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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먼로 20世紀를 뒤흔든 섹스 심벌|新東亞

마릴린 먼로 20世紀를 뒤흔든 섹스 심벌

“스크린 밖에서는 한 番도 幸福한 적 없었다”

  • 허문명│東亞日報 國際部 次長 angelhuh@donga.com│

    入力 2009-09-08 16: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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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金髮머리에 肉感的인 입술과 半쯤 감긴 눈, 美國 女俳優 마릴린 먼로는 斷然 當代 最高의 섹스 심벌이었다. 그러나 地下鐵 通風口에서 스커트를 휘날리던 이 섹시한 女俳優는 憂鬱症과 不眠症에 시달린 끝에 서른여섯의 한창 나이로 世上을 떠나고 말았다. 그女의 華麗한 人氣와 悲劇的인 終末은 이미지와 미디어가 支配하는 現代에 ‘스타로 사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 일인지를 새삼 일깨워준다.
    마릴린 먼로 20세기를 뒤흔든 섹스 심벌
    美國의 歷史學者 대니엘 부어스틴은 冊 ‘이미지와 幻想’에서 “옛날에는 名聲이 높은 사람이 偉大한 사람이었지만 現代에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라고 말한다. 옛날의 有名人士들에게는 ‘業績’이라는 實體가 있었지만 미디어가 發達한 現代에는 有名人士가 虛構的 이미지에 依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現代人은 名聲과 偉大함을 區分할 能力조차 잃어버려 ‘有名한 사람이 곧 큰사람’이라고 錯覺한다. 有名人 崇拜와 英雄 崇拜를 混同하는 것이다. 過去 英雄들은 ‘信念’에 따른 自己滿足이 于先이었지만 ‘스타’라고 불리는 現代의 有名人士들은 他人들이 支配하는 市場(市場) 滿足이 優先이다. 自己滿足과 他人 滿足 卽, 이미지와 實體 사이의 乖離 속에서 가장 큰 心的 苦痛을 겪는 이는 當事者다.

    요즘 스타의 自殺 같은 悲劇的 終末 뒤便엔 生前에 그가 겪었던 心的 苦痛이 드러나는 때가 많아 팬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最近 他界한 마이클 잭슨의 境遇를 보더라도 ‘팝의 歷史를 새로 쓴 皇帝’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孤獨한 私生活이 그의 靈魂을 갉아먹었음을 알 수 있다. 藥物로 損傷된 그의 몸을 찍은 寫眞들을 보노라면 剛한 憐憫이 솟구친다.

    문득 俳優 마릴린 먼로가 생각난다. 그女야말로 華麗한 삶 뒤便에서 누구보다 외로워하며 이미지와 實體 사이의 乖離를 體驗한 當代 最高의 아이콘이 아니었던가.

    映畫評論家 유지나氏는 冊 ‘世上을 誘惑한 女子 마릴린 먼로’ 序文에서 “우리는 먼로에 對해 많은 것을 안다고 自信하지만 事實은 偏見에 가득 차 있다”고 잘라 말한다. 柳氏의 말대로 먼로는 當代 有名한 延期코치들로부터 演技術을 배우고 타고난 感性과 知的 熱情으로 自己 革新을 끊임없이 試圖했다. 그러면서 “俳優(俳優)는 機械가 아니라 創造하는 藝術家”라고 堂堂하게 말했다.



    그리하여 柳氏는 먼로를 “自我陶醉와 自己嫌惡라는 極端的인 認知不調和 속에서 結局 죽음으로 自身을 내몰 程度로 純粹하게 自身과 直面한 사람, 演技를 통해 自己革新을 꾀한 自我實現의 意志를 갖춘 哲學的인 詩人 같은 知性派 俳優, 孤獨을 親舊 삼아 徹底히 自己準備를 했던 프로, 大衆이 만들어준 스타의 公益的 機能을 看破한 同時에 裝飾品이 되길 拒否한 知性”으로까지 끌어올린다.

