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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年生, 90年生은 ‘最惡’을 함께 견디고 있다”|신동아

사바나

“80年生, 90年生은 ‘最惡’을 함께 견디고 있다”

88萬원 世代 8人의 悲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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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재석 記者

    jayko@donga.com

    入力 2019-11-02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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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0代 돼도 내 힘으로 서울 아파트 못 사”

    • “月給 얼마든 어떤 業務든 正規職이면 祝賀받더라”

    • “正規職 入社 消息 알리자 울음 터뜨린 父母님”

    • “10年 歲月 흘러 給與 고작 47萬 원 늘어”

    • “任員 자리는 우리 世代가 닿을 수 없는 곳”

    • “不合理한 일에도 ‘元來 그런 거야’라며 無氣力 學習”

    • “왜 瞥眼間 旣成世代에 ‘짱돌’을 들어야 하나?”

    • “不安定 勞動市場 버틸 테니 집 살 與件이라도 만들어달라”

    ‘사바나’는 ‘ 膾를 꾸는 , 靑年’의 略稱인 東亞日報 出版局의 컨버전스 뉴스랩(News-Lab)입니다. ‘사바나’ 記者들은 모두 밀레니얼 世代에 屬합니다. 커보니 ‘就業이 바늘구멍’李 돼버린 經濟 現實을 目睹했습니다. ‘우리 때만큼 努力 안 한 탓’이라는 윗世代의 ‘꼰대질’도 堪耐했습니다. 이제는 靑年의 삶을 주어(主語) 삼아 윗世代가 ‘不便할 법한 이야기’를 꺼내놓으려 합니다.

    한 사립대 졸업식에서 한 학생이 졸업 가운을 입은 채 꽃다발과 학사모를 들고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다. [동아DB]

    한 私立大 卒業式에서 한 學生이 卒業 가운을 입은 채 꽃다발과 學士帽를 들고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다. [東亞DB]

    始作은 한 卷의 冊이었다. 2007年 8月, 經濟學者 禹晳熏과 社會批評家 박권일이 ‘88萬원 世代: 絶望의 時代에 쓰는 希望의 經濟學’을 出刊했다. 冊은 금세 知識社會에서 話題가 됐다. 그前에도 世代를 규정짓는 槪念은 적지 않았다. 베이비부머 世代, 86世代, X世代 等. 하지만 月給을 外皮 삼아 世代 槪念을 孕胎한 冊은 처음이었다. 

    88萬원 世代의 骨子는 이렇다. 禹晳熏과 박권일은 20代(1980年代生)의 上位 5%만이 韓國電力, 三星電子, 5級 事務官 以上의 단단한 職場을 가질 수 있고, 나머지는 平均賃金 88萬 원 程度를 받는 非正規職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 썼다. 2007年 非正規職 月平均 임금인 119萬 원에 聖人들에 對한 20代의 平均賃金 比率 74%를 곱해 나온 數字가 88萬 원이었다. 

    영·幼兒食品會社에서 代理로 일하는 김진희(假名 · 女 · 30) 氏는 ‘88萬원 世代’가 出刊되던 해 大學에 入學했다. 

    “經營學科를 갔는데 入學 첫해부터 敎授님들께 正말 많이 들은 이야기가 ‘좁은 就業 市場’과 ‘漠漠한 앞길’에 關한 것들이었어요. 實際로 200名 넘는 科 動機 中 大略 5%만이 大企業, 公企業에 들어갔고 10% 程度는 中堅企業에, 50%는 中小企業에 入社했습니다.”



    韓國 資本主義의 憂鬱한 민낯

    1980년대생들의 대학 생활을 탐구한 2007년 5월 26일 ‘동아일보’ 기사의 한 대목. [동아DB]

    1980年代生들의 大學 生活을 探究한 2007年 5月 26日 ‘東亞日報’ 記事의 한 대목. [東亞DB]

    베이비부머 世代(1955~1963年生) 사이에는 보릿고개를 함께 넘었다는 同類意識이 있었다. 經濟成長의 列車를 밀고 끌며 産業化를 일궜다는 自負心이 이들의 思考方式에 배어 있었다. 베이비부머 世代의 막내들은 86世代(1980年代 學番, 1960年代 出生)의 一員이기도 했다. 86世代는 不義한 世上을 告發하고 뜨겁게 싸운 世代였다. 價値, 獻身, 犧牲, 鬪爭, 民衆 따위의 單語들이 86世代의 網탈리테(mentalit ·集合的 無意識의 總體)를 構成했다. 

