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윌리엄-케이트 結婚 英 沈滯 觀光産業 · 老衰 王室 살렸다|신동아

윌리엄-케이트 結婚 英 沈滯 觀光産業 · 老衰 王室 살렸다

英國 王室 結婚의 政治經濟學

  • 英國 런던=성기영│워릭代 國際政治學 博士 sung.kiyoung@gmail.com

    入力 2011-05-23 14:24:00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全世界 20億 視聽者를 사로잡은 한 時間짜리 結婚 드라마는 英國 觀光産業의 먹구름을 걷었고, 스러져가던 王室 財政에도 밝은 빛을 비추었다. 平民 케이트와 王子 윌리엄의 結婚은 君主制에 懷疑的이던 英國民의 생각을 바꿔놓았다.
    • 그러나 結婚과 離婚의 歷史로 點綴된 王室에 果然 持續可能한 未來가 펼쳐질까.
    윌리엄-케이트 결혼 英 침체 관광산업 · 노쇠 왕실 살렸다
    잔치는 끝났다. 英國 王室의 傳統에 따라 케이트 미들턴, 아니 케임브리지 公爵 婦人(Duchess of Cambridge)의 웨딩 부케는 結婚式이 열렸던 웨스트민스터 寺院으로 돌아와 無名勇士의 墓 앞에 다시 놓여졌다. 無名勇士의 墓에 부케를 가져다놓는 것은 1923年 現在 엘리자베스 2世 女王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母后가 男便인 조지 6世와 結婚하던 當時부터 내려온 傳統이다. 全世界 數十億 人口를 熱狂시킨 21世紀의 超大型 이벤트는 이렇게 幕을 내렸다.

    21世紀版 신데렐라의 主人公이 된 캐서린 엘리자베스 미들턴은 世界 人口의 3分의 1이나 되는 20億 視聽者의 視線을 한 몸에 받은 童話 속 主人公에서 空軍 大尉의 平凡한 아내로 되돌아갔다. 結婚式 며칠 後 英國 新聞이 揭載한 케임브리지 公爵 夫人의 寫眞은 슈퍼마켓에서 쇼핑 카트를 미는 平凡한 主婦 그 以上도 以下도 아니었다.

    都大體 누구의 結婚式이 이처럼 많은 사람을 熱狂과 歡呼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수 있을까. 4月29日 不過 한 時間 남짓 進行된, 지루해 보이는 英國 國敎會의 婚姻 禮式은 全世界人의 關心을 이 저물어가는 섬나라로 집중시켰다. 이 事實만으로도 이番 로열 웨딩은 英國人들에게 커다란 膳物을 안겨준 것이 分明하다.

    발코니 키스 기다린 50萬 人波

    그만큼 英國人이 로열 웨딩에 갖는 關心도 유별났다. 于先 몇 가지 數値를 보자. 結婚式이 生中繼된 時刻에 BBC나 ITV를 視聽한 英國人은 2400萬名에 達하는 것으로 推算됐다. 結婚式 當日 아침 全國的인 電力 消耗 推移는 흥미로운 揷畵를 보여준다. 結婚式과 馬車 行進을 모두 마치고 로열 커플이 버킹엄궁 안으로 사라진 直後 電力 消耗量이 갑자기 치솟았다.



    英國 言論은 이를 텔레비전 앞에서 숨죽이고 이들 커플을 지켜보던 視聽者들이 그제야 한숨 돌리고 茶를 마시기 위해 커피포트를 同時에 켰기 때문으로 解釋한다(영국인들이 얼마나 紅茶를 즐겨 마시는지는 따로 說明할 必要가 없으리라). 100萬個의 커피포트가 一齊히 켜졌다는 그럴싸한 數値를 提示한 新聞도 있었다.

