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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사람 能力 탓하기 前에 맡기고 기다려보라” [經濟思想家 李健熙 探究?]|新東亞

“아랫사람 能力 탓하기 前에 맡기고 기다려보라” [經濟思想家 李健熙 探究?]

三星의 委任 經營, 社長들을 工夫하게 만들다

  • 허문명 記者

    angelhuh@donga.com

    入力 2022-08-20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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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會議에서도 主로 沈默하며 傾聽

    • 李 會長이 現場 가지 않은 理由

    • 默默히 듣다가 불쑥 디테일을 짚다

    • 캐리비안베이 워터파크 誕生 祕話

    • 半導體 1等이 그룹에 미친 波及效果

    • “優秀 技術者 給與, 一切 干涉 안 해”

    2013년 10월 28일 당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가운데)이 부인 홍라희 여사(오른쪽)와 함께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삼성 신경영 선포 2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기록물을 살펴보고 있다. [삼성그룹]

    2013年 10月 28日 當時 이건희 三星電子 會長(가운데)李 夫人 홍라희 女史(오른쪽)와 함께 서울 中區 신라호텔에서 열린 ‘三星 新經營 宣布 20周年’ 記念式에 參席해 記錄物을 살펴보고 있다. [三星그룹]

    지난 回에서 李健熙 會長의 ‘委任 經營’에 對해 紹介한 바 있다. 李 會長의 리더십을 말할 때 高位職을 지낸 前職 三星맨들이 하나같이 異口同聲으로 말한 것이 바로 ‘委任’, 卽 임파워먼트(empowerment)였다.

    委任 經營은 이 會長의 剛한 哲學이기도 했다. 그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權限과 責任을 주면 그 일을 제 것으로 생각해서 스스로 일에 沒頭하고 신이 나서 일한다. 能力도 最大限 發揮할 뿐 아니라 아이디어도 自發的으로 낸다. 이것이 資本主義 社會의 主人意識”이라고 했다. 그가 쓴 ‘DIY式 事故’라는 글의 全文이다.

    最近 DIY 製品이 市中에서 부쩍 人氣를 끌고 있다. 冊床이나 椅子 等을 半製品 狀態로 사다가 家庭에서 直接 組立하는 것으로 各自의 趣向에 따라 色相과 形態가 다양하다는 것이 이 商品의 魅力이다. 사람들의 價値觀이 참으로 다양해지고 있는 것이다.

    企業에서도 過去 工業化를 軸으로 한 成長 時代에는 ‘하면 된다’는 精神으로 뭉쳤기 때문에 經營者는 軍隊式 指揮官의 姿勢로 모든 役割을 혼자서 堪當해야 했다. 그러나 情報社會가 到來하고 環境變化가 急激해지는 現 時點에서는 經營者의 役割도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

    所謂 ‘DIY 式 思考’에서 그 解答을 찾는 것도 한 方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經營者의 姿勢를 過去처럼 ‘나를 따르라(follow me)’가 아닌 ‘네가 먼저 自律的으로 해보라(after you)’로 바꿔 보자는 것이다. 組織의 비전과 經營方針을 明確히 定해주고 具體的인 遂行은 自律에 맡기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하고자 하는 個人의 欲求를 충족시키고 잠재된 創意力을 發揮할 수 있기 때문이다.

    只今까지 우리는 뭉치는 힘 하나로 歷史를 이루어 왔다고 해도 過言이 아니다. 숱한 외침에 맞서 모두가 一致團結하여 싸우고 나라를 지켜왔으며 아무것도 없는 狀態에서 앞장선 리더들의 獻身과 全體 國民들의 團合으로 世界 속에 발돋움 할 수 있었다.

    이러한 環境이 只今은 바뀌고 있다. 한 國家의 힘 自體가 物理力에서 소프트한 힘, 卽 科學技術力, 뛰어난 人材의 保有 程度 等으로 바뀌었다. 모이는 힘만 갖고는 競爭力을 갖기가 어렵게 됐고 소프트한 힘을 낼 수 있는 創造力이 必要해진 것이다.