    X世代(1970年代生)는 ‘新(新)世代’ ‘新(新)人類’로 불리며 1990年代 華麗하게 出現했다. 世界的으로는 美 · 소 間 冷戰이 終熄되던 時期였다.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Yoshihiro Fukuyama) 美國 스탠퍼드대 敎授가 ‘歷史의 終末’을 써 自由民主主義가 “人類 最後의 政府 形態”라고 氣勢騰騰하게 宣言했다. 

    韓半島에서는 南北 間 體制 競爭이 終了됐다. ‘資本論’과 ‘共産黨 宣言’을 읽던 運動圈들이 ‘第3의 물결’을 說破했다. 以內 文民政府가 들어섰다. 1980年代 中盤부터 이어지던 經濟 好況은 絶頂에 達했다. 携帶電話 普及과 월드와이드웹의 登場이 日常을 뒤흔들었다. 

    이런 雰圍氣를 업고 登場한 X世代는 ‘集團 vs 個人’ 構圖에서 처음으로 後者에 무게重心을 둔 世代였다. 1990年代는 大衆 消費文化가 本格 開化한 時期이기도 했다. 앞선 86世代가 運動의 領域에서 顚覆을 꾀했다면, X世代는 文化의 領域에서 叛亂을 꿈꿨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X世代를 代表하는 아이콘이었다. X世代의 登場은 韓國 資本主義의 薔薇빛 未來를 豫見하는 듯했다. 

    하지만 X世代가 탄 燦爛한 불빛의 列車는 알고 보니 막車였다. X世代의 맏이와 막내 간 處地는 달랐다. 1997年 韓國을 휩쓴 國家 不渡의 危機는 이내 勞動市場을 恐怖로 몰아넣었다. 얄궂게도 X世代의 뒤를 이은 世代에 ‘88萬원’이라는 接頭語가 붙었다. 말하자면 88萬원 世代의 登場은 成長이 막혀버린 韓國 資本主義의 憂鬱한 민낯을 까발린 셈이었다.

    ‘뉴 노멀’과 産業化의 榮華

    88萬원 世代는 베이비부머 世代의 子女다. 成長을 거듭해 一家를 이루리라는 期待感이 88萬원 世代에는 없다. ‘조금만 苦生하면 더 나은 未來가 到來할 것’이라는 韓國的 삶의 敍事가 破片처럼 부서졌다. 그것은 劣敗感과는 다른 情緖다. 自嘲(自嘲) 亦是 아니다. 윗世代에 對한 嫉視라고 할 수도 없다. 當面한 現實에 適應할 뿐이다. 出版編輯者로 일하는 문가영(假名 · 女 · 33) 氏의 말이다. 

    “앞선 世代는 月給이 飛躍的으로 뛰는 經驗을 했지만, 그건 그 時節 그만큼 經濟成長이 이뤄진 德이죠. 巨視 經濟 變化에 對한 觀點을 놓친 채 윗世代와 單純 比較만 하는 건 징징대는 걸로밖에 안 보여요. 勞動市場에 對한 不安은 커지는데, 世界的인 變化라 韓國만의 탓은 아닌 것 같습니다. (入社 後에도 不安하니) 知人들은 첫 會社 다니다가 3~4年次쯤 되면 創業을 하거나 로스쿨을 갔어요.”
     
    文氏 말마따나 勞動市場의 不安定은 글로벌 資本主義 變化와 맞물려 있다. 韓國에서 ‘88萬원 世代’가 出刊되기 前 이미 이탈리아에서는 小說 ‘1000유로 世代’가 登場했다. 1000유로 世代는 不安定한 職業을 轉轉하며 月 1000유로 以下 所得에 依支해 살아가는 이탈리아 젊은이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1000유로는 小說 出刊 當時 이탈리아 1人當 平均 所得의 折半 水準이었다.
     
