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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脫北 468名 集團入國, 그 後 5年] <5·끝>人生 反轉에 成功하다|동아일보 </5·끝>

[脫北 468名 集團入國, 그 後 5年] <5·끝>人生 反轉에 成功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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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入力 2009年 10月 30日 03時 00分


家族會社 創業… 南男北女 結婚… “이젠 南住民 돕고 삽니다”

家族의 힘으로 홀로서기
아들 딸 며느리까지 就業
알뜰살뜰 貯蓄 내집도 마련

南韓 男子가 좋은 北女
男便 도움으로 安定된 生活
3名은 財産 1億以上 所有

‘성공한 탈북자’ 안정남 씨(가운데)가 29일 전기공사업체 ‘신광LED조명’ 앞에서 직원들과 함께 도면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안 씨는 경영난을 겪고 있던 이 회사를 정부에서 자금을 융자받아 지난달 1일 인수했다. 안 씨는 인수 전에는 이 회사
직원이었다. 포천=박영대 기자
‘成功한 脫北者’ 안정남 氏(가운데)가 29日 電氣工事業體 ‘身光LED照明’ 앞에서 職員들과 함께 圖面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安 氏는 經營難을 겪고 있던 이 會社를 政府에서 資金을 融資받아 지난달 1日 引受했다. 安 氏는 引受 前에는 이 會社 職員이었다. 抱川=박영대 記者
脫北者 안정남 氏(53)는 지난달 1日 電氣工事業體 ‘身光LED照明’의 社長이 됐다. 지난해 12月 入社해 現場 職員으로 일하다가 會社가 經營難을 겪으면서 前任 社長이 退陣하자 政府에서 創業 支援 資金 2000萬 원을 融資 받아 會社를 引受했다. 淸津自動化單科大學에서 電氣工學을 專攻한 安 氏는 北韓에서 電氣 關聯 일을 해 勞動黨 幹部까지 했다. 韓國에 온 뒤에도 大學에서 電氣技能長 過程을 1年 修了하고 電氣安全管理師 資格證을 따는 等 創業을 위해 熱心히 準備를 해 왔다. 創業 첫 달 1300萬 원이었던 賣出이 이달에는 2000萬 원을 넘어설 程度로 出發은 순조로운 便이다.

이 會社의 職員 7名 中 3名은 그의 아들이다. 2004年 함께 入國한 세 아들은 아버지가 會社를 引受하자 하던 일을 그만두고 와서 아버지 일을 돕고 있다. 配送 業務를 하는 큰아들(28)과 막내아들(23)에게는 月給으로 各各 150萬 원과 120萬 원을 주고, 資材 管理 業務를 하는 둘째 아들(25)의 月給은 100萬 원으로 定했다. 그는 “이番에 創業을 하면서 計算을 해보니 財産이 1億 원이 조금 넘었다”라며 “세 아들이 모두 올해 結婚해 이제 며느리까지 합치면 總 6名인데 다들 제 앞가림 하고 있고 큰 걱정은 없다”고 말했다.

○ “技術 있으니 큰소리 칠 수 있어”

2004年 7月 入國한 脫北者 468名 中 取材팀이 接觸한 200名 大部分은 經濟的으로는 貧困層으로, 社會的으로는 南韓 社會에 녹아들지 못하고 異邦人으로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中 一部는 南韓 社會에서 ‘홀로서기’를 할 수 있는 基盤을 마련하는 데 成功했다.

이순태 氏(47·以下 假名) 家族은 3名이 모두 成功的으로 南韓에 定着했다. 李 氏는 夫人과 함께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서 인테리어 가게를 運營하고 있다. 中古 싼타페 自動車를 갖고 있으며 月平均 300萬 원의 收入을 올리고 있다. 夫婦는 5年 동안 北韓에 있는 家族에게 1300萬 원 程度를 보냈다. 李 氏는 北韓에서 建設大學을 卒業하고 中國에서도 建築 關聯 일을 했지만 韓國에서는 1年 동안 日傭職으로 일했다. 그는 “日傭職으로 일할 때 7萬 원을 받으면 用役業體에 10%를 떼어주고 6萬3000원을 받고 일할 때가 가장 힘들었다”며 “쉬지 않고 일해도 손에 쥐는 돈이 몇 푼 안 돼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그때마다 ‘熱心히 하면 된다’고 覺悟를 다졌다”고 말했다. 일을 잘한다는 所聞이 나면서 일거리를 紹介해 주는 사람들이 생기자 가게를 열었다. 일거리를 준다고 하면 아무리 멀어도 마다하지 않았다. 3年 동안 全國을 세 바퀴 돌았다고 했다. “저는 脫北者라는 事實을 굳이 숨기지 않습니다. 技術이 있으면 南韓사람들한테도 큰소리 칠 수 있습니다.”

