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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다큐 ‘百年戰爭’의 李承晩 죽이기|신동아

歷史 다큐 ‘百年戰爭’의 李承晩 죽이기

歷史 歪曲해 親日派 몰고 寫眞 合成해 ‘플레이보이’ 卑下

  • 이정훈 記者 | hoon@donga.com

    入力 2013-02-18 14: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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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혁당 再建위 事件 遺家族들이 세운 4·9統一平和財團의 製作 支援을 받아 民族問題硏究所가 만든 ‘百年戰爭’은 그들이 主張하듯 眞實한 歷史를 찾아가는 다큐멘터리인가. 그들은 大韓民國을 만들어온 勢力을 親日派로 規定하기 위해 있지도 않은 事件을 만들어냈다. 親日이라는 좁은 視角으로 武裝한 사람들이 어떻게 韓國 近現代史를 歪曲했는지 追跡했다.
    역사 다큐 ‘백년전쟁’의 이승만 죽이기

    民族問題硏究所가 4·9統一平和財團의 支援을 받아 만든 歷史다큐 ‘百年戰爭.’

    지난해 18代 大統領選擧 直前 民族問題硏究所(民文年)가 4·9統一平和財團의 支援을 받아 ‘百年戰爭’이라는 題目의 유튜브 映像을 만들었다. ‘百年’은 日本에 强制 倂合된 1910年부터 只今까지를 가리킨다. 主 內容은 大韓民國은 日本의 植民地가 된 後 親日派를 비롯한 植民 殘滓를 제대로 淸算하지 못해 只今까지 外勢에 迎合하는 勢力과 自主獨立을 하자는 勢力이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百年戰爭’은 1980年代 大學街 運動圈 組織인 ‘언더(under)’들이 大韓民國이 어느 段階에 와 있는지를 놓고 벌인 ‘絲球體론(社會構成體 論爭)’을 聯想시킨다. 우리나라 運動圈은 마르크스-레닌의 純粹 共産主義를 따르자는 勢力과 北韓式 共産主義人 主體思想(主事)을 따르자는 勢力으로 兩分된다. 純粹 共産主義를 하자는 勢力은 ‘民衆民主主義(PD)’를 强調하고, 主體思想을 따르자는 一派는 南朝鮮 解放을 뜻하는 ‘民族解放(NL)’을 앞세운다.

    民衆民主主義파는 ‘민민투’로 略稱되는 ‘反帝(反帝)反파쇼 民族民主化鬪爭委員會’를 만들었다. 主體思想 信奉派는 ‘자민투’로 略稱되는 ‘反美自主化 反파쇼民主化鬪爭委員會’를 構成했다. 민민투는 政治的으로 韓國은 傳統的인 植民地가 아닌 새로운 植民地 段階에 와 있고, 經濟的으로는 國家가 獨占財閥을 만들어 끌고 나가는 資本主義라며 ‘新(新)植民地國家獨占資本主義論’(略稱 신식국독자論)을 내놓았다. 자민투는 韓國은 如前히 解放시켜야 하는 植民地이고, 半쯤 資本主義化했다며 ‘植民地班(半)資本主義論’(略稱 食盤者論)을 提示했다.

    인혁당 再建위와 4·9財團

    兩側이 自己 判斷을 貫徹하기 위해 思想鬪爭을 벌인 것이 바로 四丘體 論爭이었다. 이 論爭에서 보다 폭넓은 支持를 끌어낸 것은 ‘食盤者論’을 내세운 主思派(NL)였다. 1980年代 末부터 NL系列이 大部分 大學에서 總學生會를 掌握했기에 韓國 大學의 運動圈은 主思派 日色이 됐다. 그러나 1994年 김일성이 死亡하고 1997年 主體思想을 만든 황장엽이 亡命해 金日成 式 主體思想의 虛構를 證言함으로써 酒邪派는 沒落했고, 덩달아 大學 運動圈 勢力도 힘을 잃었다.



    民文聯銀 1948年 親日派 剔抉을 위해 國會가 만든 反民特委의 精神을 繼承해 親日派 硏究를 하다 1989年 他界한 임종국 氏의 維持를 잇자며 1991年에 만든 ‘飯(反)民族問題硏究所’에서 由來한다. 이 硏究所는 2009年 親日人名事典을 내놓아 波紋을 일으킨 바 있다. 現在 所長(3代)은 文學評論家로 불리는 임헌영 氏인데, 그는 1979年의 남민전 事件으로 投獄된 적이 있다. 임준열이 本名인 그는 朝鮮共産黨을 再建한 박헌영과 같은 ‘헌영’을 筆名으로 使用하다가 筆名이 더 알려진 境遇다.

    4·9統一平和財團은 1974年 인혁당 再建위(2次 인혁당)事件과 脈이 닿는다. 1964年 中央情報部에 檢擧돼 有罪宣告를 받은 인혁당 關係者들이 出所 後 ‘競落(經絡)硏究會’란 이름으로 인혁당을 再建했으며, 1974年 中央情報部가 檢擧한 서울大生 中心의 運動圈 組織 民靑學聯을 背後 操縱했다는 것이 이 事件의 骨子다. 經絡硏究膾가 果然 인혁당 再建위인지에 對해서는 論難이 많았다. 또 裁判 過程에서 이들이 拷問을 當했다는 主張도 나왔다.

    法院은 인혁당을 再建한 組織이 實在한 것에 注目해 8名에게 死刑을 宣告했다. 檢察은 大法院이 死刑 確定判決을 한 18時間 뒤인 다음 날 바로 兄을 執行해 ‘司法殺人을 했다’는 批判을 들었다. 이 事件에 對한 判斷이 바뀐 것은 ‘過去事法’을 만들어 過去 公安事件을 再調査한 노무현 政府 時節이었다. 2005年 이 法을 根據로 만들어진 國家情報院 過去史委는 이 事件 搜査 過程에서 拷問과 苛酷行爲가 있었다고 發表했다.