    1000유로 世代와 88萬원 世代를 共通으로 읽는 열쇳말은 勞動市場이다. 88萬원 世代는 政治的 經驗, 文化的 同類意識을 基準으로 出現한 世代가 아니다. 低賃金과 不安定한 雇傭 條件의 그림자가 88萬원 世代의 삶에 짙게 드리우고 있다. 卽 88萬원 世代가 成人이 돼 마주한 韓國은 低成長이 ‘뉴 노멀(New Normal · 時代 變化에 따라 새로 浮上하는 經濟的 標準)’로 자리매김한 國家다. GDP(國內總生産)도, 成長率도, 年俸도 過去처럼 오를 일은 이제 없다. 産業化의 映畫(榮華)는 幕을 내렸다. 文化藝術機關에서 일하는 박세희(假名 · 女 · 33) 氏가 말했다.
     
    “‘우리 世代가 아무리 돈 벌어도 父母 世代만큼 잘살기 힘들다’라는 말이 생각나요. 제가 中學生 때 父母님이 서울 江西區의 아파트 貸出金을 모두 갚아 眞짜 ‘우리 집’이 됐어요. 그때 엄청 기뻐하시던 父母님 모습이 생각나고…. 나는 50代가 돼도 穩全히 내 힘으로 서울에 아파트는 絶對 못 산다고 생각하니 조금 슬퍼지네요. 나도 熱心히 살고 있는데.”

    “이게 그렇게 祝賀받을 일인가?”

    2007년 7월 8일 서울시 공무원임용시험이 실시된 가운데 서울 성북구 경동고등학교에서 시험을 마친 수험생들이 정문을 빠져 나오고 있다. [뉴스1]

    2007年 7月 8日 서울市 公務員任用試驗이 實施된 가운데 서울 城北區 경동高等學校에서 試驗을 마친 受驗生들이 正門을 빠져 나오고 있다. [뉴스1]

    低成長은 88萬원 世代의 出發線을 억지로 앞당겨 놓았다. 金正薰 CBS 記者, 審나리 前 CBS 記者, 國會 保佐陣 김항기 氏가 ‘386 世代遺憾’에서 韓國銀行 統計 시스템을 活用해 推算한 바에 따르면, 1980年代生의 20代 後半 年所得은 2151萬 원으로 같은 期間 1人當 GDP 對比 77.9%에 不過했다. 資産 增殖의 꿈은 속절없이 바스러졌다. 같은 冊에 따르면 ‘내 집 마련 期間’은 “1960年代生 10.1年, 1980年代生 16.0年”으로 確然히 갈린다. 

    88萬원 世代가 마주한 勞動市場은 앞선 世代가 社會生活 初期 마주한 그것과 사뭇 달랐다. ‘386世代 遺憾’에 따르면 1980年代生의 20代 後半 平均 失業率은 9.2%로, IMF(國際通貨基金) 外換危機 當時 全體 失業率(7.2%)보다 2%포인트나 높았다. 

    雪上加霜 1980年代 出生 世代가 社會에 本格 進出할 時點인 2000年代 中盤부터 非正規職 規模가 急增했다. 統計廳이 2010年에 出刊한 ‘韓國의 社會動向(2010)’에 따르면 우리나라 非正規職 勞動者 規模는 2004年부터 500萬 名을 上廻하기 始作해 2005年 548萬 名, 2007年 570萬 名, 2009年 575萬 名에 이르렀다. ‘일자리는 當然히 正規職’이라는 앞선 世代의 常識이 안개처럼 사라졌다. 

    그러자 노무현 政府와 與黨(열린우리당)은 ‘非正規職 問題가 深刻하다’면서 代案으로 2007年 7月 1日 一名 ‘非正規職保護法’을 施行했다. 法은 期間制(契約職) 勞動者의 雇傭期間을 2年으로 制限하고, 그 期間이 지나면 使用者는 勞動者를 正規職으로 轉換토록 했다. 하지만 當時에도 2年마다 解雇가 잇따라 結局 非正規職 規模가 줄지 않으리라는 指摘이 많았다. 憂慮는 現實이 됐다. 지난해에는 非正規職 勞動者 規模가 661萬 名까지 치솟았다. 