    反面 結婚式 後 公式 午餐이 進行되던 途中 윌리엄-케이트 커플이 버킹엄궁 발코니에 登場해 廣場을 메운 觀客에게 人事하고 키스를 나누던 瞬間 電力 消耗量은 다시 急減했다. 모든 사람이 하던 일을 멈추고 다시 TV 앞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로열 웨딩의 熱誠팬들은 勿論 텔레비전 視聽에 滿足하지 않았다. 15分 程度의 馬車 行進 (웨스트민스터 寺院-버킹엄궁)을 보기 위해 數十萬 名이 런던 中心街 곳곳을 메웠다. 그뿐 아니라 單 몇 秒도 되지 않는 ‘발코니 키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50萬名이나 되는 人波가 버킹엄궁 廣場 앞에서 어깨를 부딪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市民들과 觀光客들은 하이드 파크와 性 제임스 파크 等 中心街 大型 公園에 雲集해 런던시에서 設置한 大型 스크린으로 生中繼를 지켜보기도 했다. 結婚式 當日 이들 公園 周邊에서 2파운드에 販賣된 結婚式 프로그램 15萬部는 霎時間에 동이 났다.

    結婚式날 길거리 파티 5500件

    現代 資本主義에서 ‘關心’은 곧 ‘消費’로 이어지는 法. 로열 웨딩에 對한 극성스러운 熱氣는 고스란히 經濟的 效果로 나타났다. 컨설팅 業體 프라이스 워터하우스 쿠퍼스(PwC)는 로열 웨딩에 따른 觀光客 增加로 인해 런던의 호텔과 레스토랑 等이 누릴 수 있는 追加 收入을 1億 파운드(約 1800億원) 以上으로 推計하기도 했다.

    또 英國 小賣業協會는 結婚式 當日 全國的으로 5億파운드 程度의 收益을 記錄했다는 統計를 내놓았다. 平常時 하루 收益의 數百 倍에 該當하는 金額이다. 小賣店 賣出에 큰 孝子 노릇을 한 것은 英國人들의 거리 祝祭 文化다.

    ‘번팅(bunting)’이라고 하는 萬國旗 스타일의 旗발을 내걸어놓고 길거리에서 파티를 여는 것은 英國人의 오랜 傳統이다. 다우닝가 10番地 總理 公館 앞에서도 例外 없이 길거리 파티가 열릴 程度였다. 甚至於 洞네 初等學校에서도 로열 웨딩을 祝賀하기 위한 길거리 파티가 줄을 이었다.

    結婚式 當日 英國 全域에서는 大略 5500件의 길거리 파티가 열린 것으로 推算된다. 이런 小規模 파티로 길거리가 들썩거리면서 當然히 가장 짭짤한 收入을 올린 곳은 中小型 슈퍼마켓들이다. 各種 케이크나 스낵類에 ‘로열’字를 얹은 企劃商品들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말하자면 ‘미들턴 소시지롤’이나 ‘빅토리아 스펀지케이크’같은 먹을거리들이 人氣商品 리스트의 맨 앞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英國 王室은 그동안 몇 年 만에 한 番씩 치러지는 王族의 結婚式을 통해 고급스럽고 다양한 王室 記念品을 선보여왔다. 이러한 記念品을 製造, 販賣하는 業體들은 王室 家族들의 結婚 所聞이 나기 始作할 때부터 이미 數百 가지의 記念品을 生産해낸다.

    이들 記念品 製造業者들의 先投資는 윌리엄-케이트 미들턴의 結婚을 契機로 大舶을 터뜨렸다. 業界에서는 이들 로열 커플의 寫眞이 들어간 머그盞, 旗발, 手巾 等 다양한 記念品 販賣만으로 2600萬파운드의 收益을 올린 것으로 推算한다.

    그뿐만 아니라 約婚式과 結婚式을 거치면서 케이트 미들턴이 입었던 옷이나 着用했던 액세서리 브랜드들도 後光效果를 누리고 있다. 美國에서 한때 오바마 大統領 夫人 미셸 오바마의 人氣가 急上昇하면서 미셸이 愛用하는 브랜드가 반짝 好況을 누린 것과도 비슷한 脈絡이다.

    그러나 이런 반짝 效果도 이番 로열 웨딩이 英國 觀光産業에 앞으로도 몇 年 동안 안겨다줄 노다지에는 比較할 바가 되지 못할 것 같다. 世紀의 로열 커플이 童話 속에나 나올 법한 馬車 行進을 통해 20億 視聽者에게 보여준 런던 市內 名物들은 하나하나가 런던 觀光의 아이콘이다.

