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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家族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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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남긴 마지막 어버이날 便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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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活動服 주머니 속 沙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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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 卒業 記念으로 膳物한 핸드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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男便을 만나게 해 준 卓球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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結婚 25周年 膳物이었던 時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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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派兵을 自願했던 아들이 받은 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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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泳을 좋아하던 아들의 스쿠버 裝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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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代 못지 않게 健康하던 아버지의 運動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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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世上을 떠난 後 到着한 表彰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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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챙기지 못했던 携帶電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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男便이 꾹꾹 눌러쓴 프로포즈 스케치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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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들과 함께 工夫했던 漢文 冊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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熾烈한 고3을 보냈던 아들의 受驗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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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이룬 아들 목에 걸어줬던 꽃목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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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첫 月給으로 膳物한 口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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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凡한 날도 특별하게 만들어주던 꽃다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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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家族' 넷을 15年間 태운 自動車 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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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婚旅行 寫眞이 들어있던 紙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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蹴球를 좋아하던 아들의 땀 밴 유니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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父母님 걱정에 몰래 支援했던 特戰司 베레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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男便이 떠난 後에도 每日 닦는 口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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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氣가 남아있는 다이버龍 時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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男便의 어린시절이 담긴 國民學校 生活通知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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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손수 깎아 만든 나무 옷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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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家族이 갑자기 世上을 떠났다.

마지막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한 채.

消防, 警察, 軍人...

어렴풋이 危險한 瞬間도 있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生死의 岐路에서

正말 自身보다 他人을 選擇할 줄은 몰랐다.

어떤 사람이었을까.

家族들은 말없이 故人의 日常이 담긴 遺品을 하나둘 꺼냈다.

남은 物件들이 代身 答했다.

世上이 英雄이라고 부르는 어떤 사람들도,

實은 家族과 울고웃던 平凡한 子息과 父母

그리고 사랑하는 男便이자 아내였다고.

그들은

이었습니다.

아들, 딸이었습니다.

딸의 小小한 日常, 아들과 주고받은 마음이 담긴 遺品을 꺼내며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稀微하게 웃었다. 그리고 모두가 말했다.

자랑스럽다고, 죽을 때까지 잊지 않는다고.

집에서 웃음소리가 나는 건 단비 德이 컸다. 단비는 집에 오면 윷놀이판을 펼치고, 旅行 갈 땐 마이크를 챙기는 딸이었다.

늘 살가웠지만, 그해 어버이날에는 더욱 多情했다.

“生前 그런 적은 없었는데, 절을 하면서 어버이恩惠 노래까지 부르더라고. 只今 생각하면 떠날 걸 알고서 그랬나 봐….”

그리고 用돈과 함께 쥐여 준 便紙. 平素에 못 한 말이 담겨 있었다.

‘어디서도 아빠 사랑 많이 받고 컸다고 堂堂하게 말할 수 있게 해준 100點짜리 아빠.’
‘내 性格 元來 이렇다는 핑계로 엄마 얘기 많이 들어주지 못해 未安해요.’

단비의 마지막 便紙가 됐다.

무엇인가 만져졌다.

딸이 마지막으로 입은 活動服을 끌어안고 고개를 파묻었다. 주머니 안쪽으로 무언가가 손에 잡혔다.

수박맛 沙糖 두 個, 다 먹고 남은 沙糖 껍질 두 個.

平素 군것질을 좋아하던 딸이었다. 몇 年째 ‘올해는 꼭 다이어트에 成功하겠다’며 菎蒻 따위를 사들이던 딸이지만 끝내 沙糖을 놓진 못한 模樣이다. 일하다가 ‘입이 심심하다’며 沙糖을 입에 넣고 입이 볼록하게 이쪽저쪽 굴렸을 모습이 선했다.

“단비답다, 하고 웃었지.”

딸의 携帶電話 속 寫眞을 하나씩 넘겨 봤다. 익숙한 物件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大學 卒業을 祝賀하며 사 준 가방이었다.

