서 짚어봐야 할 時點인 것은 分明해 보인다. 안영배 記者(風水學博士) ojong@donga.com}

    • 2021-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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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金가락지 蓮못과 長壽 샘물… 마르지 않는 富의 生命줄

    《富者를 排出하는 곳의 條件을 確認해 보기 위해 朝鮮八道 360餘 고을을 샅샅이 살펴본 이가 있다. 朝鮮 後期 實學者 이중환(1690∼1756)은 實事求是型 人文地理學者답게 興味로운 踏査 結果를 내놓았다. “물은 財物과 福을 맡은 것이므로 큰 물가에는 富裕한 집과 有名한 마을이 많다”는 것이다. 또 “바닷가 住居地보다는 江가 住居地가 낫고, 江가보다는 시냇가 住居地가 더 좋다”고도 했다. 李重煥이 提示한 富者 터는 當時 朝鮮 兩班層 사이에 커다란 反響을 일으켰다. 그의 冊 ‘擇里志’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李重煥이 시냇가 住居地로 極讚한 곳 中 하나가 智異山 자락 求禮 九萬(九萬·現在 全南 求禮郡 토지면) 一對多. 바로 湖南 名家로 불리는 운조루(國家民俗文化財 第8號)와 ‘祕密의 庭園’으로 有名한 雙産災(全南 民間庭園 5號)가 자리한 곳이다.》 ○ 집터에서 나온 金빛 돌거북 朝鮮 英祖 때인 1776年 지어진 운조루(토지면 오미리)는 240餘 年의 歷史를 자랑하는 兩班家 住宅이다. 落雁郡守를 지낸 創建主 類移住(1726∼1797)가 집을 지을 當時 狀況을 描寫한 글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사람들이 이 터를 本디 이름난 길지(吉地)라고 하였으나 바위가 險難해 敢히 터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류이주는 ‘하늘이 아끼고 땅이 숨겨둔 곳(天藏地祕·天藏地秘)李 나를 기다렸다’고 하면서 數百 名의 壯丁을 動員해 며칠 만에 집터를 닦았다.”(삼수공행장·三水公行狀) 운조루가 位置한 九萬(或은 區만들)은 앞서 李重煥이 점찍은 明堂으로 소문난 곳이었고, 이런 風水說에 따라 류이週가 집을 지었다는 것이다. ‘金俱沒니(金龜沒泥·금빛 거북이 진흙 속에 묻힌 터)’라는 名當 이름답게 實際 터에서 돌거북商道 出土됐다. 류氏 집안의 家寶로 所重히 保管돼온 이 거북賞은 아쉽게도 1989年 도난당해 只今은 寫眞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구만에 99칸 집(現在는 73칸)을 마련한 類移住와 그 後孫들은 以後 富와 名譽를 同時에 누리게 된다. 운조루 主人들은 莫大한 農地와 함께 한때 25家口의 奴婢들을 거느린 地域 最高 富豪(富豪)가 됐다.과연 운조루는 富者가 나는 시냇가 집의 條件을 갖추고 있을까. 于先 운조루 大門 앞으로 바짝 붙어서 흐르는 개울물이 눈에 띈다. 人爲的으로 造成한 돌 도랑을 따라 개울물이 콸콸 흐르고 있다. 운조루의 東쪽 文殊貯水池 方面에서 흘러온 개울물이 운조루 앞을 지나 西쪽으로 빠져나가는 模樣새다. 이를 ‘동출書類 內黨首(東出西流 內堂水)’라고 한다. 서울로 치면 景福宮 앞으로 흐르는 청계천쯤이 될 것이다. 이에 더해 그 바깥으로 서출동류(西出東流·西쪽에서 東쪽으로 흐르는 물) 外黨首(外堂水)가 감싸주면 錦上添花다. 운조루에서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2km 남짓한 距離의 蟾津江이 그런 물줄기다. 서울의 漢江에 該當한다. 이처럼 東에서 서로, 西에서 東으로 서로 交叉하는 두 물줄기는 터의 좋은 기운을 活性化하는 役割을 한다. 땅이 한層 더 풍요로워진다는 뜻이다. 운조루 主人의 才致 있는 ‘風水 인테리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大門 앞마당에 該當하는 곳에 아예 蓮못(東西 45m, 南北 15m)을 만들어 놓았다. 네모진 蓮못 가운데로는 人爲的으로 만든 동그란 섬이 하나 있다. 蓮못 터 自體가 금환락지(金環落地·金가락지가 떨어진 터) 明堂이라고도 傳해지는데, 實際로 蓮못 가운데 섬은 대단한 기운이 凝集돼 있다. 운조루는 물을 利用한 家宅 개운(開運)의 絶頂을 보여주는 事例라고 할 수 있다. ○운조루에 숨은 5個 ‘寶物’ 찾기 운조루에서는 日常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珍貴한 ‘寶物’들을 찾아내는 재미도 있다. 첫 番째가 出入口인 솟을大門 上段에 숨겨 있듯 걸린 두 개의 뼈다. 虎狼이 뼈와 말 뼈다. 元來는 둘 다 虎狼이 뼈였는데 머리뼈를 도둑맞는 바람에 말 뼈로 한쪽을 代替했다고 한다. 傳統的으로 집안의 厄運과 살기를 막아주는 效果가 있다고 알려진 虎狼이 뼈는 朝鮮時代에도 求하기 힘든 誹謗으로 통했다. 두 番째는 큰 舍廊채와 안채에 있는 둥근 기둥이다. 하늘을 의미하는 둥근 기둥은 權力과 權威를 象徵하기 때문에 宮闕 바깥에서는 함부로 使用하지 않았다. 그런데 운조루는 堂堂히 宇宙의 中心임을 自負하듯 둥근 기둥을 使用한 것이다. 세 番째는 바깥舍廊채 마당에 심어진 渭城柳(渭城柳)다. 明나라에 다녀온 使臣으로부터 膳物로 받은 渭城柳는 1年에 두 次例 꽃이 피는 稀貴한 나무로 운조루와 運命을 함께할 것이라는 얘기가 집안 來歷으로 傳해져 온다. 네 番째는 威風堂堂한 建物채에 비해 顯著히 낮게 만든 굴뚝이다. 안채와 舍廊채의 마루 밑 基壇에 낸 굴뚝 구멍은 밥 짓는 煙氣가 새나가지 않도록 設計한 것으로 끼니를 거르는 이웃들의 마음까지 配慮한 措置다. 