    創造力이라는 것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뛰어난 天才性을 타고 났어도 그것을 갈고 닦지 않으면 안 된다. 燦爛한 빛을 發하는 다이아몬드도 갈고 다듬지 않으면 그저 原石(原石)에 不過할 뿐이다. 이제는 經營者들이 原石을 硏磨하는 役割을 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部下가 能力이 없다고 탓한다. 그렇게 탓하기 前에 먼저 일을 맡겨보고 끈氣 있게 기다리는 것이 重要하다. 사람을 쓰는 祕訣은 適材適所만이 能事가 아니다. 그 사람이 제대로 일할 수 있도록 權限을 주고 또 成果를 내도록 時間을 주는 것도 重要하다.

    한 나라 皇帝가 된 乳房은 絶對的인 電力의 劣勢에도 不拘하고 項羽와 치른 3年 戰爭에서 勝利했다. 그 祕訣은 項羽가 每事를 直接 處理해야 直星이 풀리는 사람이었던 反面 劉邦은 丈量에게 企劃을 맡기고 物流는 蕭何, 戰鬪는 韓信에게 맡겨 그들의 能力을 最大로 發揮하게 한데 있었다.


    오너가 던지는 말의 무게 알았던 분

    육현표 에스원 前 社長은 祕書室 企劃팀長 時節 李健熙 會長을 至近距離에서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每番 會議에 들어갔지만 會長이 主로 沈默하며 傾聽을 했지 一一이 뭔가를 指示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當身의 말이 傳해질 무게感을 알았기 때문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會長님은 當身께서 先頭에 서겠다며 動機 附與만 하실 뿐이지, 앞에 나서서 이래라저래라 하시는 모습은 못 본 것 같습니다. 마치 當身이 起用한 사람을 믿지 못하는 일은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꼭 必要한 말씀만 하셨어요.

    企業에서 오너의 指示는 그대로 ‘法’ ‘하나님 말씀’이잖아요. 會長님도 사람인데 하고 싶은 말이 왜 없었겠어요. 하지만 當身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잘 알기 때문에 말을 아끼셨던 것 같습니다. 會長님 말 한마디에 經營陣은 이것저것 따져보지도 않고 그대로 實行에 옮길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엄청나게 自制한 것이죠. 늘 相對方이 判斷할 餘地를 두고 말씀하셨습니다. 組織의 리더라면 꼭 배워야 할 點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社長들은 工夫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指示를 履行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該當 問題에 對해 곰곰이 다시 생각해야 하니까요. 會長님의 自律 經營, 말을 아끼는 經營은 社長들을 교육시키고 공부시키는 한 方法이기도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六 前 社長은 이 會長이 되도록 現場을 訪問하지 않으려 했던 理由도 같은 脈絡으로 보인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會長님은 生前에 ‘내가 現場을 간다고 하면 狀況이 뻔하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例를 들어 重工業 造船所에 간다고 하면 페인트漆 다시 할 테고, 거기 있는 사람들 얼마나 苦生하겠느냐 이런 말씀이셨죠.”

    오너의 目的은 成果 만들어내는 것

    호암은 용인자연농원 설립에 온갖 정성을 다했다. 용인자연농원 안에 있는 한옥에 기거하며 서울로 출퇴근할 정도로 용인자연농원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용인자연농원은 오늘날 명품 테마파크 에버랜드로 자리 잡았다. 사진은 용인 한옥에서 생각에 잠긴 호암. [호암재단]

    湖巖은 龍仁自然農園 設立에 온갖 精誠을 다했다. 龍仁自然農園 안에 있는 韓屋에 起居하며 서울로 出退勤할 程度로 용인자연농원에 强한 愛着을 보였다. 龍仁자연농원은 오늘날 名品 테마파크 에버랜드로 자리 잡았다. 寫眞은 龍仁 韓屋에서 생각에 잠긴 湖巖. [湖巖財團]

    三星에버랜드와 호텔新羅 社長을 歷任한 허태학 前 社長은 1993年 호텔新羅 免稅店 事業部長이던 時節, 李健熙 會長과 처음 만난다. 許 前 社長이 傳하는 이야기에는 李 會長이 아랫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自律性을 주고 일을 맡겼는지 端的으로 느끼게 해주는 에피소드가 많다. 許 前 社長이 記憶하는 이 會長과의 첫 만남은 이렇다.