    遺族들의 請求로 열린 再審(2007年)에서 法院은 拷問이 있었다는 것 等을 認定하고, 過去 裁判에서 檢察이 提示한 資料는 證據 能力이 없다며 無罪 判決을 내렸다. 遺家族들은 政府로부터 個人別로 補償金을 받았다. 補償金의 總額은 數百億 원으로 알려져 있다. 遺家族이 이 補償金의 一部를 基金으로 8名이 處刑된 4月 9日을 기려 만든 것이 4·9統一平和財團이다. 民文聯銀 이 財團의 製作支援을 받아 ‘새로운 스타일의 歷史 다큐멘터리’를 製作했다고 유튜브에서 밝혔다.

    역사 다큐 ‘백년전쟁’의 이승만 죽이기


    없는 事實로 만든 歷史 工作

    역사 다큐 ‘백년전쟁’의 이승만 죽이기

    親日派 硏究를 했던 故 임종국氏.

    民文聯銀 李承晩·朴正熙는 各 2篇, 全斗煥·노무현은 各 1篇씩 모두 6篇의 ‘百年戰爭’을 各 50分 程度 分量으로 製作하겠다고 했다. 現在는 李承晩과 朴正熙를 素材로 各 1篇씩만 내놓았다. 民문연이 ‘百年戰爭’을 ‘새로운 스타일의 歷史 다큐’로 規定한 것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大韓民國 歷史를 民文年 스타일로 整理하겠다는 뜻을 內包하기 때문이다. 民문연이 提示한 歷史觀을 土臺로 四丘體 論爭 같은 것을 해보자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이 다큐는 事實을 土臺로 해야 한다.

    信念은 左派와 右派로 나뉘더라도 歷史 認識만큼은 事實을 土臺로 해야 한다. ‘百年戰爭’은 事實을 土臺로 歷史를 解釋하고 있는가. 民族問題를 다루겠다는 民문연이 事實이 아닌 것을 根據로 歷史 다큐를 만들었다면 그 組織의 本然性에 疑心을 품을 수밖에 없다. 一方的인 事實과 虛僞 事實로 歷史를 만드는 것은 民族 正統性을 否定하는 深刻한 ‘歷史 工作’이다. 單純한 失手와 다르다.

    1次 인혁당이 實存했다고 證言한 안병직 서울대 名譽敎授는 “自由民主主義 體制를 否定해서 그렇지, 인혁당 사람들은 正말 純粹한 사람들이었다”고 强調했다. 純粹한 사람들은 事實을 事實로 볼 수 있다. 재미를 위해 유튜브 特有의 戱畫化·비틀기·단순화를 할 수 있지만, 歷史 다큐라고 한 만큼 ‘百年戰爭’은 事實에 充實해야 한다. 두 篇의 ‘百年戰爭’을 보면서 民文聯의 歷史 認識을 따져보기로 한다.

    李承晩을 다룬 ‘두 얼굴의 李承晩’(以下 ‘두 얼굴’)은 李承晩을 親日派와 破廉恥犯으로 規定한다. 李承晩을 親日派로 規定한 根據는 두 가지로 判斷된다. 첫째 光復 後 親日派 剔抉에 反對했고, 둘째 日帝 때 다른 獨立運動家와 摩擦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또한 李承晩을 博士學位를 억지로 받아내고 女性과 놀기 좋아한 바람둥이로 描寫해 李承晩의 道德性에 一擊을 加했다.

    ‘두 얼굴’李 主張하는 ‘李承晩=親日派’를 巨視的으로 살펴보자. 李承晩은 波瀾萬丈한 삶을 살아왔기에 그에 對해서는 萬人萬色의 意見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大韓民國 初代 大統領’이란 事實은 누구도 否定할 수 없다. 1919年 그는 상하이의 (統合된) 大韓民國 臨時政府 初代 大統領, 1948年 建國한 大韓民國의 初代 大統領을 지냈다.

    李承晩이 親日派라고?

    역사 다큐 ‘백년전쟁’의 이승만 죽이기

    ‘두 얼굴’은 나치 獨逸을 擧論하며 李承晩을 콜라보·親日派로 몰았다.

    朴正熙처럼 쿠데타로 權力을 잡은 것도 아닌데 왜 그가 大統領에 推戴됐는지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3·1運動 9年 前인 1910年 李承晩은 美國 프린스턴대에서 國際政治學을 工夫하고 哲學博士 學位를 받았다. 當時엔 프린스턴 같은 아이비리그 大學도 每年 1~3名의 박사만 輩出했기에 博士는 매우 드문 存在였다. 博士가 된 李承晩은 美國에서 獨立運動을 펼쳤고, 美國人들은 博士인 그를 認定했다.

    3·1運動 後 國內外에서 생겨난 여러 臨時政府도 그를 認定했다. 13度 代表가 모여 만든 ‘國內 臨政’ 漢城政府는 美國에 있던 李承晩을 只今의 大統領과 비슷한 ‘執政官總裁’로 推戴했다. 內閣制를 採擇한 상하이(上海) 臨政은 그를 國務總理로 推戴했다. 餘他 臨政도 李承晩을 主要 補職에 推戴했다.

    그 後 상하이 臨政이 餘他 臨政을 統合하며 大統領制로 바꿔 李承晩을 初代 大統領에 推戴했다. 李承晩이 親日派였다면 獨立의 기운이 펄펄 끓던 時節 상하이 臨政을 비롯한 여러 臨政에서 그를 核心的인 地位에 推戴할 수 있었을까.

    李承晩이 親日派였다면, 그를 推戴한 여러 임정의 사람들, 그리고 그를 壓倒的인 票 差로 大韓民國 大統領으로 選出한 制憲議員들도 親日派였다는 굴레를 벗기 어렵다. 196名이 投票한 制憲議會에서는 無慮 180票(91.8%)가 李承晩에게 쏟아졌다. 金九는 13票, 徐載弼은 1票였다. 李承晩이 戰略的인 判斷으로 反日(反日)의 强度를 낮춰, 强勁 反日을 외친 사람들과 맞섰던 것을 根據로 그를 親日派라고 規定한다면, 國家 政策에 反對하는 사람을 簡單히 從北勢力·親北派라고 몰아버리는 것과 뭐가 다른가.