운조루의 主人들은 베풂과 나눔의 美學을 實踐해 왔다. 이를 象徵的으로 보여주는 게 마지막 ‘寶物’인 운조루의 뒤주(쌀독)이다. 舍廊채에서 안채로 통하는 中間에 配置한 뒤주 下段엔 한 주먹만큼 들어갈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다. 거기엔 ‘他人能해(他人能解)’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다른 사람도 열 수 있다’는 뜻으로 周邊의 배고픈 사람들이 아무 때나 와서 쌀을 퍼가도록 한 裝置다. ○別서정원이 돋보이는 雙産災 求禮에서 운조루와 比較되는 故宅이 雙産災다. 全國 最長壽 마을로 꼽히는 마산면 사도리 上司마을 中心部에 자리한 이곳은 운조루와는 不過 2km 남짓한 距離에 있다. 放送社 프로그램인 ‘尹스테이’ 撮影地로 有名해진 곳이기도 하다. 이곳 亦是 물과 因緣이 깊다. 智異山 화엄사 溪谷에서 흘러나온 작은 시냇물이 집을 휘돌아 나가고 그 바깥으로 蟾津江이 悠悠히 흐른다는 點은 운조루와 비슷하다. 그런데 雙産災의 白眉는 우물에 있다. 2004年 한국관광공사에서 全國 10代 藥水터 中 하나로 指定한 ‘당몰샘’이다. 1000年이 넘는 歷史를 자랑하는 당몰샘은 가뭄에도 마르는 法이 없고 神祕한 效能을 지닌 것으로 알려졌다. 마을 사람들은 上司마을이 長壽마을이 된 데는 이 우물이 役割을 했다고 믿는다. 이를 자랑이라도 하듯 우물을 씌운 지붕에는 ‘지존지미(至尊至味)’라는 懸板까지 달려 있다. 最高의 맛을 지닌 우물이라는 뜻이다.그런데 雙産災 主人은 舍廊채 앞쪽 마당에 있는 우물 明堂을 이웃들에게 내주었다. 우물터가 집안에 있지 않고 집 담牆 바깥의 駐車場에 있다. 雙産災 主人이 마을 사람들이 물을 不便하지 않게 길어 가도록 담牆을 새로 고쳐 우물을 바깥으로 配慮한 것이다. 雙産災의 넉넉한 마음씨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雙産災 亦是 운조루처럼 안채에다 ‘베풂의 뒤주’를 運營했다. 春窮期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뒤주에서 쌀과 보리를 꺼내 갔고, 다음 해 다시 채워 넣는 方式으로 함께 苦難을 이겨갔다고 한다. 200年 歷史를 자랑하는 雙産災는 크게 두 個의 空間으로 分離된다. 살림집(안채, 舍廊채, 건너채)이라는 生活空間과 書堂을 갖춘 別서정원(別墅庭園)李 대나무 숲을 警戒로 나뉘어 있다. 그렇다 보니 雙産災를 訪問한 사람들이 앞쪽의 살림집을 보고서는 名聲에 비해 素朴한 規模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대나무 숲을 지나 뒤쪽에 자리 잡은 어마어마한 庭園을 보고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기 十常이다. 風水에서 名當 집의 條件 中 하나로 꼽는 電着嗅官(前窄後寬·앞은 좁고 뒤는 넓음)의 典型的인 事例다. 潭陽 瀟灑園 느낌을 주는 별서정원은 갖가지 花草와 나무, 蓮못, 돌들이 하나로 어울려 仙界(仙界)에 들어선 듯하다. 이곳에는 집안의 子弟들과 洞里 아이들이 學問을 닦던 書堂채, 별채 性格의 경암當 等이 있다. 경암當 바로 옆에 있는 영벽門(暎碧門)은 雙産災 悲境의 精髓라고 불린다. 바깥으로 통하는 샛門人 영벽門을 열면 또 다른 空間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네모난 門 틀 사이로 펼쳐지는 玉빛 사도貯水池(農業用水)와 智異山 風景이 마치 額子에 걸린 그림 같은 壯觀을 演出한다. 雙産災는 2004年 一般에 開放한 以後 觀覽 및 韓屋 體驗 宿泊 運營을 해왔지만, 現在는 코로나19로 事前 豫約한 境遇에만 觀覽할 수 있다. 운조루와 雙産災는 數百 年에 걸쳐 그 名聲을 자랑해온 眞正한 名家다. 周邊 사람들에게 넉넉한 마음을 베풀어 왔기에 可能한 일이었다. 富者나 貴族 家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精神은 家門의 永續性을 위해서도 必要함을 잘 보여주는 事例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글·사진 求禮=안영배 記者·風水學 博士 ojong@donga.com}

    • 2021-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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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李成桂-明成皇后의 念願 깃든 ‘靈驗無雙’ 龍의 기운 불끈

    《1871年 高宗의 王妃이자 ‘朝鮮의 國母’ 明成皇后는 切迫한 狀況에 몰려 있었다. 名目만 國王이지 實權은 媤아버지 興宣大院君에게 뺏긴 男便의 處地도 딱하려니와 그해 11月 王位를 이을 아들마저 生後 5日 만에 잃고 말았다. 興宣大院君은 아예 高宗과 宮女 李氏 사이에서 태어난 완화군을 世子로 冊封하려 했다. 世子를 排出하지 못한 王妃는 權力에서 밀려나게 마련이다. 明成皇后는 神에게 必死的으로 매달렸다. 祈禱의 對象은 바로 ‘영험한’ 鷄龍山. 朝鮮을 開國한 太祖 李成桂의 念願이 녹아 있는 鷄龍山에서 明成皇后는 得男(得男)과 王室의 繁榮을 빌었다. 鷄龍山은 朝鮮 王朝의 創業과 沒落 過程에서 벌어진 歷史的 事件의 舞臺이자 온갖 傳說과 神話의 中心이 되는 山이다. 鷄龍山 南쪽 자락에 있는 中樂團(中嶽壇·공注視 계룡면)과 帝釋寺(鷄龍市 信徒顔面) 等이 特히 그러한 곳이다.》 ○鷄龍山 자락의 작은 宮闕 明成皇后가 企圖한 場所로 알려진 공주시 계룡면 鷄龍山 자락의 新元史 重樂團을 찾았다. 