    實際로 먼로는 自敍傳 ‘마이 스토리’에서 實體와 幻想 사이에서 正體性 混亂을 끊임없이 겪었다고 털어놓고 있다. 섹스 심벌, 白癡美라는 ‘이미지’와는 完全히 다르게 ‘仁祖 英雄’을 만들어내는 大衆의 心理를 꿰뚫고 있는 그女의 吐露는 哲學者를 凌駕한다. “사람들은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나를 통해 自身들의 淫亂한 생각을 본다. 나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내가 아닌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나를 멋대로 지어낸다. 그러고는 自己들의 幻想이 깨지면 내 탓으로 돌린다. 내가 自己들을 속였다는 것이다.”

    그女는 스크린에서 萬人의 戀人으로 사랑받았지만 實際 삶에서는 眞正한 사랑을 나눌 한 男子를 찾지 못해 極甚한 외로움에 시달렸다. 세 番의 離婚에 따른 精神的 傷處와 (遺傳的) 憂鬱症으로 藥물에 依支하며 살았다. “스크린 밖에서는 한 番도 幸福한 적이 없었다”는 그女의 告白은 衝擊的이다. 할리우드의 主流的 삶을 산 것처럼 보이지만 “女俳優의 靈魂에 5센트의 價値조차 認定해주지 않는 할리우드에서도 異邦人이었다”고도 말했다.

    父母에게 버림받은 아이

    마릴린 먼로는 私生兒나 마찬가지였다. 할리우드의 한 스튜디오에서 필름 編輯者로 일했던 生母는 먼로를 뱃속에 가진 狀態에서 離婚했다. 먼로가 아버지에 對해 물으면 “交通事故로 죽었다”고만 했다. 1926年 6月1日生인 먼로의 本名은 노마 陳(Norma Jean). 歲月이 흘러 스타가 된 後 自身의 生父가 生母와 함께 일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千辛萬苦 끝에 連絡을 하지만 “만나고 싶지 않다”는 싸늘한 對答을 듣는다.

    그나마 生母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자랐다. 經濟的 窮乏을 理由로 딸이 태어나자마자 12日 만에 다른 집에 入養을 보낸 生母는 가끔 딸을 보러 가긴 했지만 情이라곤 없었다. 엄마가 너무 무서워 엄마가 찾아온다는 消息에 옷欌 속에 숨었을 程度였다고 한다. 그女가 平生 사랑에 목숨 걸며 ‘愛情 缺乏’에 시달렸음은 어찌 보면 當然한 일인지도 모른다.

    生母는 노마 진이 일곱 살 되던 해 若干의 經濟的 餘裕가 생기자 그女를 데려온다. 하지만 團欒한 生活을 꿈꾸던 노마 秦의 꿈은 以內 부서진다. 生母가 精神分裂症으로 病院에 入院해버린 것이다. 어린 노마 晉은 다시 孤兒院과 入養生活을 反復한다. 먼로는 孤兒院에서 지내던 아홉 살 때 性暴行을 當했다고 털어놓아 世上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世上 어디에도 마음 붙일 곳 없었던 어린 少女의 逃避處는 다름 아닌 ‘空想’이었다. 너무 외로워 죽고 싶은 衝動에 시달릴 때마다 그女는 온갖 달콤한 想像 속으로 逃亡했다. 아름다운 女人이 되어 世上 男子들에게 사랑을 받는 性的 판타지도 있었다. 裸體로 敎會에 가 ‘神과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禮拜를 드리는 想像을 하기도 했다.

    思春期에 들어서면서 몸이 아름답게 變하자 空想은 現實이 되었다. 아름다운 自身을 바라보는 他人의 視線을 의식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露出이 甚한 옷을 입으면 氣分이 좋아졌다. 남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면 태어나 처음으로 存在感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危險한 賭博이었다. 섹시한 外貌는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사로잡아 現實世界로 接續하게 해주는 훌륭한 道具였지만 欲望과 利己心 덩어리인 人間들과의 거리 調節을 어렵게 만드는 毒(毒)이기도 했다.

