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金正淑 女史가 尹伊桑 墓地에 冬柏나무 심은 까닭은|신동아

事件 톺아보기

金正淑 女史가 尹伊桑 墓地에 冬柏나무 심은 까닭은

50周年 맞은 ‘동백림 事件’에 부쳐

  • 권재현 記者|confetti@donga.com

    入力 2017-07-21 11:06:47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1989年 신동아 4月號 記事로 實體가 처음 드러나
    • “擴大 誇張된 것은 맞지만 造作된 것은 아니다”
    • 尹伊桑 誕生 100周年과 맞물려 文在寅 政府 解法 나올까
    畫家 이응노, 作曲家 윤이상, 詩人 千祥炳, 飜譯家 천병희, 哲學家 임석진….
    20世紀 韓國 文化藝術 및 學術 分野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들이다. 活動 領域과 空間이 달랐던 이들에겐 한 가지 共通點이 있다. ‘동백림 事件’으로 얽힌 人物이라는 點이다.

    요즘 世代에겐 冬柏林이란 表現 自體가 낯설다. 伯林(伯林)은 獨逸 베를린의 漢文 表記다. 1990年 獨逸이 統一되기 前 베를린은 東獨 領土 한복판에 있었다. 하지만 2次大戰 終戰 後 聯合軍의 合意에 따라 그 西쪽 領域은 西獨 땅이었고 東쪽은 東獨의 首都였다. 이를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으로 區別했는데 冬柏林은 바로 그 동베를린을 指稱한다.

    이 冬柏林이란 地名이 人口에 膾炙되는 契機가 된 事件이 1967年 7月 8日 當時 中央情報部(國家情報院의 前身) 發表로 世上을 떠들썩하게 했던 동백림 事件이다. 正確한 呼稱은 ‘冬柏林을 據點으로 한 北傀對南赤化工作團 事件’. 유럽(主로 西獨과 프랑스)을 舞臺로 遊學했거나 留學 中인 인텔리 知識人과 藝術家 194名이 關聯된 ‘建國 以後 最大 間諜 事件’이었다. 황성모 서울大 敎授(社會學) 包含해 現職 敎授만 15名이나 됐다. 關聯者 中 15名은 1958年 9月부터 1967年 5月 사이에 동베를린에 있는 東獨 駐在 北韓大使館을 往來하면서 北韓과 接線해 間諜活動을 해왔으며, 7名은 當時 未修交國인 蘇聯과 中國을 經由해 直接 平壤까지 訪問, 密封敎育을 받고 歸國해 間諜活動을 해왔다고 公表됐다.

    尹伊桑·履修者 夫婦와 천병희는 北韓에 넘어갔던 7名에 包含됐고, 이응노·박인경 夫婦는 東獨 駐在 北韓大使館과 往來하며 間諜活動을 했다는 15名에 包含됐다. 千祥炳은 유럽 近處에 간 적도 없었지만 서울대 相對 同期인 강빈구 敎授에게서 “東獨에 다녀왔다”는 말을 듣고도 告發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를 脅迫해 돈을 받아 챙겼다는 嫌疑가 適用됐다. 獨逸 留學生 出身의 임석진은 平壤을 두 次例나 다녀왔고 勞動黨 入黨願書까지 썼지만 最初 提報者라는 理由로 起訴 對象에서조차 除外됐다. 이들은 모두 北韓과 連累된 行跡 自體는 認定했지만 思想的으로 北韓에 同調하거나 南韓에 對한 利敵行爲에 加擔했다는 것을 否認했다. 그럼에도 임석진을 除外하곤 有罪判決을 받아 最長 2年 獄살이를 해야 했고 이는 그들 靈魂에 크나큰 烙印이 됐다.





    ‘建國 以後 最大 間諜事件’

    동백림 事件 發表의 衝擊은 크게 두 갈래에서 發生했다. 첫째는 規模다. 中庭은 7月 末까지 總 315名을 調査해 66名을 檢察에 送致했다. 檢察은 이 中 34名에게 ‘間諜罪’와 ‘潛入罪’를 適用해 裁判에 넘겼다. 또 이 事件에 連累된 황성모 敎授가 서울對 政治學科 學生서클 ‘民族主義比較硏究會(민비연)’를 組織해 政府 顚覆을 試圖했다며 當時 學生運動 指導者였던 김중태와 현승일 等 關聯者 7名을 反國家團體 構成 嫌疑로 拘束 起訴했다. 민비연 事件은 나중에 分離 處理되지만 처음엔 한 묶음으로 엮여 있었다. 歷代 最大 規模라는 타이틀은 1992年 10月 6日 400餘 名의 組織員이 連累됐다고 發表된 ‘南韓조선노동당 中部地域黨 事件’이 發表될 때까지 維持됐다.