    “祕書室長 補佐役이었던 李鶴洙 次長이 보자고 해서 갔더니 會長께서 只今 日本 고베에 계시는데 저를 찾으신다는 거예요. 飛行機를 急히 豫約해 고베로 날아갔지요. 호텔 房門을 여는데 안에서 영 언짢은 말씀이 오가고 있었어요. 누가 꾸지람을 듣는 것 같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當時 龍仁自然農園(三星에버랜드의 옛 이름) 社業部長, 管理팀長이 엄청 꾸중을 듣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떻든 ‘와, 저렇게 혼나면 氣가 죽어서 일을 할 수 있을까’ 싶을 程度였어요.

    제가 어리둥절하며 門을 닫지도 못하고 서 있는데 사람들이 물러가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들어갔습니다. 會長님께 꾸벅 人事를 하니 ‘그동안 무슨 일을 했느냐? 只今 일에 재미를 느끼느냐?’고 물으셔서 하는 일에 對해 報告를 드리고 ‘나름대로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對答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끝이었습니다. 며칠이 지나도 다시 부르질 않는 거예요. 아무 指針도 없었고요. 一週日인가 열흘쯤 기다리다 會長님을 直接 찾아갔죠. ‘特別히 下命할 말씀이 없으시면 서울로 들어가서 일을 보다가 다시 무슨 말씀주시면 오겠습니다’ 했더니 뜬금없이 ‘도쿄 디즈니랜드를 제대로 보고 오라’고 하시는 거예요.”

    갑자기 무슨 말이었을까요.

    “저 亦是 어리둥절했습니다. 호텔新羅에서 일하고 있는 내게 왜 디즈니랜드를 보고 오라는 건가, 엔터테인먼트 技法이라든지 디자인을 호텔에 椄木시켜 보라는 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제 생각을 읽으셨는지 ‘디즈니랜드 周邊 都市나 골프場 開發한 것을 보고 오라’고 하시는 거예요. 더 感이 잡히지 않았어요. 그러더니 도쿄에 있는 놀이公園인 시티 워터파크度 가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길로 도쿄로 가서 모두 둘러보고 고베로 돌아가 報告를 드렸지요.”

    뭐라 하시던가요.

    “어땠냐고 하시기에 ‘韓國에서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施設 規模도 크고 扇面各穀色(線面角曲色 線이 분명하고 面이 살아 있으며 각지고 曲線의 柔軟함이 있으면서 色이 아름답다는 뜻)李 正말 獨特하게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亦是 서비스業은 施設들이 色相 面에서 差別化되지 않으면 顧客의 好感을 持續的으로 維持하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제 말에 相當히 肯定的인 反應을 보이셨던 것이 記憶이 납니다.”

    그렇게 서울로 돌아간 許 前 社長은 얼마 後 갑자기 龍仁自然農園으로 가라는 人事 發令을 받았다고 한다.

    “좀 놀랍고 당황스러웠습니다. 率直히 언해피(Unhappy)했고요. 제 꿈은 호텔新羅에서 專門 經營人으로 크는 것이었거든요. 美國 코넬대까지 가서 호텔 매니지먼트 硏修를 한 것도 호텔 經營에 對한 專門性을 키우기 위한 것이었는데 말이죠. 하지만 오너의 目的은 아랫사람을 부려서 成果를 만들어 내는 것이지 個人을 키우는 게 아니잖아요? 已往에 發令을 받았으니 내가 脫出할 것이냐 아니면 會社를 리노베이션 할 것이냐에 對한 苦悶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던 中 몇 달間 海外 有名 리조트, 호텔, 레스토랑 等을 살펴보고 들어오라는 指針을 받았습니다. 한 달間 덴마크, 獨逸, 프랑스, 이탈리아, 美國 西部·中部·동부, 뉴욕까지 다 둘러보고 왔어요. 들어오니까 中央開發 代表理事로 發令이 나 있었습니다. 그때 會長께서 제게 ‘자연농원을 바꿀 수 있는 劃期的인 計劃을 세워보라’고 하셨는데 비로소 고베와 도쿄, 世界 有名 리조트를 샅샅이 둘러보라고 한 깊은 뜻을 理解하게 됐지요.”