    故로 88萬원 世代는 勞動市場의 出發線에서부터 普遍的 雇傭 形態의 하나로 非正規職을 經驗한 첫 世代다. 契約職으로 勤務하다 正規職으로 轉換된 經驗이 있는 文化藝術機關 實務者 박세희 氏의 말이다. 

    “正規職 轉換 後 事實을 父母님께 말씀드렸더니 ‘正말 多幸이다. 안 그래도 걱정하고 있었는데’라고 激勵해주셨어요. 父母님이 勤勞條件에 對해 걱정하고 계셨다는 걸 이때 처음 알았어요. 大學院 指導敎授님은 그해 送年會 祝杯辭를 ‘朴ㅇㅇ 正規職 轉換 祝賀’로 해주셨고요. 전 事實 이게 그렇게 祝賀받을 일인가 했었거든요? 年俸이 크게 오른 것도 아니고, 잘나가는 大企業에 入社한 것도 아니고, 그냥 18個月을 契約職으로 다니다 正規職으로 轉換된 것뿐이었는데 말이죠. 이때 비로소 ‘正規職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會社 業種이 뭐든, 月給이 얼마든, 어떤 業務를 맡든 一旦 ‘正規職이면 祝賀한다’는 거잖아요.”

    “無期契約職조차 階級”

    政府 部處 傘下機關 硏究員으로 있는 김희연(假名 · 女 · 34) 氏의 말은 ‘웃프다’. 

    “大學 卒業 後 인턴 生活을 거쳐 大學院에 入學했고, 卒業할 때쯤 非正規職으로 就業했습니다. 그런데 別 問題意識이 없었어요. 管理者를 除外한 모든 職員이 非正規職이었기 때문이죠. 非正規職으로 2年 일하고 正規職으로 轉換됐지만 (雇傭期間을 除外하고) 賃金, 昇進 等 모든 處遇에서 轉換 以前과 以後가 全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職場 生活이 만족스럽지 않았어요.” 

    영 · 幼兒食品會社에서 일하는 김진희 氏는 2007年 月 88萬원을 받으며 學院에서 非正規職으로 일했다. 金氏는 “2017年 또래보다 훨씬 늦게 進路를 變更해 就業 市場에 뛰어들었다. 한 企業에서 인턴을 하며 받은 給與는 月平均 135萬 원이었다”면서 “10年 歲月이 흘렀지만 給與는 고작 47萬 원 늘어 있었다”고 回顧했다. 

    名門 私立大에서 博士學位까지 받은 장선예(假名 · 女 · 35) 氏는 只今 미디어 關聯 硏究所에서 無期契約職으로 일한다. 그는 ‘88萬원 世代가 正規職이 階級임을 自覺한 첫 世代라는 主張에 對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자 이렇게 答했다. 

    “30代가 돼서야 非正規職으로 就職했습니다. 只今도 언제고 잘릴 수 있는 位置죠. 그럼에도 正規職이 階級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건, 周邊 大部分이 消耗的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제 周邊엔 就職은 勿論 經濟活動하기도 힘든 狀況에 處한 30代 親舊가 너무 많습니다. 이런 狀況이라면 無期契約職조차 階級 아닌가요?” 

    문진혁(假名 · 南 · 33) 氏는 5年 前인 2014年 正規職으로 大企業 食品系列社에 入社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佛文學을 專攻해 남들보다 높은 語學點數를 갖고 있었지만, 1年 동안 100餘 곳의 企業에 入社 志願書를 提出하고 떨어지기를 反復”했단다. 

    그는 “代表理事 이름으로 入社 祝賀 花環이 집으로 到着했을 때 울음을 터뜨리며 덩실덩실 춤을 추던 父母님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같이 入社한 300餘 名 動機 모두 비슷한 感情을 共有했던 것 같다”면서도 “하지만 會社 生活의 꽃이라 할 任員 자리가 저희 世代가 닿을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가 敷衍했다. 

    “完全雇用 時期를 거쳐 只今 幹部級으로 組織에 뿌리내린 以前 世代의 正規職과 過熱된 就業 競爭에 내몰린 後 入社한 우리 世代의 正規職은 意味가 다른 것 같아요. (大企業에 다니지만) 停年 채워 隱退하는 삶은 저와 無關하단 생각이 듭니다.” 