‘우리 딸도 이제 社會人인데 핸드백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냐’며… 단비의 單짝이었던 男便이 앞장섰다.

“그래서 셋이 아웃렛 가서 이거저거 메 보면서 같이 고른 거야. 男便이 ‘단비 膳物인데 내가 사 준다’며 산 건데….”

親舊들과 찍은 寫眞 속에서 단비는 恒常 그 가방을 들고 있었다.

故 朴단비 消防校(殉職 當時 29歲) 의 어머니 이진숙

朴 消防校는 2019年 10月 31日 消防헬기를 타고 獨島로 向했다. 應急患者를 태우고 獨島를 離陸한 헬기는 不過 2分 만에 바다로 墜落했다. 朴 消防校를 비롯해 金鍾泌 機張(46), 서정용 檢査官(45), 이종후 副機長(39), 背革 消防長(31)李 함께 殉職했다.

어린 아들에게 일찌감치 水泳을 가르쳤다. 萬에 하나 물에 빠져도 水泳은 할 줄 알아야, 救해 주러 올 때까지 버티고 있을 테니까.

“나는 우리 애가 살아있을 줄 알았어. 水泳을 워낙 잘했거든.”

혁이는 생각보다 더 水泳을 좋아했다. 中學生 때 스킨스쿠버를 始作했고, 자라서는 海軍 海難救助隊(SSU) 要員으로 服務했다.

스쿠버 슈트는 아들이 자꾸 생각나 處分했다. 그러나 아들의 숨이 돼 줬을 呼吸器, 그리고 오리발은 버리지 못했다.

“代身 받아오는데 아무 생각도 안 들었어. 主人 없는 上場이 무슨 意味가 있나.”

아들은 殉職 두 달 前 다뉴브江을 누볐다. 2019年 5月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沈沒한 遊覽船 허블레아니호 失踪者 搜索에 投入되면서다.

헝가리 政府는 이듬해 5月 事故 1週期를 기려 아들에게 表彰狀을 授與했다. 이미 혁이가 世上을 떠난 後였다.

“그래도 죽을 때까지 갖고 있어야지.”

海軍 SSU 服務 當時엔 天安艦 搜索에 投入되기도 했던 아들이다. 언제든 出發할 수 있도록 가방에 恒常 속옷과 洋襪 5個, 餘卷을 싸놓고 있었다. 그런 아들이었기에 이 表彰狀을 자랑스럽게 여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故 背革 消防長(殉職 當時 31歲) 의 어머니 유미영, 아버지 배웅식

倍 消防長은 2019年 10月 31日 獨島 隣近에서 應急患者를 移送하는 헬기에 朴단비 消防校와 함께 타고 있었다. 헬기가 獨島에서 離陸한 지 2分 만에 墜落하면서 朴 消防校 等 同僚들과 함께 숨졌다.

“高 2때까지는 그냥, 蹴球 좋아하고 게임 좋아하고… 成跡도 좋지도 않았어. ‘커서 뭐할래’ 하면 ‘蹴球選手?’ 이러고. 뭘 해도 大學은 가야 하지 않겠냐 하니까 自己도 成跡은 올려야 되겠다 싶었나 봐. 齷齪같이 하더니 模擬考査 칠 때마다 每달 點數가 30點씩 오르더라고.”

그렇게 정민은 空軍士官學校에 入學했다.

“第一 예쁘고 華麗한 꽃목걸이를 걸어주고 싶었어. 洞네 꽃집에서 生花度 넣고 調和도 넣고 色色깔로 만들어서 淸州까지 가져갔어.”

파일럿 準備가 쉽지 않다고 吐露하는 정민에게 “그래도 最善을 다해 보라”고 말했었다. 아들은 좋은 成績으로 戰鬪機 操縱士가 될 수 있는 機會를 얻으며 學校를 卒業했다. 大邱에서 功들여 注文한 꽃목걸이를 工事가 있는 淸州까지 가져갔다.

