仁顯王后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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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顯王后傳 (仁顯王后傳)》은 著者와 年代 未詳의 小說로, 原名은 《仁賢聖母德行錄(仁顯聖母德行錄)》이다. 肅宗 인현왕후 의 곁을 遂行했던 宮女 가 手記 形式으로 3人稱 全知的 時點으로 內容이 展開된다. 構圖는 典型的인 勸善懲惡 및 女性들에게 特히 人氣가 높았던 善良한 糟糠之妻와 奸惡한 妖妾의 對立 構圖이다.

內容 [ 編輯 ]

全體的 槪要는 儒敎 國家였던 朝鮮에서 異常하였던 完璧한 人性과 品行을 가진 窈窕淑女로 萬百姓의 推仰을 받던 仁顯王后가 淺薄하고 惡毒하였던 첩 희빈 張氏 의 奸計로 因해 廢妃됐다가 勸善懲惡의 構圖에 따라 復位되고 희빈 張氏 는 慘酷한 最後를 맞이한다는 內容이다.

胎生부터 성스러웠던 仁賢王后는 아름다운 姿態와 完璧한 人性, 窈窕淑女의 品行과 再起, 높은 學問을 갖춘 女人으로 成長하며 外祖父인 송준길 [週 1] 과 中部 민정중 [週 2] 의 讚辭와 각별한 사랑을 얻음과 同時, 집에서 부리던 奴婢들을 통해 이웃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일찍부터 名聲과 稱頌이 높았다. 이러한 가운데 경신년(1680年, 肅宗 6) 겨울(冬), 肅宗의 元妃(元妃) 인경왕후 金氏가 後嗣를 남기지 못한 채 昇遐하여 大王大妃( 장렬왕후 )가 이를 근심해 揀擇令을 내리자, 일찍이 仁顯王后가 后妃(后妃)의 德色(德色)을 지녔다는 이야기를 仔細히 들은 바 있던 청풍府院君 김우명 이 對比와 송시열 에게 그女를 推薦하니, 對備가 宮人을 보내어 이를 確認한 後 크게 기뻐하며 大婚을 決定했다.

하늘마저 祝福하듯 和暢하고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한 가운데 大禮式에 나타난 仁顯王后의 아리땁고 성스런 姿態에 萬百姓과 宮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크게 놀라 恍惚해하였고, 두 對比와 肅宗 亦是 크게 기뻐하여 사랑하고 貴하게 여겼다. 그러나 肅宗의 사랑이 아무리 至極하여도 오랜 期間 受胎가 되지 않던 가운데 癸亥年(1683年, 肅宗 9) 겨울, 肅宗이 두환 [週 3] 에 걸려 增稅가 危篤하자 仁賢王后와 對備(=명성왕후)가 晝夜를 가리지 않고 精誠을 바치고 肅宗의 無事快癒를 祈禱하던 가운데 年老한 對備가 홀로 하겠다는 仁顯王后의 挽留를 무릅쓰고 함께 찬물에 沐浴하고 嚴冬雪寒에 壇에 올라 晝夜로 企圖하다가 結局 病을 얻어, 그 精誠에 肅宗은 快遊했으나 對備는 享年 42歲의 나이로 昇遐하여 孝誠이 남달리 至極했던 仁顯王后가 애통해하며 3年喪을 精誠으로 받들었다. 3年 後 對備의 3年喪을 마치고 混戰을 罷한 [週 4] 가운데, 宮人 張氏가 後宮에 參預하니 곧장 희빈에 封해졌다. 奸巧하고 敏捷慧할韓 희빈은 肅宗의 脾胃를 잘 맞춰 肅宗이 極히 寵愛하였으나 孝心이 至極하고 投機를 할 줄 모른 仁賢王后는 죽은 시모에 對한 그리움과 애뜻함에 빠져있어 全혀 境界를 하지 못했다.