    財政赤字 속 憂慮 목소리도

    英國 觀光廳은 이番 로열 웨딩이 沈滯 狀況을 벗어나지 못하는 英國 經濟에 가뭄 끝 단비가 되리라는 期待感을 숨기지 않고 있다. 觀光廳은 이番 로열 웨딩의 背景이 된 런던의 名所들을 찾는 觀光客의 行列이 最小限 몇 年 동안 持續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數字로만 따지면 總 400萬名의 觀光客 增加와 20億파운드 程度의 觀光 收入 增加를 가져오는 效果가 있을 것이라는 分析이다.

    그렇다면 祝祭 雰圍氣 속에 끝난 이 世紀의 結婚式이 이런 肯定的 效果만을 안겨다주었을까. 勿論 아니다. 特히 英國 經濟가 史上 유례없는 財政赤字에 짓눌리는 狀況에서 이런 豪華판 結婚式이 納稅者 또는 海外 投資者들에게 어떻게 비칠지 걱정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한나절도 못 되는 짧은 구경거리를 爲해 英國 納稅者들이 負擔한 費用은 1000萬파운드 (約 180億원)에 達한다. 이番 로열 웨딩은 世界 各國의 國王, 王妃, 王世子 等이 總出動한 超特級 警護 行事에 該當한다. 이를 위해 警護와 保安 業務에 들어간 費用만도 700萬파운드나 된다.

    結婚式 行事 自體에 들어가는 費用이야 王室 豫算으로 負擔한다고 치더라도 警護, 經費와 行事 弘報, 取材 支援 等 間接 經費는 고스란히 政府 豫算에서 支出됐다. 또 行事 前後 場內 整理, 淸掃 等에 드는 費用 亦是 該當 地自體의 몫으로 돌아갔다.

    이番 王室 行事를 責任진 文化觀光體育部 側은 過多 支出이라는 非難을 듣지 않도록 여러모로 神經을 썼다. 甚至於 버킹엄궁 周邊에 陣을 친 放送社에 中繼 부스를 設置해주고 6萬파운드 假量을 回收했다고 밝힐 程度로 ‘赤字 行事’라는 非難을 듣지 않으려고 애썼다.

    財政 赤字의 餘波로 公務員들이 잇달아 일자리를 잃고 子女 保育 手當이 잘려 나가는 狀況에서 納稅者들의 心氣를 건드리는 不要不急한 支出을 줄이려는 努力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돈 씀씀이를 最大限 規模 있게 해나가야 한다는 要求 앞에서는 王室 家族들도 例外가 아니었다. 結婚式 後 버킹엄궁에서 열린 披露宴도 最大限 簡素하게 치렀다. 그뿐만 아니라 新婦 側인 미들턴가(家) 亦是 結婚禮拜에 쓰인 꽃 裝飾과 新婦의 웨딩드레스, 公式 및 非公式 披露宴에 들어가는 費用 一部를 分擔함으로써 王室의 儉素한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한 努力에 힘을 보탰다.

    그러나 經濟界에서는 如前히 王室 結婚式 날짜를 4月29日 金曜日로 擇日함으로써 結果的으로 5月2日(月)까지 4日 동안 各級 事業場이 門을 닫는 데 對한 憂慮를 表明해왔다 (英國의 5月 첫째 月曜日은 休務日이다). 特히 이 4日 連休는 復活節 4日 連休가 끝난 지 사흘 만에 다시 찾아온 것으로 적지 않은 自營業者가 4月 末~5月 初에 걸쳐 열흘 넘게 셔터門을 내려놓는 超特級 黃金連休가 이어지기도 했다.

    英國의 經營者總協會(CBI)에 따르면 金曜日인 로열 웨딩이 낀 4日 連休로 인해 約 60億파운드에 達하는 生産性 下落 效果가 豫想된다고 한다. 스코틀랜드 王立銀行 (RBS)도 이番 連休가 2分期 經濟成長에 0.1% 程度 惡影響을 미칠 수 있다는 深刻한 展望을 내놓은 바 있다.

    王室에 對한 信賴와 尊敬

    그러나 經濟學者들이 내놓는 이러한 統計 數値는 로열 웨딩이 英國人에게 膳賜해준 벅찬 感動과 自矜心에 가려 單純한 統計 以上의 별다른 關心을 끌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勿論 이러한 感動과 自矜心의 源泉은 大多數 英國人이 갖는 王室에 對한 信賴와 尊敬이다.