花環을 보면 如前히 아들이 자랑스럽다.

故 심정민 少領(殉職 當時 29歲) 의 어머니 최원숙

2022年 1月 11日 F-5E 戰鬪機 한 臺가 京畿 水原市 空軍 第10戰鬪飛行團 滑走路를 離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機體 異常 信號가 나타나자 操縱士였던 審 少領은 管制塔에 非常脫出을 宣言했다. 그러나 民家 被害를 막기 위해 끝까지 操縱杆을 놓지 않았다. 結局 戰鬪機는 隣近 野山에 墜落했다.

“커서는 登山도 하고 水泳도 하고 아주 萬能이었는데, 어릴 때는 그렇게 運動 좋아하는 애는 아니었거든. 그런데 그때도 蹴球는 좋아했어.”

國환이는 職場에서도 蹴球 小모임 場을 맡아 週末에 種種 景氣를 나가곤 했다. 등番號는 主로 7番이나 10番. 팀에서 에이스나 最前方 攻擊手들이 다는 番號다. 그만큼 蹴球를 잘하고 또 좋아했다.

消防署 蹴球 小모임 유니폼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퍼스트 인, 라스트 아웃(First In, Last out)’

아들이 그 힘들다는 陸軍特殊戰司令部(特戰司)에 支援한 것을 뒤늦게 알았다.

“엄마 아빠 걱정할까 봐 그랬지.”

아내는 사서 苦生하는 아들이 안쓰러워 어쩔 줄 몰랐다.

國환이에게 어릴 때부터 “已往 가는 軍隊, 男子답게 海兵隊 가라”고 말하던 나 亦是 놀랐지만 以內 자랑스러웠다. ‘짜식, 힘든 만큼 배우는 것도 많을 거다.’ 아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나도 으쓱했다.

故 김국환 消防長(殉職 當時 28歲) 의 아버지 김도근

2020年 7月 31日 全南 求禮郡 智異山 피아골에서 물놀이를 하던 避暑客 한 名이 물에 빠졌다. 며칠間 이어진 비로 溪谷은 물이 불어난 狀態였다. 申告를 받고 出動한 金 消防長은 避暑客을 救하기 위해 溪谷에 뛰어들었다가 急流에 휩쓸리며 殉職했다.

海兵隊度 힘들 텐데 이라크 派兵이라니. 戰爭터라니.

“나는 正말 싫다고 했어. 누가 아들을 그런 危險한 데 보내고 싶어 해. 그런데 固執을 안 꺾더라고….”

父母 同意書가 必要했다. 署名하면 무슨 일이 날 것만 같아 決死反對했지만 호종은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無事히 돌아와 메달까지 받았다.
“手當까지 두둑하게 받았잖아.”

씩 웃으며 덧붙이는 아들을 보며 어리게만 보이던 둘째가 어느새 저렇게 자랐나 싶었다.

“호종이 생각나는 物件은 집 안에 남겨두기 힘들어서 옷이나 신발, 帽子, 啞鈴 같은 運動器具도 다 버렸어. 그런데 이 다이버 時計는 그냥 버리기가 싫었어요. 海警 試驗 準備할 때부터 찬 거거든. 合格하고 訓鍊받거나 일하러 갈 때도 이게 갖고 있는 時計 中에 第一 크고 두껍다고 자주 찼어. 보면 바닷물 소금氣가 아직도 남아 있어. 여기 까만 고무에, 허옇게 희끗희끗한 것들이 다 소금이잖아.”

故 정호종 警長(殉職 當時 34歲) 의 어머니 박상숙

2020年 6月 6日 慶南 統營市 紅島 隣近에서 스킨스쿠버를 하던 다이버 2名이 氣象 惡化로 인해 海上 洞窟에 孤立됐다. 申告를 받고 出動한 鄭 警長은 9時間 넘게 救助 作業을 이어가다 너울性 波濤에 휩쓸려 失踪됐다. 그는 이튿날 숨진 채 發見됐다. 다이버 2名은 無事히 救助됐다.