    1952年 宣布된 李承晩 라인(平和線)을 보라. 그가 親日派였다면 獨島 領有權을 分明히 한 平和線을 宣布했을까. 李承晩의 反日路線은 一貫됐고 생각 以上으로 强力했다. 大韓民國 政府 出帆 나흘째인 1948年 8月 18日 그는 처음으로 한 記者會見에서 “우리는 日本에 對馬島를 韓國에 返還할 것을 要求할 것이다”라고 闡明했다. 美軍政 治下 日本의 요시다 시게루 內閣이 反撥하자 9月 9日 對馬島는 大韓民國의 領土라는 ‘對馬島 屬領(屬領)에 關한 聲明’을 發表했다. 1949年 1月 8日 年頭會見에서는 “對日(對日) 賠償問題는 壬辰倭亂 時부터 起算(起算)해야 한다” “對馬島는 別個로 取扱돼야 할 것이다”라고 밀어붙였다. 李承晩은 6·25戰爭에서 韓國을 도와준 美國이 그렇게 勸해도 日本과 修交하지 않았다.

    나치 獨逸까지 動員

    그런데도 ‘두 얼굴’은 나치 獨逸의 宣傳長官 요제프 괴벨스를 利用해 李承晩을 親日派로 만드는 工作을 한다. 虛無孟浪한 것으로 事實을 바꾸었으니 工作이다.

    ‘두 얼굴’은 괴벨스가 “우리가 어떤 나라에 쳐들어가면 그 나라 國民은 自動的으로 세 部類가 된다. 한쪽엔 抵抗勢力(레지스탕스), 다른 쪽엔 協力者(collaborator, ‘콜라보’로 略稱)가 있고, 그 사이에 머뭇거리는 對中(masses)이 있다. 그 나라 國民으로 하여금 自身들의 온갖 富(富)가 약탈되는 것을 참게 하려면, 머뭇거리는 大衆이 레지스탕스 무리에 加擔하지 않고 콜라보 便에 서도록 說得해야 한다”라고 演說하는 場面을 보여준다.

    그리고 “日本이 侵略하자 朝鮮에서도 똑같은 現象이 일어났다. 獨立運動家와 親日民族反逆者, 그 사이에 大多數의 民衆이 있었다.…일본은 親日派를 앞세워 땅과 쌀과 이름과 말(言語), 甚至於 그들을 戰爭에 動員해 生命까지 빼앗았다. 이에 맞서 獨立運動勢力은 海外로 나가 臨時政府를 세우고 獨立軍을 組織했다”라며 李承晩을 콜라보로 몰기 始作한다.

    그러나 李承晩을 바로 親日派로 모는 것은 不可能했기에 “韓國에 온 美軍政 勢力은 親日派를 앞세워 自主獨立 勢力을 짓밟기 始作했다”라고 迂廻한다.

    美軍政 勢力이 親日派를 앞세웠다는 대목도 찬찬히 살펴보자. 美國은 核武器까지 써가며 日本과 熾烈하게 싸워 韓國에 들어왔다. 그런 美國이 親日派를 썼다면 理由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판사 僞幣事件과 大邱暴動

    역사 다큐 ‘백년전쟁’의 이승만 죽이기

    정판사 僞幣事件 裁判. 共産主義者들이 大韓民國을 흔들 目的으로 僞幣를 印刷 流通시킨 事件이다.

    ‘두 얼굴’이 ‘美軍政은 自主獨立 勢力을 짓밟기 始作했다’고 한 것은 美國이 親日派 處罰法을 認准하지 않은 것, 獨立政府를 세운 後 制憲議會가 만든 反民族行爲處罰法이 제대로 執行되지 않은 것을 섞어놓은 것으로 보인다. 前者는 美軍政이 책임져야 하지만, 뒤의 것은 美軍政이 아닌 우리가 책임져야 할 問題다.

    光復 後 純粹 美軍政을 받던 우리는 1946年 12月 12日 議會에 該當하는 ‘過渡立法議員(議院)’을 開院하고, 1947年 6月 3日엔 ‘南朝鮮過渡政府’를 出帆시켰다. 어느 程度의 自治權을 갖게 된 것이다. 過渡政府 出帆 直後인 1947年 7月 20日 過渡立法議院은 親日派를 剔抉하기 위해 ‘夫日協力者, 民族反逆者, 戰犯, 奸商輩 處斷 特別法’을 통과시켰으나 美軍政의 認准을 받지 못해 公布되지 못했다.

    日本과 戰爭까지 치른 美軍政이 이 法을 認准하지 않은 것은 深刻한 左右 對立 때문이었다. 親日派일지라도 轉向을 했다면 그들을 利用해야 할 만큼 左翼과의 싸움이 深刻해진 것이다.

    光復 直後 박헌영이 再建한 朝鮮共産黨은 對日 抗爭期에 朝鮮銀行券을 印刷했던 서울 소공동의‘정판사(精版社)’ 建物에 入住해 機關紙 ‘解放日報’를 發行했다. 그리고 정판사를 통해 1200萬 원의 僞造紙幣를 印刷해 流通시키다 過渡政府 出帆 前인 1946年 5月 警察에 摘發됐다. 警察은 朝鮮共産黨이 南朝鮮 經濟를 攪亂하고 活動資金을 마련하기 위해 僞幣事件을 일으켰다고 發表했다.

    警察에 쫓기던 解放日報 社長 권오직은 北朝鮮으로 逃走했다. 정판사 僞幣 事件은 大韓民國을 不正한 事件이었다. 大韓民國이 本格的인 左右葛藤에 들어섰다는 徵標였다.

    이 事件 5個月 前인 1945年 12月 모스크바에서 열린 美·英·蘇 外務長官會議에서 韓國에 對한 信託統治를 決定하자 李承晩과 金九를 筆頭로 한 韓國人들은 激烈히 反對했다. 박헌영도 反對했다. 그런데 그 直後 北韓에 가서 김일성, 모스크바에서 막 돌아온 로마넨코 民政擔當 副司令官, 폴리얀스키 서울駐在 總領事 等과 會議를 하고 돌아온 박헌영이 1946年 1月 2日부터 饌卓으로 돌아섰다. 모스크바의 決定을 盲從한 것이다.

    그 結果 民族陣營의 反託, 共産主義者들의 饌卓 示威가 競爭的으로 터져 나왔다. 新生 獨立國에서 불거지는 路線 鬪爭이 벌어진 것이다. 美國은 信託統治를 하자는 立場이었지만 그렇다고 親共(親共)은 할 수가 없었다. 무엇을 選擇할 것인가. 그런 岐路에 정판사 僞幣事件이 터졌으니 美軍政은 左翼 剔抉을 時急한 問題로 볼 수밖에 없었다.

