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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 解雇 女乘務員 代表 오미선|新東亞

KTX 解雇 女乘務員 代表 오미선

“單 하루 일하더라도 다시 乘務員 하고 싶어요”

  • 組成式│東亞日報 新東亞 記者 mairso2@donga.com│

    入力 2010-09-17 11: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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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年 만에 나온 解雇無效 判決
    • 鐵塔 籠城, 무서워서 正말 하기 싫었지만 責任感에 올라가
    • ‘鐵의 勞動者’ 같은 戰鬪的 勞動歌는 안 불러
    • 남아도 後悔하고 나가도 後悔하고… 380名이 34名으로
    • 20代엔 예쁘게 보이고 싶었지만 只今은 眞짜 서비스 하고 싶어
    •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큰 苦痛이던지…
    KTX 해고 여승무원 대표  오미선
    작은 가슴 속으로

    네가

    列車 되어 지나간다

    덜컹덜컹 쿵쿵

    내 가슴이 떨린다



    흔들린다

    네가 지나가면

    빈 고요

    내 마음엔 두 줄

    今晩 남는다

    -배준석, ‘列車같이’

    그女의 해맑은 웃음자락엔 슬픔이 묻어 있었다, 라는 表現은 常套的이다. 그런데 世上事의 苦痛이란 時間이 지나면 常套的인 게 되지 않던가.

    KTX 解雇 女乘務員 代表 오미선(31)氏는 두 時間 넘게 얘기하면서 한番도 눈시울을 붉히지 않았다. 그러기엔 지난 時節의 苦痛이 지루할 만큼 길었다. 눈물 따위는 말라버린 지 오래다. 그래도 法院이, 自身을 비롯한 KTX 女乘務員 34名에 對한 解雇가 無效라는 判決을 내린 8月26日만큼은 눈물과 再會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중앙지법 民事合議41部(部長判事 최승욱)는 코레일(韓國鐵道公社)에서 해고당한 KTX 女乘務員 34名이 會社 側을 相對로 낸 勤勞者地位確認請求訴訟에서 “兩側의 直接的인 勤勞契約關係가 認定된다”며 原告 勝訴判決을 내렸다. 裁判部는 코레일 側에 이들이 復職할 때까지 月 給與와 더불어 그동안 밀린 賃金을 支給하라고 命令했다.

    “우리가 옳다는 걸 많은 사람에게 보여줬다는 點에서 正말 기뻐요. 몸 疲困한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게 周邊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點이었거든요. 이番에 判決 나오고 예전 寫眞을 보니 只今의 모습이 너무 늙었더라고요. 實際로 惡플에 傷處 받기도 했습니다. 乘務員 얼굴이 그게 뭐냐고. 제가 1979年生인데, 79~82年生이 가장 많아요.”

    이들은 2004年 코레일에 入社했다. KTX 女乘務員 公採 1期였다. 2006年 코레일은 非正規職인 이들에게 子會社인 KTX觀光레저로 옮기라고 指示했다. 이들은 이를 拒否하고 正規職 轉換을 要求했다. 그러자 會社는 再契約을 하지 않는 方法으로 이들을 解雇했다. 入社 當時 ‘2年 後 코레일 正規職으로 轉換해주겠다’는 約束은 헌신짝처럼 내팽개쳐졌다.

    마지막까지 남은 34名

    女乘務員들은 罷業을 벌였다. 占據籠城을 하고, 斷食鬪爭을 벌이고, 削髮을 하고, 40m 鐵塔에 올라갔다. 애初 380名이 罷業에 同參했으나 2008年 11月 法的 訴訟으로 鬪爭方式을 바꿀 무렵엔 10分의 1도 남지 않았다. 離脫한 乘務員들은 會社와 妥協해 子會社로 옮기거나 다른 일자리를 찾았다. 마지막까지 남은 34名의 鬪爭은 悽絶했다. 이들은 어느덧 非正規職 鬪爭의 象徵的 存在가 돼 있었다.

    이番 判決은, 不法과 便法이 판치는 非正規職 雇傭의 問題點을 法院이 認定하고 是正을 命令했다는 點에서 公共機關 勞使關係에 적지 않은 影響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코레일은 吳氏 等과 直接 勤勞契約關係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契約期間이 끝나면 특별한 問題가 없을 境遇 勤勞契約을 締結할 義務가 있었는데도 契約更新을 拒否했다. 吳氏 等이 子會社로 移籍夏至 않았다고 해서 解雇한 것은 正當한 理由가 없기 때문에 無效다.”