就職한 아들이 첫 月給을 받아 사 준 膳物. 그前까지 아빠와 아들이 서로 膳物 주고받은 적은 손에 꼽을 程度였다.

“첫 月給 받았다면서 江陵 市內 끌고 가더라고. 나는 運動靴나 사달라고 했는데 아니라고, 運動靴는 平素에도 사지 않냐, 첫 月給인데 第一 좋은 거 사야 된다면서 구두를 사자 하더라고. 올가을이 간 지 5年인데 이제 잘 가라고, 호현이 物件들은 다 태우려고 하는데 이건 안 태우려고. 이건 遺品이 아니라 나한테 준 膳物이잖아.”

故 이호현 消防校(殉職 當時 27歲) 의 아버지 이광수

2017年 9月 16日 午後 9時 43分頃, 江原道 江陵의 오래된 木造 亭子 石蘭亭에 불이 났다. 李 消防校는 불을 끈 後 復歸했지만 이튿날 새벽 4時頃 불이 다시 붙었다는 申告에 두 番째로 出動했다. 火災 鎭壓 中 石蘭亭이 무너지면서 作業 中이던 李 消防校와 이영욱 消防警을 덮쳤다. 18分 만에 救助됐지만 두 사람 모두 숨을 거뒀다.

父母님이었습니다.

아버지의 物件을 整理하면서

그가 무엇을 좋아했는지, 그의 하루는 어땠는지
생각해 본다. 처음인 것 같다.

“아버지는 自然을 사랑하셨습니다. 돌이나 나무, 動物들과 같이 生命이 있는 것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이 原木 옷걸이는 山에서 벼락 맞은 나무를 直接 짊어지고 내려오셔서 집에서 손수 만드신 옷걸이입니다. 4, 5個 程度 만드셨던 걸로 記憶합니다. 죽은 나무를 다듬으면서 다시 새 生命을 불어넣는 것 같아 이 作業에 魅力을 느끼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젊으셨습니다. 不過 2年 前 제가 膳物해드린 신발을 신고 體力章 試驗에서 20代, 30代 後輩들보다도 빠르게 뛰고 滿點을 받았다고 자랑하시던 모습이 只今도 눈에 선합니다. 이 신발을 보면 每日 運動을 하셔서 20代 後半인 저보다도 힘이 세고 健康하시던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故 이종우 輕減(殉職 當時 53歲) 의 아들 이길현

2020年 8月 6日 江原道 春川 衣岩湖. 댐을 放流할 程度의 暴雨에 水質 淨化用 人工 數秒섬이 떠내려 갔다. 惡天候 속 섬 固定 作業에 投入된 사람들이 急流에 휩쓸렸다. 李 輕減은 떠내려가던 이들을 救助하기 위해 나섰으나 타고 있던 巡察情이 顚覆되면서 失踪됐다. 이틀 後 北漢江 近處에서 殉職한 그가 發見됐다.

아내, 男便이었습니다.

나를 두고 떠난 게 원망스러운 날도 있지만 알고 있다.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던질 수 있을 만큼의
그런 마음으로 나를 사랑해준
男便, 아내였다는 것을.

“오빠가 元來 글씨를 眞짜 못 쓰거든요. 本人도 콤플렉스高. 그런데 스케치북을 꺼냈는데 그 글씨가 直接 쓴 거라는 거예요. 絶對 이렇게 쓸 수가 없는데… ‘이거 오빠가 쓴 거 아니지’ 疑心하니까 아니라고, 眞짜 自己가 썼다고. 보니까 바탕에 鉛筆로 밑그림처럼 그리고 그 위에 흰色 물감으로 덧대서 漆했더라고요.”