    따라서 로열 웨딩을 收入과 支出에 맞춰 決算하는 일보다 더 重要한 作業은 이러한 王室에 對한 信賴와 尊敬이 로열 웨딩을 前後로 어떤 變化를 보였는지를 되짚어보는 것이다. 이러한 作業은 바로 現代 民主主義 時代에 英國 王室이라는 前近代的 國家機構가 어떤 方式으로 存續해나갈 수 있을 것인지에 對한 하나의 모델을 提示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英國 王室은 이番 로열 웨딩을 통해 現代化된 이미지를 對內外에 構築하고 國民으로부터 信賴를 再確認하는 大成功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윌리엄-케이트 結婚式이 끝난 直後 케임브리지 大學이 유고브(YouGov)와 함께 英國人 2萬名을 相對로 實施한 輿論調査 結果를 보자.

    이 調査에 따르면 10年 前에 比해 王室을 基盤으로 하는 君主制 시스템(monarchy)에 對한 英國人의 支持率은 두 倍로 껑충 뛰었다. 10年 前 비슷한 內容의 調査에서는 應答者의 折半이 훨씬 넘는 59%가 ‘君主制에 變化가 必要하다’고 指摘한 바 있다. 그러나 이番 調査에서 이 比率은 28%로 줄어들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 應答者의 3分의 2街 ‘100年이 지나도 君主制 시스템이 存在할 것’이라고 展望했다는 調査 結果도 王室에는 喜消息을 안겨주었다. 議會 民主主義 시스템에서 王室의 役割에 對한 懷疑論이 擴散되고 王室 財政 確保에마저 어려움을 겪어온 버킹엄궁으로서는 이番 結婚式으로 인해 君主制 시스템에 對한 確固한 支持를 再確認한 셈이다.

    王室 家族들 中 윌리엄 個人에 對한 好感度를 다시 한 番 確認한 것도 큰 收穫이다. 이 調査에서 윌리엄은 엘리자베스 2世 女王을 제치고 王室 構成員 中 人氣도 1位에 뽑혔다. 女王의 뒤를 이어, 豫備 王妃인 케이트 미들턴이 3位에 오른 것은 勿論이다.

    이미 80代에 접어든 엘리자베스 女王이나 60代 中盤을 바라보는 찰스 王世子와 달리 서른이 채 안 된 젊은 윌리엄 王世孫이 英國 王室을 代表하는 人物로 英國人들 사이에 刻印되기 始作했다는 事實이 君主制의 未來와 그 持續可能性에 對해 示唆하는 바는 絶對的이다.

    簡素함과 現代的

    그렇다면 君主制에 變化가 必要한 時點이 왔다고 생각해온 國民조차 윌리엄과 케이트의 結婚式에서 새로운 王室의 可能性을 보았다는 말일까? 그들은 이番 로열 웨딩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王室의 未來를 어떻게 보았을까?

    一般 國民이 느끼는 새로운 王室 婚姻 節次에 對한 이미지는 相對的 ‘簡素함’과 ‘現代的’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에 含蓄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正確히 30年 前 윌리엄의 아버지 찰스 王世子와 다이애나 스펜서의 結婚式 場面을 생생하게 記憶하는 英國人들에게 새로운 結婚式은 新鮮한 衝擊 그 自體였다.

    찰스-다이애나의 結婚式이 華麗함과 호사스러움으로 世界人의 耳目을 사로잡았다면 윌리엄-케이트의 結婚式은 豫想을 뛰어넘는 端雅함과 簡素함으로 新鮮함을 안겨주었다. 王室의 結婚式마다 話題를 몰고 다녔던 新婦의 드레스 길이가 이를 端的으로 보여주었다.

