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욱 (1932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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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욱 (李永旭, 1932年 8月 12日 ~ 2024年 1月 21日 )은 第16代 大邱高等檢察廳 檢査場을 歷任한 法曹人이다. 第12代 國會議員을 지냈다. 否認 변양자와 사이에 2男1女가 있고 登山과 테니스가 趣味다. 아들 이재환은 北韓 政治犯 收容所에서 死亡했다.

生涯 [ 編輯 ]

1932年 慶尙南道 마산시 에서 태어나 1952年 마산상업고등학교 와 1956年 서울大學校 法學科를 卒業하고 第8回 高等考試 司法科에 合格 하여 陸軍 法務官을 거쳐 1961年 光州地方檢察廳 木浦支廳 檢査에 任用되어 [1] 1962年 釜山地方檢察廳 光州地方檢察廳 等에서 檢査를 하면서 初任 檢事 時節부터 어려운 事件을 處理해 有能한 搜査檢事라는 評價를 받았던 [1] 이영욱은 法務部 人權과 誇張, 檢察과 課長 等 參謀 生活을 오래하여 檢察 行政에 能하다. [2] 1976年 釜山地方檢察廳 과 1980年 서울地方檢察廳 에서 次長檢査를 지내다 1981年에 檢事長으로 昇進하여 1981年과 1982年에 各各 大邱地方檢察廳 大邱高等檢察廳 檢査場을 歷任하였다. 大邱 금복주 社長 脅迫事件 搜査를 總指揮했다. 1981年에는 法務部 次官에 任命되기도 했으며 1983年 任命된 法務硏修院長을 마지막으로 1985年 1月에 與黨이었던 民主正義黨 에 영입되어 公職에서 退任하고 1985年 2月 國會議員 選擧에서 與黨이었던 民政黨 全國區 議員으로 立候補하여 當選되었다. 與黨 所屬 國會議員을 하면서 민통련 解散에 對하여 論難이 있던 1986年 11月 2日에 "治安 責任者의 민통련 解散 警告는 이 團體의 活動으로 미루어 當然한 措置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3]

1987年 7月 美國 MIT大學에서 經營學 博士課程에 있던 아들 이재환(24歲)李 오스트리아 旅行 中에 北韓 工作員에 依해 拉致돼 北韓으로 끌려갔다가 北韓으로부터 "自進 越北했다"는 말을 듣자 이영욱 "아들이 越北할 아무런 理由가 없다"고 했다. 그 以後 1988年 板門店 赤十字會談에서 北韓 記者로부터 "아들이 結婚해서 잘 살고 있다"는 말을 間接的으로 傳해 듣고 [4] 大韓赤十字를 비롯해 國內外 團體에 歎願書를 보내는 等 아들의 送還을 위해 努力하다 1999年 大韓民國 政府가 發表한 北韓의 政治犯 收容所 收監者 名單을 確認하고 유엔難民高等판文官(UNHCR)과 國際赤十字委員會에 "北韓의 人權蹂躪 行爲를 糾彈하고 아들의 送還을 促求했지만 北韓 赤十字會가 2001年 1月 15日에 發表한 "이재환(39)氏가 死亡했다"는 消息을 傳해들었다. 이에 이영욱은 "政治犯收容所로 끌려간 아들이 人間이 살아갈 수 없는 劣惡한 環境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 當然하다"고 했고 변영자는 "아들이 죽었다는데 무슨 할말이 있겠느냐"고 했다. [5] 이영욱은 아들의 拉北 直後 "유럽의 資本主義 先進 모델을 배워야 하지 않느냐"며 自身이 "유럽行을 勸誘했다"고 밝혔다. [6]

노무현 政府 當時 맥아더 에 對한 論難 等이 있을 때 제2시국선언 愛國市民모임이 2005年 10月 18日에 "나라가 亡하기 前에 大韓民國 살리자"는 口號를 내걸고 "오늘 大韓民國은 左傾化가 나라의 안房과 心臟을 威脅하고 있는 危險한 나라"라며 "서로 일깨우고, 다짐하고, 團束해서 2007年에는 1997年과 2002年에 저질렀던 잘못을 다시 저지르지 않겠다"고 宣言하면서 1萬餘名이 署名에 參與할 때 함께 했다. [7]

經歷 [ 編輯 ]

各州 [ 編輯 ]

  1. 京鄕新聞 1983年 7月 23日子
  2. 京鄕新聞 1981年 12月 17日子
  3. 京鄕新聞 1986年 11月 12日子
  4. [1]
  5. [2]
  6. 1987年 8月 12日子
  7. [3]

外部 링크 [ 編輯 ]

前任
서동권
第25代 法務部 次官
1981年 12月 17日~1982年 6月 17日
後任
정해창