新元史는 백제 義慈王 때인 651年 高句麗 出身 僧侶인 報德畫像이 創建한 以後 朝鮮 太祖 李成桂의 王사(王師) 무학대사에 依해 크게 重創됐다고 傳해지는 寺刹이다. 無學大師가 李成桂에게 이곳에 山神閣(現在 重樂團)을 지어 鷄龍山神에게 祈禱하면 所願이 이루어진다고 말했다는 傳說도 뒤따른다. 儒敎를 崇尙한 朝鮮王室과 土俗 信仰인 鷄龍山神의 ‘隱密한’ 關係는 歷史 記錄에서도 間間이 보인다. 朝鮮王朝實錄은 太祖의 아들인 太宗 李芳遠이 內侍를 보내 鷄龍山神에게 祭祀를 지내게 했고(1413년 9月 18日), 朝鮮 第9代 王인 成宗의 疾患 治癒를 빌기 위해 臣下를 鷄龍山에 派遣했다(1494년 12月 23日子)고도 傳한다. 명성황후 또한 先祖들의 뒤를 따랐다. 皇后의 懇切한 祈禱가 통했던 德分일까. 1873年 明成皇后는 興宣大院君을 攝政에서 끌어내리고 男便 高宗과 함께 權力을 掌握한 데 이어 이듬해인 1874年 3月 아들(純宗)을 낳는 驚事를 맞았다. 高宗도 鷄龍山神을 모신 新元史를 各別히 待遇했다. 高宗은 1880年 “新元史는 다른 절과 다르니 重修하는 일을 마땅히 돌보아야 할 것”이라는 臣下의 要請에 따라 空名帖(空名帖·國家가 富裕한 사람들에게 財物을 받고 形式上의 官職을 附與하는 白紙 任命狀) 500張을 하사해 基金을 모으도록 措置했다(승정원일기). 이듬해인 1881年에는 鷄龍山神을 위한 重樂團이 建立됐다(중악단 上樑文). 앞서 1879年(高宗 16年)에 明成皇后의 配慮로 重樂團이 建立됐다는 記錄(1959年에 發刊된 ‘公州郡地’)도 있는데, 大略 1880年 前後로 重樂團 設立 計劃 및 建設이 이뤄진 것으로 推定된다. 重樂團은 예사로운 名稱이 아니다. 그前까지 鷄龍山神에게 祭祀 지내던 祭壇은 鷄龍山社(鷄龍山祠), 鷄龍團(鷄龍壇) 等으로 불렸다. 그런데 이 祭壇이 公式的으로 重樂團으로 불리게 되면 國家 次元의 祭壇으로 位相이 格上된다. 以後 鷄龍山 重樂團은 北韓 쪽의 妙香山 上顎團(6·25戰爭 때 消失 推定), 南쪽의 智異山 下樂團(素材 不明)과 함께 朝鮮의 3代 事前(祀典) 場所가 됐다. 重樂團은 位相에 걸맞게 朝鮮 宮闕 樣式의 建築 構造를 하고 있다. 出入口부터가 다르다. 세 個의 出入門으로 構成된 솟을大門이 二重으로 버티고 서 있는데, 가운데 門은 宮闕의 어간門처럼 王만이 出入이 可能한 通路라고 한다. 첫 番째 솟을大門을 지나면 左右로 行廊채 비슷한 寮舍채가 있는데, 王 或은 王妃가 오면 머물던 곳이라고 한다. 口傳은 明成皇后가 重樂團에서 머물다 갔다고 傳하는데, 명성황후 本人이든 皇后의 命을 받든 內命婦 宮人이든 이곳에서 致誠을 드린 것은 分明하다. 宮中에서 쓰는 物品 目錄 等을 記錄한 ‘宮中勃起’에 新元史에서 供養을 했다는 記錄이 있기 때문이다. 重樂團의 八作지붕 위 네 귀퉁이에는 사람과 動物 形象의 雜商(雜像)李 各各 7個씩 올려져 있다. 나쁜 기운이나 살(煞)을 막는 裝置인 雜商 亦是 景福宮 昌慶宮 等 宮闕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裝飾 기와다. 景福宮 交泰殿에서나 볼 수 있는 꽃담度 있다. 重樂團을 둘러싼 4面 담牆은 宮闕 樣式인 꽃담으로 治粧돼 있다. 萬壽無疆(萬壽無疆)과 壽福康寧(壽福康寧)이란 篆書體 漢字가 꽃담 사이사이에 새겨져 있다. 重樂團은 1999年에 寶物 第1293號로 指定됐다. 現傳하는 山神閣 中 最大 規模라는 點, 하나밖에 남지 않은 國家 次元의 祭壇이라는 點, 土俗 信仰과 儒敎的 建築 樣式의 組合이라는 點이 높이 評價됐다.○국태민안만 祈禱하는 계룡대 帝釋寺 重樂團 못지않게 朝鮮 王朝와 깊은 因緣을 맺고 있는 곳이 鷄龍市 신도안이다. 李成桂가 朝鮮 開國의 첫 都邑地로 指目했던 신도안은 實際로 1年 남짓 宮闕 築造 工事가 進行되었던 歷史的 場所이기도 하다. 只今도 宮闕 工事에 쓰인 週初席과 立席 等이 곳곳에 남아 있고 大闕터, 鍾路터란 地名이 아직도 살아 있다. 現在 株礎石을 모아둔 大闕터는 軍部隊인 계룡대 營內에 있는데 코로나19로 인해 民間人들의 出入이 全面 禁止된 狀態다. 信徒顔面 용동리에 있는 괴목정度 李成桂와 無學大師의 傳說이 서린 곳이다. 現在 市民들의 休息 空間인 無窮花동산으로 有名한 이곳에는 樹齡 500年이 넘는 느티나무 세 그루(保護樹)가 나란히 서 있다. 워낙 나무가 雄壯하고 커 亭子 役割을 한다고 해서 괴목정으로 불리는데, 宮闕 造成과 關聯된 나무라고 한다. 李成桂가 신도안을 都邑地로 定하고 周邊 形勢를 살필 때 同行한 無學大師가 이곳을 지나가다 無心코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나무가 됐다는 것이다. 實際로 李成桂는 卽位 이듬해인 1393年 無學大師 等 여러 臣下들을 데리고 신도안에 行次해 5日間 都邑地 造成 現場을 視察한 바 있다. 괴목정뿐만 아니다. 계룡대 營內에 있는 帝釋寺는 맞은便 山자락의 鷄龍山 삼신당과 함께 李成桂의 祈禱處로 有名한 곳이다. 三神堂은 李成桂가 朝鮮을 建國하기 위한 祈禱處로 썼다고 알려져 있다. 帝釋寺는 李成桂가 신도안을 朝鮮의 都邑地로 삼기 위해 企圖했다는 說話가 傳해진다. 帝釋寺 뒤쪽 自然 石窟이 바로 그 說話의 舞臺다. 鷄龍山 相逢(천황봉)에서 弟子鳳으로 이어지는 山 기운이 바로 帝釋寺 一帶에서 큰 名當 穴(穴)을 이루는 形勢이다 보니 新羅 末의 高僧 道詵國師와 朝鮮의 無學大師가 이 터에서 修道했다거나 李成桂가 企圖했다는 等의 傳說이 내려오는 듯하다. 신도안에서도 가장 隱密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帝釋寺는 마치 鮮京(仙境) 世界로 들어선 듯한 錯覺을 불러일으킨다. 鷄龍山에서 絶景으로 꼽히는 癌용추와 숫용추가 節 左右에서 護衛하듯 두르고 있고, 周圍 山들과 奇巖怪石이 갖가지 動物 形象으로 살아 꿈틀거리는 듯하다. 