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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映像] “汚染·變質 86世代 運動圈 政治人, 民主化 主役도 아니다”|신동아

[映像] “汚染·變質 86世代 運動圈 政治人, 民主化 主役도 아니다”

‘80年代 民主化 油印物 産室’ 윤여연 大同印刷所 代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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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영 記者

    kjy@donga.com

    入力 2024-03-16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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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民主主義者 김근태’ 同志로 ‘서울의 봄’ 겪어

    • 전두환 新軍部는 歷史 되돌린 虐殺 勢力

    • 左派, 主思派에 洗腦된 賣國 勢力으로 變質

    • 檢察 쿠데타 프레임은 野黨의 道德不感症 傍證

    [映像] 윤여연 直說



    “民主化 成就의 眞짜 主役은 只今 政治權에서 活動하는 野黨 政治人이 아닙니다. 그들은 學生運動 經歷을 政治的 스펙으로만 利用했지 民主化를 위해 한 게 別로 없어요.”

    설 連休를 앞두고 서울 西大門區 동아일보 忠正路社屋을 찾은 윤여연 大同印刷所 代表는 ‘進步·左派·野黨이 民主化의 主役이자 赤字’라는 프레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맞받았다. 그러면서 “左派의 意味가 汚染되고 變質됐다”며 “現在 左派는 主思派에 洗腦된, 大韓民國 正體性이 模糊한 賣國 勢力을 일컫는다”는 批判을 서슴지 않았다.

    “左派와 右派를 나누는 基準은 口號나 主張이 아닌 存在와 意識, 實踐에 있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社會 矛盾을 解決하려 했고 運動의 原則을 尊重하고 살아왔다는 側面에서, 小市民으로 살기 前인 2003年까지의 제 삶을 左派의 삶이라고 봐야겠지요.”

    雅淡한 體軀에 부드러운 목소리, 서글서글한 引上까지 只今의 모습으로는 잘 想像이 되지 않지만 大學生 時節 尹 代表는 늘 學生示威의 先鋒에 있었다. 1974年 11月 3日 學生의 날 學生示威, 1975年 4月 10日 學生示威를 主動하고 1980年 4月 8日 숭전대學校(숭실대와 대전대 前身) 總學生會長으로 當選해 各種 학내외 示威를 이끌었다. 主要 大學 學生代表人 沈在哲과 柳時敏, 신계륜, 安宿, 형난옥 等과 共同 鬪爭을 摸索해 學生蜂起를 主導했다. 光州民主化運動 關聯 流言蜚語 流布 嫌疑로 檢擧돼 合同搜査本部에서 80日 동안 苛酷한 拷問에 시달리다 布告令 違反으로 實刑을 살기도 했다.



    “非人間的 拷問과 受刑 生活은 歷史를 되돌린 虐殺 勢力을 非妥協的 解放運動으로 膺懲해야겠다는 決意를 다지게 했어요. 그래서 1980年 以後에도 大同印刷所 運營과 靑年運動을 竝行했죠. 1986年부터 2003年까지는 非正規職 組織 活動을 했어요. 正常的인 職場 生活은 못 했습니다.”

    2004年부터 學生運動과 담을 쌓고 지낸 그를 ‘신동아’와 만나게 한 건 映畫 ‘서울의 봄’이다. 映畫 興行 後 文在寅 前 大統領, 李在明 더불어民主黨 代表 等 野黨 政治人이 觀覽坪에 自身들이 民主化의 嫡統 繼承者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을 모른 척 두고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윤여연 대동인쇄소 대표는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회복을 시대적 사명으로 여겨 감옥 갈 각오로 학생운동에 앞장섰다”고 밝혔다. [박해윤 기자]

    윤여연 大同印刷所 代表는 “우리 社會의 民主主義 回復을 時代的 使命으로 여겨 監獄 갈 覺悟로 學生運動에 앞장섰다”고 밝혔다. [박해윤 記者]

    ‘서울의 봄’에 便乘한 惡意的 煽動

    ‘서울의 봄’을 본 所感이 궁금하다.