    이제 사람 얘기를 해보자. 꽃다운 靑春을 鬪爭의 江물에 흘려보낸 그女를. 20代의 앳된 處女에서 30代의 成熟한 女人으로 變貌한 그女를.

    서울 龍山驛 待合室에 나타난 그女에게선 코스모스 香氣가 풍겼다. 耳目口鼻가 뚜렷한 美人이다. 先入觀인지 몰라도 透寫 이미지는 아니다. 지난 4年間 鬪爭의 先鋒에 섰던 그女는 只今 뱃속에 아이를 품고 있다. 5個月 됐다. 지난해 11月 結婚했다.

    우리는 龍山驛舍 6層에 있는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 午後의 끈적거리는 햇살이 테이블 위에서 노닥거렸다. 窓밖으로 펼쳐진 용산의 風景이 을씨년스럽다. 龍山은 希望의 都市이자 憤怒의 都市다. 非情한 都市다. 第2의 江南을 꿈꾸는 薔薇빛 靑寫眞 裏面엔 撤去民들의 恨과 苦痛이 서려 있다. 인터뷰는 내가 主題語를 던지면 그에 맞춰 그女가 告白하는 式으로 進行됐다.

    憤怒

    “5年間 싸우는 동안 社長이 5次例 바뀌었어요. 初期의 이철 社長을 빼고는 다들 對話 自體를 拒否했어요. 政府, 特히 勞動部에 對한 憤怒가 컸지요. 國會도 마찬가지입니다. 몇몇 議員은 도와줄 것처럼 말해놓고는 實際로는 도와주지 않았어요. 僞善이었던 거죠. 勿論 가장 큰 憤怒의 對象은 鐵道公社죠. 法的인 判斷에 맡기겠다, 1審 判決이 나오면 따르겠다고 約束하고는 이제 와 抗訴하겠다니까요. 無責任하고 欺瞞的인 行爲죠. 이는 團體協約 違反이기도 합니다. 단협案에 1審 判決에 따른다는 條項이 들어가 있거든요.”

    吳氏의 말마따나 코레일은 1審 判決에 承服하지 않고 있다. 判決 直後 “女乘務員들을 直接 雇用하지 않았다는 旣存 立場에 變化가 없다. 高等法院에서는 다른 結果가 있을 것”이라며 抗訴 方針을 밝혔다.

    “그間 會社는 眞情性을 갖고 事態를 解決할 意志를 보인 적이 없다”고 批判한 그女는 社側의 不法性을 條目條目 指摘했다.

    “勞動部가 鐵道工事에 보낸 公文을 보면 ‘KTX 女乘務員 일은 外注化할 수 없다’고 돼 있어요. 乘務 業務는 常時的인 것이기 때문에 都給이나 派遣은 不法이라는 거죠. 鐵道公社의 正規職 人員은 制限돼 있어요. 그래서 便法으로 홍익회를 利用해 採用한 거죠. 入社 當時 暫時 委託勤務를 하는 것이라며 2年 뒤엔 正規職으로 轉換해주겠다고 約束했습니다. 그 約束을 믿었죠.”

    2004年 1年짜리 契約職으로 入社한 吳氏는 所屬이 몇 次例 바뀌었다. 하는 일은 똑같은데 會社 이름이 繼續 바뀐 것이다. 하나같이 코레일의 子會社였다. 2004年 3月 鐵道公社는 財團法人 홍익회에 乘務 서비스를 移管하고 吳氏를 비롯한 女乘務員들을 公開 採用했다. 홍익회는 鐵道廳 勤務 中 公傷(公傷)으로 退職한 者와 殉職한 者의 遺家族에 對한 援護를 目的으로 設立된 團體다.

    2004年 12月 乘務 業務가 韓國鐵道流通으로 넘어가면서 홍익회는 援護事業만 맡게 됐다. 吳氏의 所屬은 鐵道流通으로 바뀌었다. 鐵道流通은 乘務 서비스와 함께 鐵道驛 構內 및 列車 內 食品과 物品 販賣를 맡았다. 女乘務員들은 코레일이 自身들을 正規職으로 採用하지 않은 채 乘務 서비스를 鐵道流通에 넘기자 勞動組合을 設立했다. 鐵道流通 勤務는 不法派遣에 該當된다는 게 이들의 主張이었다. 乘務 業務의 特性上 코레일이 實質的인 使用者 地位에 있으므로 自身들을 直接 雇用해야 한다는 論理였다. 이들은 政府機關에 陳情書를 넣는 한便 正規職 轉換을 要求하면서 集團行動에 들어갔다.

