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에서 人類學으로 博士 學位를 받은 최석영(47·寫眞) 氏가 1999年 서울 景福宮 內 國立民俗博物館 學藝硏究士로 勤務하기 始作했을 때다.
國立民俗博物館의 歷史부터 제대로 알고 싶어 先輩들에게 물었다.
“왜 國立民俗博物館이 景福宮 안에 있을까요? 언제부터 이 자리에 博物館이 있었죠?”
答부터 말하면 國立民俗博物館은 1966年 景福宮 수정전(修政殿)에 한국민속관으로 開館했다가 1975年 景福宮 건청궁 터의 옛 朝鮮總督府美術館으로 옮겼고 1992年 只今의 자리에 開館했다. 그러나 그런 答을 제대로 알고 있는 이가 드물었다.
‘韓國에서 近代博物館의 始作은 언제였을까? 國立博物館들은 어떤 歷史를 거쳐 只今의 모습을 갖추게 됐을까?’
崔 氏의 궁금症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韓國 博物館社 硏究를 平生 課題로 삼겠다고 決心했다. 朝鮮總督府博物館 時節 以後 關聯 資料는 수북했다. 崔 氏는 2001年 ‘近代韓國의 博覽會·博物館’(서經文化史)을 냈고 2008年 ‘韓國博物館 100年 歷史 診斷과 代案’(민속원)을 펴냈다.
崔 氏는 日帝强占期 朝鮮總督府博物館의 地方 分館이 “自發的 組織이었다”는 一角의 推定이 잘못됐음을 밝혔다. 그가 새로 찾아낸 資料에 따르면 博物館 脂肪 分館은 徹底한 官邊 組織으로, 歷史를 捏造하는 核心 役割을 했다.
백제가 660年 羅唐聯合軍에 依해 滅亡할 때 宮女 3000名이 떨어져 죽었다는 傳說을 가진 忠南 扶餘郡 落花巖. 이곳에는 1929年 三千宮女를 追慕하며 지었다는 백화정(忠南文化財資料 第108號)李 있다. 그러나 崔 氏가 發掘한 資料에 따르면 事實과 다르다. 當時 扶餘 分館 責任者로 赴任한 오사카 긴타로가 “日本 天皇이 백제를 돕기 위해 長壽 300餘 名을 보냈으며 百濟 陷落 때 宮女뿐 아니라 日本 將帥의 夫人들도 함께 떨어져 죽었다”며 이들을 追慕하는 백화정을 지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日帝强占期 博物館은 內鮮一體 政策의 理念을 만들어간 곳이었다.
崔 氏는 博物館 歷史를 모르면 理解하기 어려운 博物館 政策이 많다고 말한다. 人類學 硏究의 産室인 民族(民族)博物館이 없다는 事實이 代表的이다.
“1949年 國立民族博物館이 開館했는데 6·25戰爭으로 國立中央博物館에 統合됐어요. 人類學 硏究의 傳統을 國立中央博物館이 繼承한 셈인데, 國立中央博物館이 考古美術에 置重하면서 人類學이 外面받았습니다.”
日本은 天皇制를 뒷받침하기 위해 天皇 歷史와 關聯된 工藝와 藝術品을 展示하면서 考古美術을 發展시켰다. 崔 氏는 “韓國 國立博物館들이 考古美術 硏究에 置重한 것도 日帝强占期의 傳統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崔 氏는 부쩍 바빠졌다. 2009年은 韓國 近代博物館 100周年이 되는 해인 데다 崔 氏가 韓國 博物館社에 對한 거의 唯一한 硏究者이기 때문이다. 요즘도 5月 열리는 國際學術大會 ‘韓國 博物館 100年과 그 後 100年의 課題’ 發表 準備로 바쁘게 지내고 있다.
崔 氏는 “博物館이 韓國 近現代史에 미친 影響에 비해 學界의 關心은 거의 없다. 學科가 開設된 大學이 하나도 없는 게 傍證”이라고 말했다. 2006年 硏究에 專念하기 위해 國立民俗博物館을 그만둔 崔 氏는 現在 중앙대와 공주사대에 出講하고 있다.
윤완준 記者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