    新經營 메시지 傳播했던 또 다른 發信地

    용인자연농원 개장 테이프 커팅. 호암은 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에 서 다. [호암재단]

    龍仁自然農園 開場 테이프 커팅. 湖巖은 앞줄 오른쪽에서 세 番째에 서 다. [湖巖財團]

    許 前 社長은 용인자연농원에 對한 全面的인 手術을 敢行했다고 한다.

    “나중에 깨달은 건데 1993年 新經營 宣言 以後 會長님은 ‘不特定 多數가 드나드는 空間에서 뭔가 달라진 것이 있어야 나의 革新 메시지가 傳播될 것이다. 그리고 삼성그룹 內에도 擴散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셨던 것 같아요.

    事實 革新은 눈에 보이는 效果가 있어야 하는데, 工場과 事務室 안에서 아무리 해봤자 밖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어요. 용인자연농원이라는 곳을 1次 産業型에서 3次 産業型 空間으로 탈바꿈시키면 大衆的으로도 話題가 되고 그렇게 되면 新經營 宣言의 擴散性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신 것 같아요. 判斷을 잘하셨다고 봅니다.”

    許 前 社長은 가장 먼저 브랜드 交替를 했다고 한다.

    “美國 CI 業體를 擇해서 ‘에버랜드’와 ‘캐리비안베이’로 네이밍을 했는데 가장 큰 걱정이 會長께서 果然 許諾해주실까 하는 거였습니다. ‘자연농원’이란 이름이 이병철 選對 會長이 直接 지은 거 아닙니까.”

    그런데 李健熙 會長은 全幅的인 信賴를 보냈다고 했다.

    “正말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마누라 子息 빼고 다 바꾸자는 걸 말이 아닌 實踐으로 보여줬으니까요. 제가 뭘 바꾸고 싶다고 하면 ‘會社 代表가 알아서 하면 되지, 왜 자꾸 내게 묻느냐’고 하실 程度로 다 믿고 맡기셨어요. 新經營 宣言 때 하신 말씀 그대로 個人的인 感情 따위는 一切 개입시키지 않고 會社를 改革할 수 있다면 現場에서 할 수 있는 걸 하게 해주셨고 밀어주셨습니다.”

    브랜드 交替에 이어 周邊 인프라 업그레이드에 나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龍仁 들어가는 2車線을 4車線으로 擴張했더니 道路가 확 트이게 됐죠. 萬若 제가 月給쟁이 根性으로 ‘좋은 게 좋은 거’라는 式으로 安住했다면, 只今의 에버랜드는 誕生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캐리비안베이 워터파크를 만들 때는 1000億 원을 投資했어요. 當時로서는 엄청나게 큰 投資였어요. 周邊에서는 너무 過한 거 아닌가 라는 걱정도 많았는데 會長님은 ‘해보라’고 果敢하게 밀어주셨습니다.”

    1996年 8月 워터파크 오픈을 앞두고 李健熙 會長이 最終點檢 次 訪問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施設을 둘러본 李 會長은 그에게 이렇게 딱 한마디를 한 게 全部였다고 한다.

    “내보고 하라 켔으면 더 크게 했겠다.”

    두 巨人의 리더십 差異

    記者는 이참에 김광호 前 副會長으로부터 李健熙 會長 리더십에 對해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湖巖과 李 會長 리더십의 가장 큰 差異를 묻는 質問에 그는 이렇게 答했다.

    “湖巖은 꼼꼼하게 따지는 스타일이었다면 이 會長은 默默히 듣고 생각한 뒤 ‘하시오’ 한마디로 決定하는 스타일이셨습니다. 湖巖은 先頭에서 任員들을 督勵하고 끌고 가는 스타일이었다면 이 會長은 任員들이 알아서 뛰게 하고, 뛸 수 있도록 與件을 만들어주는 스타일이었습니다.

