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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背信? 金正恩 一家와 奴隸契約을 破棄한 거예요”|신동아

“背信? 金正恩 一家와 奴隸契約을 破棄한 거예요”

‘런던에서 온 平壤 女子’ 오혜선

  • 金賢美 記者 khmzip@donga.com

    入力 2023-02-25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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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빨치산 家門의 딸, 平壤 金수저

    • ‘滿點짜리 新郞’과 ‘1等 新婦감’

    • 소리 없이 사라진 特權層 아이들

    • “아버지는 날 理解하셨을 것”

    • 가까이 가면 타 죽고, 멀어지면 얼어 죽어

    • 公主님 된 金與正, 金氏 世襲王朝

    • 脫北 6年 車, 아직도 惡夢 꿔

    • 奴隸로 사는 北韓 住民들 잊지 말길





    오혜선 씨. [지호영 기자]

    오혜선 氏. [지호영 記者]

    “牡丹峯 改善公園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남달리 흰 얼굴에 숱진 눈썹이 印象的이었다. 後날 背信感을 느낄 程度로 그날의 그는 머리숱도 많았다.”(오혜선 回顧錄 ‘런던에서 온 平壤 女子’, 더미라클 出版社)

    오혜선(56) 氏가 34年 前 記憶을 더듬으며 떠올린 男便(太永浩 國民의힘 國會議員)의 첫印象이다. 後날 背信感을 얘기하지만 그날 女子는 첫눈에 반했다.
    韓國에 온 지 7年 만에 오혜선 氏가 回顧錄 ‘런던에서 온 平壤 女子’를 들고 世上에 나왔다. 1月 31日 國會議員 太永浩의 아내가 아닌 著者로서 동아일보 忠正路社屋을 訪問한 吳 氏의 얼굴은 上氣돼 있었다.

    平壤의 核心 階層으로 살아온 裕福한 成長期과 結婚 生活, 社會主義와 共産主義를 標榜했지만 徹底한 階級 社會인 北韓의 二重性, 金正恩이라는 새 獨裁者의 出現 以後 各自圖生으로 내몰린 人民의 삶, 外貨벌이와 體制 美化에 動員되는 北韓 外交官들의 實狀 等 그가 들려준 平壤 이야기는 奇怪하다 할 만큼 낯설었다. 그러나 子息의 未來를 위해 어떤 犧牲도 覺悟하겠다는 父母의 마음은 南과 北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冊을 쓰기 始作한 것은 3~4年 됐어요. 2020年 男便이 國會議員에 出馬하면서 괜히 잘못 써서 誤解를 일으킬까 봐 접었습니다. 男便이 國會議員이 된 지 於焉 3年이 돼 오는데 그동안 應援해 주시는 분도 많았지만 否定的인 視線도 늘어난 것 같더라고요. 背信者, 變節者, 甚至於 間諜이라는 말을 들을 때면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왜 우리가 그런 말을 들어야 하지?’하고 서운하기도 했고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大部分 우리가 어떻게 살아 왔는지 잘 모르시고 갑자기 韓國 社會에 ‘뚝’ 나타나서 國會議員까지 하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男便이 ‘나는 이렇게 살아왔어’라고 해도 本人 말을 누가 듣겠어요. 아, 이것은 아내인 내 몫이구나 생각했죠.”

    놓치고 싶지 않은 男子, 말이 必要 없는 女子

    平壤外國語學院(韓國 中等學校에 該當하는 外國語 專門 敎育機關) 時節부터 오혜선 氏의 單짝이던 名姬가 自己 愛人의 親舊라며 紹介해 준 新郞감이 太永浩였다. 共和國 歷史에 單 한 番밖에 없었던 ‘소년 留學生’ 出身에, 留學을 마치고 平壤으로 돌아와 國際關係大學을 卒業하고, 다시 베이징외국어대 英語科를 卒業한 뒤 北韓 外務省 유럽國에서 일하고 있는 엘리트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稱讚했다. 비록 幹部 집안은 아니지만 이 程度면 北韓에서 ‘滿點짜리 新郞’이었다.

    ‘抗日 빨치산 家門의 딸’로 자라 當時 평양외국어대학 英語科 卒業班이던 吳 氏도 ‘土臺’를 重視하는 北韓 社會에서 1等 新婦감이었다. 滿洲에서 獨立運動을 한 曾祖할아버지 오봉삼의 여섯 아들 가운데 둘째이던 할아버지(吳道玄)는 김일성의 빨치산 部隊 作食隊원(炊事隊員)이었던 신일과 結婚해 아들 機首를 얻었다. 하지만 光復을 보지 못하고 日本 討伐隊와 戰鬪를 치르다 犧牲됐다. 셋째 오백룡(本名 오수현)은 김일성과 동북항일연군에 參戰했고 光復 後 北韓 내무상 負傷, 金日成 護衛總局長, 조선노동당 中央위 軍事部長을 지냈다.