    親日派 處罰이냐, 左翼 剔抉이냐

    역사 다큐 ‘백년전쟁’의 이승만 죽이기

    1945年 末 박헌영이 北韓에 다녀온 後 共産 系列은 饌卓 示威를 벌였다.

    이 事件을 겪으면서 美軍政은 共産 勢力과의 싸움에 傍點을 찍게 된다. 日帝는 나치 獨逸과 마찬가지로 反共을 標榜했다. 이 때문에 日帝에 雇用된 朝鮮人 巡査 出身들이 對空(對共) 搜査에 投入됐다. 美軍政이 이들을 警察官으로 採用한 것이다.

    정판사 僞幣事件 5個月 뒤인 1946年 10月 1日 大邱에서 左翼이 일으킨 暴動이 瞬息間에 全國으로 擴大됐다(대구폭동). 美軍政은 美軍 部隊와 朝鮮人 警察部隊를 출동시켜 武力 鎭壓했다. 이 暴動으로 慶北에서는 朴正熙의 셋째 兄 박상희(김종필 前 總理의 丈人) 氏 等 64名이 死亡했다. 全國的인 死亡者 數는 集計조차 되지 못했다. 정판사 僞幣事件과 大邱暴動 等을 겪은 뒤 過渡立法議院이 親日派를 剔抉하자는 法을 만들었으나 , 親日 經歷을 가진 警察官으로 左翼과 맞서야 했던 美軍政은 이 法을 認准하지 않았다. ‘親日派 剔抉’은 饌卓을 했던 共産 勢力이 民族 勢力보다 더 剛하게 외치던 口號였다.

    李承晩과 關聯된 親日派 剔抉은 獨立政府 樹立 後인 反民特委 活動이다. 이 問題도 左翼들이 大韓民國 建國에 보인 態度를 念頭에 두고 살펴봐야 한다. 獨立政府를 세우려면 憲法이 있어야 하고 憲法 制定을 第1의 目標로 만든 招待 議會를 ‘制憲議會’라고 한다.

    美軍政期 大韓民國은 1948年 5月 10日을 制憲議員을 뽑는 投票日로 定하고 選擧運動에 들어갔다. 그러자 左翼들이 大韓民國 建國에 決死反對하고 나섰다. 가장 激烈했던 것은 4月 3日 濟州道 蜂起였다. 左翼들이 主要 官署를 襲擊해 死亡者가 나왔다(제주도4·3사건). 이에 警察과 國防警備隊가 對應해 또 兩쪽에서 犧牲者가 發生했다. 이 混亂으로 濟州島의 選擧는 無效가 됐다.

    建國을 拒否한 濟州島 4·3事件

    6月 18日 濟州道 駐屯 國防警備隊 11聯隊長 박진경 中領이 部隊에 숨어 있던 左翼 問喪길 大尉 等에게 被殺됐다. 事態가 커진 것이다. 武裝示威隊는 日本軍이 남기고 간 武器를 들고 漢拏山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펼쳤다. 警察과 國防警備隊는 이들이 숨어 있을 것 같은 中山間(中山間) 部落들을 찾아다니며 討伐作戰을 벌였다. 여기서 적잖은 犧牲者가 發生했다.

    政府는 兵力 增强을 위해 1948年 10月 麗水에 있는 14聯隊에 濟州島 出動을 指示했다. 배를 타기로 한 19日, 지창수 上司·김지회 中尉 等 이 連帶에 숨어 있던 左翼들이 幹部들을 射殺하며 煽動하자, 連帶員들이 同調해 麗水와 順天을 占領하는, 國軍 歷史上 最初의 叛亂事件이 일어났다(여·순10·19사건). 이를 鎭壓하려고 光州의 4連帶를 出動시키자 相當數의 4連帶院이 合勢해 叛亂軍의 規模는 더 커졌다. 唐慌한 政府가 다른 部隊를 投入하자 叛亂軍은 智異山으로 移動해 게릴라전을 펼쳤다. 이들은 智異山에서 이듬해인 1949年 내내 蠢動했다. 4·3事件과 與·巡事件을 契機로 政府는 軍에 많은 左翼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을 索出하는 肅軍(肅軍) 搜査에 들어갔다.

    旅順事件과 反民特委

    역사 다큐 ‘백년전쟁’의 이승만 죽이기

    李承晩이 白人 女性들에게 接近해 財閥2世처럼 最高級 食事를 사주며 데이트를 했다면서 보여주는 畵面.

    左翼 剔抉이 深刻한 課題였던 만큼 肅軍 數詞와 討伐戰에 日帝 때 共産主義와 싸운 經驗이 있는 이들이 一部 投入됐다. 그러한 肅軍 搜査에서 ‘남로당 嶺南遊擊司令’ 職責을 갖고 있던 朴正熙 少領이 檢擧됐다. 逮捕된 朴正熙는 그가 아는 軍 內 共産勢力을 實吐하고 轉向했다.

    1948年 9月 22日 政府는 制憲議會가 制定한 ‘反民族行爲處罰法’을 公布했다. 이 法에 따라 女·巡事件 鎭壓作戰이 한창이던 11月 25日 國會에 ‘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反民特委)’가 만들어져 1949年 1月 1日부터 稼動됐다. 共産 勢力은 그들 勢力을 살리기 위해 反民特委 活動을 積極 支持했다.

    選擇을 해야 했던 李承晩은 1947年 美軍政이 그랬던 것처럼, 左翼 剔抉을 優先했다. 1月 9日 그는 “反民特委는 峭法的이며 北傀와 對峙하는 狀況에서 지나간 일을 들쑤셔 安定을 沮害한다”는 內容의 談話를 發表했다. 警察도 ‘反民特委는 北韓의 使嗾를 받고 있다’며 反對했다.