    生涯 마지막 인터뷰가 된‘라이프’지에 그女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入養되어 살 때 家族들은 나를 劇場으로 쫓아 보냈다. 늘 혼자였던 꼬마는 映畫에 푹 빠졌다. …世上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머뭇거리기만 하던 나는 열한 살이 되면서 世上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門을 發見했다. 8㎞가 넘는 等·下校 길을 往復하는 동안 車에 탄 男子들이 警笛을 울리거나 지나가는 일꾼들이 손을 흔들었다. 世上이 갑자기 나를 보고 웃기 始作했다. …때로 家族들은 내가 너무 크게 웃고 明朗하게 군다며 걱정했다. 世上 사람들은 나를 親近하게 對하면서도 지나치게 가까운 關係를 要求해 나를 두렵게 하기도 했다. 正말이지 나는 平凡한 主婦가 되기에는 너무 많은 幻想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마릴린 먼로 20세기를 뒤흔든 섹스 심벌

    어린 時節부터 먼로는 寫眞 찍히기를 좋아했다. 無名時節 50달러가 必要해 찍은 누드寫眞으로 後날 口舌에 오르기도 했다.

    ‘몸이 헤픈’그녀에게 養父母가 勸한 것은 結婚이었다. 노마 晉은 겨우 열여섯 나이에 스물한 살의 男子 도허티와 結婚한다. 本來 海兵 入隊를 願했던 첫 男便은 어린 新婦의 外貌에 反해 ‘入隊하지 않겠다’는 約束을 하고 結婚하지만 2年 뒤 約束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安定된 家庭을 이루고 싶다는 그女의 꿈은 男便의 背反으로 깨졌다. 當場 끼니를 때울 일이 漠漠해 軍需工場에 들어가 페인트 漆, 落下傘 修理 같은 막일을 始作한다.

    運命이란 게 있다면 이런 걸까. 마침 한 寫眞作家가 젊은 女性勞動者들의 寫眞을 찍기 위해 工場을 訪問했다. 3日間 工場 이곳저곳을 찍던 寫眞作家는 唯獨 노마 眞이라는 女子가 카메라 앞에서 語塞하지 않은 포즈와 表情을 짓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그의 紹介로 노마 晉은 모델 에이전시에 들어간다. 男便에게 離婚을 通報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女 나이 열아홉이었다.

    運命처럼 열린 俳優의 길

    카메라 感覺이 뛰어났던 노마 晉은 1年 後 이름을 ‘마릴린 먼로’로 바꾸고 20世紀 폭스사로 拔擢되면서 모델에서 俳優로 거듭난다. 마릴린 먼로라는 이름은 폭스가 붙여준 ‘마릴린’에 生母의 이름인 먼로를 더한 것이었다. 그러나 데뷔 時節은 悽慘했다. 演技 經驗이 全혀 없었기에 3年이란 歲月을 무명으로 보내야 했다. “到底히 俳優로서 資質이 없다”는 이야기도 數없이 들었다. 結局 1年 만에 解雇된다.

    그女 人生에서 危機의 瞬間에는 늘 男子가 있었다. 解雇 直後 다시는 할리우드에 발붙이지 못할 것 같던 그女 앞에 俳優를 發掘해 映畫社에 紹介해주는 일을 하던 솅크라는 男子가 나타났다. 솅크는 콜럼비아와의 契約을 周旋한다. 當時 먼로 周邊에는 그女가 成功의 발板이 되어주는 男子들에게 “性上納을 한다”는 所聞이 따라다녔다. 自身에게 도움을 준 男子들에게 고마움의 表示로 섹스를 한다는 것이었다.

    콜럼비아 生活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코러스의 아가씨들’이란 映畫에서 比重 있는 端役을 맡지만 別로 注目받지 못했다. 1年 契約이 끝나면서 먼로는 다시 失職者가 된다. 가장 어려운 時節이었다. 自動車 修理費 50달러가 必要해 寫眞作家 톰 켈리와 함께 누드 달曆 寫眞을 찍은 것도 이 무렵이다.

    이런 渦中에도 끊임없이 映畫界 關係者들을 만나 配役을 찾던 먼로는 마침내 할리우드의 實力者 조니 하이드와 因緣을 맺는다. 조니는 그女의 몸에만 關心이 있던 다른 男子들과 달리 먼로의 悲慘한 出生과 內面의 苦痛을 理解하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自然스럽게 戀人이 되었다. 먼로는 하이드의 紹介로 有名한 존 휴스턴 監督의 ‘아스팔트 정글’에 出演하게 된다. 大使 몇 줄에 出演 場面도 두 군데밖에 없었지만 比重 있는 役이었다. 먼로는 처음으로 演技다운 演技를 했을 뿐 아니라 俳優로서의 無限한 可能性까지 보여주었다.