戊辰年(1688年, 肅宗 14) 正月, 肅宗의 나이가 거의 30이 됐지만 子息 하나 보지 못하심에 근심한 仁賢王后는 肅宗에게 御眞 後宮을 뽑아 子孫 보기를 날마다 힘써 勸하니, 結局 肅宗이 仁顯王后의 깊은 德性에 感服하여 後宮 揀擇令을 내려 熟議 金氏 를 後宮으로 뽑았다. 仁顯王后가 金氏에게도 亦是 例로 待接하고 恩惠로 거느리니 金氏를 비롯하여 모두가 仁顯王后의 성덕에 크게 歎服했으나 희빈의 時期는 커져갔다. 이 해 8月, 生前 對備 金氏와 더불어 仁顯王后를 至極히 사랑하고 庇護해주던 大王大妃 조氏(장렬王后)마저 昇遐하고, 같은 해 10月 희빈이 王子를 生産하니, 得男의 기쁨에 빠진 肅宗이 희빈과 王子를 지나치게 사랑하게 이르러 희빈이 自己 分數를 잊고 僭濫한 뜻과 放恣한 마음을 일으켜 仁顯王后의 國母 地位를 簒奪하기 위해 仁顯王后를 헐뜯고 謀陷하기 始作했다. 뛰어난 성덕과 絶世佳人의 用色으로 이미 모든 이의 人望을 차지한 仁顯王后를 謀陷하는 희빈의 言動에 肅宗은 그女의 말을 믿지 않고 仁顯王后를 投機하는 것이라 여겨 王子를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넘겼으나 仁顯王后가 新生王子를 해치려한다는 희빈이 퍼트린 所聞이 宮人들을 通해 肅宗에게까지 닿으니 肅宗이 結局 仁顯王后를 漸漸 疑心하게 되어 더以上 찾지 않으며 薄待하기 始作했다. 이에 희빈은 惡한 嬌態로 肅宗을 迷惑하며 王子를 防牌 삼으니, 肅宗이 結局 張氏에게 完全히 빠져 黑白을 分別할 수 없는 地境에 이르러 어진 臣下는 모두 물리치고 奸臣을 많이 뽑아 쓰게 됐으며, 희빈은 이들과 結託하여 國母의 자리를 簒奪할 計略을 꾸몄다.

이러한 雰圍氣 가운데 記事年(1689年, 肅宗 15) 여양府院君 민유중 (仁顯王后의 父親)李 死亡하여 仁顯王后가 애통해 寢食을 거르며 哀切하게 슬퍼하느라 宮 안팎 돌아가는 事情을 全혀 모르니, 宗親들과 宮人들, 大臣들이 이를 안타까이 여겨 仁顯王后가 힘을 내어 精神을 되찾도록 4月 23日 仁顯王后의 誕日에 소소히 誕日 下隷 宴會를 마련해 올렸는데, 이미 仁顯王后를 廢妃할 作定을 한 狀態로 賢淑하고 完璧한 인현왕후에게서 欠을 찾아내려 하고 있던 肅宗이 이를 絶好의 機會라 여겨 內戰으로 달려가 宴會를 中斷하고, 飮食을 모두 땅에 파묻게 하고 誕日 下隷 書信 및 先物 單子를 모두 主人에게 돌려보내라 命하였다. 이에 仁顯王后가 氣가 막히고 抑鬱하여 내게 무슨 罪가 있어 이러하시냐 눈물로 呼訴한 것이 男便에게 대들었다는 빌미가 되어 廢黜이 宣布됐다. 大臣들 및 王室 內外戚들이 크게 놀라 肅宗을 挽留하였으나 목창명 等 奸臣들이 이를 機會로 여겨 肅宗을 부추기니 이 過程에서 忠臣 박태보가 仁顯王后를 위해 나섰다가 모진 新型 끝에 목숨을 잃었고, 結局 仁賢王后는 廢妃되어 親庭에 돌아가게 됐다. 명안공주 等이 이 消息을 듣고 달려와 仁顯王后를 위해 痛哭하며 後日을 期約하고, 無數한 宮女들이 仁顯王后를 붙들고 눈물을 쏟아 宮을 떠나지 못한 가운데, 肅宗이 內戰으로 달려와 卽時 廢妃를 宮에서 내쫓을 것을 닥달하니 仁顯王后가 渾然히 가마에 올라 親庭으로 돌아갔고, 宮女 7~8人이 그女를 쫓아 痛哭하며 따라감에 百姓들이 이를 듣고 모이기 始作하여 하늘이 내린 國母 내쫓기시는 걸 알고 痛哭하며 길을 막고, 선비 數百 名이 버선발로 따라가 放聲大哭하니 天地가 振動하였다.