    30年 前 그날, 演出된 듯한 人形 같은 微笑에 7m60㎝나 되는 긴 드레스 꼬리를 끌며 聖 바오로 大聖堂에 나타났던 다이애나는 간 데 없었다. 代身 로열 웨딩 아침 웨스트민스터 寺院 앞에는 平凡한 新婦들이 입는 수수한 길이의 (2m70㎝) 드레스를 입은 케이트 미들턴이 結婚式場 바로 앞에서도 全혀 緊張한 빛이 없이 群衆을 向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드레스 길이만을 놓고 로열 웨딩 當日 新婦를 評價하기에는 無理가 있다. 그러나 찰스 王世子의 동생인 앤드루 王子와 結婚했던 사라 퍼거슨이 結婚式場에 섰을 때 드레스 길이가 5m가 넘었고 現在 女王인 엘리자베스 2歲가 男便 필립 功過 1947年 結婚 當時 4m 길이의 드레스를 입었던 것과 比較하면 簡素함이라는 名分 아래 王室의 傳統을 깬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두 사람 間의 呼稱이나 關係도 話題거리였다. 童話 속에서 今方 걸어나온 듯한 神祕한 이미지로 登場한 다이애나는 自身보다 13歲나 많은 찰스 王世子에 對해 ‘卿(Sir)’이라는 尊稱을 붙여야만 했다.

    찰스와 다이애나의 成婚 宣言文에 新郞에 對한 ‘복종(obey)’이라는 句節이 빠졌던 事實은 커다란 論難을 불러왔다. 이에 따라 찰스-다이애나 結婚 以後 다른 王室 家族들의 婚姻 誓約에는 다시 服從 義務가 包含됐다.

    그러나 윌리엄-케이트의 成婚 宣言文에서 服從 義務가 빠진 것에 是非를 거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結婚 禮拜를 執典한 英國 國敎會 主敎團 亦是 ‘服從 義務를 言及하지 않고 平等한 關係를 暗示한 것이 敎理에 더욱 符合하는 일’이라고 밝혔다. 오히려 成婚 宣言文의 句節을 두 사람이 스스로 選擇했다는 事實이 더욱 强調됐다.

    王室 關係者들을 더욱 만족시킨 것은 두 사람의 結婚이 王室의 肉重한 커튼 뒤에서 벌어지는 宮中野史가 아니라 自身의 職業을 갖고 있거나 가지고 있었던 健康한 生活인 사이의 結合으로 비치고 있다는 事實이다.

    찰스-다이애나 커플은 約婚에 이르기까지 고작 13番 만난 것으로 滿足해야 했다. 갓 스무 살에 不過했던 다이애나에게 판타지는 가득했지만 結婚 當時만 해도 그女에게서 親近함을 發見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다이애나의 親近한 이미지가 英國人들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것은 天使 이미지의 그女가 아프리카 貧國을 찾아다니며 에이즈 患者들의 거친 손을 끌어당겨 잡았을 때부터였다.

    그러나 大學 親舊 사이로 만남과 헤어짐을 反復했던 윌리엄과 케이트의 8年이 넘는 戀愛社는 英國人들에게 貴族的 이미지로만 느껴져왔던 王室의 이미지를 바꿀 수 있는 重要한 契機로 作用했다. 게다가 케이트는 結婚 當時 다이애나보다 열 살이나 많고 成熟하다.

    生活人들의 結婚

    이런 現代化된 王室의 이미지는 로열 웨딩이 모두 끝나고 나서 선보인 ‘깜짝쇼’에서 絶頂을 이뤘다. 全 世界의 數十餘 個 TV채널이 結婚式 生中繼를 모두 마치고 한숨 돌렸을 무렵 윌리엄-미들턴 커플이 알록달록한 파티 風船으로 裝飾된 깜찍한 오픈 스포츠카를 타고 나타난 것.

    新婚 커플은 찰스 王世子 所有의 클래식카人 아스턴 마틴에 ‘JU5T WED’ 라는 番號版을 달고 登場했다. 英國의 車輛 番號版 樣式을 그대로 따르면서도 누구라도 ‘方今 結婚했다(Just Wed)’는 메시지를 알아챌 수 있도록 機智를 發揮한 것이었다.

    觀覽客들의 웃음을 더욱 자아낸 것은 車 앞쪽 잘 보이는 곳에 붉은色 알파벳 大文字 ‘L’字를 크게 붙여놓았던 것. ‘L’은 ‘Learner’의 略字로 英國에서 運轉敎習을 받고 있는 初步 運轉者들이 使用하는 標識板이다. 方今 前 世紀의 結婚式을 치른 로열 커플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程度로 캐주얼한 面貌를 보여준 이 場面은 이날 이벤트의 最大 反戰을 記錄했다.