    김일성 政權에서 아버지 誤記首都 乘勝長驅했다. 人民武力部 總政治局 政治部長을 거쳐 板門店 北側 首席 副代表, 김일성軍事綜合大學 政治副總長, 金日成政治大學 總長 等을 지냈다. 어머니 김상숙과 김일성 一家의 因緣도 남달랐다. 어머니는 新義州醫學大學 在學 中 김일성과 그 一家의 護衛를 맡은 護衛總局의 檢食噂議로 選拔됐다. 檢食噂議는 김일성 一家의 食事 安全을 책임지는 扈衛軍官으로 모든 飮食을 미리 먹어보고 檢收하는 일을 했다. 金 氏는 除隊 後 當時 護衛總局長이던 오백룡의 紹介로 그의 조카 오기수와 結婚했다.

    오죽하면 선을 보기도 前에 男子 쪽에서 “妻子의 家庭環境이 너무 搖亂해서 내키지 않는다”고 했을까. 그래서인지 첫선 자리에서 男子는 自身은 맏아들이니 平生 父母님을 모셔야 한다는 얘기부터 꺼냈다. 女子는 自己도 모르게 “맏며느리度 괜찮다”고 했다. 事實 그를 보는 瞬間 女子는 ‘이 男子는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最小限 이 사람과 함께라면 마음苦生은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첫눈에 반한 건 男子 쪽도 마찬가지였다. 男子는 韓國에 온 後 쓴 回顧錄 ‘3層 書記室의 暗號’에서 첫선에 對해 “몇 마디만 해봐도 알 수 있었다. 더 말할 必要가 없었다”고 썼다. 1989年 4月 어느 봄날이었다.

    1989년 8월 8일 열린 제450차 군사정전위에서 북측이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대협 대표로 참석한 한국외대 임수경 양이 활동한 비디오 테이프를 보여주고 있다. [동아DB]

    1989年 8月 8日 열린 第450次 軍事停戰위에서 北側이 平壤 世界靑年學生祝典에 전대협 代表로 參席한 韓國외대 임수경 孃이 活動한 비디오 테이프를 보여주고 있다. [東亞DB]

    1989年 7月 平壤에서 第13次 世界靑年學生祝典이 열렸다. 옛 蘇聯의 影響下에 있던 社會主義 國家의 靑年團體들이 反帝國主義 鬪爭을 내걸고 한자리에 모이는 行事였다. 1988年 成功裏에 開催된 서울올림픽을 意識해 北韓은 이 祝典을 위해 돈과 人力을 쏟아부었다. 男子는 外務省 代表로, 女子는 평양외국어대학 學生代表로 祝典 準備 過程부터 함께했다. 結婚을 約束한 두 사람에겐 달콤한 戀愛 期間이었고 各地에서 온 代表 團員들로부터 祝福을 받는 幸運도 누렸다. 이 行事에 南側 大學生 代表로 임수경이 祕密裏에 訪北해 熱烈한 歡迎을 받았다. 그가 北韓 靑年同盟委員長과 덮개車를 타고 나타나면 平壤 市民들은 歡呼하며 쫓아갔다. 그 人波 속에서 두 사람의 눈앞에 統一된 韓半島의 未來가 보이는 듯했다.

    祝典이 끝나고 그해 10月 두 사람은 結婚했다. 男子가 勤務하는 外務省과 女子가 勤務하는 貿易省은 金日成廣場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나란히 出勤하고 함께 退勤하는 幸福한 나날이 이어졌다. 이듬해 첫째 아들 駐혁이가 태어났다. 北韓의 ‘滿點짜리 新郞’과 ‘1等 新婦감’의 祝福받은 삶은 그렇게 永遠할 것만 같았다.

    1996年 4月 男便이 덴마크 駐在 北韓 大使館 3等 書記官으로 發令받았다. 오랫동안 身長症을 앓고 있는 첫째 주혁이의 治療를 위해서라도 懇切히 바라던 海外 派遣이었다. 여섯 살이 되도록 업혀 다닐 程度로 허약했던 아들이 덴마크에 와서 適切한 治療를 받고 食餌療法을 竝行했더니 어느새 學校도 다니고 運動도 할 만큼 健康을 回復했다.