親庭에 돌아간 仁賢王后는 큰 오빠 민진후 의 長女(前妻 李氏 蘇生, 조영진의 某)와 宮女들만 놔두고 夫婦인(계모 風窓夫婦인 조氏) 等을 모두 邸宅에서 나가게 한 뒤 政黨(正堂: 本채)을 廢하고 下堂(下堂: 별채)에 머물게 됐는데 宮中에서 儀式을 대주지 않아 本家에서 대어주는 朝夕 水剌를 받아 먹다가 以後 建物 等의 食材料로 代替했다. 曺氏 等과 더불어 奴婢 亦是 함께 내쳤던 탓에 邸宅은 今方 凶家가 되고 풀도 매지 않아 길게 자라 버린 탓에 사람들이 周邊을 지나가지 않게 되자 鬼神이 나타나기 始作해 모두가 두려워하던 가운데, 어느 날 새끼를 밴 큰 개 한 마리가 집으로 들어와 宮人들이 내쫓아도 자꾸만 다시 돌아오니 仁顯王后의 指示 아래 밥을 주며 내버려두자 10餘 日 뒤 새끼 셋을 낳아 네 마리가 함께 聖母 계신 이 邸宅을 守護하여 鬼神들이 더以上 나타나지 않아 비로소 便安해지기 始作했다. 이토록 險難한 廢妃 生活 中 父親 3年喪을 마친 仁顯王后가 더욱 애처롭게 서러워하여 자주 아프기 始作했다.

仁賢王后가 廢妃된 後 王妃에 이른 희빈 張氏와 그 오라비 장희재가 欲心이 많고 고약하여 八道에서 財物을 긁어들이고, 희빈이 傍若無人하여 發惡을 일삼아 宮女를 嚴刑하며 暴惡한 말과 교만한 行實을 벌이니 肅宗이 그女의 實體를 비로소 把握하고 後悔하던 가운데, 壬申年(1692年, 肅宗 18) 꿈에서 명성王后를 만나 啓示와 호통을 받고 仁顯王后의 抑鬱함과 희빈의 搖音奸惡함을 完全히 깨달아 희빈을 멀리하고 仁顯王后를 그리워하게 됐다. 이러한 肅宗의 變化를 깨달은 희빈이 크게 念慮하다가 甲戌年(1694年, 肅宗 20)에 誣獄을 다시 일으켜 어진 이들(老論)을 죽이고 仁顯王后를 死刑시키려 凶謀를 꾸민 가운데 肅宗이 張氏의 凶計임을 알고 仁顯王后를 다시 復位시키고자 還國을 일으켜 凶神(男인)·간신(소론)을 모두 물리치고 옛 어진 臣下(老論)를 다시 부르신 뒤 3月부터 大殿別監에게 仁顯王后가 머물고 있는 안국동 親庭을 3次例 둘러보게 하곤 4月 9日 備忘記를 내려 仁顯王后의 無罪함을 밝히고 別宮으로 모시란 命을 내렸다. 그러나 仁顯王后가 謙讓하며 門을 열어주지 않으니, 애닳은 肅宗의 督促어린 御命과 至親들의 懇曲한 勸告에 4月 21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門이 열렸지만 스스로 國母의 資格이 없다 復位를 謙讓하는 仁顯王后에게 肅宗이 여러 書札을 보내어 慰勞하며 懇請하니 仁顯王后가 비로소 王命을 받들어 衣服衾枕을 받아입고 4月 27日 豪華로운 行列과 萬百姓의 歡呼로 다시 宮으로 돌아와 肅宗의 눈물 어린 歡迎 아래 邂逅하여 다시 國母로 復位했다. 이때 희빈은 王妃에서 다시 後宮인 희빈으로 돌아가 肅宗의 嫌惡어린 御名 아래 强制로 옛 處所인 英稤宮 취선당(現 樂善齋 位置)으로 끌려가 幽閉됐는데, 이는 肅宗이 희빈을 廢하여 重罰을 내리려다가 世子의 어미인 것을 勘案하여 降等과 幽閉로 善處한 것이다. 以後 肅宗은 희빈의 處所를 單 한 番도 찾지 않고 國師가 없을 때면 仁顯王后의 處所를 떠나지 않으며 精誠을 쏟을 뿐이었다.