    이런 ‘깜짝 이벤트’가 王室의 權威와 傳統에 얽매이지 않는 젊은 커플의 卽席 아이디어인지 아니면 老衰한 王室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緻密하게 準備된 演出의 結果物인지는 이미 重要하지 않다. 이러한 試圖 自體만으로도 數百 年을 이어져 내려온 로열 웨딩의 歷史에 커다란 轉換點을 안겨준 것이 確實해 보이기 때문이다.

    스포츠카 이벤트는 高踏的 王室 이미지에 답답해하던 젊은 層에게는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었고 王室의 傳統을 重視하는 老年層에게도 잔잔한 웃음거리를 提供했다.

    危機의 王室

    그러나 이番 로열 웨딩의 興行 成功에 對해 가장 기뻐한 사람은 이들 觀客이 아니라 바로 王室 關係者들이었다. 事實 最近 몇 年 동안 英國 王室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버킹엄궁 周邊을 감돌고 있는 危機 症候群 앞에 無氣力한 모습을 보여 왔다. 30年 만의 王室 最高 이벤트로 이런 王室의 危機感을 相當 部分 잠재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危機의 徵候는 이미 여러 군데서 同時에 찾아들었었다. 王室 運營을 支撐하는 財政은 漸漸 萎縮되기 始作했고 王室에 對한 一般 國民의 尊敬心도 예전 같지 않았다. 또한 前近代的 風習을 維持하고 있는 王室의 婚姻 慣行과 節次마저 論難의 도마에 오르기 始作했다.

    첫 番째 危機 要因은 뭐니뭐니 해도 脆弱해질 대로 脆弱해진 王室의 財政이다. 老朽해가는 버킹엄궁의 保守와 王室 行事 經費 等을 위해 王室은 지난 20餘 年間 政府 側에 豫算 增額을 꾸준히 要請해 왔다. 그러나 金融危機로 인한 稅收 減少와 런던올림픽 豫算 等으로 인한 政府 財政 壓迫으로 王室 側의 要求는 番番이 退字를 맞았다.

    王室 側은 ‘英國人의 자랑인 王室을 維持하기 위해 國民 1人當 支出하는 돈이 62펜스(約 1000원)밖에 되지 않는다’며 輿論에 呼訴하는 方法을 擇하기도 했다. 그러나 안 그래도 各種 福祉 手當 削減으로 인해 살림 걱정이 늘어난 國民에게 王室 形便을 一一이 살펴줄 餘裕는 없었다.

    지난해 英國 言論은 엘리자베스 2世 女王이 王室 財政 問題를 解決하기 위해 自身이 所有한 農家와 땅을 賣却했다고 報道한 바 있다. 또 外國 貴賓으로부터 받은 高價의 膳物이나 所藏하고 있는 葡萄酒 等도 處分할 可能性이 있다는 것이 王室 消息通이 傳하는 버킹엄궁의 살림살이 現實이다.

    結局 버킹엄궁이 現在와 같은 씀씀이를 維持하기 위해서는 王室 內部에서 經費를 調達하는 方法을 찾아내거나 資金源을 찾아내지 못하면 支出을 줄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 된다. 王室의 財政 萎縮은 王室 運營의 危機로 이어질 수도 있다.

    두 番째, 王室에 對한 信賴와 尊敬이 過去처럼 無條件的이지 않다는 것도 危機의 徵候를 부채질하는 要因이다. 勿論 58年째 在位하는 엘리자베스 2世 女王에 對한 信賴는 아직도 絶對的이다. 또 女王이 現在 80歲를 훌쩍 넘긴 나이에도 健康을 維持하고 있어 當場 王位 繼承 問題가 떠오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王位 繼承 1順位에 올라 있는 찰스 王世子에 對한 國民의 信賴에는 如前히 물음標가 따라다닌다. 特히 많은 英國人이 다이애나 王世子妃의 悲劇的 죽음에 찰스가 原因을 提供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찰스가 다이애나와 結婚한 後에도 남몰래 密會를 즐겨온 것으로 드러난 現在의 夫人 파밀라 파커 볼스에 對한 英國人들의 感情은 敵對感에 가깝다고 해도 過言이 아니다.