어마어마하게 큰 石窟 巖盤에서 한 방울 한 방울씩 떨어져 故人 藥水는 감미로운 香氣가 나는 듯하다. 寺刹이지만 마치 道敎의 武陵桃源의 世界를 보는 것 같았다. 大雄殿 格에 該當하는 ‘角王戰(覺王殿)’은 帝釋寺의 性格을 드러내고 있다. ‘賃金이 깨우침을 얻는 殿閣’ 或은 ‘깨달은 임금의 殿閣’이라는 意味다. 角王戰 內部에는 부처像과 함께 나라를 위해 애쓴 鞠訊(國神)들을 모시고 있다. 절을 지키는 도현 比丘尼 스님은 帝釋寺는 오로지 國泰民安(國泰民安·나라가 太平하고 國民이 便安함)과 平和統一만을 祈禱하는 度量이라고 말했다. 이곳에서는 査察의 州 收入源 中 하나인 薦度齋나 信徒들의 所願을 빌어주는 스님 企圖 等이 許諾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계룡대 管轄 地域인 이곳에서 帝釋寺가 어떻게 남아 있을까. 1983年 3軍 本部 移轉 事業인 ‘6·20事業’으로 신도안에 居住하던 6300餘 名의 民間人과 130餘 宗敎團體가 撤去됐다. 當時 이 절을 지키던 海峯 스님(2015年 入寂)은 帝釋寺가 國家의 安寧만을 祈禱하는 特殊한 道場임을 들어 査察을 守護했고, 軍 當局도 結局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現在 帝釋寺는 一般人의 出入이 자유롭지 않다. 1年에 單 한 次例 四月初八日(부처님오신날)에만 査察을 開放하고 있다. 祈禱발이 남다른 곳으로 알려진 帝釋寺에서 祈禱를 願하는 사람들이 이날만을 손꼽아 기다릴 程度라고 한다. 帝釋寺, 괴목정 等이 들어선 신도안은 한때 各種 巫俗信仰과 新興宗敎의 搖籃으로 꼽혀 왔다. 朝鮮時代에 流行한 도참서 ‘鄭鑑錄’ 等에서 未來 800年 신도읍地로 신도안을 꼽았기 때문이다. 事實 李成桂의 鷄龍山 遷都 計劃이 霧散된 後 漢陽에 都邑地를 마련한 朝鮮은 門을 닫을 때까지 ‘鷄龍山 鄭氏 王國 都邑說’에 시달렸다. 李氏의 나라가 아닌 새 나라, 새 時代를 熱望하는 民衆은 鷄龍山 王國說에 希望을 걸었기 때문이다. 신도안은 日帝强占期엔 日本을 排擊하고 새 나라 建國을 꿈꾸던 獨立運動家들의 숨은 基地 役割을 하기도 했다. 現代에서도 首都 移轉論이 擧論될 때마다 藥房의 甘草처럼 言及되는 곳 또한 鷄龍山 一帶다. 이처럼 鷄龍山은 歷史와 神祕한 傳說. 未來 비전이 婚材하고 있는 特異한 旅行地다. 글·寫眞 公州=안영배 記者·風水學博士 ojong@donga.com}

    • 2021-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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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ood&Dining]動員F&B, 韓食 브랜드… ‘兩班’製品群 擴張

    動員F&B가 36年 傳統을 자랑하는 國內 最初 프리미엄 韓食 브랜드 ‘兩班’을 리브랜딩海 韓食 카테고리 全般을 아우르는 브랜드로 擴張한다. 動員F&B는 旣存의 金, 죽, 國湯찌개, 김치에서 나아가 卽席밥, 傳統 飮料, 적電流까지 製品群을 넓혀 ‘兩班’ 브랜드를 韓食 HMR를 代表하는 메가 브랜드로 키울 計劃이다. ‘兩班’의 새로운 브랜드 슬로건은 ‘日常風流式’이다. 믿을 수 있는 傳統 方式으로 맛있게 만든 韓食 HMR로 바쁜 現代人들의 삶을 여유롭고 풍요롭게 만들겠다는 哲學이 담겨 있다. 韓食의 本質的인 價値인 맛과 品格은 勿論 HMR의 核心인 簡便性에 集中하겠다는 것이다. ‘兩班’의 多樣한 製品을 狀況과 趣向에 따라 組合하면 맛과 營養이 豐富한 제대로 된 한 床 차림을 뚝딱 차려낼 수 있다. 株式(主食)인 밥과 粥을 비롯해 金, 김치, 國湯찌개, 饅頭, 醬조림 等 다양한 腐蝕을 갖추고 디저트로 食醯, 修正과, 五味子茶 等 傳統 飮料와 김부각까지 곁들이면 不足함이 없다. 動員F&B는 ‘兩班’ 브랜드를 消費者들에게 積極 알리기 위해 新規 CF를 最近 公開했다. ‘兩班으로 風流가 산다’는 主題로 公開된 CF 映像에는 俳優 正해인이 다양한 日常 속에서 ‘兩班’ 製品으로 風流를 滿喫하고 餘裕를 즐기는 모습이 담겨 있다. 歌手 송창식의 히트曲 ‘가나다라’가 背景 音樂으로 活用돼 風流와 興을 돋운다. 會社 側은 “리브랜딩을 通해 ‘兩班’의 프리미엄 韓食 HMR 이미지를 鞏固히 하고 消費者들에게 더 많은 價値를 提供할 수 있는 브랜드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밝혔다. 안영배 記者 ojong@donga.com}

    • 2021-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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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늑하고 平安한 땅의 기운… 가슴엔 餘裕와 푸근함 가득∼

    湖南과 嶺南에 걸쳐 있는 智異山은 高句麗 백제 新羅가 定立하던 三國時代에 어느 한 나라가 穩全히 차지해본 적이 없던 땅이다. 智異山 자락은 各 나라 百姓들이 삶의 터를 共有하는 舞臺였다. 政治的 壓迫이나 管理의 橫暴, 戰爭 等 患亂(患亂)을 避하려고 찾아드는 사람들을 품어주는 包容의 山이기도 했다. 그 中心地가 全南 求禮郡이고, 智異山의 넉넉한 품처럼 和合과 寬容의 精神을 實踐해온 곳이 求禮 화엄사라 할 수 있다. 智異山 老姑壇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화엄사는 佛敎 經典인 ‘華嚴經’을 修行의 根本으로 삼는 寺刹이다. 華嚴經은 世上 사람들에게 對立과 抗爭 代身 和合과 統合을 가르친다. 