    “映畫의 背景이자 歷史的 變曲點이던 1980年의 時代精神은 ‘民主化의 봄’ 또는 ‘서울의 봄’이라는 敍述처럼 大多數 國民이 念願한 民主主義 秩序 回復이었다. 12·12事態는 전두환 等 하나회 勢力이 主導하던 新軍部가 이를 妨害하고 軍事政權을 延長할 目的으로 일으킨 下剋上 軍事叛亂이었다. 當時에는 徹底하게 隱蔽돼 있었기에 軍部의 正確한 動向은 알 수 없었지만 學生들로서는 民主主義 回復이라는 歷史的 使命感이 있었기에 新軍部에 抵抗해야 했다. 그때의 經驗을 記憶하며 映畫를 처음엔 혼자 봤다. ‘12·12事態로 서울의 봄의 挫折이 豫告돼 있었다’는 메시지가 읽혔다. 두 番째는 當時 같은 經驗을 한 同志들과 觀覽했다. 1980年 以後 2名의 大統領을 輩出하고 社會 곳곳의 要職을 獨占한 하나회 勢力을 1992年 大統領 就任 11日 만에 淸算한 YS(김영삼)의 勇氣에 새삼 感歎했다.”

    自由民主主義 回復은 歷史的 使命

    左派 一角에서는 하나會 軍部 쿠데타와 尹錫悅 檢察의 曺國 長官 數詞를 同一線上에 두며 ‘檢察 쿠데타’라고 主張한다. 어떻게 생각하나.

    “하늘과 땅만큼 큰 差異가 있다. 全斗煥 政權은 下剋上 軍事叛亂을 일으켜 憲政 秩序를 蹂躪하고 이에 抵抗하는 國民들을 逮捕하고, 不法監禁하고, 拷問하는 等 人權蹂躪을 恣行하면서 執權했다. 反面 尹錫悅 政府는 民主主義의 꽃이라는 選擧 節次를 통해 合法的으로 政權을 넘겨받았다. 特히 尹錫悅 大統領은 서울對 法大에 다닐 때 刑事 模擬裁判을 통해 1980年 民主化의 봄이라는 時代精神과 交感한 바 있다. 나와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民主化의 봄’의 뜻을 理解하고 있다고 본다. 다만 民主黨 支持者들이 大統領 就任 두 달도 안 돼 尹錫悅 政權 退陣 集會를 始作한 것은 大統領選擧 敗北에 對한 情緖的 不服 審理를 惡意的으로 煽動한 結果로 보인다. 이는 主思派의 影響을 받아 大韓民國의 民主的 制度와 시스템을 認定하지 못하고 敵對視해 온 活動의 延長線上으로 생각한다.

    또한 檢察 쿠데타 프레임은 ‘犯罪團體 組織罪’로 處罰해야 할 만큼 腐敗非理 集團이 된 민주당 關聯者들이 道德不感症에 빠져 스스로를 聖域視한다는 것을 傍證하는 例로 보인다. 特히 運動圈 周邊을 맴돌던 曺國 前 長官은 社會的 不公正과 不平等을 擴張한 犯法者이고 僞善者다. ‘金수저’라는 집안 背景과 서울법대 敎授라는 本人의 스펙만 물려줘도 될 텐데, 國民의 逆鱗을 건드리면서 便法과 不法으로 子女를 辯護士 시키고 醫師 시키려고 했다. 曺國 前 長官은 가장 正義로운 척 글을 써왔지만 國民의 普遍的 法 感情에 비춰보면, 檢察의 曺國 前 長官 調査는 墮落한 知識人 出身 犯法者를 搜査한 正當한 司法節次의 執行이라고 判斷된다.”

    直接 運營한 大同印刷所가 學生運動과 密接한 關聯이 있다고 들었다.

    “光州民衆抗爭 關聯 流言蜚語 流布 嫌疑로 檢擧돼 合同搜査本部에서 80日間 苛酷한 拷問에 시달리다 布告令 違反으로 實刑을 살고 釋放됐다. 出所 以後 學生運動을 再建할 必要性을 느껴 1983年 6月頃 신계륜, 李佑宰, 柳時敏 等과 모여 全國 復學生對策위를 組織하고 殺人 政權을 打倒할 때까지 復學을 미루자’고 決意했다. 그래서 新學期에 復學을 拒否하고 1984年 4月 9日 을지로에 大同印刷所를 設立했다. 以後 이곳은 不法 印刷物 製作 專門 印刷所로 發展해 學生運動의 飛躍的 發展을 도왔다. 그 때문에 15次例 以上 印刷物이 押收되고 밥 먹듯 連行과 拘留를 當했다. 그럼에도 이를 甘受하면서 非合法 印刷物의 60~70%를 供給해 ‘光州良民 虐殺 責任者 處罰과 眞相 糾明’ 問題를 全國的으로 擴散시켰다. 이러한 努力으로 1985年 2·12總選에서 野黨 勢力이 躍進하자 中央情報部는 大同印刷所를 學生運動 勢力의 成長을 이끈 油印物 供給處로 把握하고 1985年 漫畫冊 가게로 僞裝한 事務室을 押收 搜索했다. 그때 400餘 目錄이 記載된 帳簿를 빼앗겼다. 拷問 搜査에 對한 두려움으로 逃避하던 끝에 민청련(民主化運動靑年聯合)을 擔當하던 中央情報部 職員과 協商해 大同印刷所를 廢業하는 條件으로 1個月 拘留處分을 받았다.”