    2006年 5月 鐵道流通은 새로 設立된 코레일의 또다른 子會社인 KTX觀光레저로 乘務 서비스를 移管했다. 女乘務員들의 身分은 다시 觀光레저 職員으로 바뀔 판이었다. 鐵道流通이나 觀光레저 같은 子會社의 勤務與件은 本社에 비해 劣惡했고 報酬도 낮았다. 女乘務員들이 罷業을 決行瑕疵 鐵道流通은 이들을 모두 解雇했다.

    苦痛

    KTX 해고 여승무원 대표  오미선
    “肉體的 苦痛은 참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家族과 周邊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건 견디기 힘들었어요. 家族이 힘이 되기는 하지만, 反對로 家族 때문에 나간(이탈한) 사람도 많아요. 家族과 親舊들을 이해시키는 게 正말 어려웠어요. 孤立됐다는 느낌이었지요.”

    어지간히 마음고생한 게 아닌 模樣이다. 하긴 名色이 記者인 나만 해도 그들이 왜 싸우는지에 對해 眞摯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 고작 좀 안됐다고 여겼을 뿐이다. 吳氏는 “罷業을 3年이나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털어놓았다.

    “처음엔 한 100日 할 줄 알았어요. 몇 番 고비를 넘기면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 되겠지 하다가 3年이 지나버린 거죠.”

    勞組의 名稱은 全國鐵道勞組 서울地方本部 KTX乘務支部였다. 그女는 支部長을 지내면서 對言論 窓口 노릇을 했다. 자연스럽게 解雇된 女乘務員들의 代表로 浮刻됐다.

    2008年 9月 鐵塔籠城을 끝낸 後 女乘務員들은 現場鬪爭을 접었다. 한 달 뒤 法院에 ‘勤勞者地位保全 및 賃金支給’ 假處分申請을 낸 데 이어 11月엔 本案訴訟을 냈다. 1年10個月 만에 1審 判決이 나온 것이다.

    吳氏는 가장 고통스러웠던 일을 묻자 鐵塔籠城을 꼽았다. 2008年 8月 그女와 同僚 4名은 서울驛에 있는 40m 높이의 照明鐵塔 위로 올라갔다. 鐵塔籠城은 한 달 가까이 繼續됐다. 臨時 幕舍에서 새우잠을 잤다. 生理的인 問題는 簡易施設에서 解決했다. 먹을 것은 밑에서 올려 보내졌다. 그女의 告白은 뜻밖이었다.

    “正말 올라가기 싫었어요. 무서웠거든요. 그렇지만 마지막으로 한 番 해봐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올라갔습니다. 안 그러면 나중에 後悔할 것 같아서요. 거기서 그만두자니 너무 抑鬱했지요.”

    그女의 바람과는 反對로 鐵道公社는 더욱 强勁해졌다. 妥協도 없었다. 工事 側은 그女들을 觀光레저 職員으로도 못 받는다고 쐐기를 박았다.

    “너무 분했어요. 鐵道工事를 壓迫하려 (鐵塔에) 올라간 것인데 電鐵 運行에 妨害가 안 되니까 그냥 내버려두더라고요. 모든 勞動運動이 다 그런 것 같아요. 對話하다 안 되면 極限鬪爭을 벌이는 거죠. 저도 해보니 알겠더라고요.”

    鬪爭

    2006年 봄 罷業이 始作됐다. 吳氏는 組合事務室 寢囊에서 잤다. 집에는 2~3週에 한 番씩 잠깐 들렀다. 용산역과 서울驛에서 連坐示威를 벌이며 市民들에게 傳單紙를 돌렸다. 꿈쩍도 하지 않는 公社 側을 壓迫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國會 憲政記念館을 占據해 韓明淑 當時 總理 面談을 要求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飮食 搬入이 遮斷된 채 며칠間 떨던 女乘務員들은 强制로 끌려나왔다. 國會와 政府廳舍, 靑瓦臺 앞에서 돌아가면서 1人 示威도 벌였으나 效果가 없었다. 國家人權委員會를 찾아가서도 別 所得을 얻지 못했다.