    當時 南北 對峙는 深刻했다. 1949年 5月 4日 開城 松嶽山에선 10名의 將兵이 爆藥을 지고 北傀軍 토치카로 突擊한 ‘肉彈 10勇士 事件’이 있었다. 같은 날 最前方에서는 大隊長 票無願과 강태무 少領이 各各 自己 大隊員을 이끌고 集團 越北했다. 그런 狀況에서 李承晩은 左翼 剔抉에 무게를 실은 것이다.

    反面 北韓은 親日派 剔抉을 强調하며 韓國을 흔들었다. ‘暴風의 눈’李 된 反民特委는 1949年 5月 國會 프락치 事件을 겪으면서 中斷됐다. 裁判을 통해 確認된 이 事件의 實體는, 反民特委를 主導한 議員들이 이삼혁, 이재남 等 남로당 特殊工作員을 통해 北韓 指令을 받아 움직였다는 것이었다. 이 事件으로 13名의 議員이 起訴됐는데, 이들이 2審에 抗告한 狀態에서 6·25戰爭을 맞았다. 서울이 敵(敵) 治下에 떨어졌을 때 그中 12名이 北韓으로 넘어갔다.

    1950年 北韓이 南侵한 것을 보면 1949年의 左翼 剔抉은 時急한 問題였음이 분명하다. 南韓이 共産化하면 大韓民國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4·9財團의 支援을 받은 民文聯銀 親日派 剔抉이 가장 重要하다며 李承晩을 親日派로 몰고 있으니 底意가 의심스럽다.

    李承晩은 親日派가 아니다. 그리고 美軍程度 左翼 剔抉을 優先으로 여겼기에 ‘두 얼굴’은 ‘美軍政이 親日派를 앞세워 自主獨立 勢力을 짓밟기 始作했다’는 怪常한 結論을 내려놓았다. 여기서 注目할 것이 ‘짓밟혔다’는 ‘自主獨立 勢力’이다. 美軍政과 李承晩이 함께 짓밟은 것은 左翼이다. 그렇다면 左翼이 自主獨立 勢力이라는 말인가.

    共産主義者들이 自主的?

    左翼 가운데 相當數가 獨立運動을 한 것은 맞다. 그러나 그들에게 ‘자주(自主)’라는 修飾語를 달아줄 수는 없다. 左翼은 ‘萬國의 共産主義는 하나’라고 봤기에 共産主義의 本山인 모스크바의 指令에 따라 움직였다. 自主가 아니라 深刻한 事大를 한 것이다.

    김일성을 보자. 김일성은 1930年代 北滿洲에서 中國 共産黨軍의 中間 幹部로 活動했다. 臨政이나 獨立軍처럼 大韓國民의 軍이 아니라, 中國 共産黨軍의 一員이었다. 1935年 滿洲의 中國 共産黨軍은 中國人 주바午中(朱保中)李 이끄는 동북항일연군으로 統合된다. 1940年 一齊 關東軍이 討伐을 强化하자 이들은 聯合國인데도 中立條約을 맺고 있어 日本과 싸우지 않고 있던 蘇聯으로 逃走했다. 蘇聯 極東軍은 이들을 받아들여 88偵察旅團(旅團長은 주바午中)을 만들었다. 蘇聯軍 안의 中國人 部隊가 된 것이다. 김일성은 이 部隊에서 80名 程度를 이끈 大隊長 等을 했다.

    聯合國은 카이로宣言(1943年) 等을 통해 第2次 世界大戰에서 勝利하더라도 그들의 領土를 擴張하지 않는다고 公布했다. 獨逸軍의 攻擊을 받던 蘇聯은 1943年부터 모스크바 近處까지 쳐들어온 독일군을 밀어내기 始作했다. 1944年 美·英聯合軍이 노르망디 上陸作戰을 성공시키자, 蘇聯軍은 獨逸이 占領했던 東유럽 國家로 進擊해 그들을 解放시켰다. 그러나 聯合國은 領土를 擴張하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에 蘇聯은 解放시킨 東유럽 國家들을 蘇聯과 같은 共産國家로 만드는 工作을 했다.

    역사 다큐 ‘백년전쟁’의 이승만 죽이기

    李承晩과 김노디가 맨法 違反으로 起訴됐다고 한 ‘百年戰爭’의 畵面. 그러나 김노디는 李承晩과 同行하지 않았고, 李承晩은 맨法 違反으로 起訴되지도 않았다. 이 寫眞은 컴퓨터그래픽으로 合成한 것이다.

    이러한 經驗이 있었기에 北韓에 進駐한 蘇聯軍은 88旅團 所屬의 김일성을 내세워 곧장 北韓을 소비에트化했다. 그러니 金日成에게는 ‘자주’라는 單語를 붙여줄 수 없는 것이다. 김일성은 中國 共産黨員과 蘇聯軍 身分을 가졌지만, 李承晩은 그렇게 오래 美國에 있었어도 美國 國籍을 갖지 않았다.

    光復 直後 박헌영이 饌卓으로 돌아선 것은 모스크바의 指示 때문이었다. 그 後 國內 左翼은 모스크바의 指令을 받는 김일성 勢力의 指示를 받아 움직였다. 6·25戰爭도 蘇聯이 만들어준 作戰計劃에 따라 일으킨 것이다. 그런데 ‘두 얼굴’은 左翼을 自主勢力으로 해놓았으니 참으로 深刻한 歷史 歪曲이 아닐 수 없다.

    當時의 眞實은 ‘美軍政이 親日派를 앞세워 自主獨立 勢力을 짓밟았다’가 아니라 ‘美軍政과 李承晩은 左翼의 蠢動이 深刻했기에 一部 親日 勢力을 活用해 左翼을 制壓했다’이다.

    路線葛藤을 親日로 몰아

    李承晩이 路線 問題를 놓고 獨立運動 勢力과 葛藤한 것도 넓은 視野로 봐야 한다. 第1次 世界大戰 때 日本은 그前에 맺은 영일同盟을 根據로 英國 美國이 參與한 聯合國 便에 섰다. 戰後 日本은 勝戰國으로서 獨逸이 領有했던 太平洋의 섬을 委任統治하게 됐다. 이러한 狀況에서 美國과 日本은 蜜月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사이가 좋았다.