    마릴린 먼로 20세기를 뒤흔든 섹스 심벌

    먼로는 妖婦의 官能美와 少女의 天眞함을 同時에 갖추고 있었다. 戰爭의 疲勞와 再建事業에 지친 男子들은 먼로의 ‘헤프고 착한 女子’이미지에 熱狂했다.

    幸運은 이어졌다. 곧바로 有名 監督 조지프 맨키위츠의 ‘이브의 모든 것’에 캐스팅된 것이다. 큰 配役은 아니었지만 存在感을 보여주기에 손색없는 作品이었다. 바야흐로 이제 그女가 할리우드 스타덤에 오르는 瞬間이 오는가 했는데 後見人 하이드가 心臟病으로 죽고 만다. 葬禮式 날 먼로는 絶叫하듯 痛哭했다. 먼로는 當時 自殺을 決心할 程度로 흔들렸다.

    하지만 먼로는 하이드의 葬禮式을 마치고 映畫 ‘當身도 젊다’를 찍으면서 監督이자 有名劇作家人 엘리아 카잔과 因緣을 맺게 되고 카잔의 戀人이 된다. 그리고 1951年 1月1日 ‘라이프’地 表紙모델이 됨으로써 드디어 人氣頂上의 軌道에 올라섰다.

    官能美와 少女의 天眞함을 모두 가진 女子

    그 後 2年 동안 그女의 人氣는 꾸준히 올라갔지만 ‘멍청한 金髮美人’이라는 酷評은 늘 따라다녔다. 言論은 그女를 向해 ‘모든 男子를 받아들일 것 같은 멍청한 微笑를 지닌 할리우드의 標準的인 金髮美人’이라고 酷評했다. 實際로 그女는 사람들이 주고받는 對話의 話題들, 이를테면 그림 音樂 冊 歷史 地理 스포츠 政治 等에 對해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 自身에 對해 自愧感에 빠졌다.

    그럼에도 먼로의 대단한 點은 끊임없이 努力했다는 事實이다. 大學 公開講座를 듣기도 하고 本格的인 演技工夫를 위해 뛰어난 演技指導者로 꼽히는 미하엘 체호프를 紹介받는다. 偉大한 劇作家 안톤 체호프의 後孫이기도 한 미하엘 체호프는 “俳優란 캐릭터의 單純한 模倣者가 아닌 高度의 訓鍊을 거친 演出者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먼로가 追求하는 知的, 藝術的 關心을 높이 評價했다. 그의 敎習法은 먼로에게 新鮮한 刺戟이었다. 먼로는 弟子를 自處하며 그를 따랐다.

    人氣가 올라갈수록 스캔들이 따라다녔다. ‘클래시 바이 나이트’ ‘우리는 獨身者’에 出演하며 有名해지자 또다시 醜聞들이 터져 나왔다. 달曆龍 누드 寫眞을 찍은 事實이 暴露되었고 거의 孤兒나 다름없이 자란 이야기, 精神病院에서 죽은 어머니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女軍 服裝을 하고 찍은 寫眞에서 木船이 지나치게 파인 옷을 입어 軍人을 冒瀆했다는 非難까지 나왔다.

    스캔들에 對한 對處法은 徹底하게 그女다웠다. 性的 魅力을 徹底히 利用하면서도 自己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騷動에 唐慌해 어쩔 줄 모르는 純眞한 아이 같은 表情은 危機마다 빛을 發했다. “生活苦 때문에 옷 벗고 寫眞 찍은 게 그렇게 잘못이었나요?”라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슬픈 表情을 지으면 사람들은 모든 것을 容恕해주었다. 醜聞이 터져 나올 때마다 애처로운 表情으로 自身의 아픈 過去를 털어놓는 먼로에게 輿論은 漸漸 寬大해졌다. 演技力을 好評하는 評論家들도 徐徐히 나타나기 始作했다.