이에 怨恨을 품은 희빈이 仁顯王后에게 王后의 禮를 올리기를 拒否하는 放恣한 行爲를 거듭하며 어린 世子를 걸핏하면 暴行하여 골病에 이르게 하니, 肅宗이 憤慨하여 世子를 희빈에게 가지 못하게 하고 仁賢王后의 膝下에 두자 世子가 곧 아리땁고 善良한 仁顯王后의 極盡한 사랑 아래 暴惡한 生母를 곧 잊어버렸다. 더以上 世子를 통해 有勢하는 것조차 할 수 없게 된 張氏가 憤痛하여 毒藥을 求해 仁顯王后의 毒殺을 꾀하였으나 이 또한 賢明한 仁顯王后의 措置와 仁顯王后를 追從하는 모든 宮人들의 監視 아래 失敗로 돌아가니, 終局엔 濟州에 流配 中인 오라비 張希載의 妻 肅正과 公募해 妖邪한 巫女와 凶惡한 術師를 救해 晝夜로 謀議하며 處所 西便에 新黨을 排泄하고 脚色 緋緞으로 凶惡한 鬼神을 만들어 앉히고 仁顯王后의 姓氏와 四柱八字를 쓴 종이를 걸어 宮女에게 화살을 주어 하루 세 番씩 쏘게 만들고 凶한 骸骨을 救해 가루로 만들어 仁顯王后의 옷에 뿌려두고 五色 緋緞으로 妖鬼·邪鬼를 만들어 밤中에 正宮 北壁 섬돌 아래 묻는 等 詛呪하였으니, 이것이 效果가 있어 競進年(1700年, 肅宗 26) 中樞부터 仁顯王后가 병들기 始作하였다. 肅宗이 政事를 보지 않을 때면 仁顯王后의 옆을 지키며 精誠을 쏟았으나 紳士年(1701年, 肅宗 27) 5月부터 病患이 重해져 몸을 가눌 수 없게 됐고 7月 危篤해져 8月 14日 斜視(巳時: 午前 9時-11時 사이) 享年 35歲 나이로 昌慶宮 경춘전에서 死亡했다. 宮中이 모두 슬픔에 빠지고, 特히 肅宗이 애통하여 放聲痛哭하며 過度히 슬퍼하니 모두가 안절부절하는 가운데, 張氏는 기뻐하여 무당과 術師들과 相議 끝에 그女의 生日인 9月 初7日에 굿을 한 뒤 新黨을 없애기로 하고, 9月 7日이 되자 무당 術師들을 불러 處所에서 隱密히 誕日 宴會를 벌이고 仁顯王后의 죽음을 致賀하며 촛불을 밝히고 무당·術師의 說法을 進行했다. 이런 가운데 肅宗이 그間 單 한 番도 찾지 않았던 취선당에 隱密히 擧動하였으니, 바로 直前 仁顯王后를 그리워하며 깜빡 잠이 들었다가 꿈에서 예전에 죽은 內侍에게 引導를 받고 仁顯王后의 靈魂을 마주하여 仁顯王后의 죽음의 原因이 張氏에게 있음을 啓示받아 仁顯王后의 系時代로 親히 취선당에 달려온 것이었다. 모두가 애달파하는 國喪 中에 잔치를 벌여 술을 마시고 깔깔 웃는 情況도 기막히거니와 仁顯王后의 죽음을 기뻐하며 희빈의 復位를 祝福하는 것에 激怒한 肅宗은 親히 취선당을 搜索해 화살 맞은 구멍이 無數한 仁顯王后의 火傷 等을 찾아내 꿈에서 仁顯王后에게 들은 啓示가 事實임을 確認하고 親鞠을 열어 희빈의 周邊 것들을 問招하니 애初 忠誠이 없던 것들이라 刑問을 받자마자 犯罪를 줄줄이 自白하여 乙亥年(1695年, 肅宗 21)부터 新黨을 倍술하고 巫女·術師로 祝願하여 中宮이 죽고 張氏가 復位하길 빌었다고 절절이 아뢰며 罪를 轉嫁하기 위해 이름댄 이들이 줄줄이니 하루에 死刑된 罪人이 10餘 人씩이나 됐다. 