    세 番째 危機感은 英國 王室이 維持해오고 있는 結婚 風習이 果然 現代的 法體系 및 人權 시스템과 衝突하지 않으면서 維持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疑懼心에서 비롯된다. 一部 法律 專門家들은 이미 王室이 維持해오고 있는 嚴格한 配偶者 選擇 基準 等이 個人의 人權과 自由를 侵害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王室 이미지 刷新 契機

    例를 들어 現在 王室 規定에 따르면 王族 中 가톨릭 信者와 結婚하는 사람은 王位 繼承 順位에서 除外된다. 16世紀 英國 國敎會가 가톨릭으로부터 獨立해 딴살림을 차린 데서 이러한 規定이 由來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어쨌든 이는 宗敎의 自由라는 現代法 精神과 正面으로 背馳된다.

    게다가 가톨릭 信者가 아닌 무슬림이나 監理敎, 浸禮敎 等 他 宗敎 信者와 結婚했을 때 어떻게 된다는 明示的 條項이 없다. 나아가 萬若 結婚 當時에는 아니었지만 結婚 以後 가톨릭으로 改宗하는 境遇는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이뿐만이 아니다. 現在 王室 規定은 結婚 適齡期에 이른 王族 누구라도 王의 同意 없이는 結婚을 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同姓 間의 合法的 ‘파트너십’을 認定하는 英國 社會에서 王族 中 누군가가 萬若 異性 間 結婚이 아닌 同性 파트너를 選擇하는 狀況이 온다면? 여기에 對한 王室 規定은 아예 마련되어 있지 않다.

    王室 結婚 規定이 갖는 이런 矛盾點을 追跡해 最近 冊을 펴낸 英國 워릭代 레베카 프로버트 敎授는 王室이 갖고 있는 이러한 前近代的 法規定이 유럽 人權 法院에 가면 모두 敗訴하고 말지도 모른다는 시나리오를 提示하기도 한다. 프로버트 敎授는 甚至於 윌리엄과 케이트의 結婚이 法的 論爭을 誘發하지 않고 順坦하게 치러지는 마지막 로열 웨딩이 될지 모른다는 憂慮도 提起한다.

    이렇게 돈 問題, 王位 繼承 問題, 婚姻 問題 等으로 골치를 썩이고 있는 버킹엄궁으로서는 윌리엄-케이트 커플의 結婚式이 王室에 對한 이미지를 바꿔 이런 危機感을 一掃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눈치다. 또 實際로 이러한 바람은 相當 部分 充足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윌리엄-케이트 커플의 로열 웨딩이 남긴 餘韻은 王室 내 結婚이 갖는 意味를 現代的으로 再解釋할 수 있는 機會도 가져다주었다. 近代國家 成立 以來 王室의 結婚은 傳統的으로 地域 內 勢力 擴張이나 敵對的 파워에 맞서 勢力 均衡을 꾀하는 政治的 行爲로 認識되어왔다.

    그 後 이러한 政治的 意味는 사라졌지만 로열 웨딩은 如前히 理性的 個人 間의 結婚이 아닌 家門 間의 結合이라는 意味가 强調된 채로 치러져왔다.

    當初 大學 親舊로 出發했던 윌리엄-케이트의 華麗한 結婚式과 平凡한 結婚 生活은 그런 意味에서 로열 웨딩度 平凡한 戀愛의 延長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좋은 事例가 되었다. 로열 웨딩의 새로운 한 張(章)李 쓰이기 始作한 것이다.

    英國 王室 結婚史? 離婚의 歷史!

    로열 커플의 誕生은 單純히 그 華麗함만으로도 世界의 關心을 끈다. 그러나 이들의 結婚生活이 늘 成功的인 것만은 아니다. 지난 數十 年間 王室의 結婚史를 되짚어보면 幸福한 結末보다는 離婚과 破鏡이 훨씬 더 많다.