    마릴린 먼로라는 스타 誕生에는 當時 美國의 社會文化的 背景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男性的 世界와 秩序를 거스르는 女性들을 ‘妖婦(妖婦)’라는 코드로 分析한 英國의 논픽션 作家 제인 발링허스트는 ‘妖婦 그 이미지의 歷史’(이마고)에서 “1950年代의 먼로 現象은 第2次 世界大戰이라는 戰爭의 砲煙이 가라앉고 나서 日常生活이 安定으로 돌아가자 男子 마음을 흔들되 너무 많은 報償을 要求하거나 男子들을 破滅로 몰아가지 않는 사랑스러운 美女를 渴求하는 社會文化的 現象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分析한다.

    발링허스트에 따르면 먼로에게는 決定的인 祕藏의 카드가 있었으니 그것은 익히 알려진 官能美에다 어린 少女의 天眞無垢함과 軟弱함을 結合시킨 이미지다. 戰爭의 疲勞와 戰後 再建事業으로 지친 男子들은 誘惑해도 自身을 망가뜨리지 않을 ‘착하고 헤퍼 보이는’ 마릴린에 熱狂했다는 것이다. 實際로 映畫 속 먼로는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녔고 自身을 必要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男子들에게 活力을 불어넣어주었다.

    또 하나 重要했던 것은 먼로가 ‘男子보다 優越해 보이지 않는다’는 點이었다. 그女는 男子를 기쁘게 해주는 것 말고는 다른 꿍꿍이가 없는 女子처럼 보였다. 男子들이 世上을 어떻게 끌어가든 關心도 없고 干涉할 생각도 없어 보이는 그女가 必要로 하는 全部는 오로지 男子들의 愛情을 받는 일인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生活에 찌든 男子들에게 保護本能을 불러일으키고 幻覺의 再現을 保障하는 心理的 비아그라와도 같은 것이었다는 게 발링허스트의 分析이다.

    마릴린 먼로 20세기를 뒤흔든 섹스 심벌

    最近 연합뉴스에 公開된 韓國 慰問公演 當時의 먼로. 멀리 大邱 八公山이 보인다.

    이런 點에서 ‘뭘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白癡美’는 그女의 重要한 魅力이었다. 映畫 ‘7年 만의 外出’에서 보여준 ‘學校 敎育의 不足’이 그것이었다. 그女는 映畫에서 라흐마니노프 音樂을 알아듣지 못하지만 歌詞가 없는 걸로 봐서 클래식 音樂이 틀림없다는 것을 아는 水準이다. ‘紳士는 金髮을 좋아해’에 나온 그女의 大使는 自身의 哲學을 한마디로 要約하는 것처럼 보인다.

    “怜悧한 것이 重要할 때는 나도 營利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大部分 男子들은 그걸 좋아하지 않더군요.”

    디마지오와의 짧고도 强烈한 사랑

    먼로 人生에서 가장 劇的인 部分 中 하나가 結婚이다. 美國 메이저리그의 傳說的인 打者 조 디마지오와 두 番째 結婚을 했고 當代 最高 인텔리이자 劇作家이던 아서 밀러와 세 番째 結婚을 한다. 두 番 다 不幸한 離婚으로 끝났지만 드라마틱한 두 番의 結婚은 當代 매스컴을 뒤흔들기에 充分했다.

    1941年 ‘56競技 連續安打’로 美國 메이저리그 120年 歷史의 ‘3代 記錄’ 中 하나를 낸 조 디마지오(1914~1999)는 양키스에 10次例나 월드시리즈 優勝을 안긴 選手이다. 第2次 世界大戰에도 參戰하는 等 남다른 愛國心으로 美國人의 사랑을 받은 英雄이기도 하다. 그는 競技場 밖에서는 端整한 正裝 차림에 뒤로 빗어 넘긴 머리를 한, 조용한 性品을 지닌 紳士였다.

    먼로가 디마지오와 結婚한 것은 ‘돌아오지 않는 江’ 撮影이 끝난 1954年 秒다. 이들 커플의 寫眞과 記事는 全世界 雜誌 表紙와 新聞의 헤드라인, 가십欄을 裝飾했다. 조 디마지오는 서른아홉이었고 먼로는 열두 살 年下였다. 디마지오는 이미 隱退한 後였고 먼로는 人氣가 絶頂에 達한 時點이었다. 섹스 심벌로 우뚝 서게 한 ‘나이애가라’(1953)가 大成功을 거두고 1953年 봄 ‘가장 人氣 있는 俳優에게 주는 賞’ ‘1952年에 가장 急浮上한 俳優에게 주는 賞’을 연이어 受賞한 뒤였다.