    初期에 會長은 正말 밤잠 안 주무시고 일에 沒頭하셨어요. 午밤中이고 뭐고 없었어요. 새벽 1~2時에도 電話를 했는데 자다 말고 놀라 깨서 받으면 ‘이거 알아요? 저거 알아요?’ 물으시더니 제가 머쓱해져서 ‘잘 모르겠습니다’ 하면 ‘알아보세요’ 하고 끊으셨어요.

    한番은 日本에 出張 갔다가 호텔 房에서 새벽 2時에 電話를 받은 일도 있었습니다. 具體的으로 뭘 물어보셨는지 只今은 기억나지 않지만 제가 對答을 잘 못 했더니 ‘알아봐’ 하시면서 딱 끊으셨던 記憶이 있어요.

    모시는 立場에선 當然히 緊張되고 疲困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남들 다 자는 時間에도 뭔가 골똘히 생각하셨다는 데 놀랄 때가 많았습니다. 오너가 저렇게 熱心히 하는데 나는 더 熱心히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죠. 會長은 좋고 싫고를 分明히 말씀해주지 않으셨어요. 그냥 無表情이셨다고 할까. 어떤 때는 해도 된다는 건지, 아닌지 全혀 感을 못 잡겠는 때도 있었으니까요.

    湖巖은 報告가 마음에 든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무릎을 팍 치신다든지 明確하게 意思 表現을 하셨어요. 참 꼼꼼하고 일만 생각하던 분이셨습니다. 傳說처럼 내려오는 ‘무서운 메모’란 게 있었어요. 午餐 懷疑하러 들어가면 테이블 옆에 萬年筆로 1뭐, 2뭐 이렇게 쫙 쓰인 메모紙였는데 주무실 때 머리맡에 놓아두셨다가 문득 깨서 뭔가 생각나면 얼른 메모하고 다음 날 社長들한테 ‘이건 어떻게 됐냐?’ 꼭 물어보는 거죠. 社長들이 질겁했죠.

    李健熙 會長은 그런 스타일은 아니셨어요. 다만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部分까지 宏壯히 깊이 들어가셨습니다. 말씀은 많이 하지 않으셨지만 불쑥불쑥 한마디씩 던질 때마다 宏壯히 디테일하셨습니다.

    그리고 참 따뜻하셨습니다. ‘일에만 너무 매달리지 말고 말도 타고 그래라’ 해서 安養 마장도 데려가셔서 任員들이 말을 탔던 적도 있습니다. 疏脫한 面도 많으셨습니다. 괜히 會長 앞에서 얼어서 그런 거지 저희들이 便하게 생각하는 걸 좋아하셨고, 스스럼없이 잘 받아주셨어요. 한番은 ‘子息들은 平生 애프터 서비스(AS)를 해야 된다’는 말씀도 하셨는데 父母 立場에서 누구나 共感이 가는 이야기 아닙니까.”

    ‘半導體 DNA’, 오늘의 三星을 만든 原動力

    호암이 아들 이건희 회장에게 써준 휘호. 이 회장과 지근거리에 일했던 전직 삼성맨들은 “이 회장은 오너가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가 임직원들에게 미칠 영향을 잘 알아 절제하고 경청했다”며 “한마디로 말의 무게를 잘 알았던 경영자였다”고 말한다. [호암재단]

    湖巖이 아들 李健熙 會長에게 써준 揮毫. 李 會長과 至近距離에 일했던 前職 三星맨들은 “李 會長은 오너가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가 任職員들에게 미칠 影響을 잘 알아 節制하고 傾聽했다”며 “한마디로 말의 무게를 잘 알았던 經營者였다”고 말한다. [湖巖財團]

    김광호 前 副會長은 “李健熙 會長이 우리 組織에 불어넣은 ‘半導體 DNA’가 오늘의 三星을 만든 原動力이 됐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半導體 DNA’가 무엇인지 묻는 記者의 質問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絶對 敗北라는 걸 모르도록 한 거죠. 實際로 會長님이 生前에 말씀하셨던 ‘鬪犬, 鬪鷄 敎育시키는 法’이 그것이었습니다. 개나 닭을 훈련시킬 때 相對와 막 싸움을 시키다가 질 만하다 싶으면 확 빼버리는 거지요. 그렇게 訓鍊을 시키면 싸우는 立場에선 져 본 經驗이나 記憶을 갖지 않게 돼 어떤 相對를 만나도 이긴다고 생각하고 싸운다는 겁니다.