    外交官의 아내, 天國과 地獄을 오가다

    큰아이가 어느 程度 回復되니 둘째를 낳고 싶은 欲心이 생겼다. 外國에서 아이를 낳는 것은 大使館 規定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臺詞는 上部에 報告하지 않겠으니 조용히 둘째를 낳으라고 承認했다. 둘째 아들 금혁이가 태어났다. 덴마크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6個月이 될 때까지 집마다 찾아다니며 健康檢診을 해주고 隘路 事項을 解決해 주는 福祉制度가 있다. 吳 氏는 “땅 위에 天國이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생각했다”고 한다.

    그 무렵 덴마크 放送은 每日 北韓의 끔찍한 아사와 飢饉에 對한 뉴스를 내보냈다. 以前에는 想像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얼마나 힘들면 그렇게 감추고자 했던 北韓 內部 實相을 公開할까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大使館 業務도 金 氏 一家의 偉大함과 北韓 社會主義 制度의 優越性을 宣傳하는 일 代身, 共和國의 어려움을 可能한 限 많이 보여줘서 國際社會로부터 더 많은 協助와 支援을 받아내는 것으로 바뀌었다. 황장엽 祕書(北韓에서 金日成綜合大學 總長, 조선노동당 中央委員會 史上祕書 歷任)가 南韓으로 亡命(1997)했다는 消息이 傳해진 것도 그 무렵이었다.

    덴마크와 스웨덴에서의 海外 生活을 마치고 4年 半 만에 돌아온 平壤은 너무나 많이 變해 있었다. ‘苦難의 行軍’을 겪으며 貧益貧 富益富가 심해졌고 場마당에서 먹고사는 問題를 解決해야 했다. 그럴수록 머지않아 實力만 있으면 잘사는 世上이 올 거라며 사람들은 子息 敎育에 온힘을 쏟아부었다.

    태영호 의원이 탈북 전 공사로 근무했던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뉴시스]

    太永浩 議員이 脫北 前 公社로 勤務했던 英國 駐在 北韓大使館. [뉴시스]

    2004年 男便이 다시 英國 駐在 北韓大使館 參事로 發令받아 4年間 런던에서 살았다. 吳 氏는 外國에서 보낸 8年의 歲月이 自身의 思考를 完全히 바꿔놓았다며 평양외국어대학 在學 時節 自身이 얼마나 北韓이라는 幻想 속에 살았는지 얘기해 주었다. 當時 平壤에서 열린 아시아 地域 世界 保健上 會議에 參席한 泰國 女醫師의 通譯을 맡아 稅金 없는 나라 北韓의 無償治療와 無償敎育 制度를 限껏 자랑했다. 그 女醫師가 “國民에게서 稅金을 받지 않으면 나라가 어떻게 運營되느냐”고 물었지만 그때는 그 質問 自體를 理解하지 못했다.

    그러나 유럽의 福祉制度를 體驗하면서 平生 北韓의 黑色宣傳에 속아 살았다는 것을 깨닫고 부끄러웠다. 北韓에서 받는 月給으로는 고기 한 斤 사 먹을 수 없었다. 國民에게 제대로 된 人件費를 준 적이 없으니 稅金을 걷을 수도 없는 것 아닌가. ‘차라리 稅金을 걷고 國民이 제대로 살 수 있는 制度를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子息들에게 奴隸의 삶을 물려줄 수 없다”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의 친형 김정철(왼쪽)이 에릭 클랩튼의 런던 공연장을 찾았을 때 에스코트하던 태영호 당시 주영 북한 공사. [동아DB]

    金正恩 勞動黨 總祕書의 親兄 김정철(왼쪽)李 에릭 클랩튼의 런던 公演場을 찾았을 때 에스코트하던 太永浩 當時 駐英 北韓 公使. [東亞DB]

    2013年 男便이 英國 駐在 北韓大使館 公使로 赴任하면서 두 番째 런던 滯留 機會가 왔다. 하지만 첫째 週혁이는 平壤에 남겨두고 와야 했다. 北韓 外交官들은 海外 派遣 詩 한 名의 子女만 同行이 許諾됐다. 子息을 人質로 삼아 外交官들의 離脫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1年 뒤 外交官들에게 大學生 子女를 本人 負擔으로 外國에 데리고 나가 工夫를 시키라는 金正恩의 方針이 떨어졌다. 共和國 外交 歷史上 前無後無한 일이었고 五 氏 家族에게는 天佑神助의 機會였다.

    평양의학대학에 다니던 駐혁이가 런던에 到着하는 瞬間부터 吳 氏는 北韓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決心했다. 아이들이 자유로운 世上에서 마음껏 工夫하고 平穩하게 일할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아이들의 꿈과 未來를 지켜줄 수만 있다면 무엇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주혁이의 大學 卒業과 함께 北韓 送還날이 가까워지자 選擇의 瞬間이 왔다.