    조 디마지오와의 結婚으로 먼로는 韓國과도 妙한 因緣을 맺게 된다. 그女는 日本으로 新婚旅行을 떠났다가 6·25戰爭에 參戰한 美軍들을 위한 慰問公演次 첫날밤도 치르지 않고 바로 韓國으로 달려갔다. 零下의 氣溫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먼로의 모습은 全世界 雜誌와 新聞을 塗褙했다. (지난 7月30日 연합뉴스에는 먼로가 當時 韓國을 訪問했을 때 찍은 寫眞 한 張이 公開됐다. 처음 公開되는 것으로 알려진 이 寫眞 속 먼로는 大邱 K-2 飛行場에서 八公山을 背景으로 褐色 바지와 검은色 航空점퍼를 입고 ‘F-84G’ 戰鬪機 왼쪽 날개 위에 서서 왼팔을 하늘 높이 쫙 편 채 활짝 웃고 있다. 所藏者는 美國 韓人 僑胞로부터 購入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 디마지오와의 關係는 初盤부터 삐걱거렸다. 男子들의 눈療飢감이 되는 아내를 받아들일 수 있는 男便은 몇 없을 것이다. 먼로의 人氣가 높아갈수록 조 디마지오는 不安했다. 그女가 自身의 代表作 ‘ 7年 만의 外出’을 찍을 때였다. 地下鐵 通風口 위에 치맛자락을 날리며 서 있는 그 有名한 場面은 1954年 9月10日 새벽 2時 半 뉴욕에서 撮影되었다. 리허설을 하는 동안 無慮 열다섯 番이나 치마가 올라가는 걸 直接 보기 위해 1000~4000名의 人波가 모였다고 한다. 이틀 먼저 뉴욕에 到着한 디마지오는 바람이 나오는 機械 위에 서 있던 먼로의 치맛자락이 사정없이 휘날릴 때마다 사람들이 “더 높이, 더 높이! ”라고 외치며 歡呼聲을 지르는 모습을 보며 憤怒를 참고 있다가 자리를 떴다. 두 사람은 그날 새벽 호텔이 떠나갈 程度로 亂鬪劇을 벌였고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10月에 離婚을 發表했다.

    디마지오와 먼로의 法的 結婚日數는 287日에 不過했다. 비록 結婚期間은 짧았지만, 디마지오의 사랑은 길었다. 먼로는 離婚 後 作家 아서 밀러와 再婚, 離婚을 反復하고 여러 사람과 艶聞을 뿌렸지만 디마지오는 더 以上 女子를 만나지 않고 獨身으로 살았다. 먼로의 葬禮式도 直接 主管했다. 먼로가 죽은 後에는 20年 동안 一週日에 한 番씩 무덤에 薔薇꽃을 보냈다. 디마지오는 1999年 3月8日 美 플로리다 州 自宅에서 85歲를 一期로 死亡했다. 遺言은 “이제 마릴린 곁으로 갈 수 있겠군”이었다고 한다.

    디마지오와의 離婚은 먼로의 몸과 마음을 사정없이 흔들어댔다. 먼로가 精神的으로 依支한 精神과 醫師 랄프 그린슨 博士에 따르면, 이 무렵부터 먼로는 不眠症에서 벗어나기 위해 鎭痛劑와 鎭靜劑에 依存하기 始作했다고 한다. 子宮內膜症까지 앓고 있었다.

    할리우드 生活을 到底히 견딜 수 없었던 먼로는 뉴욕으로 向한다. 心身이 지쳐 있었지만 演技에 對한 熱望을 놓지 않고 俳優의 演技力을 날카롭게 坪하기로 有名했던 스트래스버그를 찾아갔다. 스트래스버그는 먼로가 할리우드의 停滯된 作業風土에 길들어 感覺이 많이 무뎌졌을 것이라 豫想했지만, 그렇지 않았다고 回顧한다. 먼로는 演技를 알아갈수록 自身의 不足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每事 初心者의 마음으로 臨했다. 그리고 그女는 2年餘 空白을 비웃듯 1955年 12月, 監督을 選擇할 수 있는 權限과 製作에 參與할 수 있는 權限을 附與받는 條件으로 20世紀 폭스사와 7年 契約을 맺고 할리우드로 돌아간다.