四月初八日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華嚴 思想의 舞臺인 求禮를 찾았다. ● 너그러이 包容하는 땅 ‘舊次例’ 求禮는 北쪽으로는 全北 南原, 西쪽과 南쪽으로는 全南 谷城 光陽 順天, 東쪽으로는 慶南 河東과 接하고 있다. 朝鮮時代에 編纂된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求禮郡 석주관性(토지면 송정리)이 嶺南에서 湖南으로 통하는 길목이라고 紹介하고 있다. 7世紀 後半 三國을 統一한 新羅는 흐트러진 民心을 收拾하는 次元에서 嶺湖南 만남의 길목인 求禮를 注目했다. 여기에는 佛敎가 큰 役割을 했다. 百濟人들이 많이 살던 求禮를 舞臺로 衣裳 大使(625∼702) 等 新羅 僧侶들은 華嚴 思想을 펼쳤다. 宇宙의 모든 事物과 師團은 끝없는 時間과 空間 속에서 서로가 原因이 돼 일어나는 것이며, 結局 對立을 超越해 하나로 融合한다는 ‘법계연기(法界緣起)’論이 核心이었다. 갈라진 나라들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은 至極히 자연스러운 現象이라는 論理로 百濟 亡國民들을 토닥거렸을 것이다. 求禮는 地理的으로도 華嚴 思想을 펼치기 좋은 環境을 갖추고 있다. 朝鮮 後期의 人文地理學者 李重煥은 ‘擇里志’에서 “사람 사는 곳에 景致가 아름답고, 物産이 豐富하여 所出이 넘쳐나면 人心 또한 自然스레 넉넉해진다”고 하면서 “求禮는 이 세 가지(景致, 物産, 人心)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고 記述했다. 韓半島 各 地域에 對한 ‘明堂 點數’를 매기는 데 있어 多少 인색했던 이중환조차 極讚한 땅이 求禮였다. 老子의 가르침에 ‘人法地(人法地·사람은 땅을 본받음)’라는 말이 있다. 땅이 넉넉하면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心性도 여유롭고 푸근해진다. 백제 時節 求禮가 舊次例(求次禮)로 불린 說話에서도 이런 痕跡이 나타난다. 百濟 時代에 사이가 좋지 않던 두 政丞이 있었다. 性格과 생각이 너무 다른 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며 싸웠다. 그러다 한 政丞이 먼저 벼슬에서 물러나 求禮에서 隱居 生活을 하였다. 다른 政丞도 隱退 後 末年을 보낼 居住地를 物色하고 있었다. 두 政丞은 求禮에서 偶然히 만나게 돼 救援(舊怨)을 풀고 함께 老年을 보내기로 했다. 두 政丞 이야기를 傳해 들은 백제 王은 ‘怨讐가 서로 例를 찾은 곳’이라는 意味로 ‘舊次例’라는 地名을 지어주었다고 한다.(‘전남의 傳說’에서) ● 화엄사를 빛낸 高僧들 山 좋고 물 맑은 곳이 明堂이라는 말을 느껴보기 위해 화엄사 山內 庵子인 延期癌(海拔 560m)을 먼저 찾았다. 老姑壇 中턱쯤 자리한 이곳에서 眺望해본 求禮는 智異山의 굳센 땅기운과 蟾津江의 豐饒로운 기운이 調和를 이루고 있는 듯했다. 特히 河東으로 흘러나가는 蟾津江 줄기가 求禮를 휘감아 도는 모습은 洛東江이 安東 하회마을을 감싸듯 돌아나가는 것과 恰似하다. 山과 江과 마을이 빚어낸 아름다운 風光을 보기 爲해 일부러 煙氣癌을 찾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山水가 아름다우면 사람도 아름다워진다. 이 地域 出身 장길선 前 求禮敎育長은 “求禮는 外地人들에 對한 偏見이나 텃勢가 거의 없는 便이어서 다른 地域에서 온 사람들이 便安히 살기에 좋다”고 말했다. 延期癌은 本社인 화엄사와 密接한 歷史性을 가지고 있다. 544年 화엄사를 創建한 西域 出身 僧侶 演技 調査가 맨 처음 遂行하던 土窟 터가 演技癌이라는 것이다. 事實 與否는 確認할 수 없으나 깊은 山속에 숨겨진 明堂 터를 콕 집어 隨行 터전으로 삼은 솜씨를 보면 道力이 높은 修行者임은 分明해 보인다. 延期癌은 壬辰倭亂 等 戰爭 통에 消失된 後 오랜 歲月 묻혀 지내다가 1980年代 後半부터 復元 作業이 이뤄져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超大型 文殊菩薩賞과 國內 最大 規模의 마니차(佛敎 經傳을 넣어둔 圓筒形의 信仰道具)가 자랑거리인 延期癌에서 화엄사로 連結되는 散策路(2km)는 ‘治癒의 숲길’로도 有名하다. 溪谷 물에서 放出하는 陰이온과 숲에서 뿜어 나오는 피톤치드가 豐富해 健康을 챙기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코스라고 한다. 散策路를 따라 내려와 화엄사로 들어서니 境內는 마치 큰 行事를 앞둔 듯 분주했다. 화엄사 주지 德門 스님은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大雄殿에 모신 木造毘盧遮那三身佛挫傷이 國寶로 指定 豫告되는 慶事까지 겹쳐 意味가 깊다”고 말했다. 華嚴思想에 基盤해 毘盧遮那佛과 盧舍那佛, 釋迦牟尼佛의 三身佛(三身佛)로 構成된 이들 木造 坐像은 3m가 넘는 超大型 佛像으로 앞서 2008年 寶物로 指定됐다. 朝鮮 王室 사람들과 僧侶 580名 等 總 1320名이 施主에 參與해 造成한 이 佛座像은 17世紀 佛敎 思想과 美術史의 重要한 資料로 評價받고 있다. 그런데 大雄殿 三身佛 造成에는 華嚴史家 겪은 아픈 歷史가 담겨 있다. 1592年 倭軍이 挑發한 壬辰倭亂과 1597年 2次 戰爭인 丁酉再亂으로 온 國土가 戰亂(戰亂)에 시달릴 때 화엄사 僧侶들은 僧兵(僧兵)을 組織해 倭軍에 對抗했다. 화엄사의 尹눌 大使는 朝鮮 水軍에 加擔해 李舜臣 將軍을 도왔고, 晉州城 戰鬪에도 參加하는 等 뛰어난 活躍을 보였다. 丁酉再亂 때는 화엄사 주지 설홍 臺詞가 300餘 僧軍을 이끌고 求禮 義兵들과 함께 要衝地인 석주관에서 倭軍들과 激烈하게 싸웠다. 그러나 壓倒的인 倭軍 軍事力 앞에 僧軍들은 모두 壯烈히 戰死했다. 