    吳 氏는 마지막 瞬間까지 ‘韓國行’을 망설였다. 北韓에 남은 家族들이 받을 不利益은 유럽이나 美國이 아닌 韓國行을 擇할 境遇 더 苛酷했기 때문이었다. 北韓에서 平生 高位層 幹部의 子女로 살아온 自身의 過去도 마음에 걸렸다. 男便도 “當身 正말 後悔하지 않을 自身 있어?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다시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을 自身이 있냐고. 나는 괜찮아. 父母님은 이미 떠나가셨고, 兄弟들은 平生 人生 막바지에 살았으니 苦生을 견뎌낼 수 있겠지만 當身 兄弟들은 다르잖아”라며 再次 아내의 脫北 意志를 確認했다.

    “어디로 갈까 決定이 안 됐을 때 英國 이민도 찾아보고 캐나다, 美國도 찾아봤죠. 저는 可能한 限 英國에 남고 싶었어요. 英國에는 唯獨 移住民이 많잖아요. 나는 移住民으로 살아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는데 男便은 反對했어요. ‘내가 半生을 사랑하고 지켰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가는데 나는 抑鬱하다. 나는 北韓 사람들과 統一을 위해서 살겠다. 그러려면 韓國으로 가야 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 일을 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北韓이 아니라 平壤, 그들만의 世上

    北韓 體制와 永遠히 作別하는 瞬間 男便은 하염없이 울었다. 兄弟들과 親戚들, 自己를 믿어준 知人들은 勿論 人間으로서 지나온 모든 過去와의 作別이었다. 그렇지만 “子息들에게 奴隸의 삶을 물려줄 수는 없다”는 決心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

    “2016年 7月 어느 날 늦은 아침 우리 家族은 조용히 大使館 正門을 나섰다. 한여름이었지만 런던 날씨는 선선했다. 시원한 바람이 우리의 緊張한 마음을 식혀주었다. 어머니와 언니, 동생들, 조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들에게 永遠히 돌아갈 수 없는 길을 우리가 選擇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繼續 걸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옳은 길임을 우리는 確信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런던에서 온 平壤 女子’에서)

    吳 氏가 回顧錄을 執筆하면서 念頭에 둔 題目은 ‘고마운 大韓民國’이었다.

    “韓國에 와서 우리 家族처럼 잘 適應한 집도 없잖아요. 大韓民國을 위해 한 일이 全혀 없는 우리 家族이 이런 사랑을 받아도 되는지 늘 고맙고 罪悚했죠. 大韓民國이 고맙고, 國民들에게 고맙다는 마음을 품고 살기 때문에 題目에서라도 그 마음을 보여드리고 싶었죠. 그런데 原稿를 矯正하는 분이 ‘런던에서 온 北韓 女子’가 어떻겠느냐고 해서, 旣往이면 런던과 對稱되게 平壤으로 하자고 했죠.”

    어머니의 인터뷰에 同伴한 長男 주혁 氏가 冊 題目에서 ‘平壤’을 强調하게 된 理由를 敷衍 說明했다.

    “제가 韓國에 와서 고려대학교를 卒業했는데 젊은 親舊들과 얘기하다 보면 그들이 알고 있는 北韓은 大部分 地方에 對한 것이었어요. 北韓 사람들의 生活 모습이나 말套까지 地方 것이 全部인 줄 알더라고요. 그래서 어머니에게 같은 北韓이라도 平壤과 地方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면 좋겠다, 平壤의 核心 階層으로 살아온 만큼 獨裁國家 北韓과 階級社會의 現實을 赤裸裸하게 보여주는 것도 意味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權勢 누리다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아이들

    吳 氏는 咸鏡北道 나진시에서 태어났지만 ‘政治일군’이던 아버지 德分에 줄곧 平壤에서 자랐다. 北韓에서는 人民軍隊 안에 黨 委員會를 만들고 그 責任者를 黨 委員會에서 派遣했는데 人事權과 處罰權을 갖고 있는 이들을 ‘政治일군’이라고 했다. 吳 氏가 託兒所에서 第一 먼저 배운 노래가 ‘김일성 元首님 고맙습니다’였다. 김일성은 日帝에 빼앗겼던 나라를 찾아준, 우리나라를 世上에서 第一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어준 恩人이며, 그에 對한 忠誠心은 義理이자 義務이고 道德이라고 배웠다.

    김일성의 故鄕 萬景臺에 位置한 人民學校(初等學校) 2學年 때 朝鮮少年團에 入團했다. ‘元首님의 길을 따라 힘차게 나가자’는 朝鮮少年團 行進歌를 부르며 愛國心과 忠誠心으로 불타오르는 10代 時節을 보냈다. 組織의 決定은 無條件 옳고 오직 服從만이 훌륭한 革命家가 되기 위한 條件이라고 믿는 ‘어린 戰死’로 키워졌다.