    “名節 때 서울驛과 龍山驛에서 1人 示威를 벌이는데 아는 사람이 볼까봐 帽子를 푹 눌러썼어요. 초라한 氣分이었지요. 正말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큰 苦痛이던지. 或 가다 親舊라도 만나면 하루 終日 憂鬱했지요.”

    吳氏는 罷業을 하면서 警察署 留置場에 세 番 갇혔다. 拘束 直前까지 몰렸던 狀況도 있었다. 占據籠城으로 起訴돼 法廷에 서기도 했다. 코레일은 罷業에 參與한 女乘務員들에 對해 業務妨害를 理由로 損害賠償請求訴訟을 냈다. 法院은 會社 손을 들어줬다. 賠償金은 組合費로 解決했다.

    罷業이 길어지면서 乘務員들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鬪爭만 하다가는 지쳐 쓰러질 판이었다. 團體로 早朝映畫를 보고 韓江에 모여 運動을 했다.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밤에는 통닭과 麥酒를 시켜 먹었다. 吳氏는 틈틈이 佛語工夫를 하기도 했다.

    “周邊에서 안 좋게 보는 視線도 있었어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만의 脫出口가 必要했어요. 男子들은 罷業하면 밤에 술 마시잖아요. 우리는 그 時間에 뮤지컬을 봤지요. 콘도에 가서 討論하고 溫泉浴도 하고. 술 마시는 거나 그거나 費用은 똑같지요. 20代 女子들에게 맞는 프로그램을 찾은 거죠.”

    或是 學生 時節 運動圈이었을까. 그女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全혀. 勞動運動이라곤 해본 적도 없고요. 아무것도 모르기에 이토록 오랫동안 싸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鬪爭이라는 게 낯설었지요. 同志라는 말도 語塞했고요. 罷業할 때도 ‘鐵의 勞動者’나 ‘임을 위한 行進曲’ 같은 戰鬪的인 노래는 안 불렀어요. ‘바위처럼’이나 그 뭐 있잖아요. 생각이 잘 안 나네. 何如間 밝고 輕快한 노래를 많이 불렀지요.”

    그女는 끝내 그 생각이 안 난다는 노래를 생각해내지 못했다. 인터뷰가 끝난 後 나는 그 노래가 或是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가 아닐까 싶었으나 굳이 그女에게 물어보지는 않았다.

    눈물

    눈물 얘기를 물어보는데, 그女는 햇살처럼 웃으면서 對答했다.

    “鐵塔에 올라갈 때 正말 많이 울었어요. 올라가도 解決될 것 같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올라갔지요. 父母와 男子親舊가 나를 어떻게 볼까, 堪當이 안 되더라고요. 元來 눈물을 잘 흘리지 않는 便이에요. 아무리 힘들어도 찔끔거리는 程度죠. 그런데 그때는 펑펑 울었어요. 正말 힘들었거든요.”

    挫折

    “이철 社長 있을 때는 期待가 컸던 만큼 挫折도 컸어요. 勞動部에서 是正措置를 勸告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正말 期待가 컸지요. 아, 이제 正말 얼마 안 남았구나. 며칠 만에 더 큰 挫折을 맛보았지요.”

    內部的으로는 同僚들의 離脫에 큰 挫折感을 맛봤다. 罷業한 지 500日쯤 됐을 때 많은 同僚가 빠져나갔다. 正말 우리가 끝까지 싸울 수 있을까, 會議가 밀려들었다. 鐵塔까지 올라갔는데도 解決되지 않았을 때는 絶望의 끝을 보는 듯싶었다.

    “同僚가 하나둘 떠나는데, 가지 말라고 說得할 수 있는 論理的 根據가 없는 거예요. 그냥 참아보자는 얘기밖에. 남아도 後悔하고 나가도 後悔하는 狀況이었지요. 워낙 鬪爭期間이 길다 보니 內部的인 葛藤도 생겨났어요. 나간 사람들도 두고 온 사람들에게 未安한 感情이 있었을 거예요. 나간 乘務員들이 밉다가도 나도 그러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들을 理解하게 되는 겁니다. 모두 被害者인 셈이죠.”

    외로움

    KTX 해고 여승무원 대표  오미선

    龍山驛 待合室. 오미선氏는 “正말 제대로 된 顧客 서비스를 하고 싶다”고 復職에 對한 期待를 나타냈다.