以後 화엄사 僧侶들에 對한 倭軍의 報復은 殘忍했다. 화엄사를 잿더미로 만들고 僧侶들을 虐殺했다. 智異山 골짜기 이곳저곳에 숨은 듯이 있던 작은 庵子들까지 찾아가 불 질러 없애버렸다. 그만큼 화엄사 僧侶들은 倭軍들에게 골치 아픈 存在였던 것이다. 德門 住持 스님은 “覺皇殿의 四方 壁을 裝飾했던 新羅 時期의 석경(石經·돌에다 華嚴經을 새겨놓은 經典)들도 그때 相當 部分 毁損되거나 倭軍에 依해 日本으로 건너갔다”면서 “日本 교토博物館 側은 當時 건너간 石經의 存在에 對해 肯定도 否定도 안 하는 模糊한 態度를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破壞된 화엄사 重創은 1630年代 碧巖 臺詞에 依해 이뤄진다. 僧兵으로서 뛰어난 活躍을 한 碧巖 大使는 朝鮮 政府로부터도 功勞를 인정받아 ‘八道都摠攝’이라는 職責을 附與받은 뒤 寺刹 重唱에 힘을 쏟았다. 大雄殿에 걸려 있는 ‘大雄殿’과 一柱門의 ‘智異山 華嚴寺(智異山 화엄사)’ 漢字 扁額은 當時 화엄사의 位格(位格)을 말해준다. 이 扁額은 宣祖의 王子이자 仁祖의 叔父인 의창군이 써준 글씨인데, 崇儒抑佛(崇儒抑佛) 體制에서 눌려 있던 佛敎가 戰爭 以後 位相이 높아졌음을 象徵한다. 화엄사는 大雄殿 外에도 國寶 및 寶物級 文化財들이 櫛比한 곳이다. 景福宮 勤政殿을 연상시키는 듯한 雄壯한 木造 建物인 각황전(國寶 第67號)과 각황전 앞의 超大型 石燈(國寶 第12號), 각황전 뒤쪽 언덕배기의 4獅子三層石塔(國寶 第35號)은 國寶級 文化財이고, 大雄殿 東五層石塔과 西五層石塔, 원통전 獅子塔 等은 寶物로 指定돼 있다. ● 四星癌에서 만난 道詵 國師 화엄사를 뒤로하고 화엄사 末寺 中 하나인 四星癌으로 갔다. 求禮郡 문척면 烏山(541m) 頂上에 자리한 社性癌 亦是 화엄사 創建主인 延期 調査가 造成한 곳이라고 한다. 元來는 山 이름을 따 烏山社(鼇山寺)로 불렸으나, 以後 新羅의 元曉 大師와 衣裳 大使, 新羅 末期의 道詵 國師, 高麗의 辰角 國師 等 4名의 高僧이 遂行한 곳이라 하여 四星癌이라고 불리게 됐다. 四星癌은 영험한 祈禱處로 有名한 곳이다. 特히 지난해 여름 集中豪雨로 求禮 地域이 被害를 입었을 當時 10餘 마리의 소 떼가 沈水된 祝辭를 避해 社性癌 꼭대기의 琉璃狂前 앞마당으로 몰려와 목숨을 건져 話題가 되기도 했다. 이런 逸話 때문인지 四星癌은 以後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明堂인 四星癌은 우리나라 風水地理說의 援助로 有名한 道詵 國師와 깊은 因緣을 맺고 있다. 그가 社性癌 內 石壁 洞窟(도선굴)에서 遂行하면서 風水地理說을 깨쳤다는 이야기가 傳해진다. 道詵은 이곳에서 한 異人(異人)을 만났다고 한다. 異人은 그에게 風水地理에 對한 理致를 얘기하고 마을 앞 江邊에다 모래로 山川을 그리고 사라졌다. 道詵은 以後 모래 그림(沙圖)에서 山川地勢(山川地勢)를 보고 風水의 原理를 깨달았다고 한다. 이를 證明하듯 社性癌 隣近에 사도리(沙圖里)라는 마을도 있다. 卽, 求禮郡 마산면 사도리는 우리나라 ‘道詵 風水’의 出發地이자 全勝地인 것이다. 求禮는 歷史的 人物과 傳說的 스토리가 豐富한 곳이다. 그런 한便으로 곳곳에 힐링 名所가 있다. 社性癌 近處의 蟾津江 대나무 숲길과 泉隱寺의 소나무 숲길 및 相生의 길 等은 平素 求禮 사람들도 즐겨 찾는 散策길이다. 이런 親環境的인 길을 걷다 보면 求禮의 아늑하고도 平安한 땅기운이 온몸을 휘감는 듯한 느낌도 맛볼 수 있다.구례=안영배 記者·風水學 博士 ojong@donga.com}

    • 2021-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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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平安한 땅의 기운-가슴엔 푸근함…구례 화엄사를 빛낸 高僧들

    湖南과 嶺南에 걸쳐 있는 智異山은 高句麗 백제 新羅가 定立하던 三國時代에 어느 한 나라가 穩全히 차지해본 적이 없던 땅이다. 智異山 자락은 各 나라 百姓들이 삶의 터를 共有하는 舞臺였다. 政治的 壓迫이나 管理의 橫暴, 戰爭 等 患亂(患亂)을 避하려고 찾아드는 사람들을 품어주는 包容의 山이기도 했다. 그 中心地가 全南 求禮郡이고, 智異山의 넉넉한 품처럼 和合과 寬容의 精神을 實踐해온 곳이 求禮 화엄사라 할 수 있다. 智異山 老姑壇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화엄사는 佛敎 經典인 ‘華嚴經’을 修行의 根本으로 삼는 寺刹이다. 華嚴經은 世上 사람들에게 對立과 抗爭 代身 和合과 統合을 가르친다. 四月初八日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華嚴 思想의 舞臺인 求禮를 찾았다. ○ 너그러이 包容하는 땅 ‘舊次例’求禮는 北쪽으로는 全北 南原, 西쪽과 南쪽으로는 全南 谷城 光陽 順天, 東쪽으로는 慶南 河東과 接하고 있다. 朝鮮時代에 編纂된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求禮郡 석주관性(토지면 송정리)이 嶺南에서 湖南으로 통하는 길목이라고 紹介하고 있다. 7世紀 後半 三國을 統一한 新羅는 흐트러진 民心을 收拾하는 次元에서 英·湖南 만남의 길목인 求禮를 注目했다. 여기에는 佛敎가 큰 役割을 했다. 百濟人들이 많이 살던 求禮를 舞臺로 義湘大師(625~702) 等 新羅 僧侶들은 華嚴 思想을 펼쳤다. 宇宙의 모든 事物과 師團은 끝없는 時間과 空間 속에서 서로가 原因이 돼 일어나는 것이며, 結局 對立을 超越해 하나로 融合한다는 ‘법계연기(法界緣起)’論이 核心이었다. 