    官能的인 겉모습, 초라한 自我

    먼로의 세 番째 男便 아서 밀러는 우리에게도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잘 알려진 當代 最高의 劇作家다. 여러 公式 모임에서 먼로와 交分을 쌓아오던 그는 먼로의 지친 靈魂을 眞心으로 걱정해준 사람이었다. 그女에게 보낸 長文의 便紙에는 팬의 한 사람으로서 眞心으로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大衆이 願하는 이미지로 그들을 사로잡으세요. 그러나 이 게임에서 當身이 傷處 받지 않기를 懇切히 바라며 甚至於 祈禱하는 마음입니다.”

    먼로는 밀러의 仔詳함에 剛하게 끌렸다. 그는 먼로를 性的 對象으로 보지 않았고 知的 水準을 無視하지도 않았다. 하나의 人格體로 對했고 섹스 심벌의 이미지가 그女의 삶을 어떻게 破壞할 수 있을지도 잘 아는 듯했다. 먼로는 內向的이고 寡默한 밀러를 깊이 사랑했다. 그는 演劇界에서 尊敬받는 劇作家였지만 同時에 少年 같은 사람이었다. 잘난 체하지 않고 率直담백했다. 밀러 亦是 正直하고 天眞爛漫한 먼로를 사랑했다.

    밀러는 먼로를 만나기 前부터 첫 夫人과 破鏡 直前이었으며 먼로와 가까워지기 前 이미 離婚 狀態였다. 두 사람이 本格的으로 사랑을 불태운 時期는 먼로가 디마지오와 離婚하고 1年餘 뒤인 1955年 12月이었다. 두 사람은 이듬해 7月 結婚한다.

    먼로는 그 어느 때보다 生動感이 넘쳤다. 새 人生을 꾸려나갈 것처럼 活氣에 가득했다. 그러나 그것 亦是 暫時였다. 먼로가 밀러에게 執着할수록 둘의 關係는 順坦치 못했다. 밀러는 먼로의 連이은 不眠症과 睡眠劑 過用, 無氣力症에 漸漸 지쳐갔다.

    두 사람 사이가 決定的으로 惡化된 것은 그女가 두 番째로 妊娠한 지 석 달 만에 流産한 1958年 11月 初부터였다. 먼로는 그토록 願하던 아이를 잃자 極度로 絶望했고 마음의 平靜을 잃었다. 무너진 自身에 對한 自虐이 反復되는 惡循環이 이어졌다. 저녁마다 鎭靜劑를 지나치게 服用하는 바람에 아침이면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아야 겨우 撮影場에 到着할 수 있었다. 밤에는 理性을 잃고 밀러에게 소리를 지르며 날뛰는 날이 잦아졌다.

    及其也 1959年 8月 發作을 일으킨 먼로는 撮影場에 나오지 못했고 한 달 동안 撮影도 中斷된다. 1960年 後半부터 61年 1月까지 먼로는 매우 混亂한 狀態에 있었다. 感情 起伏도 甚했고 “自殺은 人間의 特權”이라는 말을 習慣처럼 중얼댔다. “아무래도 憂鬱症으로 죽은 어머니에게 허약한 마음을 물려받은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親舊들도 거의 만나지 않으며 世上과 담을 쌓았다.

    몸의 變化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膽囊除去術로 오른쪽 배에 흉터가 생기자 衝擊을 받았고 가슴도 貧弱해지고 엉덩이와 얼굴 살이 처지며 손에 褐色 斑點이 생기고 있다며 괴로워했다. 이 渦中에 醫師는 그女에게 “더 以上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宣告했다. 不眠症은 더 깊어져서 生命을 威脅하는 水準에 이르렀다. 밀러는 먼로의 그런 모습을 無力하게 지켜보아야 했다. 藥物過多服用으로 胃洗滌을 하고 누워 있는 일이 잦았던 먼로는 無意識中에 누군가를 向해 “殘忍한 것들이야. 개子息들. 오, 맙소사! ” 같은 非難과 歎息이 섞인 혼잣말을 해댔다. 當時 먼로가 지은 詩에는 서로 對立되는 두 世界 사이에서 不安하지만 頑剛하게 매달려 있는 自我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삶.