‘살다가 힘들어도 서로 웃으면서 바라보고 이겨내자’
재국의 프러포즈에 고개를 끄덕였다.

“와, 男子親舊가 다이어트 記念으로 꽃을 줬다고?”

재국은 ‘꽃을 든 男子’였다.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꽃을 膳物했다. 같이 있다가 化粧室 다녀오겠다더니 꽃을 내밀고, 다이어트를 한다고 하면 다이어트 記念 꽃을 주는 男子親舊 이야기에 親舊들의 歎聲이 쏟아지곤 했다. 그가 男便이 된 건 自然스러운 手順이었다.

2018年부터 2020年까지 男便에게 받은 꽃들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가장 큰 꽃을 남긴 채 떠났다. 妊娠 4個月이었다.

故 유재국 經緯(殉職 當時 39歲) 의 아내 李꽃님

有 警衛는 2020年 2月 15日 漢江 가양대교 北端에 出動했다. 投身自殺 企圖者를 搜索하기 위해서였다. 水中 搜索을 이어가던 有 警衛에게 橋脚 돌 틈에 몸이 끼어 물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狀況이 發生했다. 救助돼 病院으로 移送됐으나 治療 中 殉職했다.

“이건 生前에 男便이 몸에서 한時도 떨어뜨리지 않고 들고 다니던 것들이야. 正말로 絶對 놔두고 가는 法이 없었거든. 그런데 그 現場에는 아무것도 안 들고 갔더라고. 携帶電話도 놔두고 간 거야. 派出所長이 直接 出動을 한 것도 그렇고, 大體 얼마나 急한 狀況이었으면 아무것도 못 챙기고 뛰쳐나갔는지….”

우리 家族 네 사람을 15年 동안 태우고 다니던 自動車 키.

男便은 언제나 우리 넷 다 가야지, 말했다. 아내와 둘만 가는 旅行도 손사래 쳤다. 꼭 아들 둘까지 다 끼고 가야 한다고 했다. 괜히 서운할 때도 있었지만 웃어 넘겼다. 그래 우리 넷이 家族이잖아.

그래서 이 車를 如前히 處分하지 못하고 그대로 駐車場에 뒀다. 男便이 運轉하러 올 것만 같다.

“派出所도 그랬나 봐. 男便 생각난다고 車를 치워달라고 하더라고….”

七寶國民學校 1學年 2班 6番
수, 수, 수, 禹, 수, 수, 禹….

“이거 봐, ‘每事 성실하며 成績 優秀하다’. 어릴 때부터 그래도 성실한 거 하나는 認定받았다니까.”

1979年, 40餘 年 前 男便의 初等學生 時節이 담긴 生活通知表와 上場들을 아내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男便의 그 時節 자랑이 귀여웠다.

“나이 마흔 줄에 別 意味 없는 거기도 한데 그냥 어쩌다 같이 보면서 자랑하면 稱讚해주고 웃고 그랬어요.”

故 이강석 警正(殉職 當時 43歲) 의 아내 김성선

2015年 2月 27日 競技 華城市 住宅街에서 銃器 人質劇이 벌어졌다. 南陽派出所長이던 이 警正은 直接 現場에 出動해 집 안으로 들어갔다. 迅速하게 犯人을 說得하고 被害者를 求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犯人이 쏜 銃彈에 맞아 殉職했다.

“이 時計가 男便 寶物 1號였어. 다른 건 모르겠는데 이건 차마 못 버리겠더라고.”

結婚 25周年 膳物로 男便에게 時計를 膳物했다. 아이처럼 좋아하면서 每日 찼다. 事故가 난 그날도 마지막까지 차고 있었다. 只今은 그女의 男동생이 代身 時計를 차고 있다.

“팔찌는 몇 年 前에 내 生日 膳物로 해준 거야. 같이 TV 보고 있다가 팔찌 예쁘다니까 ‘그럼 팔찌 살까’ 해서 金銀房 가서 산 거거든. 그때 退職할 때는 純金 팔찌 해준다고 積金도 들었는데….”