갈라진 나라들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은 至極히 자연스러운 現象이라는 論理로 百濟 亡國民들을 토닥거렸을 것이다. 求禮는 地理的으로도 華嚴 思想을 펼치기 좋은 環境을 갖추고 있다. 朝鮮 後期의 人文地理學者 李重煥은 ‘擇里志’에서 “사람 사는 곳에 景致가 아름답고, 物産이 豐富하여 所出이 넘쳐나면, 人心 또한 自然스레 넉넉해진다”고 하면서 “求禮는 이 세 가지(景致, 物産, 人心)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고 記述했다. 韓半島 各 地域에 對한 ‘明堂 點數’를 매기는 데 있어 多少 인색했던 이중환조차 極讚한 땅이 求禮였다. 老子의 가르침에 ‘人法地(人法地·사람은 땅을 본받음)’라는 말이 있다. 땅이 넉넉하면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心性도 여유롭고 푸근해진다. 백제 時節 求禮가 舊次例(求次禮)로 불린 說話에서도 이런 痕跡이 나타난다. 百濟 時代에 사이가 좋지 않던 두 政丞이 있었다. 性格과 생각이 너무 다른 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며 싸웠다. 그러다 한 政丞이 먼저 벼슬에서 물러나 求禮에서 隱居 生活을 하였다. 다른 政丞도 隱退 後 末年을 보낼 居住地를 物色하고 있었다. 두 政丞은 求禮에서 偶然히 만나게 돼 救援(舊怨)을 풀고 함께 老年을 보내기로 했다. 두 政丞 이야기를 傳해 들은 백제 王은 ‘怨讐가 서로 例를 찾은 곳’이라는 意味로 ‘舊次例’라는 地名을 지어주었다고 한다.(‘전남의 傳說’에서) ○화엄사를 빛낸 高僧들 山 좋고 물 맑은 곳이 明堂이라는 말을 느껴보기 위해 화엄사 山內 庵子인 延期癌(560m)을 먼저 찾았다. 老姑壇 中턱쯤 자리한 이곳에서 眺望해본 求禮는 智異山의 굳센 땅 기운과 蟾津江의 豐饒로운 기운이 調和를 이루고 있는 듯했다. 特히 河東으로 흘러나가는 蟾津江 줄기가 求禮를 휘감아 도는 모습은 洛東江이 安東 하회마을을 감싸듯 돌아나가는 것과 恰似하다. 山과 江과 마을이 빚어낸 아름다운 風光을 보기 爲해 일부러 煙氣癌을 찾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山水가 아름다우면 사람도 아름다워진다. 이 地域 出身 장길선 前(前) 求禮郡敎育長은 “求禮는 外地人들에 對한 偏見이나 텃勢가 거의 없는 便이어서 다른 地域에서 온 사람들이 便安히 살기에 좋다”고 말했다. 延期癌은 本社인 화엄사와 密接한 歷史性을 가지고 있다. 544年 화엄사를 創建한 西域 出身 僧侶 演技調査가 맨 처음 遂行하던 土窟 터가 演技癌이라는 것이다. 事實 與否는 確認할 수 없으나 깊은 山속에 숨겨진 明堂 터를 콕 짚어 隨行 터전으로 삼은 솜씨를 보면 道力이 높은 修行者임은 分明해 보인다. 延期癌은 壬辰倭亂 等 戰爭 통에 消失된 後 오랜 歲月 묻혀 지내다가 1980年代 後半부터 復元 作業이 이뤄져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超大型 文殊菩薩賞과 國內 最大 規模의 마니차(佛敎 經傳을 넣어둔 圓筒形의 信仰道具)가 자랑거리인 延期癌에서 화엄사로 連結되는 散策路(2km)는 ‘治癒의 숲길’로도 有名하다. 溪谷 물에서 放出하는 陰이온과 숲에서 뿜어 나오는 피톤치드가 豐富해 健康을 챙기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코스라고 한다. 散策路를 따라 내려와 화엄사로 들어서니 境內는 마치 큰 行事를 앞둔 듯 분주했다. 화엄사 주지 德門스님은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大雄殿에 모신 木造毘盧遮那三身佛挫傷이 國寶로 指定 豫告되는 慶事까지 겹쳐 意味가 깊다”고 말했다. 華嚴思想에 基盤 해 毘盧遮那佛과 盧舍那佛, 釋迦牟尼佛의 三身佛(三身佛)로 構成된 이들 木造 坐像은 3m가 넘는 超大型 佛像으로 앞서 2008年 寶物로 指定됐다. 朝鮮 王室 사람들과 僧侶 580名 等 總 1320名이 施主에 參與해 造成한 이 佛座像은 17世紀 佛敎 思想과 美術史의 重要한 資料로 評價받고 있다. 그런데 大雄殿 三身佛 造成에는 華嚴史家 겪은 아픈 歷史가 담겨 있다. 1592年 倭軍이 挑發한 壬辰倭亂과 1597年 2次 戰爭인 丁酉再亂으로 온 國土가 戰亂(戰亂)에 시달릴 때 화엄사 僧侶들은 僧兵(僧兵)을 組織해 倭軍에 對抗했다. 화엄사의 尹눌 大使는 朝鮮 水軍에 加擔해 李舜臣 將軍을 도왔고, 晉州城 戰鬪에도 參加하는 等 뛰어난 活躍을 보였다. 丁酉再亂 때는 화엄사 주지 설홍대社가 300餘 僧軍을 이끌고 求禮 義兵들과 함께 要衝地인 석주관에서 倭軍들과 壯烈하게 싸웠다. 그러나 壓倒的인 倭軍 軍事力 앞에 僧軍들은 모두 戰死했다. 以後 화엄사 僧侶들에 對한 倭軍의 報復은 殘忍했다. 화엄사를 잿더미로 만들고 僧侶들을 虐殺했다. 智異山 골짜기 이곳저곳에 숨은 듯이 있던 작은 庵子들까지 찾아가 불 질러 없애버렸다. 그만큼 화엄사 僧侶들은 倭軍들에게 골치 아픈 存在였던 것이다. 德門 住持 스님은 “覺皇殿의 四方 壁을 裝飾했던 新羅 時期의 석경(石經; 돌에다 華嚴經을 새겨놓은 經典)들도 그때 相當 部分 毁損되거나 倭軍에 依해 日本으로 건너갔다”면서 “日本 교토博物館側은 當時 건너간 石經의 存在에 對해 肯定도 否定도 안하는 模糊한 態度를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破壞된 화엄사 重創은 1630年代 碧巖臺詞에 依해 이뤄진다. 僧兵으로서 뛰어난 活躍을 한 碧巖臺詞는 朝鮮 政府로부터도 功勞를 인정받아 ‘八道都摠攝’이라는 職責을 附與받은 뒤 寺刹 重唱에 힘을 쏟았다. 大雄殿에 걸려 있는 ‘大雄殿’과 一柱門의 ‘智異山 華嚴寺(智異山 화엄사)’ 漢文 扁額은 當時 화엄사의 位格(位格)을 말해준다. 