    結局 企業도 마찬가지거든요. 現場에 나가 世界 超一流 企業과 붙었는데 끝까지 달라붙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겨야 될 거 아닙니까. 그게 바로 10年 만에 世界 1位에 오른 三星 半導體 精神입니다.

    勿論 中間에 赤字도 많이 나고 失敗도 많이 했지만 絶對로 물러서지 않게, 失敗를 모르게 한다는 그런 精神이 바로 오늘날 三星을 世界 1等으로 만든 半導體 DNA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三星이 初期에 半導體 事業을 할 때 相對하는 業體나 사람들이 IBM, HP(휴렛팩커드) 같은 世界 一流, 이른바 월드 베스트 컴퍼니 아니었습니까. 그런 企業들 등쌀에 미치고 換腸(?)할 때도 많았지만 製品 生産에서부터 工場 運營, 在庫에서부터 納期 管理까지 ‘아, 저렇게 하는 것이구나’하며 많이 배우게 된 겁니다.

    三星이 IBM이나 HP에 척척 納品도 하고 實績도 쌓고 市場 占有率도 오르니, 經營 狀態도 좋아지면서 會長님 期待에 副應하니까 自信感도 생겼죠. 半導體 때문에 그룹이 亡할지 모른다고 했는데 會長님이 就任하시면서 치고 올라가 利益을 내니까 이처럼 좋은 일이 어디 있었겠어요. 그런 自信感을 土臺로 家電까지 바꿀 수 있겠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그래서 1993年 新經營 宣言이 나오게 된 것이고요.

    제가 三星電子 統合 社長이 됐을 때 TV를 하다 갔는데 思考方式이라든가 일하는 方式이 半導體와 比較하면 많이 떨어져 있었어요. 그래서 ‘半導體 DNA’를 가전, 컴퓨터, 通信 各 部門에 집어넣으려 한 겁니다. 所謂 글로벌라이제이션, 월드와이드 오퍼레이션을 해 나가야 한다, 그렇게 誕生한 것이 월드 베스트 TV고 携帶폰입니다. 한마디로 半導體 1等의 波及效果는 半導體 하나에서 끝난 게 아니라는 거죠.”

    김광호 前 副會長은 “무엇보다 湖巖이나 李健熙 會長 모두 사람 欲心이 强했다”고 했다.

    “湖巖度 그랬지만 李健熙 會長님이 가장 많이 얘기했던 게 ‘美國 技術者 데려오는 데 社長 月給보다 열 倍 줘도 괜찮다’였습니다. 湖巖은 우리들이 海外 出張 갈 때에도 ‘絶對 한꺼번에 같은 飛行機 타지 마라, 따로 타고 다녀라’ 그런 指示까지 하셨어요. 或是라도 있을 수 있는 思考까지 念頭에 두고 리스크를 分散하자는 次元으로 理解했습니다. 그런 걸 보면 正말 用意周到했다고 할까(웃음), 正말 대단하신 분이셨죠.

    李 會長님은 外國에서 技術을 가져오고 優秀한 技術者를 데려오는 데서 돈을 얼마 주는지에 對해서는 一切 干涉을 안 하셨어요. 1979年, 1980年에 年俸 10萬 달러(現在 換率로 約 13億 원)이면 꽤 큰 金額이었는데 그 돈을 주고 데려왔으니까요. 三星이 실리콘밸리에 硏究所(SSI)를 만들 수 있던 理由도 바로 그런 果敢한 投資에 있죠. 韓國에 있는 사람들과 俸給 隔差가 나는 것도 一切 介意치 않고 必要하다면 于先 잡아 오고(?) 봤어요. 勿論 다 成功한 건 아니고 그 中에는 탈락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떻든 좋은 人材를 求해오는 것을 絶對的이라고 여겼습니다.