    그 무렵 캘리포니아에 있던 一部 獨立運動 勢力이 ‘武裝 空軍을 길러 太平洋을 날아가 쥐 같은 倭王의 머리를 부수자’고 했다. 國際政治에 精通했던 李承晩은 이런 일이 不可能할 뿐 아니라 오히려 美國의 獨立運動 勢力을 위축시킨다고 보았다.

    處地를 바꿔놓고 이런 생각을 해보자. 只今 우리와 北韓은 사이가 무척 나쁘다. 그런 大韓民國에서 一旦의 새터民(脫北者)들이 ‘核實驗을 거듭하는 金正恩의 머리를 부숴버리자’며 獨自的으로 運用할 武裝 空軍을 韓國에 만들겠다고 하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日本과 싸우고 있던 장제스의 中國 國民黨 政府도 우리 臨政이 武裝組織을 運用하는 것을 許可하지 않았다. 外部 勢力이 武裝 組織을 갖추는 것은 許諾할 수 없는, 主權(主權) 侵害 事項이기 때문이다.

    장제스 政權은, 1932年 상하이 훙커우公園에서 尹奉吉 義士가 도시락爆彈을 던져 日本軍 首腦部를 殺傷했을 때 “中國의 30萬 大軍이 하지 못한 일을 韓國 靑年이 해냈다”며 비로소 友好的인 態度를 보였다. 그리고 朝鮮 靑年들로 光復軍을 만드는 것을 特別許可했다(1940년). 하지만 1941年 光復軍이 組織되자, 中國은 光復軍을 臨政에서 分離해 그들이 統制하는 組織으로 만들었다. 이를 위해 參謀長과 政訓處長 等 光復軍의 核心 要職엔 中國 將校를 집어넣었다. 이러한 制約이 있었기에 光復軍은 日本軍과의 戰鬪에 나서지 못했다.

    朝鮮人이 나라 밖에서 外國 政府의 規制를 받지 않고 軍事組織을 만들어 日本과 싸운 事例로는 1920年 大韓獨立軍을 이끈 洪範圖의 봉오동戰鬪와 北路군정서를 指揮한 金佐鎭의 靑山裏戰鬪를 꼽을 수 있다. 그때의 滿洲는 無主空山에 가까웠기에 朝鮮人 獨立軍 部隊들이 活動할 수 있었다.

    그러나 敗北한 日本軍이 討伐을 强化하자 이들은 러일戰爭 敗北 後 日本을 警戒하고 있던 蘇聯에 ‘好感을 갖고’이동했다. 우리가 ‘自由詩’라고 일컬었던 스보보드니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蘇聯은 自國 領土 안에 許可받지 않은 武力이 있는 것을 許容할 수 없어, 朝鮮 獨立軍들을 相對로 武裝解除를 試圖했다. 이때 衝突이 빚어지자 蘇聯은 軍隊를 動員해 朝鮮 獨立軍 勢力을 攻擊해 죽이고 逮捕했다. 1921年 ‘自由詩 慘變’이 일어난 것이다.

    ‘플레이보이 李承晩’

    역사 다큐 ‘백년전쟁’의 이승만 죽이기

    ‘플레이보이 李承晩’은 포토샵으로 만든 畵面이다.

    蘇聯軍은 生捕한 朝鮮 獨立軍 勢力을 裁判에 處했는데, 그때 有無罪를 다투는 陪審員으로 活動한 사람 中의 한 名이 光復 後 서울에서 人工(人共)을 宣布했던 여운형이다. 蘇聯은 살아남은 朝鮮 獨立軍들을 中央아시아 各地로 흩어버렸다. 洪範圖는 카자흐스탄으로 移動해 劇場 水位를 하다 死亡했다. 左翼이 介入된 自由詩 慘變으로 數萬 名에 達했던 朝鮮 獨立軍은 完全히 瓦解됐다.

    外國에서 武裝勢力을 運用하는 것은 不可能에 가깝다는 것을 꿰뚫어본 李承晩은, 그 나라의 法을 지키는 範圍 안에서 鬪爭했기에 勢力을 모을 수 있었다. 反面 過激한 鬪爭을 외친 熱血 勢力들은 世가 모이지 않아, 李承晩을 攻擊했다. 路線鬪爭이 벌어진 것이다.

    李承晩은 第1次 世界大戰으로 美國과 日本의 사이가 좋았을 때는 反日運動을 할 人材를 키우는 敎育에 集中했고, 美國과 日本이 싸우는 時期에는 强力한 鬪爭을 主張했다. 太平洋戰爭 末期 CIA(美國 中央情報局)의 前身이라고 할 수 있는 美軍의 OSS(戰略情報局)는 日本人과 비슷하고 日本말을 할 수 있는 朝鮮人들로 特殊部隊를 만들어 韓國에 浸透시키려 했는데, 그 連結고리가 李承晩이었다.

    이런 事實을 안다면 李承晩을 向한 숱한 非難은 路線鬪爭에서 비롯된 것이지, 李承晩이 親日을 했다는 端緖가 될 수 없다는 것이 自明해진다. 李承晩 路線이 오히려 現實的이었다는 判斷도 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두 얼굴’은 이것을 辛辣히 批判한다. 李承晩은 親日派라며.

    ‘두 얼굴’의 攻擊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政治人의 致命的인 弱點이 될 수 있는 女性問題를 擧論한 것이다. ‘두 얼굴’은 “46歲의 李承晩이 그를 崇拜하는 22살짜리 吳벌린臺 女大生 김노디와 旅行을 하고, 最高級 레스토랑에서 食事를 하고, 最高級 럭셔리 호텔에서 잤다”고 했다. 그러고는 “(李承晩은) 白人 女子들에게 接近해 마치 財閥 2世처럼 最高級 食事를 사주며 데이트를 즐겼다”고 主張한다. 하지만 ‘白人 女子’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러면서 “美國 搜査官들은 李承晩을 不道德한 플레이보이라고 判斷했던지 그를 起訴해버렸다”고 한 後 그 有名한 ‘맨法(Mann Act)’을 들먹인다.