    나는 두 갈래로 나뉜 곳에 서 있다.

    强추위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는다.

    모진 바람을 견뎌내는 거미집만큼

    强하다.

    不安하게 매달려 있지만

    어쨌든 견뎌내는 거미줄.

    언젠가 그림에서 본 色깔을 띤

    구슬 같은 빛-아아 삶이여

    그들은 너를 속여왔다.

    當時 그女가 그린 그림도 死後 公開되었는데 하나는 狡猾하면서 官能的인 姿態를 뽐내고 있는 女性이고, 다른 하나는 초라한 옷에 발목께로 흘러내린 洋襪을 신은 조그만 黑人少女를 그린 그림이다. 前者는 겉으로 드러나는 自我이고 後者는 그女의 어두운 自我다.

    먼로는 1962年 8月5日 36歲라는 젊은 나이에 自身의 집 居室에서 벌거벗은 屍體로 發見됐다. 當時 剖檢을 했던 醫師는 藥物過多服用이 直接的인 死因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날 商品으로만 여긴다”

    冊 ‘世上을 誘惑한 女子 마릴린 먼로’에는 리처드 메리먼 記者가 ‘라이프’誌에 실은 먼로의 마지막 인터뷰가 실려 있다. 記事에는 句句節節 그女가 겪었던 삶의 疲勞가 切切하게 드러나 있다. 于先 먼로는 스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吐露했다.

    “有名해지는 瞬間, 成熟하지 못한 人間本性들과 마주하게 된다. 人氣는 부러움이라는 感情을 誘發한다. 그들은 내가 有名하니까 나한테 다가와 무슨 말이든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늘 사람들의 無意識과 마주친다. 몇몇 俳優 或은 監督들은 나에 關한 이야기를 新聞記者에게 한다. 나와 키스하는 것이 히틀러와 키스하는 것 같다는 어떤 俳優의 말을 적은 記事를 읽은 적이 있다. …이 바닥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너무 猜忌하는 것 같다. …나는 眞實하게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사람들의 幻想 속에 머무는 건 기쁜 일이지만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나는 나 自身을 商品으로 여기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여긴다. …때때로 사람들은 저녁모임에서 내가 雰圍氣를 밝게 만들어줄 것이라 期待하며 나를 招待한다. 나는 純粹한 目的으로 招待받지 못한다. 但只 裝飾品이다.”

    그女가 隱遁生活을 할 즈음 이뤄진 이 인터뷰에서 먼로는 人氣의 虛妄함에 對해 깊은 洞察力을 보여준다.

    “남들에게 魅惑的으로 보이거나 섹시하게 보이는 게 스트레스는 아니다. 그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이 스트레스다. …人氣라는 건 어디까지나 一時的이고 不完全한 幸福에 不過하다고 생각한다. 每日 먹어야 하는 飮食하고는 다르다. 人氣로 虛飢를 채울 수는 없다. 조금 따뜻하게는 해주지만 그것도 한瞬間이다. …只今껏 받은 人氣는 언젠가 시들해질 것이다. 人氣는 변덕스럽다. 只今껏 經驗한 바로는 그렇다. 그래서 그것에 戀戀하며 살지 않는 것이 賢明하다.”

    或者는 먼로를 男性中心主義 社會가 낳은 犧牲羊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筆者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먼로는 自身의 成功과 野望을 위해 自身의 몸과 性的 코드가 먹혀들 수 있음을 本能的으로 알고 있었고, 그것을 徹底히 利用해 마침내 모든 것을 가졌다. 하지만 成就가 주는 것에는 ‘기쁨’도 있지만 ‘슬픔’도 있다. 世上과의 接續이 쉬울수록 世上으로부터 버림받기도 쉽다는 것, 미디어가 支配하는 現代社會에서 ‘스타’를 꿈꾸는 모든 사람이 져야 할 宿命임을 그女는 이미 오래前에 看破하고 있었다.

    ‘參考圖書’

    ‘世上을 誘惑한 女子 마릴린 먼로’

    ‘이미지와 幻想’

    ‘妖婦 그 이미지의 歷史’

    ‘마이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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