    眞짜 廢業했나.

    “1985年 6月부터 낮에는 민청련 事務局長으로, 저녁에는 祕密 大同印刷所 社長으로 活動했다. 그러다 1985年 7月頃 김근태 민청련 議長과 幹部들이 連行되고 나도 手配돼 1986年 1月頃 大同印刷所를 職員에게 물려줬다. 1986年 11月 3日 檢擧돼 南營洞對共分室 調査와 懲罰房을 轉轉하며 受刑 生活을 하다 1987年 初 健康이 惡化돼 執行猶豫로 풀려났다. 釋放 後 大同印刷所를 再建하고 6月 民主抗爭 企劃會議, 6月 10日 市廳 앞 示威에 參與했다. ‘가자! 市廳으로!’라는 油印物을 300萬 張쯤 納品해 6月 民主抗爭의 國民 參與 幅을 넓히는 데 寄與한 바 있다.”

    1980年 숭전대 제1기 總學生會長으로 選出됐다. 總學生會長이 돼야만 했던 特別한 理由가 있나.

    “軍 除隊 後 1979年 2學期에 숭전대에 復學해 10·26事態와 12·12事態를 지켜보면서, 民主主義 回復이라는 時代的 要求를 代辯하는 것이 學生들의 歷史的 使命임을 自覺했다. 全國에서 民主化의 봄을 熱望하고 있었다. 新軍部의 執權 野慾에 맞서 싸우려면 大衆鬪爭 力量을 强化할 必要가 있다고 判斷해 學徒護國團 體制를 解體하고, 直選制 學生會를 復活했다. 그리고 歷史的 責任을 堪當하고자 監獄 갈 覺悟로 1980年 4月 8日 숭전대 總學生會長에 出馬해 當選됐다. 情報 交換과 共同 鬪爭을 摸索할 學生會長團 連帶 모임을 提案한 사람도 나다.”

    軍部獨裁 時節 總學生會를 中心으로 學生運動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當時 學生運動의 窮極的 目的은 무엇이었나.

    “1980年 初에는 學院 査察 中止, 御用 敎授 退陣, 理事會의 不法 退出 같은 學院民主化에 傍點을 뒀고 그해 5月부터 漸漸 社會民主化에 힘을 실었다. 人間의 自由意志를 抑壓하는 軍事政權의 暴壓的 統治 延長을 終熄하고 民主主義的 制度와 構造를 갖춘 民主主義 社會를 實現하자는 內容의 反獨裁民主化運動이 主된 口號였다. 自由롭고, 平等하며 正義로운 理想的인 大同 世上을 만들려고 했다.”

    어쩌다 示威를 하게 됐나.

    “시골 村놈이 서울에 와서 目擊한 富의 不平等이 契機가 됐다. 大學 新入生끼리 茶房에 갔는데 아무도 커피 값을 안 내더라. 그래서 내가 냈는데 같이 커피 마신 親舊 집에 가보니 너무 호화스러웠다. 한 달 동안 쓸 돈을 커피 값으로 내버려서 어떻게 버티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 光景을 보니 짜증이 몰려왔다. 우리 社會 貧富隔差가 얼마나 甚한지 實感하는 瞬間이었다. 그때는 富의 兩極化가 正말 甚했다. 朴正熙 大統領이 3選 改憲을 해서 거의 終身 執權할 수 있도록 法을 改正한 것도 그 무렵이다. 學生들이 抵抗하자 그걸 막으려고 데모를 한 番이라도 하면 死刑시킬 수 있는 緊急措置를 斷行했다. 人間의 自由意志를 抑壓하는 것은 옳지 않기에 데모에 앞장섰다. 人間이 뚫린 입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自由는 줘야 한다는 게 平素 내 持論이었다.”