    찰스와 다이애나의 스캔들은 一旦 暫時 접어두자. 于先 찰스 王世子의 女同生인 앤 公主부터 오빠 못지않은 結婚과 離婚 經歷을 자랑한다. 앤 公主는 1973年에 結婚해 두 아이를 낳았지만 1981年 破鏡을 맞이한 後 1992年 公式的으로 離婚했다.

    찰스가 다이애나와 갈라선 바로 그해였다. 그뿐만 아니라 찰스의 동생인 앤드루 王子의 結婚 生活도 같은 해 破局을 맞았다. 女王은 4男妹 中 3名이 같은 해에 破鏡을 맞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앤 公主는 離婚 後 같은 해 海軍 將校 出身으로 王室 職員이던 티모시 로렌스와 再婚했다. 그러나 男便인 티모시는 王室 內에서는 드물게 아무런 爵位를 받지 못했다.

    現在 앤 公主는 公式的으로 結婚 生活을 維持하고 있지만 두 番째 男便인 티모시와도 事實上 別居 狀態인 것으로 알려진다. 一部에서는 티모시가 王室의 一員으로 제대로 取扱받지 못하고 있다는 觀測을 내놓는다. 앤 公主와 關聯해서는 두 番째 離婚說마저 돌고 있다.

    게다가 앤 公主는 찰스 王世子의 現在 夫人인 파밀라 파커 볼스의 前 男便인 앤드루파커 볼스와 結婚 前부터 艶聞을 뿌린 바 있다. 두 사람은 各自 結婚과 離婚을 反復하면서도 關係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앤드루가 두 番째 夫人과 死別했을 때 앤 公主는 直接 조문하祈禱 했다.

    앤 公主의 오빠인 앤드루 王子도 1986年 사라 퍼거슨과 結婚했으나 6年 만인 1992年 破鏡을 맞았다. 사라 퍼거슨이 다른 男子의 품에 안겨 있는 場面이 言論을 통해 公開된 것이 決定的 契機로 作用했다. 사라 퍼거슨은 얼마 前 企業으로부터 請託을 받고 利權을 챙기려는 去來價 言論에 捕捉돼 亡身을 當하기도 했다.

    結局 엘리자베스 2世 女王의 4男妹 中 막내아들인 에드워드 王子만이 1999年 結婚한 以後 比較的 平坦한 結婚 生活을 維持하고 있다.

    조금 더 이야기를 過去로 돌려보자. 앤 公主의 姨母이자 엘리자베스 2世 女王의 동생인 마거릿 公主(2002年 死亡)는 버킹엄궁 內에서도 有名한 스캔들 메이커였다.

    勿論 結婚 過程도 順坦치 않았다. 公主가 애初 사랑했던 사람은 아이가 둘이나 딸린 離婚男이었다. 둘은 約婚式까지 치렀다. 그러나 離婚 經歷을 理由로 英國 國敎會에서 이 結婚을 承認하지 않자 마거릿 公主는 結局 다른 平民 出身의 男子와 만나 結婚했다.

    마거릿 公主의 結婚式은 텔레비전으로 中繼된 最初의 로열 웨딩으로 記錄되기도 했다. 그러나 1978年 結局 이 結婚도 破局을 맞는다. 이 무렵 마거릿 公主가 17歲 少年과 某種의 關係를 維持해왔다는 所聞이 돌았다.

    마거릿 公主의 아버지인 조지 6世는 1936年 末 갑작스레 王位에 올랐다. 조지 5歲의 事後 王位를 繼承한 兄 에드워드 8歲가 1年 만에 갑작스레 王位를 내놓으면서였다. 理由는 簡單했다. 두 番의 離婚 經歷을 가진 美國人 심프슨 夫人과 結婚하기 위해서였다. 離婚女와 結婚하기 위해 王位를 내놓은 에드워드 8歲의 이야기는 最近 아카데미賞을 받은 映畫 ‘킹스 스피치’에 잘 나와 있다.

    最近 數十 年 동안 英國 王室에서 치러진 結婚의 歷史는 몇 年 뒤 고스란히 똑같은 이름을 내건 離婚의 歷史로 탈바꿈했다고 해도 큰 無理는 아닌 것 같아 보인다. 윌리엄과 케이트는 果然 어떤 길을 걷게 될 것인가.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