“내가 사준 구두는 아니야. 男便 가기 2年 前쯤에 인터넷으로 같이 고르고 산 거야. 그때 男便이 내 것도 사주겠다고 하는 걸 내가 신발 膳物 하면 도망간다고, 신발은 膳物하는 거 아니라고, 됐다고 했었어. 이제 와서 보면 무슨 所用인가 싶지만….”

男便 영욱이 出勤하기 前 신고 나갈 구두를 每日 닦아 줬었다.

“只今도 每日 닦는 건 그냥 그때 習慣도 있고. 아무래도 女子 혼자 사는 집이니까 그렇잖아. 집에 男子가 있는 느낌 주려고 하는 것도 있어.”

蘡薁은 漢文을 아는 것을 正말 重要하게 생각했다. 쉬는 날이면 冊을 읽거나 漢文, 英語 工夫를 했다.

외아들 人에게도 漢文과 數學 等을 옆에 끼고 直接 가르쳤다.

寫眞은 20餘 年 前 男便 영욱이 當時 初等學生이던 아들과 工夫했던 漢文 冊子. 男便이 쓴 漢字를 빈칸에 아들이 따라 썼다.

故 이영욱 消防警(殉職 當時 59歲) 의 아내 이연숙

2017年 9月 16日 江原道 江陵 石蘭亭 火災 事故 當時 팀長으로 이호현 消防校 等과 함께 出動했다. 불을 끈 後 復歸했지만 이튿날 새벽 4時頃 불이 다시 붙었다는 申告에 두 番째로 出動했다. 火災 鎭壓 中 建物이 무너지면서 作業 中이던 李 消防警과 李 消防校를 덮쳤다. 18分 만에 救助됐지만 두 사람 모두 숨을 거뒀다.

승민과 만나게 된 契機는 卓球였다.

비슷비슷한 하루를 보내던 中 새로운 趣味 生活을 해보고 싶었다. 같이 일하던 同僚들의 勸誘로 卓球를 배워 볼까 地域 體育敎室에 登錄했다. 同僚들은 “재미있는 老總角 消防官이 있다”며 어느 저녁 자리에 두 사람을 불러냈다.

“잘 어울리는데!”
愚直해 보였는데 말을 꽤 재미있게 하는 男子였다. 짓궂은 周邊의 장난이 왠지 싫지 않았다.

같이 卓球를 치다 보니 어느새 戀人이, 夫婦가 되어 있었다.

“이거는 푸껫으로 新婚旅行 가서 같이 산 紙匣이에요. 여기에 公務員證이랑 住民登錄證 같은 것도 다 들어있어요. 元來는 寫眞 찍는 걸 막 좋아하지는 않는데, 新行 갔을 때 찍은 寫眞도 한 張 있고. 나중에 딸내미 크면 아빠 쓰던 거라고 보여주려고 그대로 두고 있어요.”

故 허승민 消防尉(殉職 當時 46歲) 의 아내 박현숙

2016年 5月 4日 江原道 太白의 聯立住宅 지붕이 强風에 날아가 道路에 떨어졌다. 虛 消防尉는 危險하다는 申告를 받고 出動해 道路邊에 떨어진 지붕 構造物을 撤去하고 있었다. 强風이 이어지며 屋上에 남은 또 다른 지붕 構造物이 作業 中이던 虛 消防尉의 머리로 떨어지면서 殉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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紙匣의 主人이었던 승민이 世上을 떠난 지 6年이 흘렀다. 태어난 지 百日 만에 아빠를 잃었던 아기는 일곱 살이 됐다.

사랑하는 子息, 父母, 男便, 아내는 떠났지만 남겨진 이들의 가슴속에 살아있다. 남겨진 이들은 무너지고 또 무너지지만 살아있다.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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