    人民學校 卒業 後 吳 氏는 平壤外國語學院 英語科에 進學했다. 北韓 사람들은 ‘對外 部門 일군’이 되어 外國에 한番 나가보는 게 所願이었다. 對外 部門 일군이 되려면 金日成綜合大學 外國語文學部, 國際關係大學, 평양외국어대학 中 한 곳을 나와야 했다. 이 大學들에 入學하려면 外國語學院을 卒業해야 하니 當然히 學院 入學 競爭이 熾烈했다. 實力뿐 아니라 家庭環境, 財力도 좋아야 入學할 수 있었다. 學院에는 幹部집 子女들이 워낙 많다 보니 名節이 다가오면 집집마다 最高 權力者의 下賜品을 자랑했고, 그때 膳物에도 等級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이 ‘오백룡 家族이야? 오백룡 日伽倻?’라고 부를 때마다 正말 내가 특별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學院에 다닐 때 權力을 누리다가 父母님들의 罪 아닌 罪로 없어지는 애들을 보면서 내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權力이 무섭더라고요. 學院이 6年 過程인데 卒業할 무렵 1學年 入學 때 만났던 아이들 가운데 平凡한 집 애들은 大部分 남아 있지만 幹部집 子女들은 거의 다 없어졌어요. 딱 한 名 남았더라고요. 金 氏 패밀리. 金日成 五寸 조카만 있더라고요.”

    주혁 氏에게 讀者로서 ‘런던에서 온 平壤 女子’를 읽고 가장 記憶에 남는 部分이 무엇인지 물었다.

    “어머니의 親舊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部分이요. 그들이 왜 없어져야 했는지, 北韓 社會가 어떻게 이런 構造가 됐는지, 이 冊을 통해 韓國人들이 알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주혁 氏는 平壤으로 돌아가 學校를 다닐 때 自身도 비슷한 經驗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外國 生活을 經驗했던 親舊들이 海外에서 있었던 얘기나 그때 배운 노래를 하면 組織, 軍部에서 나와 어디론가 데리고 가더라고요. 한두 名씩 없어지는 것을 보면서 나도 이렇게 하면 큰일 나겠다 싶었죠. 그런 事件이 많다 보니 어떤 말은 하고 어떤 말은 안 해야 하는지 判斷이 안 돼 可及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親舊들끼리도 ‘眞率적’ 얘기를 한 적이 없는 것 같아요.”

    眞率한 對話는커녕 北韓에서는 아무도 그 親舊가 왜 사라졌는지 묻지 않았고, 물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혜선 氏는 冊을 쓰면서 비로소 사라진 親舊들의 이름을 한名 한名 불러줄 수 있었다.

    “學院 2學年 때 抗日 빨치산 出身으로 副主席을 지내던 김동규의 막내 늦둥이 딸 金英淑이 어느 날 갑자기 없어졌다. 그 애는 먹는 것을 남달리 좋아해 손에 間食을 늘 달고 다니던 통통하고 快活한 少女였다. 日本에서 歸國했던 中央黨 統一戰線部 副部長의 딸들인 김영순, 김유리, 김서경 姊妹도 비밀스러운 權勢를 누리던 工夫 잘하고 착한 兄弟였지만 하룻밤 사이 온 家族과 함께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아버지가 海軍 司令官을 거쳐 陸海運喪을 지냈던 방희순度 大學 入學을 앞둔 8月의 放學 어느 날 온 家族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런던에서 온 平壤 女子’에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方法은 親舊들의 不幸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애써 外面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父母님은 國家와 黨에 해를 끼친 罪人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내 아버지가 그런 過誤를 犯해 어느 날 갑자기 三水甲山(사람의 발길이 닿기 힘든 奧地)으로 쫓겨가는 일은 없기를 빌고 또 빌었다. 北韓에는 ‘太陽의 곁에 너무 가까이 가면 타 죽고 너무 멀어지면 얼어 죽는다’는 말이 있다. 누가 說明해 주지 않아도 權力의 무서움은 뼛속에 새겨졌다.

    낡은 黑白寫眞 한 章으로 남은 이福 언니

    五 氏 一家의 뼛속에 새겨진 두려움의 震源地는 어쩌면 아버지였는지도 모른다. 아버지 오기수는 萬景臺혁명학원(1947年 金日成이 빨치산 時節 犧牲된 戰友들의 遺子女를 위해 自身의 故鄕에 設立한 寄宿學校) 2期로 6·25戰爭 中 러시아 모스크바로 留學을 떠났다가 그곳에서 高麗人 아내를 만나 結婚하고 딸 하나를 데리고 歸國했다. 外務省에 配置돼 勤務를 始作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黨 組織으로부터 不信을 받았다.