    죽고 싶을 만큼 苛酷한 拷問 後遺症

    그 때문에 苛酷한 拷問을 數없이 當했다고 들었다.

    “1980年 전두환이 指揮하던 合同搜査本部에서 80日 동안 고문당할 때가 가장 힘들었다. 손목에 찬 手匣에 쇠파이프를 끼워 통닭처럼 대롱대롱 매달아 죽고 싶은 생각이 들 만큼 拷問했다. 拷問 後遺症으로 손목 힘줄이 甚하게 늘어나 手術을 받았다.”

    拷問을 한 名分이 뭔가.

    “처음에는 强性 데모 主動者들을 잡아다 行跡을 캐려고 顧問했는데 光州民主抗爭이 터지니 김대중 氏와 連結하려고 했다. 우리를 行動대로 만들어야 김대중 氏를 잡아넣을 說得力이 생기지 않나. 낮에는 김대중 氏를 만난 적도 없는데 만난 것처럼 虛僞 陳述을 하도록 强要했다. 저녁에는 ‘靑瓦臺 木枕’ 爆擊을 當했다. 武術 3段 以上에 키가 176㎝ 以上이어야 選拔되는 33憲兵隊 憲兵들이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地點과 가슴을 손바닥으로 후려쳐 온몸을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呻吟 한마디라도 나올 때까지 繼續 그 짓거리를 했다.”

    虛僞 陳述을 어떤 式으로 誘導하나.

    “처음에는 北韓에 갔다왔는지, 두 番째는 北學 工作員들과 만났는지, 세 番째는 光州에 갔다 왔는지 追窮해 김대중 氏와 엮으려고 했다. 잘못하면 死刑될 수도 있고 國家保安法에 걸리면 最小 5年에서 10年은 監獄살이를 해야 하니 繼續 否定했다. 나한테 뭔가 얻어야 顧問을 관두겠다 싶어 沈在哲을 통해 김대중 氏에게 50萬 원을 받았다고 虛僞로 陳述했다. 搜査官들이 김대중 氏가 살던 동교동 집을 어떻게 가는지, 地下室에 가면 뭐가 있는지 다 알려줬다. 沈在哲은 그때까지 檢擧되지 않아 證人으로 세울 수 없다고 判斷했다. 서울대 總學生會長이라 안 잡힐 줄 알았다. 나중에 再철이가 내 房에 왔는데 목이 甚하게 부어 있었다. 合同搜査本部에서 當한 拷問이 얼마나 苛酷했던지 1986年 김근태 先輩와 끌려간 南營洞 對共分室이 호텔처럼 느껴질 程度였다. 南營洞 對共分室 내가 있던 房에서 두 달 뒤 (서울대生) 박종철이 죽었다.”

    學生運動을 1970年代에 한 世代와 1980年代에 한 世代는 어떤 差異가 있나.

    “1970年代 데모를 한 學生들은 良心囚라 불릴 만큼 自己 管理와 犧牲을 當然視하면서 學生運動을 實踐한 世代다. 이에 反해 1980年代 데모를 한 世代는 主思派的 理念을 받아들이면서 北韓을 神聖視하고 大韓民國을 中心에 두지 않는 移籍 勢力이 됐다. 또한 個人의 社會的 成就를 優先하고 身分上昇을 追求하면서 學生運動을 벌인 初心을 잃었다. 貪慾에 빠져 腐敗하고 墮落한 길을 걷게 됐다. 特히 主思派 理論에 빠진 86世代(1980年代에 大學을 다니고 1960年代 태어난 世代)가 들고나온 植民地 反封建 社會構成體論이 運動圈에 反美運動을 擴散시켰다. 執權 旣得權層에 對한 憤怒와 敵愾心을 불러일으키고 反國家 行爲에 正當性을 附與한 側面도 있다. 1970年代 民主化運動은 大韓民國을 정의롭게 만들려고 한 愛國 運動이지만, 1980年代 일어난 學生示威는 民主化運動을 宿主 삼아 民族 大團結이라는 美名下에 北韓을 이롭게 하고자 했던 賣國 運動이었다.”