    “1審 宣告가 나왔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난 이제 堂堂하게 말할 수 있다’였어요. 그間 周邊에 KTX 乘務員이라고 떳떳하게 밝히기 어려웠거든요. 다른 部類의 사람으로 바라보니까요. 사람은 社會的 動物이잖아요.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 일인지…. 우리 社會는 남에 對한 理解心이 不足해요. 우리의 問題가 아니라 그들만의 問題로 置簿하죠. 그래서 늘 외로웠죠.”

    元來 앞에 나서는 性格이 아니었다. 大學 다닐 때는 學科에 男學生이 훨씬 많아 氣를 못 폈다(체육학과를 나온 그女는 한때 아르바이트로 水泳講師를 했다). 罷業을 겪으면서 남 앞에서 自身의 意見을 堂堂히 밝히는 積極的인 性格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社會問題에도 눈을 뜨게 되고.

    “非正規職 勞動者들의 雇傭不安이 如前히 深刻하잖아요. 畸形的 正規職度 많고. 너무 힘이 弱해요. 資本이라는 巨大한 怪物 앞에서.”

    後悔

    “勞組 加入을 안 했다면 只今쯤 7年次 乘務員으로 일하고 있을 텐데… 한便으로는 아쉽기도 해요. 몰라도 될 걸 알아서 더 힘들지 않았나 싶어요. 다시 하라면 못해요. 동생이 이런 일에 나선다면 도시락 싸들고 말릴 겁니다.”

    吳氏에 따르면 中間에 妥協의 餘地도 있었던 模樣이다. 勿論 내키지 않은 妥協이었지만.

    “折衷할 수 있을 때 折衷했다면 狀況이 달라졌겠지요. 周邊에 끼치는 波及效果도 컸을 테고. 싸움이 너무 길어지다 보니 選擇의 幅이 漸漸 좁아졌어요. 萬若 會社와 妥協했다면 鬪爭 名分이나 精神이 사라졌겠지요. 되게 부담스러웠어요. 勞動界에서 非正規職의 꽃이니 象徵이니 하면서 支援하는 게. 저는 性格上 强勁派는 못 돼요. 그런데도 狀況에 몰려 强勁한 척했지요. 鐵塔엔 正말 올라가고 싶지 않았어요. 責任感 때문에 올라간 거예요. 勞動運動 하는 사람들 正말 대단하다는 걸 느꼈죠.”

    家族

    “엄청난 競爭을 뚫고 乘務員이 됐을 땐 正말 내가 대단한가 싶었지요. 여기저기서 祝賀電話가 걸려오고. 아빠는 周邊에 자랑하느라 정신없었지요. 乘務員 制服이 자랑스러웠어요. 自負心도 있었고.”

    吳氏는 딸만 넷 있는 집안의 長女다. 그女의 아버지는 ‘아들 같은 딸’이라며 늘 자랑스러워했다. 아버지의 깊은 愛情은 罷業期間에도 變하지 않았다.

    하지만 媤宅 쪽은 달랐다. 男子親舊의 어머니는 TV에 籠城 中인 그女의 모습이 비치면 “며느리 될 사람이 독해 보인다”고 걱정스러워했다. 電話를 걸어 “너, 힘들게 살지 말아라. 즐겁게 살아야 한다”며 안타까운 心情을 드러내기도 했다. 1審 判決이 나온 後 가장 먼저 電話를 걸어온 사람은 媤아버지였다. “다시는 그런데 나서지 말라. 뭐든지 너무 앞장서지 말라”고 忠告했다. 反面 親庭父母는 마냥 자랑스러워했다. 甚至於 “家門의 榮光”이라며.

    “아빠는 前에는 光化門에서 示威하는 사람들 보면 辱했어요. 그런 분이 딸 때문에 世上 보는 눈이 달라졌어요. 只今은 示威隊에 拍手를 쳐줘요. 동생들도 다 저를 支持하고요.”

    사랑

    吳氏가 뒷날 結婚하게 된 男子親舊를 처음 만난 건 2006年 7月. 罷業에 들어간 지 3個月쯤 됐을 때였다. 海外 建設現場에서 일하는 男子親舊는 1年에 한두 番 歸國했다. 그女도 罷業을 하고 있어 애初 正常的인 데이트는 쉽지 않은 狀況이었다. 自然히 電話와 e메일 데이트를 즐기게 됐다. 그女는 主로 새벽에 e메일을 써 보냈다.