消息을 接한 大臣들이 世子의 處地를 걱정해 肅宗에게 희빈을 容恕하여 줄 것을 懇切히 請하였으나 肅宗의 決斷이 이미 確固한 지라 世子에게 阿附하기 위해 희빈의 容恕를 求하는 최석정(소론) 等 奸臣들을 流杯하고 "옛 한무제度 無罪한 구익 夫人을 죽였거니와 이제 長女는 吳兄持參을 할 것이요."라며 희빈에게 嚴兄을 求刑하건데, 世子의 處地를 걱정하여 罰을 減하여 身體를 穩全히할 수 있는 社死刑을 내리고 宮人을 命하여 희빈에게 死藥을 기다리지 말고 世子를 위해 스스로 自進할 것을 傳敎하였다. 그러나 世子의 形勢를 믿고 正말 죽이기야 하랴, 張氏가 "내 무슨 罪가 있어서 賜藥하리요. 구태여 나를 죽이려거든 내 아들을 먼저 죽이라."며 死藥 그릇을 엎고 宮女를 號令하니, 宮女가 힘으로 制壓할 수 없어 肅宗에게 이 事實을 알리자 肅宗이 그 더러운 얼굴 보기 싫어 藥을 보낸 것이니 아들 위해 自進하여 三戚之律 [週 5] 을 避하라는 御命을 다시 傳達했지만 張氏의 不純 暴惡한 소리가 齷齪 같으니 結局 肅宗이 玉轎를 타고 영숙宮에 親臨하여 左右를 號令해 張氏를 黨 아래 끌어내려 꾸짖고 눈 앞에서 社死刑을 執行시켜 發惡하는 張氏를 여럿이 强制로 붙잡아 막대로 입을 벌리게 하고 死藥을 세 그릇 연이어 쏟아 부어 버리자, 頃刻에 五臟이 다 녹아 일곱 구멍에서 검은 피가 솟아나 죽게 됐다. 肅宗이 不快해하며 屍體를 卽刻 宮 밖에 버리게 하고 外殿으로 돌아갔다가 다음날 世子의 情理를 보아 초초히 禮裝토록 命하시어, 소금腸을 덮어 다음날 入棺하려 하니 하룻밤 사이 身體가 다 녹아 검은 피만 房 안에 가득하고 凶惡한 냄새가 振動하니 刑罰로 죽은 것보다 못한 地境이라 天罰을 받은 것이었다. 장희재 亦是 肅宗의 嚴明 아래 四肢가 갈갈이 찢어져 죽으니 百姓들이 軍器寺 앞에서 막대에 身體 조각을 꿰어들고 기뻐하였다. 10月 13日 肅宗이 親鞠獄事를 다 決斷하고 仁賢王后의 混戰에 親히 臨하여 直接 祭文을 지어 祭祀를 지내니 그 內容과 精誠이 切切하여 左右 우러러 눈물을 禁치 못하였고, 聖母(=인현왕후)의 恩愛를 받고 자란 世子가 惡毒한 生母 탓에 부끄러워 罪人을 自處하며 世子의 자리를 辭讓하니 肅宗이 富者指定과 仁顯王后가 生前 世子를 極盡히 아끼고 사랑했던 것을 떠올려 世子를 慰勞하며 免罪하였다. 나라 體面에 곤위를 비울 수 없어 調整이 여러 番 아뢰니 슬퍼 듣지 않으시다가 마지못해 壬午年(1702年, 肅宗 28) 仲弓 揀擇을 하여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따님(=인원왕후)을 뽑아 王妃 冊封하시니 朝賀를 받으실 때 仁顯王后가 떠올라 눈물을 그치지 않으시니 妃嬪 宮女 다 서러워 울었다고 한다.