    當時는 金日成이 남로당系, 蘇聯系, 沿岸界, 甲山界를 除去하고 唯一的 領導 體系를 樹立하던 時期였다. 모스크바에서 온 高麗人 아내를 둔 아버지는 蘇聯派로 疑心받았고 蘇聯 關聯 會議에서 排除됐다. 家族을 지킬 것인가, 김일성에게 충성할 것인가의 갈림길에서 아버지는 後者를 擇했다. 아내와 딸을 暫時 蘇聯으로 돌려보낸 것이 永遠한 離別이 되고 말았다.

    낡은 黑白寫眞 한 章으로 남아 있던 이福 언니 ‘오미옥’의 存在는 혜선 氏의 첫사랑과 함께 吳 氏네 家族史에 다시 登場했다. 大學 2學年 때 만난 러시아語科 男學生이 ‘歸國者’ 집안 出身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吳 氏네가 발칵 뒤집어졌다. 北韓에서는 1950年代 末에서 1960年代 日本에서 北韓으로 移住한 在日僑胞들을 ‘歸國者’라고 했다. 北韓에서 歸國者는 信賴할 수 없는 사람으로 여겨졌고 甚至於 間諜 取扱을 當하기도 했다. 이들이 가질 수 있는 職業도 制限的이어서 黨 幹部나 外交官이 되는 것은 꿈도 못 꾸었다. 歸國者 집안 出身 男子와의 結婚은 兄弟들 앞날까지 막는 ‘집안 亡하게 할 짓’이었다.

    혜선 氏는 온 家族의 反對에 直面해 結局 첫사랑과 訣別했다. 그리고 비로소 어린 딸을 蘇聯으로 보낸 아버지가 平生 짊어진 罪責感과 그리움과 아픔을 理解할 수 있었다. ‘런던에서 온 平壤 女子’를 쓰면서 始作을 ‘언니를 찾습니다’로 한 理由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平生 그리워했던 이福 언니를 꼭 찾아서 그 恨을 풀어드리고 싶었어요. 아버지를 代身해서 언니에게 容恕를 求하고 아버지의 마음을 傳해 주고 싶었죠. 제 冊을 본 분들을 통해 저 집에 저런 事緣이 있었구나 하고 입所聞이 나면 或是라도 언니를 찾는 데 힘이 되지 않을까요.”

    吳 氏는 海外 生活을 하면서 金正恩의 生母가 歸國者 出身이라는 말을 듣고 金 氏 一家의 二重性에 깜짝 놀랐다고 했다.

    김일성에게 충성하기 위해 家族마저 버린 아버지(2008年 작고)였지만 萬若 살아서 딸의 脫北 事實을 알았다면 뭐라고 하셨을까.

    서울에서 듣게 된 北韓 讚揚

    “韓國에 到着한 지 몇 달 지난 2016年 겨울, 어머니가 北韓 放送에 나온 部分을 中國 鳳凰TV를 통해 본 적이 있어요.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셨어요. ‘너는 親戚도 없고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南朝鮮에 가서 어떻게 살려고 그렇게 미련한 決心을 했느냐. 萬若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너를 銃으로 쏴 죽였을 거다.’ 北韓에 남아 있는 子息들도 있으니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어머니의 가슴은 또 얼마나 갈기갈기 찢어지셨을까 싶었죠. 한便으로 아버지가 正말 나를 쏴 죽였을까. 이런 생각을 많이 해봤어요. 아니다. 아버지는 나를 理解하셨을 것 같아요. 아버지가 平生 忠誠을 바친 北韓은 只今 어떤가요. 人權이 없고 하고 싶은 말도 할 수 없는 가난한 北韓이 正말 우리 아버지가 꿈꿨던 世上일까. 아버지가 (딸의 脫北 決心을) 아셨다면 ‘빨리 가라. 너희들이라도 가서 子息들에게 꿈을 주라’고 하셨을 것 같아요.”

    그리운 아버지, 안타까운 어머니를 떠올리며 吳 氏는 끝내 울었다.

    韓國에 온 지 2年 만인 2018年 8月 서울 上岩 월드컵競技場에서 ‘南北勞動者 統一 蹴球大會’가 열렸다. TV를 통해 兄夫가 北韓 代表團을 이끌고 南韓을 訪問한다는 消息을 들었다. 언니 미선 氏는 빨치산 出身 주도일의 둘째 아들 주영길과 結婚했고, 2018年 當時 兄夫는 最高人民會議 代議員이자 조선직업총동맹中央委員會 委員長이었다. 吳 氏는 한달음에 달려가 家族의 安否를 묻고 싶었지만 괜히 所聞이 나서 北韓에 있는 어머니와 兄弟들에게 더 큰 被害가 갈까 봐 抛棄했다. 代身 두 아들을 데리고 먼발치에서라도 兄夫의 얼굴을 보고자 蹴球競技場으로 向했다.