    經濟 專門 媒體에서 記者로 일하는 김재일(假名 · 南 · 33) 氏는 “88萬 元 職場人의 삶이 ‘제자리걸음’이라는 世間의 表現에 同意한다”면서 그 理由를 이렇게 說明했다. 

    “職場人은 會社에 勞動力을 提供하고 그 代價로 賃金을 받습니다. 只今은 過去보다 인풋(勞動力 및 時間 投入) 對備 아웃풋(賃金 或은 임금의 活用價値)의 效率性이 顯著히 낮아요. ‘88萬원 世代’라는 冊이 出刊된 지 10年도 지났지만 別 進展은 없는 것 같습니다. 내 삶을 主體的으로 運身할 수 있는 幅이 좁아진 것 같고요.”

    “課長도, 次長도 달 수 없다면…”

    出版編輯者 문가영 氏는 勞動市場 變化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力說한다. 그는 “프리랜서가 勞動市場의 主를 이루고 한 사람이 여러 職業을 갖는 時代가 곧 올 텐데 正規職이 크게 意味가 있을까”라며 말을 이었다. 

    “(於此彼) 停年이 더는 保障되지 않는 社會죠. 過去 放送社에서 非正規職으로 일한 적이 있습니다. 只今은 正規職인데, 돌아보면 똑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非正規職은 季節마다 파리 목숨이고, 正規職은 1年마다 파리 목숨(年俸契約 時)이라는 點이 다를 뿐이죠.” 

    ‘88萬원 世代’를 쓴 禹晳熏 博士는 80年代生이 이와 같은 勞動市場 앞에서 鬪爭하길 願했다. 冊의 副題는 ‘20代女, 토플冊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였다. 그런 그는 2012年 冊의 絶版을 宣言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 冊(‘88萬원 世代’)을 쓰면서 생각한 變化는 벌어지지 않았다”는 理由에서다. 于 博士가 屬한 86世代는 ‘全斗煥’이라는 巨惡(巨惡) 앞에서 끈끈한 紐帶를 誇示했다. 전두환을 끌어내리면 世上이 더 나아지리라는 希望이 그들에게는 있었다. 그러나 88萬원 世代 앞에 可視的인 巨惡은 없다. 低成長 時代를 相對로 싸울 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建築設計士 유정혜(假名 · 女 · 33) 氏는 ‘88萬원 世代’가 出刊됐을 當時 大學校 1學年이었다. 

    “再修까지 하며 願하던 上位圈 大學에 艱辛히 入學하고 나니 社會가 우리를 絶望的인 世代로 규정짓기 始作했습니다. 警覺心을 갖고 冊을 읽었는데 ‘아프니까 靑春이다’의 에세이만큼 全혀 와닿지 않았어요. 왜 우리가 瞥眼間 旣成世代에 ‘짱돌’을 들어야 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습니다.” 

    영 · 幼兒食品會社 代理 김진희 氏는 “88萬원 世代는 鬪爭하기보다 기꺼이 社會에 順應하는 便을 擇했다”며 말을 이었다. 

    “不合理한 일에 露出될지라도 ‘괜찮아, 元來 그런 거야’라면서 스스로를 合理化했고, 無氣力함을 學習했습니다. 그렇다고 80年代 生이 特別 待遇나 特別한 慰勞를 받을 必要는 없어요. 但, 적어도 社會가 80年代生들에게 不安定한 勞動市場에서 버틸 것을 要求하는 것이라면 國家라도 나서서 ‘인프라’를 提供해야 합니다. 誇張도 次長도 달 수 없다면 國家가 집을 살 수 있는 與件을 만들어주고 月給이 뛰지 않는다면 物價를 안정시켜야 하는 것 아닌가요?”

    퀴즈쇼

    職場에서 80年代生은 어느덧 後輩를 맞았다. 文在寅 大統領이 靑瓦臺 職員들에게 膳物했다는 冊(‘90年生이 온다’)의 主人公, 90年代生이다. 出版編輯者 문가영 氏는 “80年代生은 90年代生과 比較해 좀 더 철든 時期에 IMF 外換危機, 世界經濟 危機 等을 經驗해서 조금 더 保守的인 反面, 90年代生은 머리가 트여 있고 보다 더 創意的이라고 생각한다”며 “70年代生과 80年代生 間 間隙보다, 80年代生과 90年代生 사이의 間隙이 더 큰 것 같다”고 말했다. 