    둘째는 關聯者들의 面面이었다. 以後 文化藝術界와 學界에서 韓國을 代表할 人士들이 줄줄이 엮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응노는 20世紀 韓國畫를 代表하는 畫家로 우뚝 서게 되고, 윤이상은 東洋과 西洋의 音樂的 架橋를 놓은 天才音樂家로 世界的 名聲을 獲得한다. 6個月 刑을 宣告받아 監獄에 오래 살지 않았지만 중정의 審問 過程에서 받은 拷問後遺症으로 半平生 苦生한 千祥炳은 가장 純粹한 韓國詩人으로 評價받는다. 獨文學者였던 천병희는 10年間 資格停止로 敎授職을 잃었지만 國內 最高의 그리스어 原電飜譯家로 우뚝 섰다. 임석진 亦是 告變자라는 손가락질 속에서도 國內 헤겔 哲學 權威者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그 規模와 面面에 놀란 韓國 知識社會는 숨을 죽였다. 當時 유럽 留學生은 知識人 社會 羨望의 對象이었는데 그들 中 相當數가 容共 左傾化됐다는 消息에 驚愕했다. 그 餘波로 全 世界 곳곳에서 學生運動이 뜨겁게 噴出하던 1968年 唯獨 韓國에서만 學生示威가 發生하지 않는 異例的 現象이 벌어졌다.

    하지만 1969年 3月 31日 最終審 判決에서 間諜罪가 認定된 사람은 單 1名도 나오지 않았다. 정하룡, 정규명 2名에게 死刑, 조영수에게 無期懲役, 윤이상과 천병희 等 4名에게 懲役 10年, 이응노에게 5年刑이 言渡됐지만 間諜罪가 아니라 反共法 違反 嫌疑였다. 그나마도 獨逸과 프랑스에 있던 僑民을 國內로 連行하는 過程이 外交問題로 飛火하는 바람에 政府는 1969~1970年 實刑을 言渡받은 15名을 모두 釋放했다. 尹伊桑 천병희 이응노 等 12名은 刑 執行停止로, 重刑을 宣告받은 정하룡 정규명 조영수 3名은 刑執行免除로 1969~1970年 사이 다 풀려났다.


    6·8 不正選擧 撫摩用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이 따로 없었다. 이 때문에 朴正熙 政府가 10日間 7次例에 걸쳐 大大的으로 搜査 內容을 發表하며 동백림 事件을 韓國 社會 前面에 浮刻한 것은 工作政治의 一環이라는 疑惑이 提起됐다. 事件 關係者를 追跡해 이를 最初로 深層 報道한 ‘신동아’ 1989年 4月號 記事 ‘동백림事件과 6·8 不正選擧’는 1967年 6月 8日 치러진 國會議員選擧 不正是非를 덮기 위해 동백림事件이 利用됐을 可能性을 提起했다.

    當時 與黨인 공화당은 1971年 大選에서 朴 大統領의 3線 길을 열어줄 ‘3選 改憲’을 위해 6·8總選에서 大大的 不正選擧를 恣行해 改憲에 必要한 3分의 2 以上 議席(結果的으로 74%의 議席 確保)을 確保했다. 當時 131個 選擧區에서 266件의 選擧訴訟이 提起됐는데 이는 1963年 總選의 選擧訴訟 38件에 비해 7倍에 達하는 規模였다.

    이 記事를 쓴 전진우 記者는 當時 명지대 敎授였던 임석진과 匿名의 인터뷰를 통해 그가 이 事件을 提報하게 된 經緯를 仔細히 紹介했다. 獨逸 留學 時節 北韓에 包攝됐던 임석진은 서울大 政治學科 同期同窓으로 獨逸留學 中이던 이기양 조선일보 記者를 東獨 駐在 北韓大使館에 紹介해준 張本人이었다. 그런데 1967年 5月 이기양 記者가 체코에서 失踪된 事件이 發生한다. 當局이 搜査에 나서면 自身의 罪도 드러날 것이 두려웠던 임석진은 百方으로 救命 줄 찾기에 나섰고 (朴 大統領의 妻조카 洪某 氏를 움직여) 5月 19日 靑瓦臺에서 朴正熙 大統領 獨對에 成功했다.

    임석진은 自身의 잘못을 告白하면서 當時 當局의 海外送金 制限 措置로 유럽의 韓國 留學生들이 經濟的 어려움에 시달리는 狀況에서 用돈兆로 數百 달러씩 찔러주는 北의 包攝活動에 廣範圍하게 露出된 實態를 仔細히 說明했다고 밝혔다. 또 그런 北韓의 包攝活動에 露出된 人事의 名單을 提出하면서 自身과 마찬가지로 北에 包攝된 사람들 거의 大部分도 共産主義者가 아니란 點은 確實하다고 덧붙였다고 했다. 朴 大統領은 이를 2時間 넘게 傾聽한 뒤 “잘 알았네, 眞相을 把握하고 나서 關聯者들의 자유로운 社會活動을 保障해주도록 하지”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르면 朴 大統領은 처음부터 이 事案이 間諜 事件이 아니라는 點을 把握한 셈이다. 하지만 두 달 뒤 이 事案이 歷代 最大 間諜 事件으로 遁甲한 것을 보고 임석진度 크게 놀랐다고 했다.