    世襲 認定한 社會主義 國家의 矛盾

    “우리가 여기(韓國)에 있다는 것을 알 텐데 金正恩이 어떤 心情으로 아저씨(北韓에서는 兄夫를 아저씨라고 부른다)를 韓國으로 派遣했을까. ‘너희는 가만 있으라’는 脅迫일까. 代表團이 板門店을 通過한 뒤 記者들과 인터뷰하던 아저씨 얼굴은 激情으로 힘들어하는 것 같았어요. 멀리서라도 아저씨의 얼굴을 봐야 平生 後悔를 안 할 것 같아서 아들들을 데리고 競技場으로 갔죠. 可能한 限 남의 視線에 띄지 않게 望遠鏡으로 아저씨 얼굴을 봤어요. 나는 아저씨에게 밥 한 끼 챙겨줄 수 없는데 韓國人들이 아저씨 周邊에서 熱心히 먹을 것을 챙겨주는 모습을 보고 고맙기도 했죠. 그런데 行事가 김정은과 北韓 政權을 讚揚하는 쪽으로 흘러가는 것을 보고 精神을 차렸어요. 北韓에 있을 때에는 金正恩의 입맛에 맞는 말을 하지 않으면 生存할 수 없는 狀況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韓國에 와서 自由를 얻은 몸으로 北韓을 讚揚하는 아저씨의 모습을 보니까, 아 저게 내 모습이었지 싶어서 부끄럽더라고요.”

    海外 生活을 통해 北韓 社會의 不義와 金 氏 一家의 罪行을 알게 된 뒤 忠誠과 服從의 삶에 懷疑를 느낀 吳 氏는 어머니와 兄弟들로부터 漸漸 더 멀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平壤의 어머니가 TV 속 金與正을 보며 自然스럽게 ‘公主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社會主義 共産主義로 糊塗하지만 金 氏 一家는 創始者高, 北韓의 太陽이고, 北韓의 神으로 永遠하다는 二重成人 거죠. 社會主義 共産主義 社會에서는 있을 수 없는 世襲을 버젓이 强調해요. (金與正을) 公主님이라고 부르는 것. 이미 北韓 사람들은 世襲을 認定하고 있어요. 公公然하게 버젓이 내려왔기 때문에 北韓 사람들은 이미 다 그렇게 알고 있는데 나만 놀란 거죠. 北韓에서는 사람들에게 金 氏 一家에 對한 充實性을 體質化하라고 俳優거든요. 모든 敎育과 모든 活動과 個別的인 生活조차도 充實性에 根據해 進行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自己도 모르게 洗腦가 돼요. 韓國에 와서 보면 참 어리석구나, 穩全한 精神으로 어떻게 저런 데서 살 수 있을까 생각하지만 그 世上에서 살면 그렇게 되는 거죠.”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 당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와 김여정 당 중앙위 제1부부장. [동아DB]

    2018年 4月 27日 板門店에서 열린 南北 頂上會談 當時 金正恩 北韓 勞動黨 總祕書와 김여정 黨 中央위 第1副部長. [東亞DB]

    “無條件 참아라, 無條件 견뎌라”

    그럼에도 北韓의 獨裁政權이 永遠할 수는 없다고 믿었다.

    “이런 얘기는 처음 하는데 김정일이 現地 指導를 나가서 손을 흔들 때면 손금을 봤어요. 命금(命줄)이라고 하죠. 저 사람의 名금이 긴가 짧은가. 이 政權이 果然 오래갈까. 外國 生活을 마치고 北韓으로 돌아갈 때마다 正말 懇切히 金 氏 政權이 끝나기를 期待했어요. 그러나 金正恩이 登場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죠.”

    吳 氏는 金日成이 政治的 敵手를 除去하기 위해 곳곳에 政治犯 收容所를 만들었다면, 김정일과 金正恩은 나라를 人間 生地獄, 하나의 커다란 矯導所로 만들어버렸다고 말한다. 그런 곳에서 살고 싶은 사람은 單 한 名도 없을 것이다. 그런 곳에서 代代로 子息들을 살게 하고 싶은 사람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2008年 五 氏 家族이 平壤으로 돌아왔을 때, 자유로운 유럽에서 자란 두 아들에게 體制의 矛盾을 說明해 줄 方法이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父母가 해줄 수 있는 말은 “無條件 참아라, 無條件 견뎌라”였다.