    맨法은 1910年 제임스 로버트 맨 議員이 發議해 制定된 것으로, 性賣買와 姦通 防止를 主目的으로 했다. 男性이 많은 白人 女性을 데리고 株 境界를 넘으면 性賣買, 夫婦임을 證明하지 못하는 男女가 株 境界를 넘으면 姦通으로 보고 一旦 調査하게 한 것이 맨法이다. 뜻은 좋았지만 이 法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될 수 있어 特定 政治人의 名譽를 毁損하는 法으로 惡用되는 境遇가 많았다. 演藝界 從事者들은 女性들과 同行하는 境遇가 많다. 有名한 喜劇俳優人 찰리 채플린도 이 法 違反으로 調査를 받아야 했다.

    韓國 女性 김노디가 李承晩을 尊敬한 것은 事實이다. 김노디는 李承晩이 設立한 韓人基督學院 校長 等을 하며 그의 活動을 熱烈히 支持했다. 李承晩을 ‘아버지와 같은 분(surrogate father)’이라고 表現한 적도 있다. ‘두 얼굴’은 李承晩과 김노디가 맨法 違反으로 1920年 6月 샌프란시스코에서 搜査官들에게 잡혀 起訴됐다고 主張했다.

    그러나 그때 김노디는 샌프란시스코는커녕 캘리포니아 週에도 있지 않았다. 이 事件은 統合된 상하이 임정의 大統領이 된 李承晩이 中國으로 가기 위해 美國 東部에서 西部로 오는 過程에서 일어났다. 그때는 美日關係가 좋았기에 與圈 없이 中國에 가려는 李承晩은 두 나라를 刺戟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行動했다.

    3·1運動 後 李承晩은 漢城政府의 執政官 總裁가 됐기에 워싱턴으로 옮겨가 活動했다. 그런데 상하이 臨政에서 大統領으로 推戴하자 상하이行 배를 탈 수 있는 호놀룰루로 오면서, 조용히 몇 군데에서 朝鮮 獨立을 위한 演說會 等을 열었다. 그가 호놀룰루行 배를 탈 수 있는 샌프란시스코에 到着했을 때 로스앤젤레스에서 누군가가 맨法 違反으로 李承晩과 김노디를 告發했다.

    포토샵으로 寫眞 造作까지

    역사 다큐 ‘백년전쟁’의 이승만 죽이기

    ‘朴正熙는 뱀 같은 사내였다’ ‘美國은 共産主義에 맞서기 위해 韓國 經濟를 발전시켜 주었다’고 한 ‘百年戰爭’의 畵面.

    그러나 김노디는 캘리포니아에 온 事實도 없으니 李承晩을 맨法 違反으로 調査할 수 없었다. 그런데 李承晩은 無國籍者였다. 當時 美國에는 많은 外國人이 일자리를 찾아 몰려들었으므로 無國籍者 問題는 勞動部에서 다뤘다. 맨法 違反으로 告發된 李承晩 問題는 캘리포니아 主 勞動部로 넘어갔다.

    그런데 李承晩은 博士學位를 가진 巨物이라 勞動部는 李承晩의 본 居住地였던 호놀룰루에서 判斷하라며 호놀룰루 移民國으로 移牒했다. 李承晩은 自由롭게 호놀룰루로 가게 된 것이다. 그때 캘리포니아 警察은 누군가가 李承晩을 노리고 있다고 보고 警察官으로 하여금 호놀룰루로 가는 李承晩을 警護하게 配慮했다.

    李承晩은 호놀룰루의 著名 人事였기에 호놀룰루 移民國 責任者는 無嫌疑 處分을 하고 이를 캘리포니아 政府가 있는 샌프란시스코에 報告했다. 이 때문에 李承晩은 배를 타고 中國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두 얼굴’은 “美國 搜査官들은 李承晩을 不道德한 플레이보이라고 判斷했던지 그를 起訴해버렸다”라고 해놓았다. 그리고 사람 키를 재는 者를 背景으로 찍은, 그리하여 被疑者처럼 보이게 된 李承晩과 김노디의 寫眞을 放映한다. 김노디는 캘리포니아에 온 事實이 없는데 어떻게 이 寫眞이 나오게 된 것일까.

    結論부터 밝히면 이 寫眞은 포토샵으로 만든 造作이다. 李承晩 硏究者인 류영익 敎授가 만든 ‘李承晩의 삶의 꿈’(中央日報 刊行)이라는 冊에는 李承晩이 김노디를 비롯한 여러 明과 團體로 찍은 寫眞이 실려 있다. ‘두 얼굴’은 이런 寫眞에서 李承晩과 김노디를 떼어낸 다음 被疑者처럼 보이게 키를 재는 者를 背景으로 둘이 같이 있는 寫眞을 만들어 放映한 것이다.

    그리고 “李承晩이 22살인 어린 女大生과 바람을 피웠다”고 한 後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特定하지도 못하는 白人 女性들과 놀아났다고 主張했다. 完全한 造作인데, 이는 死者(死者)에 對한 深刻한 名譽毁損이 될 수 있다.

    ‘두 얼굴’ 製作에 參與한 人士는 김노디가 샌프란시스코에 있지 않았고, 李承晩은 샌프란시스코가 아닌 로스앤젤레스에서 告發된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李承晩과 김노디가 같이 있었느냐는 質問에 “告發을 當했다”고만 對答했다. 李承晩과 김노디가 者를 背景으로 찍은 寫眞에 對해서는 “CG(컴퓨터 그래픽)로 만들었다”라고 答했다. ‘김노디가 캘리포니아에 없었는데 어떻게 李承晩이 맨法 違反으로 起訴될 수 있는가’란 質問에는 “起訴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우리에게 法律諮問을 해준 분들은 起訴한 것과 진배없다고 했는데…”라면서 말끝을 흐렸다.

    李承晩 博士學位가 왜 問題인가

    李承晩의 博士學位에 對한 是非는 더욱 荒唐하다. 李承晩은 1910年 프린스턴대에서 ‘美國의 影響을 받는 永世中立론’(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1912年 出刊)이라는 論文으로 博士學位를 받았다. 이 論文은 100年이 지난 只今도 잘 썼다는 評價를 받는다. ‘두 얼굴’은 李承晩이 碩士學位를 받지 않고 프린스턴大로 갔고, 프린스턴대에 籍을 둔 狀態에서 하버드대에서 碩士學位를 받은 것이 問題라고 指摘한다.

