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思悼世子 敎育에 執着한 英祖, ‘庶子 콤플렉스’ 탓?|東亞日報

思悼世子 敎育에 執着한 英祖, ‘庶子 콤플렉스’ 탓?

  • 東亞日報
  • 入力 2022年 5月 12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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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健熙 컬렉션 숨은 1인치]〈1〉景賢堂 賡載帖
1741年 春秋執典 競演 後 잔치서 臣下들이 思悼世子 英敏함 稱讚하자
英祖 “노는데 精神 팔렸다”며 面駁… “아들 自慢 않도록 嚴한 敎育” 解釋
“庶子 出身 탓 過度한 訓育” 反論도… 異服兄 ‘景宗 詩解說’ 시달리던 英祖

1741년(영조 17년) 왕이 사도세자, 신하들과 경희궁에서 벌인 잔치(선온)를 묘사한 ‘경현당 갱재첩’ 속 그림(위 사진). 전각 가운데 일월오봉도 앞자리와 그 오른쪽 자리에 영조와 사도세자가 각각 앉았다. 관례에 따라 신하들의 뒷모습만 그리고 왕과 세자는 자리만 표시했다. 아래는 왼쪽 사진부터 국립중앙박물관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에서 갱재첩을 설명하는 동영상, 영화 ‘사도’(2015년)에서 영조와 사도세자가 대면하는 장면, 영조를 그린 조선시대 어진(초상화). 국립중앙박물관·국립고궁박물관 제공·동아일보DB
1741年(英祖 17年) 王이 思悼世子, 臣下들과 慶熙宮에서 벌인 잔치(宣醞)를 描寫한 ‘景賢堂 賡載帖’ 속 그림(危 寫眞). 殿閣 가운데 日月오봉度 앞자리와 그 오른쪽 자리에 英祖와 思悼世子가 各各 앉았다. 慣例에 따라 臣下들의 뒷모습만 그리고 王과 世子는 자리만 表示했다. 아래는 왼쪽 寫眞부터 國立中央博物館 李健熙 컬렉션 特別展에서 賡載帖을 說明하는 動映像, 映畫 ‘使徒’(2015年)에서 英祖와 思悼世子가 대면하는 場面, 영조를 그린 朝鮮時代 御眞(肖像畫). 國立中央博物館·國立故宮博物館 提供·동아일보DB
《‘숨겨진 1인치를 찾았다.’ 26年 前인 1996年 큰 注目을 받은 三星電子 TV 廣告 文句입니다. 蹴球 競技에서 畵面에 보이지 않던 選手가 슛을 성공시키는 모습을 보여주는 名場面이죠. 遺物도 눈에 當場 보이지 않는 價値가 더 빛날 때가 있습니다. 동아일보는 ‘李健熙 컬렉션’ 寄贈 1周年을 맞아 大衆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遺物 및 作品에 담긴 事緣을 통해 숨은 價値를 發見하는 시리즈를 連載합니다.》



지난달 28日 開幕韓 국립중앙박물관의 ‘故(故) 李健熙 會長 寄贈 1周年 記念展’에는 唯獨 中年 女性들이 몰리는 展示品이 있다. 子息 키우는 어머니 立場에서 280年 前 빛바랜 冊을 바라보는 이들의 視線에는 애틋함이 묻어 있다. 2部 中間 通路에 자리 잡은 ‘景賢堂 賡載帖(景賢堂 갱載帖)’이다. 1741年(英祖 17年) 마흔일곱의 왕이 4年에 걸친 春秋執典(春秋集傳) 競演을 마친 것을 記念해 일곱 살의 사도世子와 臣下 13名을 불러 慶熙宮에서 벌인 잔치(宣醞)를 그림과 글로 남긴 冊이다. 展示場 壁面에는 ‘아들을 못 미더워하는 아버지의 不安함이 後날 悲劇의 씨앗이 되고 말았습니다’라는 意味深長한 文句가 붙어 있다. 그런데 果然 이때부터 父子間의 悲劇이 始作된 걸까. 가로 38.5cm, 세로 27.5cm의 이 작은 冊에 담긴 眞實은 무엇일까.