    “自由와 民主主義 맛을 보지 않았다면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겠죠. 人生은 自由를 몰랐을 때와 알았을 때로 딱 갈라지거든요. 北韓 社會에 適應하기 위해 可能한 限 아이들이 自由를 몰랐으면 했지만 애들은 이미 어떤 말은 父母에게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까지 알았던 거죠. 北韓에서 애들이 學校를 다니는 것을 보니 奇怪하더라고요. 큰애가 평양의학대학에 入學한 뒤 날마다 돈을 달라고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알고 보니 先生님들이 敎材니 試驗이니 하면서 아이에게 每日 돈을 要求해요. 除隊軍人 學生들은 賣店에 외상을 하고 駐혁이 앞으로 외상을 달아놓았어요. 海外에서 歸國한 지 얼마 안 되는 編入生들이 掠奪의 標的이 되는 거죠. 애는 엄마에게 이런 事情은 말하지도 못하고 아침마다 ‘돈 돈’ 했어요. 職場 同僚들에게 學校의 實相을 얘기했더니 아무도 놀라거나 憤怒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오 동무, 그럼 그 敎員은 어떻게 먹고살겠소? 月給도 없고 配給도 안 주지, 그 先生도 家族이 있으니 먹고살아야 할 게 아니오’라고 斗頓하더군요. 둘째 金革이는 平壤外國語學院에 다녔는데 幹部級 子女들이 羨望하는 學校라 學生들의 背景도 대단하고 競爭도 熾烈했어요. 어느 날은 牌싸움을 벌여 머리를 맞고 들어오기도 하고 칼로 허벅지를 찔려서 피를 흘리며 들어오기도 했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애들을 끌고 平壤으로 돌아온 게 잘못됐음을 깨달았죠.”

    韓國에 온 後 첫째 주혁 氏는 고려대에서 經濟學을 專攻하고 現在 美國 留學을 準備하고 있다. 둘째 金革 氏는 서울所在 大學에 在學하고 있다. 親舊들을 願 없이 사귀며 韓國 生活에 完璧히 適應하고 있는 두 아들을 보면서 吳 氏는 自身의 選擇이 옳았다고 確信한다.

    “처음 韓國에 와서 어떻게 먹고살아야 하나 苦悶하고 있을 때 거리를 지나가다 과일 장사가 큰 소리로 ‘沙果 사세요’ 하고 외치는 걸 봤어요. 男便한테 ‘저렇게 하루 終日 외치려면 얼마나 힘들까’라고 했더니 男便은 ‘그래도 저분은 定着해서 沙果라도 팔고 있지 않나’ 하더군요. 精神的 自由도 重要하고 身體的 自由도 重要하지만 經濟的 自由도 重要하죠. 나도 내 몫을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이화여대 大學院 北韓學科에 支援해 工夫를 했습니다.”

    과일 장수의 自由로부터 얻은 깨달음

    吳 氏는 如前히 北韓에서 特權을 누리며 살았으면서 어떻게 敢히 北韓을 背信할 수 있느냐고 疑訝해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北韓에는 金 氏 一家를 除外한 ‘特權’의 享有者는 없어요. 서로 다른 位置에서 다른 形態의 奴隸가 되어 아슬아슬한 살얼음板을 건너며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을 뿐입니다.”

    脫北者를 向해 背信者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6·25戰爭 時期 金 氏 一家를 등진 사람은 失鄕民이고, 現時代 金 氏 一家를 등진 사람은 脫北民입니다. 이름만 다를 뿐 北韓에 남겨진 失鄕民의 家族도 現在의 脫北民의 家族과 마찬가지로 ‘背信者’로 낙인찍혀 몇 代째 差別을 받으며 苦痛을 겪고 있습니다.”

    ‘런던에서 온 平壤 女子’를 脫稿하면서 韓國의 讀者들에게 이렇게 付託했다.

    “人間은 忘却의 生命體라고 합니다. 하지만 6年이 지난 오늘도 北韓에서 體驗했던 不幸과 苦痛의 瞬間들이 가끔 꿈속의 現實로, 惡夢으로 찾아와 나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民族 悲劇의 歷史가 絶對로 되풀이돼서는 안 됩니다. 北韓과 같은 惡魔의 나라, 地球上에서 가장 反人倫的인 惡의 威脅이 韓半島 北쪽 아주 가까운 곳에 如前히 도사리고 있다는 事實을 看過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北韓 住民들, 아직도 金 氏 一家의 暴政下에서 奴隸의 삶을 살아가는 數千萬 北韓 住民들은 不過 半世紀 前에는 大韓民國 國民과 한 밥床을 나누던 그대들의 父母, 兄弟, 姊妹들이었다는 事實을 잊지 말기를 懇切히 所望합니다.”

    신동아 3월호 표지.

    신동아 3月號 表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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