    碩士課程을 밟던 學生이 自己 學點을 들고 다른 大學의 席·朴 統合過程으로 옮겨가는 것은 只今도 可能한 일이다. 席·博士 統合過程生이 所定의 過程을 履修하고 資格試驗을 通過하면 學校는 博士論文이 通過되기 전 碩士學位를 준다. 그러한 狀況이라면 하버드대는 李承晩에게 不足한 學點을 채우게 한 後 碩士學位를 줄 수 있다.

    簡單히 理解되는 것을 ‘두 얼굴’은 不可能한 것으로 規定해 李承晩을 邪惡한 사람으로 몰았다. 情況이 이렇다면 非難을 받아야 할 쪽은 李承晩이 아니라 民文聯이다.

    앞뒤 狀況을 살펴보면 李承晩은 ‘두 얼굴’李 主張하는 대로 親日派도 아니고 플레이보이도 아니었다. 李承晩의 問題는 經濟를 살리지 못했다는 것, 外交에는 達人인데 내치는 잘하지 못했다는 것, 獨裁를 했다는 것 等인데, 이는 이미 숱한 硏究書에서 이미 指摘했다. ‘두 얼굴’은 追加로 밝혀낸 것이 없다. 그런데도 虛僞 事實을 根據로 李承晩이 親日派에다 플레이보이라는 歷史 다큐를 만들었으니 民文聯銀 그에 對한 責任을 져야 한다.

    朴正熙를 ‘稱讚’하는 ‘百年戰爭’

    朴正熙를 다룬 ‘百年戰爭’은 ‘프레이저 報告書 1部’라는 副題를 달고 있다. 이 유튜브 映像은 ‘두 얼굴’과 달리 單一 主題로 一貫하고 있어 덜 헷갈린다. 1976年 美國에서 박동선을 中心으로 한 코리아게이트 事件이 터졌다. 그러자 美 下院 國際關係委員會가 傘下 國際機構小委員會로 하여금 이 事件을 調査해 1978年 10月 31日 議會에 報告書를 提出하게 했다. 小委員會는 委員長이 프레이저 議員이었기에 ‘프레이저 委員會’, 報告書는 ‘프레이저 報告書’로 불리게 됐다.

    이 報告書는 코리아게이트의 背景을 說明하는데, 全體的으로는 朴正熙의 經濟開發을 肯定的으로 評價한다. 그러나 中間 中間 問題點을 指摘했는데, 유튜브 映像은 그러한 것만 뽑아내 스토리를 만들었다. 이 때문에 韓國의 經濟成長은 朴正熙의 功勞가 아니라, 美國 政府의 親美 國家開發戰略 때문이라고 主張한다. 美國이 自國의 威信을 높이고, 日本을 保護하며, 共産主義와의 對決에서 優位에 서기 위해 韓國의 經濟를 成長시켜줬다는 것이다. 이 映像은 또 日本은 美國의 指示를 받고, 韓國을 日本 依存 國家로 만들기 위한 意圖에서 韓國의 經濟成長을 支援했다고 主張한다.

    그러면서 朴正熙가 다가키 마사오(高木正雄)라는 日本 이름으로 만주군관학교를 거쳐 滿洲軍 中尉를 했고, 하도 靈惡해 뱀 같은 男子, 卽 ‘스네이크 朴(Sna-ke Park)’으로 불렸다고 비꼰다. 朴 政權 때 일어난 證券波動과 貨幣改革의 問題點도 擧論한다.

    하지만 누가 뭐라고 非難해도 只今 韓國은 世界 8位의 貿易大國, GDP 基準 世界 13位의 經濟大國이다. ‘百年戰爭’은 1960年 韓國 經濟力이 世界 101位일 때 北韓은 50位였다고 했는데, 只今 韓國은 經濟大國이 됐고 北韓은 150位圈 밖으로 墜落했으니 이는 朴正熙의 經濟成長을 認定한 꼴이 된다. 그런데도 내레이터는 繼續 朴 政權의 經濟政策을 問題 삼으니 民文聯의 歷史 認識이 의심스러운 것이다.

    왜그 더 도그(Wag the Dog)

    大韓民國은 經濟成長을 통해 民主化까지 이룩한 나라다. 桐·夏季 올림픽과 월드컵 等 大型 國際行事를 거뜬히 치르고 主體思想까지 떠벌일 수 있는 自由 空間을 提供했다. 인혁당 再建위 事件에 對해서는 拷問을 加한 것을 認定해 再審에서 無罪判決을 내렸다. 民文聯銀 이러한 民主國家를 親日派가 만들었다고 主張하고 있다. 典型的인 本末顚倒, 主客顚倒다. 事實이 아닌 思想으로 歷史를 만드는 典型的인 歷史 造作이다.

    1997年에 나온 美國 코미디 映畫 ‘왜그 더 도그’는 再選이 어려운 美國 大統領이 戰爭을 일으켜 再選을 圖謀한다는 內容을 담고 있다. 週(主)가 아닌 種(從)으로 本質을 바꾸려는 努力을 諷刺한 것이다. 개가 꼬리를 흔들어야 하는데 거꾸로 꼬리가 개를 흔드는 것을 ‘왜그 더 도그(wag the dog)’라고 한다.

    民文聯의 歷史 다큐야말로 왜그 더 도그다. 大韓民國을 만들어온 主流의 努力은 度外視하고, 親日이라는 問題에만 執着해 韓國 歷史를 裁斷하려고 하니 歷史歪曲에 이르게 됐다.

    1980年代의 四丘體 論爭은 社會主義者들끼리의 論爭이었다. 이 때문에 結論이 限定돼 있어 學生運動을 觸發시켰다. 그러나 그 論爭을 벌인 勢力은 國家 發展에 參與한 이들이 아니었다. 이제는 韓國의 國家 發展에 參與한 勢力도 參與하는 眞짜 四丘體 論爭을 벌여야 한다.

    ‘百年戰爭’은 ‘近現代史 眞實 찾기 프로젝트’라는 글句로 大尾를 裝飾한다. 眞實로 近現代史의 眞實을 찾고 싶다면, 民文聯銀 眞實을 土臺로 歷史 다큐를 製作해야 한다. 그러지 않을 때는 그에 對한 責任도 져야 한다.

    그리고 北韓을 놓고도 똑같은 잣대로 眞實한 歷史 찾기에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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