○ 執着인가, 否定(父情)인가
“世子의 덕스럽고 聰明한 모습은 謹嚴하고, 나라를 도울 工夫에 拍車를 加하니 國家의 끝없는 福이 참으로 여기 달렸습니다.”(좌승지 김상성)

“世子가 노는 데 精神이 팔려 얼굴色이 매우 검다. 너는 여러 臣下와 대면하면서 工夫한 冊을 읽을 수 있는가?”(영조)

賡載帖에는 英祖가 只今의 大統領祕書室에 該當하는 承政院(承政院), 學問 및 政策 硏究機關인 弘文館(弘文館) 官吏들과 더불어 思悼世子에 對해 對話하는 場面이 記錄돼 있다. 子息 자랑을 하면 八不出이 될까봐 그랬을까. 영조는 思悼世子의 英敏함을 稱讚하는 臣下들에게 “노는 데 精神이 팔려 工夫를 게을리한다”며 世子 앞에서 面駁을 준다. 그러곤 잔치를 벌이기 前 學習敎材(童蒙先習)를 가져오게 한 뒤 世子가 배운 部分을 읽도록 했다. 世子는 이를 막힘없이 읽었다.

右承旨 이도겸이 “1張을 講義한 지 100餘 日이 지났는데도 잊은 곳이 없다. 어린 나이에 記憶力이 뛰어나다”고 거듭 稱讚하지만 英祖는 다른 試驗을 낸다. 漢字音 3個를 들려주고 該當 글字를 冊에서 가리키도록 했는데 世子는 이番에도 通過한다. 영조는 그제야 “동궁(世子)이 처음에 3番 程度 읽고 겨우 音과 土에 익숙해지자 곧 暗誦할 수 있었다”며 慇懃히 子息자랑을 한다. 김문식 단국대 史學科 敎授(朝鮮後期史)는 “아들이 自慢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嚴한 敎育을 시킨 것이지 이때부터 思悼世子와의 悲劇이 始作됐다고 보는 건 無理”라고 말했다.

反面 學問이 높았던 英祖가 아들을 自身의 눈높이까지 끌어올리려 한 執着이 이 대목에서 읽힌다는 見解도 있다. 庶子 出身으로 肅宗의 嫡統이 아니라는 콤플렉스가 世子에 對한 過度한 訓育으로 이어졌다는 것. 허문행 국립중앙박물관 學藝硏究士는 “영조는 唯獨 臣下들 앞에서 어린 世子가 工夫 못한다는 소리 듣는 걸 容納하지 못했다. 思悼世子가 왜 悲劇的인 狀況을 맞았는지에 對한 端初가 賡載帖에 담겼다고 보고 이를 展示에 反映했다”고 說明했다.

○ ‘統治 正當性’ 確保에 올인
事實 이날 잔치는 次期 權力인 世子에게 未來의 執權層을 形成할 젊은 官僚들을 紹介하고, 이들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傳達하는 자리였다. 영조는 世子에게 “여기 있는 臣下의 할아버지와 父親은 모두 歷代 임금들을 섬겼다. 그리고 이들의 子息과 孫子도 모두 너와 함께 늙어갈 사람이니 너는 알아야 한다”고 强調한다. 이날 登場하는 臣下들 相當數는 40歲 前後의 젊은 請要職(淸要職·言路 役割을 한 中下位職) 官吏들로 黨派 싸움에서 한발 떨어진 이들이었다.

흥미로운 건 이날 英祖가 特別히 ‘黨濕(黨習·黨派 싸움)’을 警戒하는 發言을 한 事實이다. 王權 强化를 위해 黨爭을 막은 自身의 强力한 蕩平策이 世子 執權 後에도 維持돼야 함을 强調한 것. 이는 老論 政權에서 排除된 南人과 少論 一部 勢力이 일으킨 ‘李麟佐의 亂’(1728年)으로 英祖가 卽位 4年 만에 危機에 빠진 經驗이 큰 影響을 끼쳤다.

當時 狀況은 英祖의 콤플렉스는 勿論 權力 基盤과도 엮여 있었다. 李麟佐의 亂 때 反對派가 主張한 英祖의 ‘景宗 詩解說’李 統治의 正當性을 毁損했기 때문이다. 이에 英祖는 蕩平策을 實施하며 自身의 異服兄 殺害 嫌疑를 벗기 위해 不斷히 努力한다. 警鐘 弑害 嫌疑로 老論 人士들이 大擧 肅淸된 1722年(景宗 2年) 壬寅獄社(壬寅獄事)를 無辜에 依한 抑鬱한 獄事라고 判定한 1740年(英祖 16年) 更新處分(庚申處分)李 代表的이다. 賡載帖이 發刊되기 바로 直前 해에 벌어진 일이다. 이근호 忠南大 敎授(朝鮮後期史)는 “영조는 自身이 兄의 죽음과 關聯이 없다는 걸 景賢堂 賡載帖이 發刊된 1741年까지 强調한다”며 “賡載帖은 英祖가 臣下들과 더불어 自身의 政治的 正當性을 闡明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김상운 記者 sukim@donga.com
#庶子 콤플렉스 #英祖 #思悼世子 敎育 執着 #王權强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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