特徵 [ 編輯 ]

矛盾 [ 編輯 ]

  • 著者는 仁賢王后가 王妃가 되었을 때(肅宗 7, 1681年)부터 곁에서 遂行했던 宮女였음을 自稱하고 있으나 小說 마지막 部分에 "(中略) 卽位하시니 이 어른이 곧 英祖大王 이시다. 孝義가 出戰하시며 요순의 道德이 계시어 50餘年 太平을 누리시니 (中略)"란 대목이 있다. 영조는 1776年 (英祖 52)에 死亡하여 英宗(英宗)의 廟號를 얻었으며, 1889年 (高宗 26)에 영종에서 英祖(英祖)로 廟號가 改稱됐다 [1] . 따라서 이 小說은 英祖의 事後인 朝鮮 末期 正祖~純宗 年間 사이의 한 時點에 집필됐거나 [週 6] 20世紀 初 近代 作家에 依해 執筆된 것으로 推定되며, 年對象 著者는 仁顯王后를 모신 宮女일 수 없다.

實際 歷史와의 差異 [ 編輯 ]

  • 小說에선 장렬왕후 조氏가 肅宗의 再婚을 主導하였던 것으로 쓰여있으나, 實際로는 명성왕후 金氏가 主導하여 强行했던 것이다.
  • 청풍府院君 김우명 은 肅宗 1年(1675年)에 이미 死亡했다. 肅宗 6年(1680年) 10月에 인경왕후가 死亡하자 명성왕후 金氏(當時 王大妃, 현종비, 肅宗모)에게 仁顯王后를 後任 王妃로 推薦한 건 淸聲府院君 김석주 (明聖王后의 4寸 從兄, 西人 汗黨 宗主 金堉 의 嫡長孫, 三福의 玉 庚申大黜陟 의 設計者)였다.
  • 小說에선 仁顯王后의 冊比例 當時 날씨가 和暢하고 賞서러운 기운이 가득해 하늘도 祝福하는 太平 國母라 描寫하고 있으나 實際로는 仁顯王后가 王妃로 揀擇되면서부터 연이어 地震이 發生하였고 책비日엔 人命被害가 發生할 程度의 大地震이 일어나 모두가 凶한 兆朕이라 여겨 不吉해하던 가운데 冊比例가 强行됐다. [2] [3] 冊比例 當時의 地震은 記事年(1689年, 肅宗 15) 1次 王妃 交替 當時 仁賢王后가 廢妃될 때에도 거듭 强調되어 廢妃 事由 中 하나로도 適用됐다. [4]
  • 小說에선 장렬왕후가 명성왕후와 더불어 仁顯王后를 至極히 사랑하며 든든한 支持 基盤이 되어준 量 描寫하고 있으나 장렬왕후는 明聖王后가 제 權力을 위해 王室 最高 女性의 固有 權限과 國法을 侵犯하여 멋대로 擇悲恨 仁顯王后를 新婚 初부터 肅宗 以上으로 못 마땅하게 여겼던 人物임과 同時에 희빈 張氏를 收養딸처럼 사랑하며 庇護해주었던 人物로, 仁顯王后의 廢妃 事由 中 하나가 '장렬王后(東朝)에게 不忠不孝하여 誣陷하고 逼迫해 장렬왕후가 눈물과 근심으로 最後를 맞이했다'였다. 이로 因해 閔鎭遠이 完成한 《肅宗實錄》, 閔鎭遠의 個人著書인 《단암萬綠》, 迎賓 金氏 의 6寸 外再從兄人 濃愁 이진정(筆名 이문정)李 題目 그대로 巷間에 퍼져있는 所聞을 모아 再構成한 《濃愁 水門錄》 等엔 장렬왕후에 對한 不平 및 장렬왕후의 近族人 조사석과 영풍군婦人을 絶對惡으로 評價하였는데 이로 인해 舊學說에선 장렬왕후·조사석·영풍군否認 부처를 南人으로 定義하는 誤謬 [週 7] 를 일으키기도 했다.