    建築設計士 유정혜 氏는 “大學을 갓 卒業한 20代 後輩 몇 名을 實務 라인에서 接했을 때 느낀 共通的인 引上이 있었다”면서 經驗을 淡淡히 回顧했다. 

    “90年代生들이 우리 世代에 비해 ‘合理性’을 追求하는 文化가 더 剛했어요. 自身의 權利를 더 잘 아는 것 같습니다. 經歷 5~6年次 位인 저보다 勞動法에 對해 더 많이 알고 있었고 ‘社長님 只今 (雇傭 形態에 對해) 이렇게 하시는 거 不法이에요’라고 表現할 줄도 알았습니다. 第 社會 初年生 時節이 떠올랐는데요. 現象公募展 準備를 하면 새벽 3~4時에 택시 타고 退勤하는 일이 茶飯事였어요. 그런데 室長級 先輩들이 바로 집에 안 가고 꼭 술 한盞 하자고 했어요. 先輩로서 술 한 盞 사며 後輩 스트레스 풀어주고 싶은 ‘善意’였겠죠. 저는 새벽에 꼭 그들과 함께 布帳馬車에 들러 한 時間씩 燒酒를 마시고 집에 돌아갔습니다. 90年代生의 合理性은, 그런 ‘善意’를 물리칠 수 있다는 거죠.” 

    그렇다면 90年代生에게 80年代生은 꼰대일까. 政府 傘下機關 硏究院 김희연 氏는 “꼰대 짓을 하려 해도 할 수 없는 條件”이라고 말했다. 

    “이른바 ‘꼰대的 認識’은 나이, 職級, 年次를 武器로 다른 사람을 規制하려는 거잖아요. 그런데 職場에서는 80年代生과 90年代生 職級이 같은 境遇가 너무 많습니다. 80年代生의 成長이나 昇進이 停滯돼 있기 때문이죠.” 

    ‘88萬원 世代’가 出刊되던 해, 김영하의 小說 ‘퀴즈쇼’가 登場했다. 冊에는 이런 有名한 句節이 나온다. 

    “우리는 檀君 以來 가장 많이 工夫하고, 第一 똑똑하고 外國語에도 能通하고 尖端電子製品度 레고블록 만지듯 다루는 世代야. (… ) 우리 父母 世代는 그 中에서 하나만 잘해도, 아니 비슷하게 하기만 해도 平生을 먹고살 수 있었어. 그런데 왜 只今 우리는 다 놀고 있는 거야? 왜 모두 失業者인 거야? 都大體 우리가 뭘 잘못한 거지?” 

    여기서 ‘우리 世代’는 80年代生, 卽 88萬원 世代를 일컫는다. 12年이 지난 現在, 小說 속 主人公을 90年代生으로 置換해도 語塞할 文章은 單 하나도 없다. 그사이에 大統領이 3番이나 바뀌었지만 世上은 別般 달라지지 않았다. 미디어 硏究所 硏究員 장선예 氏의 말이다. 

    “(김영하 小說과 같은) 20代를 겪은 우리가 30代로 넘어왔지만, 如前히 非正規職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現在 20代가 어떤 30代가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겠죠. 社會는 80年代生과 90年代生을 對決 構圖化하며 서로가 다른 存在임을 규정짓고자 하더군요. 하지만 우리는 함께 最惡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20代와 30代는 最惡을 견뎌내느라 서로를 比較할 수 없습니다. 이미 서로 連帶感을 더 많이 느끼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요.”



    사바나

    고재석 기자

    고재석 記者

    1986年 濟州 出生. 學部에서 歷史學, 政治學을 工夫했고 大學院에서 映像커뮤니케이션을 專攻해 碩士學位를 받았습니다. 2015年 下半期에 象牙塔 바깥으로 나와 記者生活을 始作했습니다. 流通, 電子, 미디어業界와 財界를 取材하며 經濟記者의 文法을 익혔습니다. 2018年 6月 동아일보에 入社해 新東亞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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