    윤여연 대동인쇄소 대표는 “윤석열 정부가 3년 남은 임기 동안 국정을 잘 운영하려면 집권여당의 안정 과반 의석 확보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박해윤 기자]

    윤여연 大同印刷所 代表는 “尹錫悅 政府가 3年 남은 任期 동안 國政을 잘 運營하려면 執權與黨의 安定 過半 議席 確保가 切實하다”고 强調했다. [박해윤 記者]

    손바닥으로 하늘 가린 사람들

    그는 “86世代 運動圈은 北韓을 讚揚하고 當面 鬪爭을 回避했다. 當面 鬪爭보다 全國 組織 建設에 置重해 연세대 學生 이한열의 안타까운 죽음도 社會 變化의 動力으로 만들지 못했다”고 批判했다. 그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86世代 運動圈의 先鋒에 있던 李仁榮 고려대 總學生會長, 禹相虎 延世大 總學生會長 等이 主軸이 돼 서울 地域 大學生 協議會人 서대협을 만들었다. 서대협의 目標는 全國大學生代表者協議會(전대협)를 만드는 거였다. 서대협은 이한열의 葬禮式에 100萬 人波가 몰렸을 때도, 以後 全國的으로 勞動者들이 鬪爭할 때도 自身이 犧牲할 覺悟로 앞에 나서지 않았다. 1988年 한양대 總學生會長이 된 任鍾晳은 樹齡 待接을 받았다. 死守隊가 그의 周邊 50m를 死守하고 任鍾晳은 그 안에서 돌아다니는 受領놀이만 한 셈이다. 이들은 學生運動을 國會議員 出馬를 위한 팸플릿 기재용 스펙으로 만들어놨다.”

    그는 86世代 運動圈에 政治판이라는 놀이터를 提供한 李가 金大中 前 大統領(以下 DJ)라고 꼬집었다.

    “DJ는 1989年 3月 虐殺 責任者 中 1人이던 노태우와 中間評價 延期에 合意했다. DJ의 잘못된 選擇을 되돌려야 할 歷史的 使命이 있던 평민연(李海瓚, 임채정, 문동환 等) 在野入黨派가 運動의 原則과 大義名分을 忘却하고 DJ의 影響力에 投降하면서 運動圈의 地域 對中 支持 基盤이 急激히 허물어지기 始作했다. 민주당은 身分 上昇을 탐내는 이들을 위한 政治 놀이터가 됐다. 以後 민주당에 政治的 危機가 닥칠 때마다 政治權 輸血 對象이 된 86世代 活動家들은 身分 上昇을 위해 學生運動의 歷史的 使命과 役割을 外面했다고 할 수 있다.”

    李在明 民主黨 代表는 進步 陣營의 大將답다고 評價하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李在明 代表가 城南市長 時節 關係한 大庄洞 非理 等 知能型 腐敗 事件에 對해 國民 大多數는 有罪라고 보고 있다. 周邊의 關聯者 여러 名이 自殺한 것도 釋然치 않다. 이런 사람이 人間 解放의 大同 世上을 希望하는 進步 陣營의 代表가 될 수 있겠나.”

    只今 우리에게 必要한 時代精神은 뭐라고 보나.

    “世界 超一流 先進 强國으로 跳躍하기 위해서는 特權과 反則을 追放하고 不公正·不平等한 社會構造와 制度를 整備해 國家競爭力을 强化해야 한다. 政爭으로 國力을 浪費하는 主思派 論理에 洗腦된 3流 賣國政治를 追放하고 一流 愛國政治로 탈바꿈해야 한다. 世代交替와 勢力交替를 包含한 社會經濟的 土臺를 健康하게 만들어가는 社會 大淸掃 運動이 必要하다.”

    各界가 4月 總選에 거는 期待가 크다. 어느 쪽의 勝利를 豫測하나.

    “大統領 就任 2年이 다 되도록 민주당은 多數 議席을 武器 삼아 政府組織法조차 통과시키지 않고 國政의 발목을 잡는 各種 政爭을 提起해 온 國民을 疲勞하게 만들고 있다. 4月 總選에서 누가 勝利할지보다는 大韓民國이 正常的으로 發展해 갈 수 있을지에 關心을 가질 때다. 이番 選擧에서는 어느 쪽도 쉽게 이기긴 어려울 것 같다. 다만 尹錫悅 政府가 3年 남은 任期 동안 國政을 잘 運營하려면 執權與黨의 安定 過半 議席 確保가 切實한 것은 分明하다.”



    김지영 기자

    김지영 記者

    放送, 映畫, 演劇, 뮤지컬 等 大衆文化를 좋아하며 人物 인터뷰(INTER+VIEW)를 즐깁니다. 요즘은 팬덤 文化와 不動産, 流通 分野에도 특별한 關心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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