  • 小說에선 戊辰年(1688年, 肅宗 14) 秒에 熟議 揀擇이 있었던 것으로 그려지나 熟議 揀擇은 1686年(肅宗 12) 初에 있었다. [5]
  • 小說에선 여양府院君 민유중 이 記事年(1689年, 肅宗 15)에 死亡한 것으로 쓰여있으나 민유중 은 1687年(肅宗 13)에 死亡했다. [6]
  • 小說에선 記事年(1689年, 肅宗 15) 肅宗의 女同生인 명안공주 가 仁顯王后의 廢妃 消息을 듣고 急히 入宮하여 仁顯王后를 잡고 어쩔 줄 몰라하였다고 敍述하고 있으나 명안공주는 肅宗 13年(1687年)에 이미 死亡했다. [7]
  • 小說에선 仁顯王后가 幽閉 中인 司祭에 나타난 것이 鬼神이라 쓰여있지만 實際로는 百姓들이 犯罪 目的으로 侵犯한 것이었다. [8] 小說에선 仁顯王后가 萬百姓의 推仰과 保護를 받은 것으로 設定했기에 鬼神으로 脚色한 것으로 推定된다.
  • 仁賢王后는 廢妃 期間 中 初期 1~2年 남짓만 幽閉地人 親庭에 머물렀을 뿐이고 以後 이곳을 隱密히 離脫하여 外家의 私有地 中 한 곳이었던 慶北 金泉市에 位置한 靑巖寺에서 3年間 머물며 復位를 圖謀했다. [週 8]
  • 肅宗은 2次 王妃 交替를 전후하여 仁顯王后의 無罪를 宣布한 적이 없다. 仁顯王后의 復位 事由는 '두 字典의 三年喪을 함께 지냈던 처라 三不去에 該當되며 自轉께서 親히 擇하시어 各別히 사랑하셨던 며느리이기도 한데 내치기까지 했던 것은 多少 過한 點이 없지 않다. 이젠 스스로 罪를 懇切히 뉘우치고 있으니 特別히 復位한다.'였다. 더불어 희빈 張氏는 小說의 內容에서처럼 罪가 있어 王妃에서 後宮으로 강봉된 것이 아니라 三不去로 肅宗과 仁顯王后의 離婚 關係가 取消됨에 따라 離婚 前의 立場이었던 희빈으로 돌아간 것에 不過하다. 이는 太宗 때 婚姻法을 改正하고 嫡庶差別法을 세우면서 離婚이 急增하자 政府가 離婚을 取消함과 同時에 此後 離婚을 防止하기 위해 古典 속 單純 義理에 不過했던 三不去를 正式 離婚法으로 採擇하면서 연동된 重婚法에 依據한 것이다.
  • 小說에선 희빈이 王世子를 暴行하여 肅宗이 희빈과 만나지 못하게 命하였다고 쓰여있지만 實際로는 仁顯王后가 王世子와 희빈의 만남을 制限하였다. 한便 민진원은 이에 對해 희빈이 걸핏하면 王世子를 꼬집고 暴行하여 仁顯王后가 王世子를 가여이 여겨 母親을 만나지 못하게 한 것이라 主張했다.
  • 小說에선 9月 7日이 張氏의 生日이라 主張하고 있으나 《承政院日記》에 記錄된 張氏의 生日은 陰曆 9月 19日이다. 또한 肅宗이 張希載를 處刑하란 備忘記를 내린 건 9月 23日, 張氏에게 自進하라는 備忘記를 내린 것은 9月 25日이다.