이 扁額은 宣祖의 王子이자 仁祖의 叔父인 의창군이 써준 글씨인데, 崇儒抑佛(崇儒抑佛) 體制에서 눌려 있던 佛敎가 戰爭 以後 位相이 높아졌음을 象徵한다. 화엄사는 大雄殿 外에도 國寶 및 寶物級 文化財들이 櫛比한 곳이다. 景福宮 勤政殿을 연상시키는 듯한 雄壯한 木造 建物인 각황전(國寶 第67號)과 각황전 앞의 超大型 石燈(國寶 第12號), 각황전 뒤쪽 언덕배기의 4獅子三層石塔(國寶 第35號)은 國寶級 文化財이고, 大雄殿 東五層石塔과 西五層石塔, 원통전 앞 獅子塔 等은 寶物로 指定돼 있다. ○ 四星癌에서 만난 道詵國師화엄사를 뒤로 하고 화엄사 말四重 하나인 四星癌으로 갔다. 求禮郡 문척면 邑에서 烏山(541m) 頂上에 자리한 社性癌 亦是 화엄사 創建主인 演技調査가 造成한 곳이라고 한다. 元來는 山 이름을 따 烏山社(鼇山寺)로 불렸으나, 以後 新羅의 元曉大師와 衣裳大使, 新羅 末期의 道詵國師, 高麗의 진각國師 等 4名의 高僧이 遂行한 곳이라 하여 四星癌이라고 불렸다. 四星癌은 영험한 祈禱處로 有名한 곳이다. 特히 지난해 여름 集中豪雨로 求禮 地域이 被害를 입었을 當時 10餘 마리의 소 떼가 沈水된 祝辭를 避해 社性癌 꼭대기의 琉璃狂前 앞마당으로 몰려와 목숨을 건져 話題가 되기도 했던 곳이다. 이런 逸話 때문인지 四星癌은 以後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明堂인 四星癌은 우리나라 風水地理說의 援助로 有名한 道詵國師와 깊은 因緣을 맺고 있다. 그가 四星암내 石壁 洞窟(도선굴)에서 遂行하면서 風水地理說을 깨쳤다는 이야기가 傳해진다. 道詵은 이곳에서 한 異人(異人)을 만났다고 한다. 異人은 그에게 風水地理에 對한 理致를 얘기하고 마을 앞 江邊에다 모래로 山川을 그리고 사라졌다. 道詵은 以後 모래 그림(沙圖)에서 山川地勢(山川地勢)를 보고 風水의 原理를 깨달았다고 한다. 이를 證明하듯 社性癌 隣近에 사도리(沙圖里)라는 마을도 있다. 卽 求禮郡 사도리는 우리나라 ‘道詵 風水’의 出發地이자 全勝地인 것이다. 求禮는 歷史的 人物과 傳說的 스토리가 豐富한 곳이다. 그런 한便으로 곳곳에 힐링 名所가 있다. 社性癌 近處의 蟾津江 대나무 숲길과 泉隱寺의 소나무 숲길 및 相生의 길 等은 平素 求禮 사람들도 즐겨 찾는 散策길이다. 이런 親環境的인 길을 걷다 보면 求禮의 아늑하고도 平安한 땅 기운이 온몸을 휘감는 듯한 느낌도 맛볼 수 있다.화엄사 주지 德門스님 “華嚴의 땅에서 相生 共同體 文化 模範 보일 것” 화엄사 境內 한쪽엔 ‘미얀마 民主化運動을 支持한다’는 플래카드가 있다. 화엄사는 曹溪宗 敎區本寺 가운데 最初로 미얀마 民主化運動 支持 聲明을 냈다. 부처의 가르침을 權力 같은 上位가 아닌 大衆과 함께 하겠다는 意志의 表明인 듯하다. 이를 主導한 화엄사 주지 德門스님은 ‘華嚴의 땅’ 求禮에서 華嚴의 理想鄕인 相生 共同體를 具現하겠다는 意志가 剛하다. 特히 地域社會와의 相生을 强調하는 그를 만나보았다. -求禮와 화엄사의 相生을 實踐한 事例라면? “過去 求禮는 화엄사를 찾는 觀光客들 德分에 人口가 늘고 蕃盛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화엄사 住持로 赴任(2017年)한 後 求禮郡民들이 화엄사 末寺인 泉隱寺 入場料 때문에 辱을 먹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 마음이 아팠다. 智異山 老姑壇에 오르려면 泉隱寺 賣票所에서 1人當 文化財區域 入場料를 내야 했다. 老姑壇으로 오르는 길 自體가 査察 所有의 私有地이기 때문에 泉隱寺로서는 不法的으로 入場料를 받는 게 아니었지만 이에 對한 否定的 이미지도 있었다. 그래서 求禮가 吝嗇한 洞네가 아니며, 또 求禮郡民意 自尊心을 回復해 드리고 싶어서 入場料를 廢止했다. 이 때문에 泉隱寺 살림살이가 좀 어려워지긴 했지만 泉隱寺가 國民과 郡民들의 사랑을 받는 곳으로 거듭나는 契機가 됐다.”-화엄사 터가 明堂인 데다 求禮 땅 自體가 포근하면서도 便安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統一新羅 時期에 東西和合을 위한 華嚴思想을 펼치기에 가장 좋은 地域이 求禮였다. 嶺南과 湖南의 關門이라는 地政學的 特性, 좋은 터의 기운 等에 힘입어 華嚴史家 그 役割을 中心的으로 遂行했다. 過去에 그랬듯이 화엄사는 東西和合 뿐 아니라 保守와 進步의 相生 文化 等을 構築하는 데 힘쓰고 있다. 現在도 화엄사는 慶北 永川 銀海寺와 姊妹 因緣을 맺고 꾸준히 交流한다. 화엄사 住持로 赴任하기 前 桐華寺 住持로 奉職한 因緣 때문인지 大邱 慶北 地域 佛子들이 자주 이곳을 訪問하고 있다. 사람들이 오가다 보면 疏通과 相生의 마음이 절로 생기게 마련이다.” -華嚴史家 重點的으로 念頭엔 두고 있는 일은?“화엄사 覺皇殿을 裝飾했던 ‘華嚴 석경(石經)’을 復元하는 일이다. 經典을 종이에 옮겨 쓴 死境(寫經) 作品은 많지만 돌에다 陰刻한 석경은 世界的으로도 보기 드물다. 壬辰倭亂과 丁酉再亂 때 破壞된 석경 1萬3000餘 點의 破片이 現在 성보박물관에 保管돼 있는데 이를 世上에 드러내 우리의 優秀했던 석경 文化를 알리고자 한다. 中國의 防産 石經이 우리의 華嚴 石經보다 粗雜한 것을 보고 그런 使命感이 들었다. 한便으로 그間 잊힌 死境(寫經) 遂行文化度 널리 普及하고자 한다. 寫經은 信仰的으로 功德을 쌓는다는 意味도 있지만, 遂行의 훌륭한 方便이기도 하다.” <끝> 求禮=안영배 記者 · 風水學 博士 ojong@donga.com}

    • 2021-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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