李 氏의 딸 이윤선 氏(21)는 檢定考試를 거쳐 연세대 2學年에 在學 中이다. 그는 海外硏修까지 다녀왔다. 南韓 生活의 滿足度를 물었더니 이 氏는 10點 滿點에 8點, 夫人은 9點, 딸은 10點이라고 對答했다.

전태선 氏(49)네 家族은 月收入이 600萬 원으로 脫北者 200名 中 家口 所得이 가장 높았다. 前 氏와 큰아들, 딸이 京畿 華城市에 있는 携帶電話 렌즈 製造 會社에서 正規職으로 일하면서 月給으로 200萬 程度씩 받는다. 全 氏가 들어오고 2年 뒤 두 아들과 딸도 모두 韓國으로 들어왔다. 그는 “新聞廣告를 보고 就業해 성실하게 일하다 보니 會社에서 내 딸과 子息들도 모두 받아줬다”고 말했다. 政府에서 提供한 49.5m²(15坪) 賃貸아파트에 살던 全 氏 家族은 79.2m²(24坪) 賃貸 아파트를 分讓 받아 지난달 새 집으로 移徙했다.

○ 南韓 사람과 結婚하면 安定的 生活

安定된 職業이 있는 南韓 男子와 結婚한 젊은 脫北 女性들은 經濟的으로 潤澤한 生活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億 원 以上 財産을 所有한 4名 中 안정남 氏를 除外한 3名은 모두 韓國 男子와 結婚한 女性들이었다.

유연실 氏(30)는 2006年 12月 삼성전자에 다니는 男便과 結婚했다. 柳 氏는 敎會에서 알게 된 執事가 運營하는 飮食店에서 男便을 처음 만났다. 이곳의 단골손님이었던 男便과 職場同僚들에게 主人이 “여기 北韓 아가씨들이 와 있다”고 紹介를 했고 自然스럽게 合席하면서 만남이 始作됐다. 以後 1年間 交際 끝에 結婚에 골인해 세 살 된 아들과 함께 競技 龍仁市에서 79.2m²(24坪)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北에 두고 온 어머니와 男동생에게 種種 돈도 보낸다. 그는 “北에 있는 家族이 걱정이지만 이곳에서 比較的 餘裕롭게 살고 있다”며 “幸福하다”고 말했다.

의정부시에 사는 김영임 氏(28)도 카센터를 하는 男便과 함께 66m²(20坪)짜리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經理職을 하고 있는 金 氏와 男便의 收入을 합치면 月 400萬∼500萬 원은 된다. 그는 “北韓에서 몇十 年 동안 살다온 우리들에게는 南韓이 他國이나 마찬가지”라며 “아무래도 韓國 사람을 만난 사람이 當然히 安定的인 生活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起亞自動車 生産職 職員과 2005年 結婚한 강유나 氏(28)는 結婚 2年 만에 내 집 마련에 成功했다. 2億7000萬 원에 分讓 받은 아파트가 只今은 4億 원이 넘는다. 딸(5)과 아들(2)을 잘 키우고 幸福한 家庭을 꾸리는 게 꿈이다.

○ “이제는 베풀고 싶어요”

定着 初期 政府 支援을 받았지만 只今은 홀로서기에 成功해 다른 사람을 돕는 脫北者도 있다. 脫北者 專門 結婚仲介業體에서 일하는 朴政賢 氏(51)는 어린이病院에 每달 10萬 원 程度 寄附하고 있다. 그는 “저희를 받아준 게 너무 고마웠지요. 이제 받은 것만큼 남한테 돌려줄 때가 됐지요”라고 말했다.