價値 [ 編輯 ]

各州 [ 編輯 ]

  1. 孝宗-玄宗 때의 西人 山堂 黨首로 송시열 의 前任이자 親族 兄이다. 仁顯王后가 6歲였던 1672年(玄宗 13)에 死亡하였으나 小說에선 이보다 오래 산 것으로 登場한다.
  2. 仁顯王后의 父親인 閔維重의 둘째 刑으로 宋時烈의 文人이다. 肅宗 6年 三福의 玉 庚申大黜陟 을 設計한 김석주 을 補佐하여 南人을 刺殺하는 役割을 遂行해 이 공으로 姪女 仁顯王后를 王妃로 만들었음과 同時에 老少分黨의 原因을 提供했다.
  3. 痘瘡. 現代語로 天然痘 를 뜻한다.
  4. 祔廟禮를 뜻한다. 明聖王后의 祔廟禮는 肅宗 12年(1686) 2月 10日에 擧行됐다.
  5. 大役罪人의 三陟(親戚·外戚·姻戚)을 連坐하여 함께 罰을 내리는 것.
  6. 20世紀 近代에 이 小說을 所藏하기 위해 筆寫하는 過程, 或은 20世紀 中後半에 大韓民國 敎育部가 이 小說을 中高生을 위한 必須 古典으로 採擇하여 一部 文章을 現代語로 緩和하는 過程에서 令終이 現代人에게 익숙한 英祖로 바뀌었을 可能性은 充分히 存在한다.
  7. 장렬왕후·조사석·영풍군夫人은 西人 山堂 家門의 子弟들이다.
  8. 一說에선 이곳이 仁顯王后의 外家라 主張하기도 하지만 仁顯王后의 外家는 忠淸道 회덕(現 大田 廣域市)에 位置했다.

出處 [ 編輯 ]

  1. 고종실록 26卷, 高宗 26年 12月 5日 病者 1番째記事
  2. 肅宗實錄 11卷, 肅宗 7年 5月 2日 甲寅 5番째記事 中 "地震(地震)의 變怪(變怪)가 여러 날 동안 거듭 일어났고, 더욱이 책비(冊妃)하는 날을 當하여 災異(災異)가 이와 같으니, 殿下께서 水星(修省)하시는 道理에 있어서 顔淵(晏然)하게 行禮(行禮)할 수가 없으며, 大禮(大禮)를 災異(災異)가 있는 날에 그대로 擧行하는 것도 또한 未安(未安)할 듯합니다. 一關(日官)이 앞으로도 吉日(吉日)이 있다고 말하였으니, 오늘의 冊禮(冊禮)를 後日로 미루어 擧行하여 經口(警懼)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3. 肅宗實錄 11卷, 肅宗 7年 5月 3日 乙卯 2番째記事 中 "地震(地震)의 變怪(變怪)는 그 感應(感應)李 하나만이 아닙니다. 혹 女謁(女謁)李 盛行(盛行)하거나, 혹 驪州(女主)가 정사(政事)에 關與하거나, 혹 宦官(??)李 權勢를 부리는 데서 오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가지 일은 그 일이 없다는 것으로써 疏忽히 여길 수 없으며, 只今 大婚(大婚) 바로 前이니, 더욱더 警戒하심이 마땅합니다."
  4. 肅宗實錄 21卷, 肅宗 15年 5月 4日 期해 2番째記事 中 "아! 六禮(六禮)를 올릴 때의 일을 생각하건대, 地圖(地道: 地震)가 警告(警告)하였고 , 이러한 七去(七去)의 警戒함을 犯하였으니, 禮法(禮法)에 容納하기 어렵다. "
  5. 肅宗實錄 17卷, 肅宗 12年 2月 27日 신해 2番째記事
  6. 肅宗實錄 18卷, 肅宗 13年 6月 29日 乙亥 1番째記事
  7. 肅宗實錄 18卷, 肅宗 13年 5月 16日 繫辭 2番째記事
  8. 肅宗實錄 24卷, 肅宗 18年 5月 25日 甲戌 1番째記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