    “事實 뜨거운 사랑을 했던 건 아니에요. 電話와 便紙를 자주 하다 보니 사랑이 싹 트더군요. 그는 ‘뭘 하든 지켜봐주겠다’고 했어요. 돈은 自身이 벌겠다며. 그 말이 큰 힘이 되고 慰勞가 됐어요. 海外에서 인터넷을 통해 제가 占據籠城하고 連行된 걸 알았나 봐요. 그런데 그의 反應은 ‘왜’가 아니라 ‘괜찮아?’였어요. 내가 굳이 說明하거나 이해시키려 애쓸 必要가 없었지요. 그만큼 理解心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애틋함보다는 便安함으로 다가왔지요. 人生의 同伴者라는 느낌. 그는 우리 家族도 잘 包攝했어요. 年末이나 名節 때 나 代身 우리 집에 찾아가 家族들과 함께 時間을 보내곤 했어요.”

    鬪爭의 原動力은 熱情이다. 싸워본 者는 안다. 加熱한 憤怒의 옆구리로 熱情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을. 熱情은 때로 사랑으로 昇華한다. 吳氏의 사랑도 極限鬪爭 속에서 더욱 단단해졌으리라. 罷業에 同參했던 한 女乘務員은 自身을 調査했던 警察官과 結婚까지 했다. 警察에 連行돼 調査받다가 불꽃이 튄 것이다. 이래서 男女間 사랑은 不可解한 것인가 보다.



    그女가 한숨을 훅 내쉬었다. 꿈 많던 20代는 이제 아련한 追憶이다. 그女는 高等學校 때부터 乘務員의 꿈을 키워왔다. 제복이 참 멋있어 보였다. 旅行을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뭔가 나눠주는 걸 좋아했던 그女는 서비스職이 自身에게 딱 맞다고 생각했다.

    “KTX 乘務員 生活은 肉體的으로 고단했지만 보람 있었어요. 顧客이 나의 작은 서비스에 好意的인 反應을 보일 때 가장 보람을 느꼈지요. 하루에 8~9時間 서서 勤務하면서도 힘든 줄 몰랐어요.”

    法院 判決로 復職의 길이 열렸지만 公社 側의 頑强한 態度로 봐 實際로 復職이 이뤄질지는 알 수 없는 狀態다. 그女의 꿈은 勿論 復職해 다시 乘務員 制服을 입는 것이다.

    “光化門, 汝矣島, 江南, 서울驛을 돌면서 가장 부러웠던 게 職員症을 목에 걸고 다니는 會社員들이었어요. 우리끼리 弄談으로 携帶電話기라도 걸고 다닐까, 했죠. 26歲에 入社해 罷業을 하고나니 32歲가 됐어요. 이제는 다른 데 就業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아요. 2007年 以後엔 履歷이 없어요. 空白期죠. 몇몇 會社에 願書를 내봤는데 다 退字 맞았어요.”

    그女는 “일하고 싶다”고 힘줘 말했다.

    “鐵道工事에 對한 愛着이 커요. 單 하루 일하고 그만두더라도 다시 들어가고 싶어요. KTX 列車만 보면 반가워요. 顧客으로서 KTX를 타보니 顧客 不滿을 알겠더라고요. 客室에 乘務員이 안 보이는 겁니다. 事實 只今도 乘務員 數가 모자라요. 20代엔 예뻐 보이고 싶을 뿐이었죠. 只今은 正말 顧客을 위한 서비스를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 機會가 주어질지….”

    사람을 나누는 方式은 여러 가지가 있다. 명분파와 實利派로 나누는 것도 그中 하나다. 名分을 重視하는 사람은 大體로 實속 없는 삶을 살아간다. 世俗的인 基準에 비춰 得보다 失이 훨씬 많다. 出世하고 잘 먹고 잘사는 사람들은 大體로 實利를 좇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名分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名分을 내건 싸움은 멋있어 보이지만 實狀은 초라하기만 하다. 이기기도 힘들지만, 이겨도 남는 게 없다.

    KTX 해고 여승무원 대표  오미선
    그런데 그게 다일까. 그래도 世上이 아름다운 건 名分을 위해 싸우는 바보 같은 사람들 때문 아닐까. ‘그까짓’ 正規職 約束을 안 지켰다고 싸우느라 그토록 좋아하던 乘務員 일도 못하고 금쪽같은 靑春 4年을 虛費한 오미선氏는 正말 바보다. 그 바보에게 單 하루도 復職을 許容하지 않을 만큼 코레일이라는 公共機關은 殘忍한 集團인가. 허준영 社長의 智慧가 要求되는 時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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