    무엇이 이런 變質을 낳았을까. 동백림 事件과 민비연 事件의 連結고리로 拘束됐다가 無嫌疑로 풀려난 황성모 敎授는 “처음엔 當局에서 嚴重 警告 次元에서 뒤處理하려 했으나 6·8 不正選擧 糾彈 데모가 擴大되자 方針을 急旋回해 事件을 擴大, 誇大 包裝하기로 한 것”이라고 主張했다. 具體的으로 동베를린에서 北에 包攝된 황성모의 指導를 받는 민비연이 學生데모를 背後操縱하고 있으므로 結局 學生데모는 北韓 使嗾에 依한 것이라는 三段論法을 만들어내려 했으나 失敗했다는 說明이었다.

    2006年 1月 國家情報院 ‘過去事件 眞實 糾明을 통한 發展委員會’(過去史委)가 이 事件에 對해 發表한 調査結果도 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過去史委는 처음부터 중정이 企劃 造作한 것은 아니라고 摘示했다. 임석진의 提報로 搜査에 着手했고 事件 關聯者들이 동베를린(50名) 및 北韓(12名) 訪問, 金品收受(26名), 特殊敎育 履修(17名), 北側 要請事項 履行(12名) 等 實定法을 違反한 事實이 明白했기 때문이다.



    實體는 있지만 擴大·誇張된 事件

    하지만 具體的 內容을 보면 大部分 單純한 對北接觸 및 同調行爲에 不過했음에도 國家保安法 및 間諜罪를 無理하게 適用해 事件의 外延과 犯罪事實을 擴大·誇張한 點이 問題라고 指摘했다. 6·8 不正總選 糾彈 示威를 잠재우기 위해 政治的으로 利用된 側面이 있으며 이는 민비연을 동백림 事件과 無理하게 엮으려 한 點에서 뚜렷이 드러난다고 摘示했다.

    過去史委는 또 獨逸 프랑스 美國 오스트리아 等 外國으로부터 30名의 容疑者를 連行해온 것은 該當國의 主權과 國際法을 無視한 不法行爲라는 點에서 ‘이 事件이 처음부터 잘못된 事件임을 보여준다’고 批判했다. 特히 윤이상에 對해서는 國內로 不法連行, 一部 强壓搜査, 消極的 對北 行跡에 對한 間諜罪 適用으로 ‘윤이상=間諜’이란 汚名을 쓰게 한 點에서 ‘不當한 側面이 있다’고 봤다. 또한 決定的 證據를 찾기는 어려웠지만 천상병 等 最小 14名에 對한 拷問 可能性은 높다고 判斷했다.

    事件의 實體的 眞相이 糾明되고 50周年을 맞았지만 關係者들의 韓銀 풀리지 않은 듯하다. 過去史委는 政府 次元의 謝過를 勸告했지만 이는 이뤄지지 않았고 主要 關係者 中 相當數는 이미 숨을 거뒀거나 老患으로 呻吟하고 있었다.

    千祥炳은 1993年 拷問後遺症으로 63歲의 나이에 숨졌다. 1983年 프랑스로 歸化한 이응노는 1989年 파리에 묻혔고, 1971年 獨逸로 歸化한 윤이상은 다시는 韓國 땅을 밟지 못한 채 1995年 베를린에 묻혔다. 最初 提報者 임석진(85) 명지대 名譽敎授는 高齡으로 인한 老患으로 意思疏通이 不可能한 狀況이다. 천병희(78) 단국대 名譽敎授는 “只今도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事件”이라며 “살아남은 사람들끼리도 連絡하고 지내지 않는다”고 밝혔다. 민비연 事件으로 拘束됐다 無嫌疑로 풀려난 박범진(77) 북한인권시민연합 理事長은 “동백림 事件 關係者들이 北韓에 包攝된 것 自體가 맞기에 造作은 아니지만 間諜罪 適用은 잘못”이라며 “민비연 事件은 그와 完全 別個의 것으로 事件 自體가 成立할 수 없었다”고 過去史委 發表에 同意했다. 過去 朴 理事長은 1964年 1次 인민혁명당(인혁당) 事件이 造作된 事件이라는 過去史委의 發表를 否認하며 自身이 서울大 政治學科 4學年 때 入黨한 인혁당은 實體가 분명이 있었던 組織이었다고 證言한 바 있다.

    올해는 동백림 事件 50周年인 同時에 尹伊桑 誕生 100周年이다. G20頂上會議 參席次 獨逸 베를린을 찾은 文在寅 大統領의 夫人 金正淑 女史는 7月 5日 윤이상의 墓所를 參拜하며 故人의 故鄕인 慶南 統營에서 가져온 冬柏나무를 심었다. 漢字는 다르지만 冬柏林의 冬柏을 聯想시키는 이벤트였다. 文在寅 政府는 이를 契機로 동백림 事件과 그 事件 以後 親北 行跡으로 國內에서 反感이 큰 윤이상의 惡緣을 풀어나갈까. 지켜볼 問題다.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