    具體的인 事業 決定은 社長들이 했지만, 表面에 나서 말하지 않고 뒤로 다 支援해주는 會長이 계셨기에 밀고 나갈 수 있었습니다.”

    敗北 自體보다 敗北 意識이 問題다

    김광호 前 副會長이 말하는 李健熙 會長의 ‘鬪犬鬪犬 訓鍊’은 이 會長의 글에도 나온다. 그의 글 ‘럭비 精神’의 專門이다.

    只今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한때 鬪犬이 盛行한 적이 있었다. 鬪犬을 훈련시키는 過程을 지켜보면 매우 興味 있는 事實을 發見할 수 있다. 鬪犬 챔피언으로 만들려면 普通 生後 6個月에서 1年 된 어린놈을 골라서 싸움부터 시키는데 그 對象은 隱退한 챔피언이다.

    隱退한 챔피언은 나이가 들어 힘은 弱하지만 워낙 老鍊해서 젖내 나는 어린 鬪犬이 힘이 빠질 때까지 適當히 싸우다 30分 程度 지나면서부터는 攻擊하기 始作한다. 그러다 隱退한 챔피언이 이길 것 같으면 調鍊師가 떼어놓는다.

    어린 鬪犬은 그렇게 한 番도 敗하지 않으면서 退役 챔피언이 갖고 있는 技術을 傳受받게 된다. 이런 鬪犬은 大會에 나가면 大部分 챔피언이 되고 以後 한 番이라도 지면 그날로 隱退시킨다. 한 番 싸움에 지면 다시는 이길 수 없다고 判斷했기 때문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나 企業에서도 이런 境遇를 찾아볼 수 있다. 잘 나가던 一流 人材나 一流 企業이 한 番 敗北로 二流 人生, 二流 企業이 되고 나면 다시 一流로 올라서기가 如干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敗北 自體가 주는 打擊보다 敗北했다는 意識이 心中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前後(戰後) 잿더미에서 世界가 부러워하는 經濟成長을 일궜다. 그동안 만난 外國의 여러 人士들은 이런 成長과 發展을 奇跡이라고 하는 데 躊躇함이 없었다. 그와 같은 奇跡에 바탕이 됐던 것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可能性에 對한 믿음이었다. 그런데 敗北 意識은 이런 可能性을 잠재운다. 恐怖를 불러오고 意志와 行動을 위축시키기 때문이다.

    只今 不況의 斷面들이 곳곳에서 보이는데 어떤 이는 恐慌 兆朕까지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經濟가 어렵다는 理由만으로 恐慌은 오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우리가 眞情으로 무서워해야 할 것은 敗北 意識에 사로잡히는 일이다. 經濟的 恐慌은 얼마든지 克服할 수 있지만 心理的 恐慌은 한 番 빠지면 쉽게 벗어날 수 없다.

    그런 點에서 럭비 精神은 示唆하는 바가 크다. 럭비는 한 番 始作하면 눈비가 와도 中止하지 않고 繼續한다. 걷기조차 힘든 진흙탕에서는 온몸으로 부딪치고 뛴다. 오직 前進이라는 팀의 目標를 向해 激烈한 태클과 攻擊을 反復하면서 하나로 뭉친다. 그래서인지 럭비選手들은 學校를 卒業하고 나서도 럭비팀으로 모이기만 하면 社會的인 地位에 關係없이 모두 하나가 된다고 한다.

    惡天候를 이겨내는 不屈의 鬪志, 하나로 뭉치는 團結力, 태클을 뚫고 나가는 强靭한 精神力, 이것이 럭비에 담긴 精神이다. 勿論 野球, 골프 等의 運動에도 저마다 所重한 룰과 精神이 있다.

    이 時點에 우리에게 가장 必要한 것은 몸을 던져서라도 難關을 突破하겠다는 럭비 精神으로 精神的 敗北主義를 克服하는 일이다. 이런 精神이 한 社會의 精神的 인프라로 자리 잡을 때 그 社會에는 危機를 이겨내는 底力이 생긴다. 어느 國家, 社會, 企業을 莫論하고 眞正한 힘은 사람에게서 나오며 그 힘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各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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