江예린 氏(37·女)는 낮에는 中小企業 事務職 職員으로, 밤에는 專門大 家庭福祉學科 1學年 學生으로 ‘晝耕夜讀’을 하고 있다. 수원시 세류동의 49.5m²(15坪)짜리 원룸에서 傳貰로 살면서 5000萬 원 程度의 財産도 모았다. 그는 社會福祉士가 돼 脫北 兄弟들을 爲해 일하는 게 꿈이다. “自願奉仕를 해보니 저도 누군가에게 必要한 사람이더군요. 그게 感謝했습니다. 窮極的으로 障礙人과 老人들 福祉를 위해 奉仕하며 살고 싶습니다.”

▼高學歷-專門職 出身이 適應 잘해
經歷보다는 自信感-積極性 더 重要▼
■ 月所得 200萬 원 以上 20名 分析해보니

같은 時期에 南韓 生活을 始作한 脫北者들의 現在 生活水準을 갈라놓은 것은 뭘까. 동아일보 特別取材팀은 脫北者 200名 가운데 個人 所得이 ‘200萬 원 以上’이라고 答한 脫北者 20名의 特性을 分析했다.

北韓에서의 職業이나 學歷이 南韓 社會에서 就業하는 데 直接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北韓에서 專門職이었거나 高學歷者였던 사람들은 南韓 社會 定着에 積極的이었고, 그들의 積極性은 높은 所得으로 이어졌다.

北韓에서 ‘黨 일꾼(黨員)’이었던 임선태 氏(51)는 現在 공구상 店員으로 일하며 月 200萬 원假量을 번다. 林 氏는 定着 初期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몇 年 동안 막勞動판을 轉轉했고, 일자리를 찾아 美國에 갔다가 오기도 했다. 그는 곧 공구상을 차릴 計劃이다. 그의 誠實性을 눈여겨본 사람과 함께 同業을 할 생각이다. 林 氏는 “앞으로 어떻게 사는가 하는 건 純全히 本人 손에 달린 것 같다”며 “이를 악물고 熱心히 사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北韓에서 金正淑교원대학을 나와 人民學校 體育敎師로 일했던 한금진 氏(43)도 하나圓을 나온 뒤에는 5個月 程度 無職이었다. 그는 막勞動판에서 어깨너머로 配管 技術을 익혀 只今은 한 달에 200萬 원 以上을 번다. 脫北者들의 韓國 定着을 硏究하는 연세대 社會學科 염유식 敎授는 “北韓에서 黨員이나 高學歷者였던 境遇 自信感이 있고 進路 決定도 빠르다”며 “資本主義 生活樣式에 對한 理解度가 높고 成就動機가 强한 傾向이 있다”고 말했다.

‘身光LED照明’을 創業한 안정남 氏 家族이나, 한 달 所得이 600萬 原因 전태선 氏 家族에서 알 수 있듯이 家族 中에 돈을 벌 수 있는 成人이 많을수록 經濟的으로 自立하기가 쉬웠다.

南韓 사람의 도움을 받은 脫北者들은 比較的 쉽게 韓國社會에 適應했지만 그 數가 많지는 않았다. 仁川 부평구의 物流會社에서 正規職으로 일하는 안청룡 氏(33)는 就業할 때 南韓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脫北 過程에서 韓國 宣敎師가 꾸린 地下敎會를 찾아가 1年 6個月 동안 聖經工夫를 했고, 入國 뒤 韓國 敎會의 傳道師를 紹介받았다. 두어 달間 安 氏를 데리고 일하며 지켜본 傳道師가 現在의 職場에 安 氏를 紹介했다.

하지만 相當數 脫北者는 인터뷰에서 “韓國社會는 人脈이 重要한데 우리는 그게 없다”고 어려움을 呼訴했다. 그리스도臺에서 社會福祉學을 가르치며 脫北者들의 經濟的 定着을 硏究하는 유시은 博士는 “人脈의 必要性을 느꼈을 때는 이미 南韓 사람들과의 接觸 範圍가 좁아져 있는 事例가 많다”며 “經濟的 支援뿐 아니라 南韓 사람들과 關係를 形成할 수 있는 자리를 政府 次元에서 마련하는 게 必要하다”고 말했다.
特別取材팀
팀長=황진영 記者 buddy@donga.com
유덕영 記者 firedy@donga.com
김윤종 記者 zozo@donga.com
우정열 記者 passion@donga.com
황형준 記者 constant@donga.com
張允瀞 記者 yunjung@donga.com
조종엽 記者 jjj@donga.com
신민기 記者 minki@donga.com
이미지 記者 imag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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